[QT] 48일차 '찢어지지 않았더라'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3월 15일사순절 셋째 주일
찢어지지 않았더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1:1∼14
두학기에 걸쳐 반장 부반장 선거에서 연거퍼 고배를 마셨던 셋째아이는 작년 가을, 그러니까 초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드디어 부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직후 몇일 동안 부반장임을 뽐내고 다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부반장의 `부'자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부반장 생활이 어떤지를 묻자 아이는 대뜸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부반장은 할 일이 없어요. 반장이 저 혼자 다 해먹어요. 제가 무슨 얘길해도 반장이 도대체 듣질 않아요'
아이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습니다.
`나도 꼭 반장 한 번 해먹고 말거야'
그러더니 지난 3월 초 마침내 3학년 1학기 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서로 반장이 되겠다며 16명이나 출마한 선거에서 반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했기에 반장으로 뽑히게 되었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아이의 대답입니다.―`만약 저를 반장으로 뽑아 주시면 저는 여러분들을 위한 걸레가 되겠습니다.'그랬더니 몰표가 쏟아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분을 위한 걸레가 되겠다'는 그 말의 여운이제 마음속에서 점점 더 짙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짧은 말 한마디가 갖는 의미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이었습니다.
제 아이가 무슨 깊은 의미를 생각하고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저 반 친구들에게 한 표라도 더 많이 얻기 위한 방편 이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삶을 그보다 더 잘 보여주는 표현이 또 달리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삶을 십자가를 지는 삶, 궂은 일에 솔선 수범하는 삶, 타인을 위한 헌신과 봉사에 앞장서는 삶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나 자신이 걸레가 되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걸레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더러워짐으로 상대를 깨끗케 해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가 손해보는 것입니다. 손해보지 않는 헌신과 봉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양초가 자신을 태움 없이 어찌 빛을 발할 수 있으며, 소금이 스스로 녹아지지 않고는 어찌 짠맛을 낼 수 있겠습니까? 같은 이치로 자기 자신을 걸레로 온전히 내어놓지 않는 곳에 어찌 참된 헌신과 봉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묵상 끝에 그날 밤늦은 시각, 아직 자지않고있던 셋째 아이를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제 무릎에 앉히고는 아이의 머리 위에 저의 손을 얹고서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승윤이가 오늘 반 친구들에게 걸레가 되겠다는 약속으로 반장이 되었습니다. 승윤이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건 간에, 한 학기 동안 승윤이가 정말 반 친구들을 위한 걸레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승윤이가 자라 갈수록 더 큰 걸레가 되게 해주십시오. 승윤이가 성인이 되어 무엇을 얻든 어떤 직책에 앉든 그 모든 것으로 더 많은 사람을 위한 보다 큰 걸레가 되게 해주십시오. 타인을 위하여 걸레가 되는 삶만 진정 향기로우며 그 삶속에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능이 함께 하심을, 이 아들이 일평생 동안 자신의 삶을 통하여 확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관점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세상그 누구도 닦아 줄수 없는, 그 어떤 걸레로도 닦을 수 없는 우리의 추악하고 더러운 죄를 손수 닦아주는 걸레 되시려 오신 분이 아니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말끔하게 닦아주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이 십자가위에서 죄의 형벌을 친히 받으시기까지, 당신 자신이 걸레처럼 더러워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아니하신 분이 아니셨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 그 어떤 더러움보다 더 더럽던 내 죄를 닦아주시는 걸레가 되어 주시지 않았던들, 어찌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이처럼 구원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주님을 본받아 이 세상을 위한 걸레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스스로 되어지기 원하는 걸레와 세상의 걸레는 형태상으로는 동일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자기가 더러워지므로 상대를 깨끗케 해준다는 형식적인 면에서는 양자 모두 분명히 동일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는 결코 동일 할 수 없다는 것은, 세상의 걸레는 계속 천대받다가 결국엔 버려지는 반면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스스로 되어지는 걸레는 걸레에 충실해질수록 더 더욱 하나님에 의하여 존귀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이 땅에 오셨던 주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셨지만, 당신 스스로 인간의 종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느 정도로 종이 되셨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닦아주시는 걸레가 되실 정도로 가장 비천한 종의 종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비천한 가운데 비천한 채로 내버려두셨습니까? 오히려 정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주님을 가장 존귀케하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두 주님 앞에 영원토록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영원토록 존귀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세상을 닦는 헌신과 봉사의 걸레 되기를 주저치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모세를, 사도 바울을 존경합니까? 그들 모두 자기 시대를 위한 헌신과 봉사의 걸레들이었기 때문 아닙니까? 그들이 맡겨진 걸레의 역할에 충성을 다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귀하게 세워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이 시대를 위한 걸레가 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존귀케 하는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걸레 되고자 하는 자의 삶이 찢어질래야 찢어질 수 없음은 주님께서 그 삶을 영원토록 책임져 주시는 까닭입니다.
3년이란 시차를 두고 똑같은 갈릴리 바다에서 똑같은 사건이 같은 사람들에게 두 번이나 반복되어 일어난바 첫째 사건은 누가복음 5장에, 그리고 두 번째 사건은 본문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두 사건이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똑같아 보이지만 그 의미는 상이함을 이미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즉 첫 번째 사건에서 마지막 순간 건져 올린 물고기의 의미가 제자들의 속에서 꿈틀대던 욕망이라면, 두 번째 사건에서 새벽녘 제자들의 그물에 가득찬 물고기의 의미는 헌신과 봉사라 했습니다. 그런대 오늘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물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10∼11)"
밤새도록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아무 의미 없이 헛 그물질만 하느라 허기진 제자들에게 헌신과 봉사로 이어지지 않는 삶이란 아무른 의미가 있을 수 없음을 일깨워 주시려, 다시 말해 오직 헌신과 봉사의 삶만이 참된 의미를 지님을 깨닫게 해주시려, 제자들을 위하여 헌신과 봉사의 조반을 친히 준비해 두신 주님께서, 이제 막 육지에 당도한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도 제일 먼저 앞장선 사람은 역시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를 필두로 한 제자들이 고기가 가득찬 그물을 배에서부터 육지로 끌어올리고 보니 큰 물고기가 무려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153'이라는 이 숫자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주석 가들은 당시의 사람들은 물고기의 종류가 153종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153이란 숫자가 나왔다고 설명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1에서부터 17까지를 가산한 수의 합계가 153이라면서, 10은 10계명을 그리고 7은 성령의 7가지 은사를 의미한다고 셜명하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 지고 있는 하얀 모나미 볼펜에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153이라는 숫자가 붙어 있습니다. 역시 이 숫자를 중요시하고 있음의 증거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숫자 치고 어찌 무의미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수가 아닙니다. 본문 1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물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본문이 지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될 정도로 많았지만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보통 때에 그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걸렸으면 반드시 그물이 찢어졌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왜 요한 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여기에서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음을 이토록 강조하고 있습니까? 3년전 똑같은 사건이 처음으로 일어났을 때에는 그물이 찢어져 버렸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누가복음 5장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베드로)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베드로)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4∼6)"
모든 상황이 동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3년전에는 그물이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대 3년이 지난 지금은 응당 찢어져야 할 상황인데도 전혀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의 물고기의 의미가 욕망이라면 두 번째 사건에서의 물고기의 의미는 헌신과 봉사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건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자기 욕망만을 위해 사는 자의 인생은 반드시 찢어진다는 것입니다. 헌신과 봉사를 위한 삶은 결코 찢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걸레 되기를 주저치 않는 자의 삶만이 찢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자신의 삶만 찢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의 삶을 찢는 누를 범치도 않게 되는 것은 , 타인을 위해 걸레 되는 자가 있는 곳엔 분열이 있을 수 없음입니다.
지난 2월 25일 새 대통령의 위임식이 있던날, 이미 전직 대통령이 되어버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할대로 상한 얼굴을 TV화면을 통해 보면서, 오래전 그분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었던 사람으로써 저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 분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5년동안 국민을 위한 넉넉한 걸레가 되었었다면, 평생 나라를 위해 살아왔다는 그분의 말년이 어찌 저토록 비참하게 찢어질 수가 있었겠습니까? 자기 욕망을 위해 사는 자의 인생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빨리 찢어집니다. 남을 위하여 걸레되는 자의 인생만이 찢어지지 않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그물이 되어주시는 까닭입니다.
오늘 이 나라의 경제라는 그물이 찢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 애쓰고 땀흘리며 쌓아 온 열매들이 찢어진 그물 사이로 하루아침에 새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그물들은 온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라는 그물도, 교육이라는 그물도, 문화라는 그물도, 사회라는 그물도, 종교라는 그물도, 어느 한 그물도 찢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왜 우리의 그물들이 이다지도 만신창이가 되었습니까? 우리 모두가 남을 생각함이 없이 자기의 욕망만을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란 나와 타인의 그물을 동시에 찢어 버리는 흉기란 사실을 알지못한채, 혹은 알면서도 욕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결과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인식했다면 우리는 지금 이 민족을 위한 헌신과 봉사의 걸레가 되기를 주저치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이 시대 이 민족을 위한 걸레가 될 때에만 우리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그물되어주시매, 찢어짐과 분열의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진정 자유함을 얻을수 있습니다. 이사회가 한심할 정도로 추하기 때문에 그냥 피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하기 때문에 더 더욱 이 추한 사회를 위한 걸레의 임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하필이면 이 시대에, 하필이면 이 땅위에서, 하필이면 이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3천 5백년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헌신의 걸레가 되었을 때 과연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노예였던 그들은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돌아서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한심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가나안을 향하는 광야에서도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는 다 짓는 더러운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했기 때문에 오히려 모세는 그 더러운 형제들을 위한 걸레 되기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더러운 곳에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걸레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천년전 바울이 그 시대의 걸레가 되기를 자임했을 때, 그때의 사람들은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보다 바울을 핍박하고 죽이려는 흉악한 인간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 역시 그러했기 때문에 더 한층 그 흉악한 자들을 위한 봉사의 걸레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결한 곳이라면 걸레가 필요치 않음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바울이 그처럼 걸레와도 같이 헌신과 봉사를 다 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 시대의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되어 주셨음은, 그 찢어지지 않는 그물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얻고 로마의 역사가 새롭게 되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 이제 다시 우리의 상황을 되돌아봅시다. 대명천지에 경제 주권을 상실하였으니 얼마나 한심한 상황입니까? 하루 아침에 이 한심한 상황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한심합니까? 정부에도 국회에도 학교에도 시장터에도 온통 한심한 사람들 천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 모두를 한심타 탄식할 때 그 한심한 대상에서 과연 우리 자신은, 나 자신은 예외입니까? 나는 그 `한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나 자신부터 한심한 인간 아니었습니까? 나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목전의 이득에만 눈이 멀어, 내 인생의 그물을, 타인의 그물을, 이 사회의 그물을, 만신창이가 되도록 찢어 놓은 한심한 주범이 바로 나 자신 아니었습니까? 십자가위에서 나의 죄를 닦아주는 걸레 되신 주님을 믿는다는 내가, 헌신과 봉사를 삶의 철칙으로 삼는다는 그리스도인 된 내가, 이 사회를 위한 걸레 되기를 원치 않는 한심한 인간이었는데 어찌 이 사회가 이처럼 한심하게 되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습니까?
다니던 은행의 구조 조정으로 인하여 정든 직장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 한 퇴직자가 쓴 시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침묵의 땅에서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의 풍경은
모두 낯설기만 합니다.
날마다 얼굴 마주했던
사람 사람들……
손때묻은 책상과 펜, 서류 뭉치
한 몸이던 단말기
그리고 해보다 눈부시던 우리의 미소
이 모두를 하늘에 걸어 두고
우린 돌아서야 합니다.
정녕 내 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인생은 짧은 여름밤의 꿈이라
하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고 싶었던 날들
무거워라, 해 아래 사는 일
당신을 향해 말하고 싶은 몇 마디
왜 이리 목울음이 잠기는지
밀쳐 놨던 세상의 언어로 나 여기 있소,
나 여기 살아 있소
천둥 같은
으뜸의 소리 외치고 싶습니다.
나라의 경제가 찢어짐으로 인하여 그 인생의 그물이 찢어져 버린 자의 찢어지는 절규입니다. 도대체 누가 이 사람의 인생을 찢어 놓았습니까? 누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처럼 찢어지는 아픔을 절규하게 했습니까? 허망한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던 나 자신 아닙니까?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이 사회의 그물을 찢어놓은 장본인임을 주님 앞에 회개해야만 합니다.
청결한 집이라고 해서 걸레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청결한 집일수록 더 많은 걸레가 필요합니다. 청결하다는 것은 보다 많은 걸레질의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사회가 정말 청결한 사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바른 사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더 이상 찢어지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높은 곳에 매달린 장식물이 되려 하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낮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우리 자신을 이 사회를 위한 걸레로 내어 놓읍시다. 혹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더 높은 지위나 직책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께 간곡히 호소합니다. 누구보다 더 앞장서서 이 사회를 위한 걸레가 되십시오. 여러분들을 보다 더 큰 걸레로 사용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허락하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헌신과 봉사의 걸레가 될 때에만이 나의 그물이 찢어지지 않습니다. 남의 그물을 찢는 우를 범치도 않습니다. 때로 병들고 때로 실직당하고 때로 실패할 수는 있으나 그 인생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찢어지지 아니함은, 오히려 더욱 존귀케 됨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찢어지지 않는 그물되시기 때문입니다. -가득히 찬 물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작은 욕망 때문에 내 인생의 그물을 찢는 우를 범해 왔습니다. 나의 권리만을 주장하느라 타인의 그물을 찢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값비싼 액자가 되어 높은 곳에 자리잡으려고만 했지, 누구 하나 낮고 낮은 곳에서 이 사회를 위한 걸레가 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 사회의 그물을 만신창이가 되도록 찢어 버리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한심한 우리의 삶으로 인해 인생의 그물이 찢기운 자들의 찢어지는 절규가 도처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맞는 이 아침 우리의 이 모든 죄를 회개하오니,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후로 우리 모두 주님을 본받아 이 사회를 위한 걸레가 되게 해주옵소서.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많을수록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위하는 더 큰 걸레가 되게 해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일터가, 이 사회가, 그리스도안에서 다시는 찢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언제 어디서든 걸레처럼 헌신과 봉사를 다하며 살다가는 우리의 삶으로 인하여 이 사회가 청결성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므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대한민국이란 찢어지지 않는 그물을 넘겨주는 진정한 신앙의 부모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