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어머니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작가 조연경씨의 작품 중에 `효도별곡'이란 콩트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만두집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부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어김없이 만두가게에 나타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만두집 부부는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주 수요일 3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따로따로 만두집으로 들어선다든가, 식탁에 마주앉아 서로 쳐다보는 표정 등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개는 할아버지가 먼저 오는 편이었지만, 비나 눈이 온다거나 날씨가 궂은 날이면, 할머니가 먼저 와서 구석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할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만두를 시킨 뒤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먹을 생각도 않고, 마치 이별을 앞둔 젊은 연인들처럼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로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상대에게 황급히 만두를 권하다가 다시 눈이 마주치면,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였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부지간 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만약 부부라면 매번 만두집에 따로 나타날리도 없고, 만날때마다 그처럼 서로 애절하게 쳐다보다가 헤어질 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를 옛날 `첫사랑'의 관계로 잠정 결론을 내렸습니다. 몸은 늙어도 사랑은 늙지 않는 법이기에 나이 들어 우연히 재회한 첫사랑의 연인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젊은 시절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의 아쉬움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그날 따라 할머니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만두 하나를 집어 할머니에게 권했지만 할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따라 할머니는 눈물을 자주 닦으며 어깨를 들먹이곤 했습니다. 한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만두 값을 치룬 할아버지는, 그날 만큼은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만두집을 나섰습니다. 곧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며 걷는 할머니를 어미 닭이 마치 병아리를 감싸듯 감싸안고 가는 할아버지―그 두 노인의 뒷모습이 왠지 가슴 아프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수요일도, 또 그 다음 수요일에도 두 노인은 영영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어느 수요일 정각 오후 3시에,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만두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부부는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얼굴은 예전과는 달리 몹시 초췌해 보였고, 진심으로 반가와하는 부부를 향해 할아버지가 답례로 보인 웃음은 울음보다 더 슬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만두집 여자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도 곧 오시겠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습니다.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만두집 부부는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뜨릴 만큼 놀랐습니다. 그리고 마치 독백하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사연을 듣고서는, 부부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첫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어엿한 부부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수원에 있는 큰 아들의 집에서,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둘째 아들의 집에서 각각 떨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두 분의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식들이 싸운 결과였습니다. 큰 며느리가 다 같은 며느리인데 자기 혼자만 시부모를 모두 모실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서는 바람에, 아들들이 공평하게 한 분씩을 모시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서울과 수원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 세시만 되면 마치 견우직녀처럼 그 만두집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온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 나만 죽으면 돼, 천국에서는 같이 살 수 있을거야."

 

 

연로한 부모님을 생이별시켰던 그 자식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자식들에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피치 못할 절박한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자식들이 부모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있었더라면, 부모로 인해 이 땅에 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었고, 부모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음에 대한 긍지가 있었다면,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다못해 달동네 삭월세 방이라도 얻어 함께 기거토록 해 드릴지언정, 그 어느 때보다도 삶의 반려자가 필요한 노부모를 생이별시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가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십계명 중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작년 어버이 주일 `공경하라'는 히브리어 `k bad'는 `무겁다'는 뜻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즉, `공경한다'는 것은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부모님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경륜의 무게, 인식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를 인정하면 귀히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게'란 `긍지'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 인생의 무게를 존중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만약 이 긍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무게를 인정하기는커녕 깃털보다 더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란 함께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 용돈을 얼마나 드리느냐, 얼마나 호강을 시켜 드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효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에 대한 긍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벌써 15 년전의 일입니다. 일본 혹가이도의 삿뽀로에서 돈을 많이 번 재일교포 한 분이, 형편이 어려운 재일교포 노인들을 위한 최신 시설의 양로원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지를 직접 답사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연 소문대로 양로원은 호텔과 같은 수준의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많은 노인들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영양사와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재일교포 노인을 위해 지어진 그 양로원에 재일교포 노인은 막상 1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막상 시설 좋은 양로원에 재일교포 노인들이 들어가고 싶어해도, 자식들이 혹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까 두려워 반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효자이어서 노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불효자라는 욕을 듣지 않기 위하여, 실제로는 전혀 효도를 하지 않으면서도 부모님을 단지 가두어 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낳아 주신 부모님이 단지 귀찮아서, 혹은 남의 손을 빌어 형식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양로원에 보내는 것은 물론 천륜을 어기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자식이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부모님께서 노인들을 위해 특수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양로원에서 같은 또래의 노인들과 함께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시기에 양로원에 모셔다 드리고 정기적으로 찾아뵙는다면, 그것은 결코 불효가 아닙니다. 도리어 참된 효도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한 집에 모시고 살면서도 함께 사는 애완용 강아지만도 못하게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씻을 수 없는 불효입니다.

 

따라서 내 부모님의 재산이 얼마냐, 내 부모님이 얼마나 출세한 분이냐, 얼마나 배운 분이냐에 상관없이, 그 분의 자식으로 태어난 데 대한 긍지가 참된 효도의 필수조건이 됩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도 존중도 섬김도 오직 이 긍지로부터만 비롯되는 까닭입니다.

 

 

본문 26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사용한 호칭 `여자'란 단어 `gunee'는 이스라엘인들이 존경하는 상대에게 사용하는 경칭이라는 것과,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에 하신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한 성도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신 것은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을 일컫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적절한 질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모친 곁에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사도요한이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7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제자 요한과 예수님은 친형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자기 친 어머니처럼 모셔 줄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해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고 말씀 하신 것은 당신 자신이 마리아의 아들이란 뜻이 아니라, 요한을 가리켜 앞으로 요한을 양아들로 삼으라는 의미란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래서 표준 새 번역 성경은 아예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어머니를 보시고, 또 그 곁에 자기가 사랑하는 제자가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자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셨다."

 

즉 본문에서의 아들이란 사도 요한임을 단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황적으로나 문맥적으로 대단히 설득력있는 해석입니다. 저 역시 원문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 자신이 아들이란 말인지, 아니면 사도요한이 아들이란 말인지를 밝혀 줄 주어와 동사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본문의 아들을 사도요한과 예수님 중 어느 쪽으로 번역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이야말로 예수님의 효성을 강조하는 구절로 인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친 어머니였던 마리아에 대하여, 효도와는 거리가 멀었던 분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12살 되던 해 가족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어머니 마리아가 그만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심정이 어떻했겠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사흘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어린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그리스도로서의 공생애를 위해 출가한 예수님을 어머니 마리아가 찾아갔을 때 에도,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48∼50)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이와 같은 언행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볼 때 불효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리켜 불효자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부모공경의 본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그 근거는 요한복음 2장에 나타난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와 오늘의 본문 두군데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라는 곳의 혼인 잔치 집에 어머니와 함께 참석하셨을 때, 마침 그 집의 포도주가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기적을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직은 당신의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강권하자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굽히고 어머니의 명령에 순종하여 생애 첫 번째 기적을 행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효성을 강조할 때마다 늘 인용되는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의 일이었습니다. 그 이전은 물론이요 그 이후 역시 예수님의 효성을 엿볼 수 있는 기사는 복음서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운명하시기 직전, 오늘의 분문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효성을 발견하고 강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이 구절은 정말 중요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이 구절이 없다면, 가나의 혼인 잔치 기사 하나 만으로 예수님을 효자라 강조하기엔 너무나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란 주님의 말씀은 모친 마리아에게 단순히 사도 요한을 아들로 삼고 살라는 소개의 말 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말해 어머니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살다가 기껏 죽기 직전 다른 사람을 아들로 소개나 시켜주는 예수님이야말로, 단지 자식으로서의 형식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이별시켜 놓고도 부모를 모신다고 생각하는 자식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저 애정도 없이 남의 손을 빌어 효도아닌 효도를 하기 위해 부모를 양로원에 떠 맡겨 버리는 자식들과 다를 바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구서야 어찌 예수님께서 부모공경의 본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본문 속의 아들은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던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발견하셨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에게 어머니보다 더 그리운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에 두 팔을 벌리신 채, 당신 자신을 가리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 보십시오. 바로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그것은, 어머니 마리아가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동정녀 처녀의 몸으로 당신을 잉태하고, 당신을 낳고, 당신을 키워 주었기에,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시어 그리스도로서 구원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다는, 어머니에 대한 주님의 긍지의 대선언이었던 것입니다. 동정녀 처녀였던 어머니가 내 어머니 되어 주지 않았던들, 그 모든 일이 가능할 수 없었다는 긍지로운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 한 마디로 인해,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으므로 마리아가 세상사람들로 부터 겪어야만 했던 온갖 고초와 고난의 고통이 눈녹듯 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머니에 대하여 이처럼 긍지를 갖고 계셨기에, 비록 주님께서 어머니와 떨어져 사셨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성만은 변할 수가 없었고, 바로 이 긍지로 인해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 하시며 당신 모친의 여생을 간절하게 부탁하실 수 있었고, 남의 손을 빌어 효도하려는 여타 인간들과도 구별되실수 있었고,그래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예수님의 삶 속에서 성취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 살아생전 효도를 다 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나이들수록 그것을 예외없이 후회하게 되는지 아십니까? 이제 곧 죽으면 하나님과 먼저가신 부모님을 만나게 될 것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효도라는 단어의 의미가 퇴색해 가는 비정상적인 세태 속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제5계명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주셨던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찾으십시오. 비천한 달동네 나사렛 출신의 마리아가 단지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긍지가 되듯이, 우리의 부모님이 아무리 늙고 병들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에 의해 우리 부모님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긍지가 될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해 이 긍지를 갖고 있는 한, 설령 남에게 불효처럼 보이는 행동도 그 본질은 실은 효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긍지를 갖지 못한 자식이라면, 그가 부모에게 행하는 것들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또다른 불효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녕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오늘부터 우리 모두 부모님을 향하여 주님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긍지로운 고백의 삶을 시작치 않겠습니까?

`보십시오. 저는 바로 부모님의 자식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아름답게 펼쳐질 것입니다.

 

 

기도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부모님 아니셨더라면 지금 우리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서 빼시고 빼시어, 우리 존재의 통로가 되게 하신 부모님에 대해 긍지를 갖는 자식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 긍지로부터만 참된 효도가 시작됨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자녀된 긍지로부터 비롯됨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 긍지 속에서 하나님 공경과 부모 공경이 우리 삶으로 성취되게 하시고, 그 누구도 아닌,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분별하고 실천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불효자처럼 보이는 효자 가 될지언정, 효자처럼 보이는 불효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부모 공경이 연례행사가 아니라 매일의 삶이 되게 하옵서소. 진정한 부모공경의 본이 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옵서소.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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