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11월 29일


혼돈의 대지 위에 무지개 설교자 : 임 영 수

말씀 : 창 9:8∼17, 계 21:1∼8


오늘부터 대강절 기간이 시작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력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예수님의 강림을 앞둔 대강절을 시점으로 해서 예수님의 탄생, 그의 부활 40일 전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그리고 부활, 승천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신 오순절로 이어집니다.

교회력의 특징은 과거 지향적이 아니며, 미래 지향적인 희망입니다. 대강절도 지난날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념 주간이 아니며, 장차 이루어질 희망의 약속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금번 대강절에는 우리 모두 기도와 묵상 가운데서 오늘 우리 시대에서 마음에 깊이 품어야 할 진정한 희망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지개를 쫓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어떤 나이 어린 소년이 자기 집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 중턱에 걸려 있는 무지개를 보고 그것을 잡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산 가까이 가보니 무지개는 다시 처음과 같이 앞에 바라보이는 산 중턱에 있었습니다. 소년은 다시 그곳으로 달려갔지만, 무지개는 그 산에서 바라 뵈는 넓은 들에 있었습니다. 다시 들로 뛰어가 보니 무지개는 그만큼의 거리를 둔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무지개는 인간의 갈구와 꿈의 상징으로 인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구약의 본문에 나타나 있는 무지개는 인간의 갈구와 꿈의 상징으로 인용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서 새로운 미래로 나아감과 함께 그 약속의 징표로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무지개는 어린 소년이 달려갈 수 있는 아름다운 대지 위에 떠 있지 않고, 땅 위에 모든 창조물들을 물로 쓸어버린, 쓸쓸하고 황폐한 혼돈의 대지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혼돈의 대지가 다시 과거의 안정에로 돌아갈 것이라는 약속으로 무지개를 보여주신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심판을 넘어서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점에서, 그 일을 실시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 속의 무지개는 인간의 의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의 죄 때문에 사람을 포함해서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까지 모두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노아의 가족과 노아가 불러들인 암수 몇 쌍씩의 피조물을 제외하고 모두 물로 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혼돈의 대지 위에 무지개를 두셨습니다. 무지개는 소수의 노아의 가족과 짐승들 외에 살아 있는 것들이란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대지 위에 떠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의 깊은 의도는 소수의 노아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다시 과거의 안정된 도시의 회복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무지개는 심판을 넘어서 새로운 미래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독자들이 그것을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혼돈의 대지 위에서 밝아 오는 새로운 아침을 보게 됩니다. 그때 그 대지 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밝아 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 무지개가 지시하고 있는 희망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신약 성서의 사 복음서 기자들은 정치적 억압·거짓·불의·폭력·종교적 위선·영적 고갈·허무로 가득 차 있는 도시 한 복판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희망의 사건이 그 당시 로마의 통치 아래서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겨자씨와 반죽한 밀가루 서 말 속에 들어 있는 소량의 누룩은 외형적으로 매우 왜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놀라운 성장력과 변화의 힘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역사 속에서 그러한 의미의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 창조의 역사는 신약 성서 마지막 책인 계시록 끝 부분에서 생명이 무성하며 하나님의 평화가 다스리는 "새 도시의 도래의 비전(Vision)"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이 새로운 도시에 대한 비전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계 21:1∼5 표준새번역)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 위에 새로운 도시 건설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를 위한 한 새로운 미래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미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새로운 미래는 병든 사람에게는 치유로,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받아 들임으로, 죄인들에게는 은혜로, 죽은 사람들에게는 부활로 나타납니다. 신약 성서의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미래에 대해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 (눅 7:22 표준새번역)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새로운 현실, 새로운 미래를 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미래는 주체사상도 아니고, 신 마르크스주의도 아니며,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하의 복지국가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존재 방식입니다.

1940년 세계 제2차 대전 말기 25세난 청년 로저(Roger)는 화해와 일치를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불란서 동부에 있는 한적한 마을로 가서 거처를 정했습니다. 2년 동안 그는 거기서 홀로 지내면서 나치에 쫓기는 유대인들을 숨겨 주기도 하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살아갈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후부터 여러 곳에서 한 두 명씩 그의 공동체 삶에 동참해 가기 위해 그 곳을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세계 각 곳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결심한 형제들로 구성된 화해와 일치의 본을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의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떼제 공동체에는 해 마다 세계 각 곳에서 수 천명의 젊은이들이 와서 오늘 우리 시대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화해의 공동체로서 매일 매일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오늘 우리 시대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현대인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의 선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 반드시 구체적인 희망의 삶의 방식을 창조해 냅니다. 그러한 희망의 공동체적 삶에서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눈물을 거두고 웃게 되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이 위로를 받게 되고, 분열과 갈등의 장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이념적인 사회 공동체와 다릅니다. 인간의 이념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 공동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착취와 인권유린, 창조 질서의 파괴 현상이 일어납니다. 분열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희망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삶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극복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이 희망의 약속은 유토피아나 환상이 아닙니다. 이 희망은 현실에 구체적인 창조적 삶을 만들어 내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적 삶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희망과 현실의 조화요, 영원과 현실의 이어짐입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이 약속은 오늘 이 시대 세속 도시 한 가운데 있는 무지개입니다. 오늘의 세속 도시에는 문화적 유산들도 있지만 살인·강도·매춘·마약·폭력·정치적 음모·술수와 같은 온갖 어두운 일들이 밀집되어 있는 혼돈의 대지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의 도시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노아 시대의 도시·바벨·소돔과 고모라·사도 바울이 선교지로 택했던 로마·고린도·에베소·빌립보·골로새 같은 도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혼돈의 대지 위에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희망의 무지개입니다. 교회는 희망의 무지개를 바라보는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혼돈의 도시를 바라보고 절망하거나, 도피한 사람들의 집단이 아닙니다. 희망의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함께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무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미래는 교회이며 교회의 미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떼제 공동체 창설자 청년 로저는 독일의 나치, 이태리의 뭇소리니의 독재, 일본의 군국주의가 패망한 황폐한 대지 위에 떠 있는 희망의 무지개에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이루시고자 하는 새 것이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강절에 우리는 약속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또 다시 혼돈의 도시 속으로 들어가서 눈물을 흘리는 자들의 눈에서 눈물을 거두게 하고, 고통과 한숨,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생을 포기한 사람을 위로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숨과 탄식 도피적인 삶 대신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참여해 갈 때 자기 연민의 눈물을 거두게 되고, 탄식과 한숨 대신에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대강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아 멘 -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11월 22일


人生의겨울  설교자 : 임 영 수

말씀: 전도서 12 : 1∼8


지난 주일에 인생의 가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인생의 겨울 노년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생의 어느 한 시기에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질문은 생의 사계절 중에 체력이나 활동력이 점차 감퇴되어 가는 노년기에 더 마음을 차지하는 물음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노년기는 생의 가치를 재검토하는 시기입니다.

자연계에도 이 계절에서 다음의 계절로 변해 가는 것이 매우 점진적이며 은밀한 것처럼 생의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그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 분명히 의식되지 않습니다. 생의 여름에서 가을을 맞이했는가 했는데 어느덧 노년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 이유는 생의 가을에 이미 노년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의 가을에 노년기를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준비는 물질적인 것도 있지만, 노년기를 맞이해서도 의미 있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분은 은퇴 후에 급속히 노쇠현상을 맞이하는데 그러한 경우 대부분 의미 있는 일을 갖지 못해서 입니다. 반면에 은퇴 후에도 계속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분은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해가고 있는 경우입니다.

제가 캐나다 뱅쿠버에 갔을 때 60세 이상된 노년기를 맞이한 분들로 구성된 시온 성가단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주 목요일 그 시에 있는 컴유니티센타에 모여 한 시간 성경공부, 함께 점심식사, 오후 한 시간 합창연습을 합니다. 그리고 매해 상반기·하반기 공연회도 갖습니다.

그분들의 말에 의하면 주간에 그 날이 제일 기다려진다고 합니다. 그 시간은 자기들에게 이민 생활에서 유일한 의미라고 했습니다. 노년에 의미 있는 일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노년기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노년기에 들어서면서 생의 다른 계절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두 가지 현저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먼저 개인적으로는 생리적인 변화입니다.

어떤 분이 자신의 노년기를 표현한 글 가운데 이러한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젊은 시절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전연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밤마다 잠자리에 들어 그 다음날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나는 귀는 서랍 안에, 나의 이는 컵 속에, 나의 눈은 책상 위에 놓여져 있곤 한다."

이 글은 생의 노년기에 경험하게 되는 상반된 의식을 표현한 것입니다. 노년기에 들어선 분들로부터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은 `마음은 아직도 젊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반된 의식이 노년기를 쉽게 받아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지혜자도 노년기에 찾아오는 변화를 아주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그 때가 되면 집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팔이 떨리고,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두 다리가 약해지고,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 질 것이며-눈은 잘 안보이게 되고,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소리가 적어질 것이며-귀는 잘 들리지 않게 되고,

우리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잠이 적어지고,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 것이며-귀가 어두워서 노래를 못하며,

높은 곳을 두려워 할 것이며-두려움이 많으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머리털이 희어지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젊은 시절처럼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하며,

원욕이 그치리니-육체적 정신적 의욕을 잃어버리게 된다."

전도서 기자는 이러한 노년기를 곤고한 날이라 말씀합니다 전도서 기자가 노년기를 곤고한 날이라 말씀한 것은 육체의 기력이 쇠하여지고, 모든 일에 흥미를 잃게 되고, 우울함을 더욱 느끼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이러한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노년기를 면제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자를 의뢰하며 살아가면 생을 의미 있게 살게 되고 노년기 위기를 바르게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회적인 면에서 노년기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에서 해방되는 시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년기에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는 동시에 아쉬움·후회·당황이 있게 됩니다.

제가 아는 어느 권사님 한 분이 젊은 시절 결혼을 해서 자신의 생을 거의 자녀 양육과 건강하지 못한 남편을 위해 다 보냈습니다. 한 여인의 헌신적인 자기 희생을 통해서 자녀들이 모두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갖게 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분의 생애에 무거운 짐이 되었던 남편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드디어 그 분은 자신의 생의 모든 짐을 벗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자신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이미 그 때는 그의 생의 노년기였습니다.

생의 모든 짐을 다 벗고 이제부터 자신의 생을 살려고 할 때, 생의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노년기에 맞이한 자유는 그에게 아쉬움·허탈·초조함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생의 위기에서 조용히 기도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전도사 일을 위해서가 아니고, 남은 생의 시간을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삼년간 오직 그 일에 몰두하면서 생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되었고, 그 후 그는 캐나다로 이민하여 시온 성가단을 창단해서 16년 동안 그 합창단을 지도해오고 있습니다.

이 권사님은 생의 곤고한 날을 젊은 시절부터 의지하여 오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 보내고 있습니다.

인생의 노년기에는 아쉬움과 후회만이 있는 계절은 아닙니다. 인생의 노년기는 많은 경험을 재산으로 축적하고 있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가치를 재검토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인생의 노년기는 많은 학위를 가지고 있는 매우 값진 시기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은 그들의 공동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노년기에 갖게되는 경험은 교실에서 지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며, 지금까지 삶의 현실에서 체험적으로 익힌 것들이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입니다. 값지다는 것은 시행착오를 거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젊은 신혼부부가 결혼 전에 육아법에 관한 책을 사서 육아 양육에 관한 지식을 다 습득했다고 해도, 생의 노년기을 맞이한 어머님의 경험에 비할 바 아닙니다. 인생의 노년기는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값진 시기입니다. 잘못하면 노년기에 이르러 지나온 과거를 모두 경멸해버릴 수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노년기는 더욱 아쉬움과 공허만이 남게 됩니다. 그러한 태도는 노년기를 건강하게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지나온 날의 경험들에서 값진 교훈들을 찾아내어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그것을 후세들에게 글로 또는 말로 유산으로 전수해 주는 것이 노년기를 건강하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자신의 지나온 날들을 경멸하지 않고 값진 것으로 받아드리는 데서 노년기를 쉽게 긍정적으로 받아드리게 됩니다.

한편 노년기에서는 지나온 날들에서 경험한 값진 경험의 유산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면서, 다가오고 있는 마지막 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서야 할 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 시간을 위한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어야 합니다.

몇 년 전 미국에 갔을 때 제가 도착하기 몇 주전에 있었던 감동적인 사건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노부부가 `캠핑 카'를 타고 미국 대륙을 여행하던 중, 어느 국립공원 높은 지대에서 폭설을 만났습니다. 갑자기 내리는 폭설로 자동차는 눈에 갇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계속 눈이 내려 자동차 전체가 눈에 덥히게 되었습니다. 노부부는 자동차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약 일주일 후에 눈 속에 있던 차가 발견되어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노부부는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평화롭게 숨을 거둔 그들 옆에 한 권의 일기장이 있었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노부부가 눈에 갇힌 시간부터 죽음의 시간을 내다보며 남편이 기록한 일기와 남편이 먼저 숨을 거둔 후 옆에 있던 부인이 대신 계속해서 기록한 일기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거기에 이러한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의 남편은 우리가 눈에 갇히게 되면서 운명하는 순간까지 줄곧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옆에서 지켜 본 남편의 모습에는 조금도 두려움의 빛이 없었고 매우 평화로웠으며, 안정되어 있었다. 드디어 남편이 숨을 거둔 후, 나는 그를 대신해서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가 나 역시 나의 마지막 시간을 맞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눈 속에 갇혀 있는 고독한 노부부의 모습은, 고독하고 외로운 노년기를 맞이한 사람의 모습으로 상징화 시켜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드리고 다가오고 있는 영원의 시간을 내다보며 일기를 써 갈 수 있을 정도라면, 그야말로 훌륭한 노년기를 보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의 모습 자체가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의 모습은 그가 살아온 생전체의 모습을 반영해 주는 시간입니다.

끝으로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드디어 그리스도 안에서 노년기를 맞이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려드립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간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운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 : 6∼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겨울, 인생의 노년기는 우리 모두의 미래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 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노년기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서야할 시간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십시다.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의 생의 모든 물음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창조주 하나님 앞에 가서 서야 합니다. 그 시간이 갑자기 닥치기 전에 그 분을 깊이깊이 신뢰해가야 합니다.

- 아 멘 -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11월 15일



겨울이 오기전에-인생의 가을 설교자 : 임 영 수

말씀 :  디모데후서 4 : 9∼22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그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근황을 알리면서 겨울이 오기전에 자기에게로 오라는 당부와 함께, 올 때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과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올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는 이미 인생의 겨울인 노년기에 있었고, 자연의 계절로는 겨울을 얼마 앞둔 시기에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두꺼운 겉옷이 필요하였고 인생의 겨울과 다가오고 있는 순교의 시간을 내다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그에게 필요 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그러한 부탁을 했을 것입니다.

본문에 `겨울이 오기 전에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가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겨울 전의 계절인 가을에서 겨울을 내다보며 다가오는 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준비에는 단지 계절적인 준비만이 아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생의 마지막 시간을 위한 준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한편 현실에서 앞으로 다가오는 자신의 미래의 시간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삶입니다.

바울이 내다본 그의 미래는 죽음이 아닌 죽음의 장벽 뒤에 있는 영원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영원의 시간에 그를 위해 예비되어 있는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현재의 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가 아니고 영원으로 잇대어지는 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현재는 더욱 소중했습니다.

이러한 진실은 바울에게만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한 순간 순간을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반드시 경제적인 풍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우리의 생의 계절을 놓치지 않고 보다 충만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자연계에 사 계절이 있듯이 우리의 생에도 사 계절이 있습니다. 자연계의 사 계절에 각각 그 특성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인생의 계절에도 그 나름대로 독특한 특성이 있습니다. 자연의 봄의 특성이 새롭게 태어남과 성장이라면 인생의 봄 역시 태어남과 성장이 그 특성입니다. 자연계의 여름이 열매의 계절이면 인생의 여름 역시 열매와 결실을 위한 준비의 계절입니다. 여름 다음에 오는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며, 그 다음에 오는 겨울은 모든 것을 마감하는 휴면의 절기입니다. 인생의 가을, 겨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중에는 생의 봄에 사는 분·생의 여름·가을·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계절적으로 좀 늦었지만 가을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생의 계절 가운데 가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인생의 가을은 새로운 적응의 계절입니다. 이 시기는 생의 봄, 여름과는 달리 더 이상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추진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며 생의 겨울을 내다보는 시점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새로운 적응이 필요합니다. 이 시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신적 갈등을 극복해 가기 위해서는 철저히 현실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젊은 시절과 같이 이상과 꿈을 갖고 살아갈려고 하면 많은 갈등을 갖게 되고 그러한 갈등은 정신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져오게 됩니다.

현실적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며,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생의 계절에서 생의 봄과 여름을 상실해온 사람의 경우 생의 가을을 현실적으로 받아드리기 어렵습니다. 생의 가을을 현실적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어렵지 않으려면 그 전 계절을 상실하지 않아야 합니다. 생의 가을을 원만하게 받아드릴 수 있는 사람일수록 생의 가을에 와서 나름대로 소유한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소유는 물질적인 것이라기 보다 정신적인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사랑을 원만하게 받아온 사람, 젊은 시절 자기 자신을 바르게 실현해 온 사람인 경우 생의 가을을 받아드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드리는 것이 매우 어렵게 느껴집니다.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자기가 성취하지 못한 이상이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과거나 미래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으로 인생의 가을은 또 한 번의 선택의 시기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선택이란 새로운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진행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정리해야 할 것은 정리를 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전연 새로운 선택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절대적 원칙은 없습니다. 그러나 선택은 하되 어디까지나 자신의 남은 생을 보다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그러한 선택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일의 선택도 있을 수 있고, 젊은 시절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는 선택도 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 박사는 어느 날, 한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부인은 영국의 글래스고우의 유명한 여학교에서 교사일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교육계에서 명예있는 오랜 경력을 완수하고 은퇴하였습니다. 그 편지에 의하면, 그는 신약 성경을 그리스 말로 읽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배우지 못했다가 이제는 은퇴하였으므로 그럴 시간이 있다고 하면서, 학생으로서 바클레이 박사의 고전어 강의 시간에 참석하여도 좋겠는가라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바클레이 박사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부인을 맞이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며 명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 학기부터 바클레이 박사의 강의에 다른 젊은 학생들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바클레이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배우는 일에 벌써 늦었다고 할 필요는 없다."

다음으로 인생의 가을은 책임의 시기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의미와,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가을에서 우리는 모든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산이나 들에 있는 각종 식물들은 그것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자기의 열매와 색깔을 나타냅니다. 봄·여름에 잘 구분이 되지 않았던 것들도 가을이 되면 자기의 고유성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러한 현상을 인간의 생의 책임과 정체성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은,`사람은 중년기에 자기의 얼굴 모습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중년기에 그 사람의 얼굴 모습은 지금까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가을에 와서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거나, 책임전가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드리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것이 성숙입니다.

어느 성형외과 의사의 글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자기에게 성형수술이 잘못되어 고치러온 한 부인이 있었는데, 그의 얼굴 모습은 이 십대의 젊은이인데 그의 몸매와 손은 중년 부인의 것이었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부인은 중년이라는 자신의 생의 현실을 받아드릴 수 없는 정신적인 깊은 사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계절은 생을 보다 단순하게 깊이 있게 살아가야 할 시기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갈릴리 바닷가를 거닐다가 어부 시몬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습이 매우 피곤하고 허탈한 것을 보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가을을 깊이 있게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깊은 신앙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생의 계절에서 보다 생의 가을에 깊이 있는 신앙 생활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가을에 찾아오게 되는 정신적 공허와 허무를 극복해 가기 위해서입니다.

자연계의 가을에 모든 생태계는 거의 다 충만함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맞이하는 생의 가을은 그것과는 반대입니다. 인생의 가을은 쓸쓸함·외로움·정신적 공허·허무라는 원치 않는 손님이 찾아오는 계절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들을 잘 극복해 가기 위해서는 영적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가을에 영적으로 잘 충전되지 않으면 생의 겨울을 맞이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말씀의 묵상과 영적 독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생의 가을을 보다 풍성하게 살아가는 지혜는 생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선한 일을 하는데 두는 것입니다. 유럽에 아들러라는 유명한 정신의학자에게 어느 날 중년부인이 찾아와서 자신에게 찾아온 우울증의 고통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들러 부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그에게 일 주일 분의 약을 지어주면서 그가 지켜야 할 한 가지 삶의 원칙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약을 먹으면서 하루에 한 가지씩 반드시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해야된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돌아가서 의사의 지시대로 충실히 약도 복용하고 하루에 다른 사람을 위해 선한 일 한 가지씩 했습니다. 한 주 후에 부인은 아주 명랑한 얼굴을 아들러를 찾아와서 자신의 병이 다 나았다고 하면서 약의 효과를 감탄했습니다. 그때 아들러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부인,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은 약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그 약은 소화제에 불과하고, 부인이 나은 것은 자신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관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의 계절을 후회 없이 완전하게 향유해 갈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현재 자기가 있는 생의 계절에서 다음 계절로 넘어설 때에는 후회·갈등·두려움이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생의 계절을 완전하게 후회없이 실현해 가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것과 죄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생의 방향을 바르게 설정해 가지 못하게 하고, 허무한 것, 무의미한 것에 집착하게 하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에는 언제나 후회·허무·갈등이 따라 다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상실한 생을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용서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씻어내고, 우리의 허무와 후회를 씻어냅니다. 그리고 영원한 삶에 대한 새로운 약속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은 어느 한 생의 계절만이 유일하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의 모든 계절이 다 가치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의 계절은 다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생의 각 계절은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신의 생의 계절을 다 살지 못하고 질병으로, 불의 사고로 생의 과정이 단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한 생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마지막 부활의 때에 다 보상됩니다.

자연계의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며 수확의 계절입니다. 가을이 되면 아무리 생각이 무딘 사람도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생을 돌이켜 보며 반성하게 됩니다. 한편 인생의 가을에서 결실과 수확의 의미는 적응·선택·책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깊이 있게 살아가야 할 계절이라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이 생을 잘 살아간다는 것은 생의 각 계절을 상실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생의 계절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따라야 합니다.

인간의 성숙은 어느 한 계절만을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성숙은 인생의 전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생의 전 과정에서 저는 생의 가을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긍정적인 면에서나, 부정적인 면에서 가을을 우리를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가을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끝으로 김남조 씨의 `가을의 기도'를 읽어드리면서 저의 설교를 끝맺겠습니다.

"신이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못내 당신 앞에 벌받던 여름은 가고

기도와 염원으로 내 마음 농익는

지금은 가을

노을에 젖어 고개 수그리고

긴 생각에 잠기옵느니

여기 이토록 아름차게 비워진 나날

가을엔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신이여 가을엔

기도드리게 하옵소서

바람 속에서

바람에 불리우다 불현 듯 더워오는 눈시울

주체할 길 바이 없으니

이제금 홀로인 그분과 나와

가을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가을엔

사랑하게 하옵소서

경건히 보다 경건히

요적의 눈빛으로 마주 바라보는

계절은 가을

신이시여 당신과 나 사이에

그분과 나 사이에

한 아름의 들국화를 두게 하옵소서

보라빛 흰빛의 소담스런 국화가

피어도 있고

피면서도 있게 하옵소서

가을은 돌아가는 계절

푸른 하늘 아래

나도 몰래 내가 멈춰서는 계절

문득 멈춰서서 다시 보면

나는 혼자인 나

가을은 제각기 혼자인 계절

신이시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 아 멘 -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11월 15일


산 제물로서 예배  설교자 : 임 영 수

말씀 :  로마서 12 : 1∼8


종교사적으로 볼 때 옛날 원시인들은 그들이 믿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종교 의식으로 바치는 제물이 짐승, 곡물 이외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후 인간의 의식이 깨이고 신 개념이 점차 바뀌어 가고 종교도 제도화되어 가면서 일정한 의식 중심의 제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은 주로 소·양·염소 날짐승·곡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때 반드시 흠 없는 것,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잘못되어 제사장과 상인들이 결탁하여 성전에서 상거래 행위로까지 변질되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통점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은 흠이 없는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신은 사람과는 다른 거룩한 존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 헌금으로 바치는 돈은 새 돈으로 골라서 드리곤 하였습니다. 새 돈이 없을 때는 다리미로 돈의 구김살을 펴서 헌금으로 드린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너무 순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새 돈, 돈의 액수가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퍽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 나라 초대 미국인 선교사 한 분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어린 시절 일화 가운데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더우드는 유년 시절 주일 학교에서 헌금할 시간이면 눈을 감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사실을 주일 학교 선생님이 발견하고 한 번은 언더우드에게 `너는 왜 헌금시간이면 헌금을 드리지 않고 기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선생님 저는 헌금 드릴 돈이 없어 그 대신에 저의 몸을 드리곤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이 소년은 성장해서 목사가 되어 한국의 초대 선교사로 와서 사역했습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권면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은 짜임새 있고 경건미가 있는 예배 형식, 그렇지 않으면 준비된 많은 액수의 헌금, 좀더 나아가 도덕적인 삶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는 `산 제물로서 몸'은 그러한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은 우리의 `참모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은 잘 포장되거나, 위장된 우리의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참모습을 희생 제물로 드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살아온 경험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그가 살아 온 만큼의 생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청년은 청년으로서의 경험이 있고, 장년은 장년의 경험을 가지고 있고, 노인은 노인으로서 생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험을 드린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그 시점까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놓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참모습을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부서지고 깨어진 불완전함·우리의 이중성·욕망·허무·게으름·우리의 강함·약함 모두를 희생의 제단 위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어둡고 나약한 면은 받아드리려 하지 않고 자신의 도덕적 가치에 부합되는 것만을 자기 자신으로 받아드립니다. 어두운 면은 모두 부모의 탓,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를 받아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제물이란 우리의 도덕적인 의가 아니라 우리의 참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우리의 참모습을 드린다고 할 때 거기에는 부서지고·깨어지고·병든 우리 자신이 포함되고, 우리의 이중성·탐욕·허무주의·게으름이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러한 참모습을 기뻐하십니다. 그러한 모습이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잘못 생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화려한 성전, 살찐 송아지, 형식적인 종교 의식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그릇된 신앙에 대해 예언자 아모스는 매우 날카롭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쳤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어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암 5 : 21∼23)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된 것은 죄를 짓고 독약과 같은 죄의 쓴맛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제물을 반기지 않으시며,

내가 번제를 드려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깨어진 마음입니다.

깨어지고 짓밟힌 심령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십니다."(시 51 : 16∼17)

제가 학교 교목으로 일을 볼 때, 어느 해 학기말 졸업 사정회가 있었습니다. 사정회 시간에 전체 교사가 다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졸업반 담임 선생님들이 자기 반 졸업생이 몇 명이며, 유급 되는 학생은 얼마나 된다고 보고를 합니다. 그 중 어느 졸업반 담임 선생님이 자기 반 형편을 이야기하는 중에, 한 학생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이 학생은 점수가 너무 미달되어 졸업이 불가능하지만, 금번에 졸업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선생님들에게 동정을 구합니다. 그 이유는 그 학생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성적으로는 몇 해 유급 시켜도 졸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담임 선생님 하는 말이, 그 학생 어머니가 찾아와서 간절히 사정하기를 자기 아들을 금번에 졸업만 시켜주면 신학교에 보내 목사를 시키겠다고 하니 선생님들의 넓은 이해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그 이야기를 하자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저를 보면서 일제히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선생님들이 그렇게 웃는 이유를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웃음 이면에는 매우 의미 있는 암시적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알고 보니 목사는 다 모자라는 사람이구나!'라는 의미입니다.

한 때 우리 나라 교회에서 잘못 이해된 것이 목사는 모두 모자라는 사람, 육신적으로 병든 사람, 지난날 어두운 전력을 가진 사람이 목사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목사들 가운데는 인간적으로 모자라는 사람, 병약한 사람, 장애인, 인생의 온갖 어두운 경험을 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 모두 목사가 된 것은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거짓없이 드렸기 때문에 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 할 일이 없어 타의에 의해서 목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목사가 된다면 그 사람은 목사의 직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서지고, 약한 것, 상한 심령을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받으신다는 의미는, 우리에게 부담스럽고 쓸모 없는 것을 하나님께 갖다 맡길 때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우리에게 짐스럽고 귀찮은 것은 모두 하나님께 바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요즈음 불란서 조각 중에 `로댕' 다음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세자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매우 특색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거의가 전통적인 개념을 뛰어 넘어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버린 물건들을 가지고 작품을 만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철제 폐품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집이 가난해서 배우지도 못하고 조각할 수 있는 재료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버려진 물건들을 줏어다가 그 물건의 특징을 살려서 조각품을 만들곤 하던 것이 오늘의 세자르가 되게 하였습니다.

사진으로 그의 작업장을 보았는데 그곳은 마치 철공소 같기도 하고, 폐품 수집상 같은 인상을 풍기기도 했습니다. 부서지고 녹슬고, 버려진 것들이 조각가 `세자르'의 손에 들어가면 매우 신기한 작품으로 바뀝니다.

우리도 역시 참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희생의 제단 위에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중한 의의 병기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점은 기뻐하는 것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약한 것, 깨어진 것을 싫어합니다. 언제나 화려하게 포장된 것, 꾸밈을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아닌 자기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 수술도 하고, 학벌을 속이기도 하고, 없으면서 있는 척 하기도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이 받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계성의 삶에서 자주 실망·허무·환멸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를 위장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자기는 의인·착한 사람·똑똑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 하는 것이 위장·허구·불성실입니다. 인간이 가장 진실해 질 수 있는 순간이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보는 순간입니다. 복음의 빛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드러냄과 아울러, 그러한 우리의 참모습을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결혼 후에 찾아오는 첫 번째 위기가 꾸밈 뒤에 숨겨진 참모습들이 드러나면서 상대방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결혼 전에는 다 미녀요, 미남이며 다 교양이 있고 온전해 보입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그러한 위장의 면사포가 벗겨지면서 뒤에 숨겨진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장된 것, 꾸민 것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우리 자신의 참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받아드린 산 제물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 제물은 계속적으로 "변형되어 가는 삶과 순종"입니다.

본문에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했습니다.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은 마음이 새롭게 되는 데서 시작됩니다. 외형이 화려하게 되어지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세상을 위하는 내적 동기의 변화입니다.

그 다음으로 형체의 변형입니다. 본문에 "이 시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변형 Transforming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전한 뜻을 분별해서 그 뜻에 순종해 가는 삶으로 되어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산 제물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말씀하기를,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 : 22)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시면서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 순종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길로 들어서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순종이 요구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제물은 우리의 능력에 따른 봉사입니다. 본문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남의 것이 아닌, 흉내가 아닌, 자기의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예배 처소를 마련해서 이제부터 매 주일 보다 좋은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예배처소와 함께 우리의 삶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서의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서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참 모습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형되어 가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결국 산 제물로서 몸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 아 멘 -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11월 1일


만민이 기도하는 집 설교자 : 임 영 수 목사님

말씀 :  예배 마가복음 11 : 15∼19


우리는 예수님이 온유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도 안 내시고 언제나 참으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고정 관념을 완전히 깨트리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격정적입니다. 거룩한 성전 뜰 안에서 제사에 사용할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유'라는 뜻을 좀더 바르게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온유란 내성적이며 착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 잘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명예와 욕심, 영웅심에 사로잡혀 있는 분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전적으로 순종하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렇게 용감한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한 사람은 화를 내어야 할 때 화를 내고, 침묵을 해야 할 때 침묵을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의 다 자신의 이익과 신변을 생각해서 행동을 하지만, 예수님처럼 온유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하신 일에 대해서 복음서 기자 마가는 비교적 자세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가가 전해주는 내용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왜 그러한 격정적인 행동을 취하셨는 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성전에서 되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시고 모르는 척하고 지나치셨다면 예수님 답지 않았을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종교적 행사가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 각 곳에 사는 유대인들은 누구나 일년에 한 번 그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희망이며 기쁨이었습니다. 그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희생 제사에 사용할 소·양·염소·비둘기와 같은 희생 제물을 가지고 가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순례자들이 가지고 온 제물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제사장들에게 검열을 받고 합격을 해야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 사회와 종교가 너무 타락해서 제사장들과 상인들이 결탁하여, 순례자들이 가지고 온 제물을 의도적으로 불합격 판정을 내려, 성전 뜰 안에서 파는 제물을 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장면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남자는 누구나 매년 한 번씩 성전 세를 내게끔 되어 있는데 반드시 유대 은화 반 세겔로 내야만 합니다. 그 당시 로마나 그리스 화폐가 주로 통용되던 시대인 만큼 순례자들은 성전에 와서 유대 반 세겔로 환전을 해서 성전 세를 내곤 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란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들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는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 되어진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은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종교에서나 기도하는 곳으로 지정된 곳에서는 조용히, 엄숙해야 하고 그곳에서는 세상적인 잡된 생각을 해서는 안되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그러한 뜻으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뜻에서 그렇게 행동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취하신 행동에는 좀더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의분을 나타내신 것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서 거짓과 불의의 행위가 자행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오심으로 지금까지 유대 성전에서 해오던 종교의식은 끝나고, 유대인이나 이방인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예배드릴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것을 알린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미국의 영성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평안·기쁨·다정함·교제·솔직함·친밀함·용납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향인 하나님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기도라면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희생 제물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부터 그러한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문을 통해 직접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대화가 시작됩니다. 그때 하나님과 대화는 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매우 솔직한 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대화가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대화에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제 그 다른 점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이러한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놓게 됩니다. 이 세상 그 누구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가면을 써야하고 현재의 우리 자신보다 낫게 행동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대상들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원하십니다.

둘째, 그리고 우리의 생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게 됩니다. 사람은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다 자신의 생의 짐이 있습니다. 그 짐이 때로는 너무 무겁게 느껴져 사람들은 피곤해 합니다. 누가 대신 져주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우리의 짐을 져줄 사람은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하나님과 대화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우리의 잘못을 용서받게 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에 대한 적대감, 미움 때문에 고통을 당하며, 죄의 가책을 마음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대화에서 그러한 미움과 죄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죄도 하나님께서 감당 못하실 죄는 없습니다.

넷째, 하나님과 대화의 내용은 우리의 인생에서 경험하고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에는 제한 받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의 삶이 익숙해지면 질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생기 있고 희망적인 삶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의 삶을 배워가는 일은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다섯째, 이러한 하나님과 대화에서 우리의 마음이 강건해집니다. 강건해진다는 것은 새로운 희망으로 무장하는 것이며, 삶의 의욕과 열정으로 채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섯째, 하나님과의 대화는 결국 인간을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대화를 통해서 새로 태어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게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기도하는 집이란 하나님과 대화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대화하시기 위해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맞아들이기 위해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한편 기도하는 집은 `회상과 전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기도하는 집에 들어온 사람은 먼저 자신이 지나온 날들을 회상해 보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생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이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보여 주시는 미래를 바라보며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기도하는 집인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가서 그들이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들의 역사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하셔서 그들을 인도하여 주셨는가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축제를 지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전개되는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며 옷깃을 여미곤 했습니다.

기도하는 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사람들이 모여 성만찬의 떡과 잔을 나누며 서로 교제하는 친교의 장소입니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세상 사람들이 갖는 교제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교제는 그 동기가 다 인간적인 것이지만 기도하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친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하는 일!

머리 위의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 같고

주께서 여기에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133)

오늘 우리 모두 감사와 기쁨, 희망 가운데서 입당식을 갖는 이 새 건물은 이름하여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 집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주님의교회 성도들과 정신학교 선생님, 학생들과 대화하시기 위해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집은 대화의 집입니다.

그리고 이 집은 사랑하는 성도들이 모여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보며, 미래를 내다보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거룩한 예배의 장소입니다.

다음으로 이 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주님의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나누는 친교의 장소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새로 기도하는 집을 마련해서 새로운 미래를 향해 출발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미래 역시 여러분들만이 걸어가는 길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미래에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일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희망·사랑으로 그 창조의 사역에 참여해 가야 합니다. 그 일을 바르게 잘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새로운 기도의 집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집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과 예배, 친교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의 불의와 거짓으로 모든 것이 형식화 되어갈 때,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고갈되고 내용이 없는 삶으로 되어 간다는 것을 복음서 기자 마가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기사 전반과 후반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삽입시켜 왜, 그 당시 유대 종교가 무기력한 종교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되어진 일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에 있는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를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저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문안에 들어서 있다.

예루살렘아, 너는

모든 것이 친밀하게 갖추어진 성읍처럼,

잘도 세워졌구나.

저 지파들, 주의 지파들이,

주의 이름을 찬양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를 따라

그리로 올라가는구나.

거기에 재판의 보좌들이 놓여 있으니,

다윗 가문의 보좌들이로구나.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하여라.

`예루살렘아!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네 성벽 안에 평화가 깃들기를,

네 궁궐 안에

평화가 깃들기를 빈다' 하여라.

내 친척과 이웃에게도

`평화가 너에게 깃들기를 빈다'

하고 축복하겠다.

주 우리 하나님의 집에

복이 깃들기를 빈다." (1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