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었다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4 : 15∼26


일반적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데에는 연역법과 귀납법이 있습니다. 연역법이란 이미 일반화된 원리 혹은 명제를 근거로 하여 특수한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으로써 이른 바 삼단논법이 동원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모두 백의민족이다, 나는 한국인이다. 고로 나는 백의민족이다'와 같은 식입니다.

반면에 귀납법이란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명제나 법칙 혹은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서울에 있는 까마귀를 보아도, 부산에 있는 까마귀를 보아도, 동경이나 뉴욕 그리고 파리에 있는 까마귀를 보아도 다 검은 색이므로, 까마귀는 검다'고 정의하는 방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볼 때에도 연역적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귀납법적으로 다가서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방법 모두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지만, 연역적으로만 성경을 보면 은혜로울 수는 있으나 성경 속의 사실을 내 삶에 적용시키기 어려운 단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다.' `믿음의 조상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고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주저없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

참으로 은혜로운 논리 전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내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믿음의 조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음의 조상이 아니다.' `믿음의 조상이 아닌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고로 나는 아브라함처럼 내 자식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식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연역적으로 접근해 보십시다.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사도였다.' `위대한 사도는 날아오는 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로 그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바울과 비교한 우리 자신은 어떻게 표현되겠습니까?

`나는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가 아니다.' `위대한 사도가 아닌 나는 이유없이 내게 돌팔매질을 하는 자를 용납할 수 없다.' `고로 지금 내가 천수를 다하기도 전에 진리 때문에 순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을 이처럼 연역적으로만 접근할 때,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과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면서 결단보다는 오히려 주눅이 들고 자포자기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인물에 대하여 귀납적으로 다가갈 때 우리는 전혀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가장 큰 재산이던 그 옛날 100살이 될 때까지 자식을 얻지 못했던 인생 실패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믿지 못해, 여종과 동침하여 서자를 먼저 얻는 믿음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고 보니 기근의 땅이자 그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도망 가버린, 신앙의 지조라고는 전혀 없는 한심한 인간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자기 아내를 탐내는 사람들로 인해 목숨을 잃을까 아내를 누이라 속이다가 정말 빼앗겨 버린 창피스러운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인간 같잖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치 않으시고 말할수 없는 자비와 긍휼로 그를 붙드시고 바로 세워 주셨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인격적으로 깨달았을 때, 자신을 위해 인내하시며 끊임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바뀌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과 사랑과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자식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자식을 더 확실하게 얻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으로 높임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삶을 귀납적으로 들여다보면 우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믿음도 신앙의 지조도 없고, 정말 창피하고 한심한 삶을 살아 왔다 할지라도, 아니 참담한 실패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는, 우리도 모두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진리인 주님을 부정하던 인간이었습니다. 자기와 반대 의사를 가진 자를 돌로 쳐죽일 정도로 독불장군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잘났고 자기만 옳다고 착각하던 철부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처럼 형편없던 인간인 그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살리시기 위해 피 흘리시며 돌아 가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에 의해 그는 새롭게 변화되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날아오는 돌맹이도 기꺼이 맞을 수 있었고, 그 사랑의 증인이 되기 위해 참수형마저도 두려워 않았습니다. 주님 사람의 종착역은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임을 알았던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또 다시 소망이 용솟음치게 됩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의 바울 같은 독불장군이요 철부지 같은 인간이요, 심지어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 할지라도 주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주님의 사랑 속에만 있으면, 주님에 의해 우리 역시 얼마든지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더 이상 아브라함이나 바울 앞에서 죽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귀납법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우리 삶 속에 적용시켜 가기만 하면, 우리는 성경 속의 그 어떤 위대한 인물과도 동일할 수 있습니다. 40년동안이나 실패자로 살다가 위대한 출애굽의 지도자가 된 모세가 될 수도 있고, 남의 유부녀를 빼앗은 불한당이었으면서도 이스라엘 최고 성군이 된 다윗일 수도 있고,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모른다 부인하다가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던 베드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로 연역법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다가 80년대 중반을 너머서면서, 세계적으로 귀납법적 성경공부가 일반화되고 있는 것은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이 방법이 우리의 신앙적 결단과 실천 그리고 성숙에 훨씬 더 유익한 까닭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연역법적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같은 신이시다.' `고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넉넉히 지실 수 있었다.'

이렇게 될 경우 우리는 예수님을 닮을 수도 없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질 가능성은 더더욱 없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입니다. 하찮은 인간이 어찌 신을 닮을 수 있으며 신이나 지는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귀납적으로 다가설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수님 역시 여인의 몸을 통해 육신을 입고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목수 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궁핍함 속에서도 그 분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만을 구하며 사셨습니다. 30세쯤 되셨을 때에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버리사 인간 구원의 길에 나서셨습니다. 3년동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끝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루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육신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실 망정, 그 고통을 끝내 피하지 않으시고 죽음으로 감수하시므로 하나님에 의해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인류의 구원자, 부활의 주님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와 같은 귀납법적 설명은 인간의 해석이 아닙니다. 빌립보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신으로 이 땅에 오시어 신으로 아무런 고통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감수하셨기에 하나님께서 그 분을 그리스도로, 인류의 구원자로, 성자 하나님으로 세워 주셨다는 뜻입니다. 뿐만아니라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만에 하나라도 예수님께서 죽음 뒤에 찾아 올 부활의 즐거움을 믿지 못하시어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을 꺼려 하셨더라면, 결코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귀납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성경의 방법입니다. 아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지칭하실 때 가장 즐겨 사용하신 호칭이 바로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복음서를 통하여 무려 81회나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고 계십니다. 신(神)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참사람으로 십자가 지심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좇아 갈 수 있는 가능성과 공간이 비로소 확보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으로서만 오셨다면 인간인 우리는 감히 그 분을 흉내 낼 수조차 없겠지만, 그 분 역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갖고 오셨던 사람의 아들이셨기에, 사람인 우리는 참사람이셨던 그 분을 믿고 따르며 그 분을 본받아 각자의 십자가를 지므로, 그 분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 세움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30)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구원 사역을 다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 중 단 한가지라도 이루지 못하신 것이 있었다면, 그 분은 결코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한 구원 사역을 마지막 십자가에서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셨기에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원 사역을 다 이루셨습니까? 예수님 당신의 방법으로입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따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처럼 베들레헴에서 사람의 아들로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의 예언처럼 동정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사야 9장 1절∼2절의 예언처럼 갈릴리를 중심으로 천국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처럼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신음하시자,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가에 갖다 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 군병들이 마취제 효능을 가진 쓸개 탄 포도주를 드리자 거절하셨습니다. 마취제를 먹고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고난의 참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작 필요할 때 필요한 포도주마저 거절하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새삼스럽게 포도주를 드실 까닭이 없습니다. 더우기 신 포도주라면 식초와 같기에 목마른 자는 더더욱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골리기 위해 드린 식초같이 신포도주를 받으셨다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보가 아니신 다음에야 왜 그처럼 어리석어 보이는 짓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본문 28절이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하실 최후의 모습을 시편 69편 21절을 통하여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나이다"(시 69:21)

 

십자가 위에서 생명의 심지가 꺼져 가는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타는 목마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식초와 같은 신 포도주를 삼키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다 이루었다'는 한마디로 당신의 생애를 정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루었다'는 단어 'teleo'는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분의 삶이 곧 하나님 말씀의 완성이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한 말씀도 빠짐없이 그 분의 삶 속에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사람의 아들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성육신한 그리스도, 즉 성자 하나님이 되셨고, 십자가 위에서 당당하게 `다 이루었다' 선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습니까?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어야만 합니다. 나의 욕망이나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진리의 말씀을 지향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 성취되어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세상을 향해 보여 줄 수 있는 성경이어야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셋째아이가 수학문제를 풉니다. 사탕 12개를 놀러온 친구 세명에게 나누어주면 한 사람당 몇 개씩 줄 수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답은 두말할 것도 없이 4개씩 입니다. 그런데 셋째 아이는 세개씩이라고 답을 썼습니다. 아내가 왜 세개씩이냐고 묻자 아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저도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우리 집에 친구 3명이 놀러왔다면 자기까지 네 사람이므로, 12개를 네명에게 나누어주면 한 사람당 세개씩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논리로는 맞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분명 틀린 답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려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아이처럼 언제나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 논리에 빠지고, 우리가 얻는 답은 다 오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틀린답은 우리 자신을 망치고 타인마저 해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돈을 벌더라도 나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지식을 구해도 지식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진리을 위하여, 가정을 꾸려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무엇을 행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때에만 우리는 진리안에서 인생의 바른 해답을 따라 살 수 있으며, 우리의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 아무런 후회도 없이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당당하게 이 땅에서의 생애를 마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형편없는 인간이었을지라도, 모세처럼 철저한 실패자일지라도, 다윗같은 패륜아였을지라도, 바울 같은 살인마 였다 해도, 우리 삶이 말씀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모두 믿음의 조상,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사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중심이 있는 한,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시사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우리 자신들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같은 참담한 실패자였다할지라도, 다윗이나 바울처럼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정녕 주님을 바르게 믿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좇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으로 주님의 말씀을 성취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이시여.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진리를 구현하는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고 주님의 참사람 되심을 온전히 본받게 하옵소서. 맡겨 주신 사명 다 감당한 뒤에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버지여, 다 이루었습니다'란 고백의 예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하여 주옵소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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