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말씀/1998.8.30 

하나님의 희망 속에 있는 공동체(설교자 : 임 영 수 )

말씀: 사도행전 2:37∼47


스위스 제네바 국제 복지기관에 그 기관의 책임자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미모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여성은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전 그 날 방송을 마감하는 시간에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을 반드시 듣고 잠자리에 들곤 하였습니다.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이란 별 것 아닌 "여러분 이 밤도 좋은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아주 짤막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비서에게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이 인사말을 듣고 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여비서가 그렇게 하게 된 이면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이 기관에 와서 일하는지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책임자를 비롯해서 누구 하나 그에게 인간적인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오지만 모두 사무적인 이야기 외엔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서 아파트로 돌아오면 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루 중 인간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방송을 종료하는 시간에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폴 뚜르니에 박사의 "고독으로부터 도피"라는 책 서두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뚜르니에 박사는 그러한 현상이 참된 친교에 굶주려 있는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의 병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뚜루니에 박사는 이러한 병의 원인을 다음의 몇 가지 잘못된 인간의 그릇된 정신 때문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첫째, 의회 정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회 정신은 건전한 민주주의 정신을 의미하지 않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닫고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내서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정치적 복선을 가지고 인간관계를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독립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개인주의를 의미합니다.

셋째, 소유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탐욕·욕심·허영·지배욕·조급을 의미합니다.

넷째, 요구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뚜르니에 박사는 이러한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데는 참된 친교의 정신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도, 오늘의 가장 큰 인간의 병은 사랑의 결핍, 보살핌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결과는 고독·절망·좌절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병은 약으로 치유할 수 없고 오직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병이 치유되고 극복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적 삶의 유형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어느 심리학자가 창설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보혜사 성령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하나님의 희망 속에 있는 새로운 삶의 공동체 형태입니다.

이 공동체가 탄생된 동기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속대로 성령이 오셔서 그의 활동의 구체적인 결과로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삶의 형태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혜사 성령에 의해 인간의 역사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며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스케치에 불과합니다.

이 공동체의 내부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세상 공동체와는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공동체의 형성 동기부터 다릅니다. 세상의 공동체의 형성 동기는 주로 정치적, 경제적인 것들이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 부활의 영이신 보혜사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공동체는 어느 특정인의 신념, 이데올로기, 어떤 사람의 유훈이 그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데 여기서는 그것과는 달리 예수님으로 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이 공동체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살아가는 생활 방식이 세상의 것과 다릅니다. 세상의 생활 방식은 서로 많이 소유해 가는 것인데 여기서는 서로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 나누어주는 생활 방식입니다.

다음은 세상의 생활 방식은 소유가 목적인 철저한 개인주의인데 여기서는 존재가 목적인 친교입니다. 그 친교를 가능케 하는 힘이 돈이나, 권력의 힘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형제 자매 간에 형성된 새로운 관계입니다. 그러한 것이 본문에서는 서로 떡을 떼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세상 공동체에서는 개인의 행복과 가정의 평안을 위해 우상의 허구에서 복을 비는 것이 통례인데, 여기서는 그러한 허구에서 깨어나 하나님과 대화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탄생은 그 시대 사람에게는 너무 생소한 것이기 때문에 이 공동체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모두 경이로움을 느꼈고,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 공동체가 오늘의 교회 모체입니다. 이 공동체가 기독교 역사 이 천년을 지내 오면서 구체적인 형체를 갖게 됩니다. 그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조직입니다. 기독교 전 역사를 통해 교회가 몸부림치며 고뇌하고 투쟁해 오는 것은 자기 형체의 문제와 일치의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이 아니고 주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교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들이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희망 가운데서 온전한 교회로 지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교회가 계속해서 견지해 가야 할 몇 가지 기본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먼저 교회의 거룩성 문제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교회는 거룩합니다. 이 뜻은 교회는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특별히 구별되어 있고, 교회는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행위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그의 거룩성을 상실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공회입니다. 여기서 공회란 말은 카톨릭 교회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 후에 카톨릭 교회를 `기독교회'로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교회의 보편성 때문입니다. 카톨릭이란 말 자체가 `보편적'이란 뜻입니다. 교회는 종족·계급·지역을 초월해서 정의와 평화를 인류 전체의 목적으로 지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보편성입니다.

사도들의 사명 자체가 이러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어느 특정 종족이나 특정 계급의 사람들을 위해 보내심을 받지 않고 전 인류를 위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을 세상에 보낸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으로 성도의 교제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양식은 친교입니다. 친교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교제를 나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만찬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만찬과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도의 교제에서 그 구원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한가지 더 첨가되는 것이 믿는 자들간의 교제입니다. 교회는 친교라는 이 존재 양식을 상실하면 안됩니다.

교회가 견지해 오는 이같은 태도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본질적 내용과 일치됩니다. 교회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희망 가운데 있는 미래이며 세상의 미래는 교회의 미래이기 때문에 교회는 인간 사회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새로운 인류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의 공동체로서 지역이라는 제한성에 머물게 됩니다. 이러한 희망의 미래를 기대하는 교회는 세상에 있는 동안 그 어떤 제도나 규칙을 절대화해서 거기에 얽매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희망 가운데서 지향해 가는 하나님 나라는 눈물·죽음·애통·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간 새 창조의 현실입니다. 그 현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고, 용서되고, 치유되고, 온전케 되는 부활의 때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생을 조명해 볼 때 우리의 생의 실현이나 완성은 자아실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웃·자연·자기 자신과 조화라는 통합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지향하는 희망의 내용도 개인을 넘어서는 공동체의 구원입니다.

이러한 존재 방식을 가진 교회의 생명은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구원의 능력인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하고, 눈을 뜨게 하고, 갱신시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친교입니다. 그 다음은 소유가 목적이 아닌 나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의 삶인 기도입니다.

이것들이 교회의 힘이며, 교회의 재산이요, 교회의 긍지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당위성이나 필연성이 있다면 교회야말로 이 세상의 희망이며 미래라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이 역사의 현실에 현존하시는 종말론적 인격으로서 그리스도 몸입니다. 교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오늘의 위기는 이 세상의 위기가 아니라 교회의 위기입니다. 교회가 자기의 고유한 삶을 포기하거나 기권해 가고 있는 데 있습니다. 포기해 가는 이유가 구원의 능력인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자신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리석은 소년 한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요? 한스라는 소년이 집을 떠나 외지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해서 주인으로부터 금덩어리 하나를 삯으로 받게 됩니다. 소년은 집으로 가는 도중 어떤 사람이 말 한 필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그것이 갖고 싶어 금덩어리를 말과 바꿉니다. 얼마를 가다가 말을 거위 한 마리와 바꾸고, 다시 얼마를 가다가 거위를 고양이 한 마리와 바꿉니다. 다시 얼마를 가다가 고양이를 숫돌과 바꿉니다. 나중에 개울을 건너다가 그것까지 물에 던져 버리고 빈손으로 집으로 가면서 그는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잃어 버린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단지 귀찮은 것을 버렸기 때문에 홀가분하다고만 생각했지,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어 버렸는가에 대해서는 전연 생각을 못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기독교 공동체는 분명히 과거의 역사의 한 시점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비춰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같이 복잡한 조직의 형체는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의 교회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영적 생동감·희망·사랑이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어느 시대에서나 세상에 나타나야 할 종말론적인 인격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미 이 천년이 지난 이 시대에서 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과거의 역사에 있었다 없어진, 고고학적 연구의 자료로서가 아닌,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빛 가운데서 우리가 지향해 가야 할 공동체의 모형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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