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말씀/1998.9.6 

 대화로서의기도(설교자 : 임 영 수 )
  말씀: 고린도전서 14 : 15

올림픽 공원 야외 조각 전시장에 알제리 조각가 아마라(Amara. Monhand)씨의 "대화"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작품의 내용은 석상으로 된 상반신의 두 사람의 상(Image)입니다. 이 두 석상은 서로 서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작품에 대한 작가의 해설은 이렇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지식을 풍부히 하고 서로 세심하게 보살피는 듯한, 그리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려고 애를 쓰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한 것은 인간은 서로 의지하고 교류함으로써 존재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초월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대로 인간은 서로 의지하고, 교류함으로써 존재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가능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다른 한 차원의 대화의 삶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인간 서로 서로에 대한 가치를 높여 주고 인간끼리의 장벽을 제거하고 서로를 받아 드리게 합니다. 이 하나님과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기독교인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 기도는 다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형식과 동기,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옛날 원시 종교에도 기도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시 종교에서의 기도는 거의가 다 자아중심적이었습니다. 원시 종교에서 기도자의 간구 내용은 주로 자신이나 자기 종족의 번영이나 보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동기는 자신의 이득과 공포 두려움이었습니다. 원시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힘을 무마시키고, 불행과 위험에서 구출 받기 위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후 문명의 발전과 함께 기도의 형태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기도는 주로 어떤 일정한 종교 의식을 갖춘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의식 기도에서 기도는 일정한 형식으로 작성된 기도문을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의식 기도로서 대표적인 것은 희생 제사였습니다. 이 희생 제사는 종교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기도 내용은 원시 기도와 다를 바 없는 현실의 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는 주문이나 독백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인격적 대상들 간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의 인격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와 대화를 원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대화에서 하나님은 대화의 주체이시면서 또한 객체이십니다. 객체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닌 `나와 당신'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대화의 주체며 객체가 되신다는 것은 대화의 동기와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분이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존 낙스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진지하고 친밀한 대화다."고 했습니다. 존 칼빈은 "기도는 하나님과 경건한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교제이다."고 했습니다. 한편 도날드 불뢰쉬는, "기도는 교제나 연합보다 더한 구체적인 것인데,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상호 의사 전달이다"고 했습니다.

묵상이 말이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라면 기도는 말이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마음속으로만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삼상 1-13). 그는 비록 소리는 내지 않고 기도했지만 그것은 말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말이 개재된다는 것은 `나와 당신'의 관계에서 쌍방의 뜻과 의도가 개재됨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 기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성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말이 있는 대화로서 기도이며 거기에는 뜻과 의지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대화에는 언제나 이의 의문이 수반됩니다. 에룰(Ellul)은, "대화에는 전도·긴장·모순·반론을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역시 이의 의문이 수반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불완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불완전과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 없이 맹종하는 로봇이 아닌 약속의 동반자로 상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런 뜻도 모르고 중언부언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레미아의 기도에서 대화로서 기도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은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되기만 합니까?"(렘 12:1 표준 새번역)

이 기도에서 예레미아는 하나님께 이의 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아가 제기하는 문제는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입니다. 결국 나중에 가서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의 현실적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들으려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말이 있다.

그가 나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영이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계속 듣고 있었다."
(겔 2:1∼2)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상대로서의 자격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의 목적을 완성해 가시면서 우리를 그의 계약의 동반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과 동등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선임 동반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주인이지만 우리를 친구로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친구로 말씀하셨습니다. (출 3:6)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기 위해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보좌로 다가가기 위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오직 성령의 감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준비는 믿음 가운데서 기대·소망·겸손·진지함·단순함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그것이 하나님과 대화이기 때문에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파울은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롬 8:26) 토마스 아켐퍼스는,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에 있어서 하나의 위대한 기술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인간적인 기술이 아니고 우리의 내적 존재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탄식과 곤핍을 말로 나타낼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요 믿음에 있어서 약한 우리는 기도 생활에서 성장하기 위해 지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기도 생활을 배양해 가는데 있어서 각자의 방법들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인도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존중해 주시고, 우리의 명철과 영적 발전을 위해 우리를 만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생활에 고정된 규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진지하게 대화의 디딤돌을 딛고 나아가노라면 굴레가 아닌 자유롭고 도움이 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성서에서 기도의 때와 시간에 대해서 특별히 규정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적 근거에서 바람직한 지침은 제시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특별히 제시하는 기도의 시간은 하루 중 아침·낮·저녁입니다.

기도의 때와 시간에 대해 시편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고 아침마다 주님께 기도 드립니다"(시 88:13)
     "저녁에도 아침에도 한낮에도 내가 탄식하면서 신음할 것이니, 내가 울부짖는 소리를 주께서 들으실 것이라"(시 55:17)

다니엘은 하루 세 번 예루살렘 쪽으로 나있는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단 6:10) 예수님은 해질 무렵에 홀로 빈들에 가셔서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기도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주로 아침 기도를 권장합니다.

좋은 기도, 깊이 있는 기도를 위해서는 경건의 서적들을 많이 읽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에는 기다림과 끈질긴 씨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정한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습니다.

우리가 지속적인 기도의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진보와 영적 승리의 대리자들로서 하나님의 목적과 그 분의 뜻의 도구로 만들어져 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데 몇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교란시키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말고 솔직히 고백하곤 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나름대로 결론을 가지고 그것을 그대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자기 주장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문제 그대로를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그것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데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객관식 시험 답안지 작성과 같이 0,×가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은 함축적이며, 관점 변경·신뢰·해방·새로운 결단·새로운 시작·용서·사랑입니다. 최선의 기도의 응답이며 선물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의 문제와 물음에 대한 유일한 해답입니다. 그러한 해답에서 하박국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하박국이 자기 시대에서 생긴 역사적 물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긴 대화 끝에 그가 얻은 해답은 하나님 자신만으로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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