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교회/주일낮 예배 / 1998. 9. 20. / 설교자 : 임영수 목사님


영원을 향한 삶
말씀 : 누가복음 16 : 19∼26


 
사회에서 소유를 근거로 해서 사람을 구분할 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됩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가진 자보다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나타내고 있는 책입니다.

그 유명한 마태복음 산상수훈의 팔복 내용이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자라는 구체적인 사회계층에 대한 위로와 희망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발췌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그러나 화 있을 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가난한 자로,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주린 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부요한 자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의 비유는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가 미래에 받을 보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나사로는 가난한 자를 대신하고, 부자는 부요한 자를 대신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가난한 자의 삶 그 자체를 부추기고 예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좀더 깊은 안목을 들여다보면 가난한 자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경건한 자의 삶의 모형으로 제시되어 있고, 부자의 삶은 그것과는 반대되는 삶의 모형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릴 줄은 모르지만 보고 느끼는 즐거움은 향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한 때에는 인상파의 그림을 좋아해서 그림을 수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추상적인 그림이나 조각을 더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것들은 무한한 상상력을 가지고 감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작가의 분명한 철학과 의도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그림 언어입니다.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역시 그림으로 비유하면 추상화이면서,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분명한 의미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깁니다. 여기서 부자의 입은 옷을 특별히 강조한 것은 그의 부의 척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시대 아주 부요한 사람이 아니고는 입을 수 없는 의상들입니다. 거기에 곁들여 이 부자가 날마다 호화롭게 연회를 즐기면서도 자기 눈앞에 비참한 상태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 조그마한 관심이나 긍휼을 베풀지 않고 살았다는 것으로 그의 삶의 방식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상태에서 살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나사로를 헌데투성이 거지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것으로 배를 채워 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희망이나 낙이 없는 삶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거지 나사로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가난 가운데서 그가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천당과 지옥을 말해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고, 이 현실에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유에서 재물 그 자체를 선악으로 규정하거나 문제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재물과의 관계에서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부자는 맴몬 `Mammon'이라는 신을 숭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신을 숭배할 때 그의 눈은 어두워져서 가난한 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의 쾌락 자신의 배만을 채우는 것이 생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부자와 같은 삶의 결과는 결국 깊은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고통은 제삼자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온전한 삶으로 실현되지 않고 왜곡 되이 형성된 삶의 결과 그 자체가 그에게 고통과 두려움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한 고통을 비유에서 고통 속에서 몹시 목말라 하는 부자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현실에서 자신의 영혼의 요구를 무시하고 외면하며 살았을 때, 그 영혼의 갈급함은 나중에 영원히 고통과 아픔, 후회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한 고통과 아픔은 영원한 생명으로 닿을 수 없는 큰골을 만들게 됩니다. 비유에서 그러한 현상을 아브라함 품안에 있는 나사로와 고통 가운데 있는 부자 사이에 왕래할 수 없는 큰 구렁텅이로 그려져 있습니다.

오랜 기간 정신과 치료를 받아 오던 삼십대 남자가 임종을 앞두고 그의 정신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그림의 내용은 고래와 같은 큰 괴물이 입을 벌리고 한 사람을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반대편에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그 그림의 해설에서 큰 괴물은 그 환자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의식화시키지 못하고 억눌려 놓았던 무의식이 죽음의 순간에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인데, 죽음 앞에서 그 환자가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서 몸부림치는 것은 그 괴물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 그림은 저에게 매우 깊은 것을 암시해 주었습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그의 진정한 내적 요구를 외면하고 살아갔을 때 죽음의 순간에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미래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의 요구나, 내적 요구는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이며, 그의 통치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와 같이 자기만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것이 현명한 삶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러한 삶은 진정한 자기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 내적 고갈과 허무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자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것은 자동차의 경고등과 같은 것으로 다가오고 있는 위기를 암시해 주는 경고 표식입니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사회적으로도 육신의 안목과 정욕만을 자극하는 문화적인 분위기는 그 사회가 매우 심각한 위기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빨간 신호등입니다.

한편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 희망이 다 끊어진 상태입니다. 직장도 없고, 연줄도 없고, 저축해 놓은 돈도 없고, 도와줄 친구도 없습니다. 헌데투성이로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 개들이 그의 헌데를 핥았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생의 희망을 둘 곳이 전연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것은 가난 가운데서 그의 삶이 어떠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살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현실에서 숨겨져 있는 진정한 삶의 길을 발견해서 그 길로 간 것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그의 것이라"는 미래의 희망의 약속을 현실에서 선취해서 살았고, 나중에 그 약속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영적으로 부요하게 살아간 경건한 자의 삶의 모형입니다. 진정한 경건에는 능력과 자족, 희망,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삶의 맛을 안 사람들은 그것과 대치되는 현실의 쾌락을 포기해 갑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정신적 고통은 경제적인 핍절에서 보다는 좀더 깊은 곳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쾌락은 쉽게 경험하지만 참된 기쁨의 경험은 점점 힘들어 집니다. 참된 기쁨은 우리에게 삶의 희망, 인격의 통합을 가져오지만 쾌락은 희망 대신에 어두움·좌절·가책·분열을 가져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늘 배부르게 먹고 마시지만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은 미용 기술과 의상으로 외적인 멋은 드러내고 있지만 진정한 미적 만족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삶은 점점 더 고독해지고 피곤해집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와는 멀리 있는가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에 몸담고 살면서 재물, 성, 권력과 무관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 때문에 눈이 어두워져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을 놓쳐 버리면 안됩니다. 이러한 것들과 관계를 맺고 살면서도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유해 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에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이러한 것들을 더 높은 목적을 위해 활용해 갈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삶이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추구해 가는 삶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해 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해 가는 구체적인 삶의 태도를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로 받아 드리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의 소유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태도는 염려와 욕심에서 해방되는 좋은 길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업을 내가 돌보고 있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 가는 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의 필요나 유익을 위해서는 언제나 함께 나눌 수 있다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리고 쌓아 두고 모아 두는 습관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습관을 길러 가야 합니다.

다음,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음미하고 감상하는 것을 즐기는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통 당하는 이웃에 대해 사랑의 관심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을 길러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을 지향하는 삶은 내세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이러한 삶은 오히려 더 현실적인 것으로 현실의 삶을 영원의 시간으로 확대시켜 현실의 가치와 목적을 설정해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현실의 삶이 영원의 시간과 잇대어질 때 현실의 의미와 목적이 더 분명하게 밝혀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본래의 진가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독일 뮨스터 대학 신학부에 신약 성서 사본 사료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신약 성서가 한 권의 책으로 편집되기 전 신약 성서의 자료로 사용된 여러 종류의 사본의 파편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조각 하나 하나는 매우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각 자체로서의 가치는 그것이 성서 본문 전체 중에서 어느 부분의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그 것의 가치가 인정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성서 어느 책 몇 장의 내용의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오래된 양피지 사본이라 해도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이 영원이라는 전체에 잇대어질 때 영원의 부분으로서 우리의 생의 가치와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한 밝혀짐 가운데서 나라는 존재의 가치뿐만 아니라 그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의 가치도 밝혀지게 됩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성당에는 아름다운 세 개의 아치문이 있다고 합니다.

한 문에는 황홀하리 만치 아름다운 장미가 조각되어 있는데, 밑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기쁘게 해주는 그 모든 것들은 잠시뿐이다."

또 다른 문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그 밑에는 이렇게 씌여 있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은 잠시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오직 영원한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서에서는 우리의 생을 아침 안개, 잠시 피었다가 지는 꽃으로 비유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의 생이 매우 짧고, 허무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한 순간이 영원의 시간과 잇대어져 그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볼 때 현실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허무한 한 순간이 아닌 매우 소중한 한 순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죽음은 현실과 영원을 이어주는 다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옛날 희랍 사람들이 사용하던 시간과 관련된 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이며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입니다. 먼저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이며, 뒤의 것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비유의 부자의 삶은 이 현실에서는 용납될 수 있는 삶이지만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서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영원히 수치와 고통·번민·후회로 남아 있게 됩니다. 부자의 삶은 완전히 영원과는 단절된 삶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구원받지 못한 자의 삶의 한 유형이라 말하게 됩니다.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나 비겁한 자와 신실하지 못한 자와 가증한 자와 살인자와 음행 하는 자와 마술쟁이와 우상 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계 21:8)<표준새번역>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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