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 1998. 10. 11/설 교 자 임 영 수


모든 이를 위한 자리

말슴 : 마태복음 20:1∼16


요즈음 우리 나라를 비롯해서 전 세계적으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불경기로 인해 실업률이 높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업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 침체로 고용 창출이 안되는 증거입니다. 제가 대학 입학하던 시기에 우리 사회에서 적성에 맞는 일자리 하나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때에는 경제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으로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사회 전문 분야에서 어떤 특정한 직종의 자리는 제한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를 놓고 매우 치열한 경쟁이 벌어집니다. 그러한 경쟁에서 이겨 자리를 확보하면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합니다.

인간사회에서 전문별 일자리에는 선후배의 관계가 있고, 임금의 차이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직일수록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 요청되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우월감이나 자만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요즈음 우리 나라 현실은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는 젊은이들에게 좌절을 줍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제창한 평화 봉사단 운동은, 그 당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방황하던 미국 젊은이들에게 큰 희망과 꿈을 주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임금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희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 나라에도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와서 각 분야에서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진정 인간의 희망과 꿈은 제한된 사회 전문 분야에 뚫고 들어가서 어떻게 성공하느냐가 아닙니다. 우리 앞에 얼마만큼 희망과 꿈이 있는 미래가 전개되며, 보람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고민과 좌절은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가 되지 못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을 바쳐 살아갈 만한 비전이 있는 현실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희망적인 비전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때에는 돈이나 환경이 그렇게 문제시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희망과 기쁨은 돈의 액수나 사회적 지위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 섬겨야 할 대상, 사랑할 수 있는 이웃, 평생을 바쳐 모험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일을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그러한 것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는 남에 대한 빚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그것을 갚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가 그러한 것을 찾지 못했더라면, 철학박사, 신학박사, 의학박사, 바하의 최고 권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모험의 길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그 길을 가기 위해 격심한 훈련과 연구로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적 지위, 명칭, 돈의 액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전, 모험, 섬김과 관련됩니다. 본분의 비유는 그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해 주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를 거듭 거듭 반복해서 읽어 가면 비유의 깊은 내용에 접근해 갈 수 있습니다.

불란서 파리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정박인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 이름은 아르슈(Arche)입니다. 그것을 창설한 사람은 쟝 바니에라는 해군 장교 출신입니다. 그가 군대에서 전역한 후 그가 존경하는 토마스 신부의 권고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설립 당시 쟝 바니에는 정박인 두 사람과 함께 조그마한 집에서 공동 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 태동의 동기였습니다.

그 곳에는 정박인들을 집단으로 수용하지 않고 각기 독립 주택에서 소수의 인원들이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한 가족처럼 살아가면서, 농사짓는 일, 공예품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거기서 일하는 봉사자들은 평생을 그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한 사람, 일정한 기간 그곳에서 봉사하는 사람으로 나뉘어집니다.

그들과 잠시 지내는 동한 함께 식사도 하고,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봉사자들이나 정박인들 모두 지극히 평화스럽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들 자신들이 매우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곳 책임자와 함께 한 가정에서 공동 식사를 하였는데, 식사 준비부터 설거지까지 모두 다 참여해서 맡은 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정상인, 정박인의 구별도 없고, 명령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만 각자 맡은 일이 있을 뿐입니다.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를 포도원으로 묘사한 것은 희망과 사랑의 모험의 일이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포도원에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에 걸쳐 하여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들이 일꾼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유의 포도원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지 않고, 이 세상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고, 찾아가서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의미합니다.

그 일이 정박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위하는 일, 새로운 창조적인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기를 원하시는 선한 일들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고용하기 위해 하루에 다섯 번씩 `아침 아홉시, 열두시, 세시, 다섯시' 밖으로 나아가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희망과 사랑의 선한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열려져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열려져 있습니다. 주인의 부름을 듣고 응답한 사람은 누구나 들어가서 일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르슈 책임자에게 저와 같은 사람도 이곳에 와서 일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누구나 와서 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가지 조건은 불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으려면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부름 받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한갓 취미나 여가 선용을 위해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선한 일이 주님의 십자가를 이 세상에서 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러한 선한 일은 언제나 품삯으로부터 자유합니다. 비유에 처음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이나 나중 들어온 사람이나 하루의 품삯을 꼭같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은 품삯으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택한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값진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삶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 큰 선물로 여겨지기 때문에 품삯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진정한 보상은 품삯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임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해 가는 것 자체로 자족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볼 수 있는 안목과 그 일을 할 수 있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품삯에 대한 관심을 초월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선한 일을 하는 자리에서는 지위나 명칭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업적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제가 아르슈에서 경험한 것은 그곳에서는 오래된 사람이 세도를 부리지 않고 더 깊은 섬김의 자리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의 특성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것이 그 특성입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자리는 세상적인 출세나 성공의 자리도 아니며, 명예의 자리도 아닙니다. 그 자리는 오직 섬김의 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는 진정한 섬김에 있습니다. 본문에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제가 지난날 섬기던 목회지에서 어느 날 안수집사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 그 자리에 참석한 어느 은퇴 안수집사 한 분이 후배 집사들에게 권면하는 말에서 `여러분은 나처럼 실패자가 되지 말고 다 성공자가 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분이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그것이 아니고 안수집사에서 장로가 되지 못한 것을 실패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실패 성공은 지위나 명칭에 있지 않습니다. 흔히 하는 말들 가운데 목회 성공·실패들을 말합니다. 그 기준이 거의 다 세상 기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끝까지 포도원에서 일하였는가 입니다. 몇 시간 어느 자리에서 일하였는가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맡은 일에 끝까지 충성하였는가를 묻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경력에 따라 품삯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일한 시간에 비례해서 품삯이 지불돼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 일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품삯이 지급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옆에 있던 강도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에서 경력·업적·지위·명칭이 중요시된다면 십자가의 강도는 낙원에 대한 약속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현실 사회에서 매일 매일 다른 사람보다 좀더 나아질려고, 좀더 좋은 여건을 확보하려고, 좀더 높은 임금을 받으려고, 고심하며 불안 가운데서 피곤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은 너무 각박하고, 웃음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그저 경쟁·견제·다툼으로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저뭅니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는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현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현실을 바라볼 때 우리가 해야 할 선한 일이 어떤 것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선한 일들을 경쟁심에서 벗어날 때, 이해관계에서 해방될 때 보여지게 되고, 그 일을 위한 부름을 듣게 됩니다. 그러한 선한 일은 우리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의 생은 빚을 진자의 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랑의 빚을 진자의 생으로 자신의 생이 받아들여질 때 현실이 자신이 들어가서 일해야 할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이 비유와 관련한 시 한 편을 소개하며 설교를 맺겠습니다.


「첫 시간부터 일한 사람은

정당한 보수를 받습니다.

늦게 온 사람은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오정때쯤 도착한 사람이라 하여

적게 받지 않기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후가 되어 늦게 온 사람도

주저않고 다가옵니다.

해질 무렵에 온 사람은

늦게 왔다 하여 겁내지 않습니다.

주인이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온 사람까지도

맨 먼저 온 사람처럼 즐겨 맞아들이시고

모두에게 휴식을 주십니다.

마지막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제일 먼저 온 사람에게는 상을 주십니다.

먼저 온 사람에게는 줄 것을 주시고

마지막 온 사람에게는 거저 주십니다.

일한 사람들을 존중하시고

일하려는 뜻을 지닌 사람도 칭찬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십시오.

맨 처음에 온 사람도 그 다음 보수를 받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다 함께 기뻐하며

주님의 모든 선하심을 즐기십시오.」

<로마의 히뽈리또. 3세기>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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