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11월 1일


만민이 기도하는 집 설교자 : 임 영 수 목사님

말씀 :  예배 마가복음 11 : 15∼19


우리는 예수님이 온유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도 안 내시고 언제나 참으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고정 관념을 완전히 깨트리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격정적입니다. 거룩한 성전 뜰 안에서 제사에 사용할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유'라는 뜻을 좀더 바르게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온유란 내성적이며 착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 잘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명예와 욕심, 영웅심에 사로잡혀 있는 분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전적으로 순종하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렇게 용감한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한 사람은 화를 내어야 할 때 화를 내고, 침묵을 해야 할 때 침묵을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의 다 자신의 이익과 신변을 생각해서 행동을 하지만, 예수님처럼 온유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하신 일에 대해서 복음서 기자 마가는 비교적 자세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가가 전해주는 내용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왜 그러한 격정적인 행동을 취하셨는 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성전에서 되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시고 모르는 척하고 지나치셨다면 예수님 답지 않았을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종교적 행사가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 각 곳에 사는 유대인들은 누구나 일년에 한 번 그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희망이며 기쁨이었습니다. 그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희생 제사에 사용할 소·양·염소·비둘기와 같은 희생 제물을 가지고 가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순례자들이 가지고 온 제물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제사장들에게 검열을 받고 합격을 해야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 사회와 종교가 너무 타락해서 제사장들과 상인들이 결탁하여, 순례자들이 가지고 온 제물을 의도적으로 불합격 판정을 내려, 성전 뜰 안에서 파는 제물을 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장면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남자는 누구나 매년 한 번씩 성전 세를 내게끔 되어 있는데 반드시 유대 은화 반 세겔로 내야만 합니다. 그 당시 로마나 그리스 화폐가 주로 통용되던 시대인 만큼 순례자들은 성전에 와서 유대 반 세겔로 환전을 해서 성전 세를 내곤 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란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들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는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 되어진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은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종교에서나 기도하는 곳으로 지정된 곳에서는 조용히, 엄숙해야 하고 그곳에서는 세상적인 잡된 생각을 해서는 안되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그러한 뜻으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뜻에서 그렇게 행동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취하신 행동에는 좀더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의분을 나타내신 것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서 거짓과 불의의 행위가 자행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오심으로 지금까지 유대 성전에서 해오던 종교의식은 끝나고, 유대인이나 이방인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예배드릴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것을 알린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미국의 영성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평안·기쁨·다정함·교제·솔직함·친밀함·용납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향인 하나님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기도라면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희생 제물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부터 그러한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문을 통해 직접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대화가 시작됩니다. 그때 하나님과 대화는 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매우 솔직한 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대화가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대화에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제 그 다른 점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이러한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놓게 됩니다. 이 세상 그 누구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가면을 써야하고 현재의 우리 자신보다 낫게 행동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대상들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원하십니다.

둘째, 그리고 우리의 생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게 됩니다. 사람은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다 자신의 생의 짐이 있습니다. 그 짐이 때로는 너무 무겁게 느껴져 사람들은 피곤해 합니다. 누가 대신 져주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우리의 짐을 져줄 사람은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하나님과 대화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우리의 잘못을 용서받게 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에 대한 적대감, 미움 때문에 고통을 당하며, 죄의 가책을 마음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대화에서 그러한 미움과 죄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죄도 하나님께서 감당 못하실 죄는 없습니다.

넷째, 하나님과 대화의 내용은 우리의 인생에서 경험하고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에는 제한 받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의 삶이 익숙해지면 질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생기 있고 희망적인 삶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의 삶을 배워가는 일은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다섯째, 이러한 하나님과 대화에서 우리의 마음이 강건해집니다. 강건해진다는 것은 새로운 희망으로 무장하는 것이며, 삶의 의욕과 열정으로 채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섯째, 하나님과의 대화는 결국 인간을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대화를 통해서 새로 태어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게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기도하는 집이란 하나님과 대화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대화하시기 위해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맞아들이기 위해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한편 기도하는 집은 `회상과 전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기도하는 집에 들어온 사람은 먼저 자신이 지나온 날들을 회상해 보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생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이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보여 주시는 미래를 바라보며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기도하는 집인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가서 그들이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들의 역사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하셔서 그들을 인도하여 주셨는가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축제를 지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전개되는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며 옷깃을 여미곤 했습니다.

기도하는 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사람들이 모여 성만찬의 떡과 잔을 나누며 서로 교제하는 친교의 장소입니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세상 사람들이 갖는 교제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교제는 그 동기가 다 인간적인 것이지만 기도하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친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하는 일!

머리 위의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 같고

주께서 여기에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133)

오늘 우리 모두 감사와 기쁨, 희망 가운데서 입당식을 갖는 이 새 건물은 이름하여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 집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주님의교회 성도들과 정신학교 선생님, 학생들과 대화하시기 위해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집은 대화의 집입니다.

그리고 이 집은 사랑하는 성도들이 모여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보며, 미래를 내다보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거룩한 예배의 장소입니다.

다음으로 이 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주님의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나누는 친교의 장소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새로 기도하는 집을 마련해서 새로운 미래를 향해 출발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미래 역시 여러분들만이 걸어가는 길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미래에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일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희망·사랑으로 그 창조의 사역에 참여해 가야 합니다. 그 일을 바르게 잘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새로운 기도의 집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집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과 예배, 친교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의 불의와 거짓으로 모든 것이 형식화 되어갈 때,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고갈되고 내용이 없는 삶으로 되어 간다는 것을 복음서 기자 마가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기사 전반과 후반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삽입시켜 왜, 그 당시 유대 종교가 무기력한 종교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되어진 일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에 있는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를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저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문안에 들어서 있다.

예루살렘아, 너는

모든 것이 친밀하게 갖추어진 성읍처럼,

잘도 세워졌구나.

저 지파들, 주의 지파들이,

주의 이름을 찬양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를 따라

그리로 올라가는구나.

거기에 재판의 보좌들이 놓여 있으니,

다윗 가문의 보좌들이로구나.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하여라.

`예루살렘아!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네 성벽 안에 평화가 깃들기를,

네 궁궐 안에

평화가 깃들기를 빈다' 하여라.

내 친척과 이웃에게도

`평화가 너에게 깃들기를 빈다'

하고 축복하겠다.

주 우리 하나님의 집에

복이 깃들기를 빈다."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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