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11월 15일


산 제물로서 예배  설교자 : 임 영 수

말씀 :  로마서 12 : 1∼8


종교사적으로 볼 때 옛날 원시인들은 그들이 믿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종교 의식으로 바치는 제물이 짐승, 곡물 이외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후 인간의 의식이 깨이고 신 개념이 점차 바뀌어 가고 종교도 제도화되어 가면서 일정한 의식 중심의 제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은 주로 소·양·염소 날짐승·곡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때 반드시 흠 없는 것,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잘못되어 제사장과 상인들이 결탁하여 성전에서 상거래 행위로까지 변질되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통점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은 흠이 없는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신은 사람과는 다른 거룩한 존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 헌금으로 바치는 돈은 새 돈으로 골라서 드리곤 하였습니다. 새 돈이 없을 때는 다리미로 돈의 구김살을 펴서 헌금으로 드린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너무 순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새 돈, 돈의 액수가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퍽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 나라 초대 미국인 선교사 한 분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어린 시절 일화 가운데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더우드는 유년 시절 주일 학교에서 헌금할 시간이면 눈을 감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사실을 주일 학교 선생님이 발견하고 한 번은 언더우드에게 `너는 왜 헌금시간이면 헌금을 드리지 않고 기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선생님 저는 헌금 드릴 돈이 없어 그 대신에 저의 몸을 드리곤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이 소년은 성장해서 목사가 되어 한국의 초대 선교사로 와서 사역했습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권면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은 짜임새 있고 경건미가 있는 예배 형식, 그렇지 않으면 준비된 많은 액수의 헌금, 좀더 나아가 도덕적인 삶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는 `산 제물로서 몸'은 그러한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은 우리의 `참모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은 잘 포장되거나, 위장된 우리의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참모습을 희생 제물로 드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살아온 경험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그가 살아 온 만큼의 생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청년은 청년으로서의 경험이 있고, 장년은 장년의 경험을 가지고 있고, 노인은 노인으로서 생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험을 드린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그 시점까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놓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참모습을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부서지고 깨어진 불완전함·우리의 이중성·욕망·허무·게으름·우리의 강함·약함 모두를 희생의 제단 위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어둡고 나약한 면은 받아드리려 하지 않고 자신의 도덕적 가치에 부합되는 것만을 자기 자신으로 받아드립니다. 어두운 면은 모두 부모의 탓,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를 받아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제물이란 우리의 도덕적인 의가 아니라 우리의 참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우리의 참모습을 드린다고 할 때 거기에는 부서지고·깨어지고·병든 우리 자신이 포함되고, 우리의 이중성·탐욕·허무주의·게으름이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러한 참모습을 기뻐하십니다. 그러한 모습이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잘못 생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화려한 성전, 살찐 송아지, 형식적인 종교 의식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그릇된 신앙에 대해 예언자 아모스는 매우 날카롭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쳤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어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암 5 : 21∼23)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된 것은 죄를 짓고 독약과 같은 죄의 쓴맛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제물을 반기지 않으시며,

내가 번제를 드려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깨어진 마음입니다.

깨어지고 짓밟힌 심령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십니다."(시 51 : 16∼17)

제가 학교 교목으로 일을 볼 때, 어느 해 학기말 졸업 사정회가 있었습니다. 사정회 시간에 전체 교사가 다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졸업반 담임 선생님들이 자기 반 졸업생이 몇 명이며, 유급 되는 학생은 얼마나 된다고 보고를 합니다. 그 중 어느 졸업반 담임 선생님이 자기 반 형편을 이야기하는 중에, 한 학생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이 학생은 점수가 너무 미달되어 졸업이 불가능하지만, 금번에 졸업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선생님들에게 동정을 구합니다. 그 이유는 그 학생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성적으로는 몇 해 유급 시켜도 졸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담임 선생님 하는 말이, 그 학생 어머니가 찾아와서 간절히 사정하기를 자기 아들을 금번에 졸업만 시켜주면 신학교에 보내 목사를 시키겠다고 하니 선생님들의 넓은 이해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그 이야기를 하자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저를 보면서 일제히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선생님들이 그렇게 웃는 이유를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웃음 이면에는 매우 의미 있는 암시적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알고 보니 목사는 다 모자라는 사람이구나!'라는 의미입니다.

한 때 우리 나라 교회에서 잘못 이해된 것이 목사는 모두 모자라는 사람, 육신적으로 병든 사람, 지난날 어두운 전력을 가진 사람이 목사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목사들 가운데는 인간적으로 모자라는 사람, 병약한 사람, 장애인, 인생의 온갖 어두운 경험을 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 모두 목사가 된 것은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거짓없이 드렸기 때문에 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 할 일이 없어 타의에 의해서 목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목사가 된다면 그 사람은 목사의 직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서지고, 약한 것, 상한 심령을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받으신다는 의미는, 우리에게 부담스럽고 쓸모 없는 것을 하나님께 갖다 맡길 때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우리에게 짐스럽고 귀찮은 것은 모두 하나님께 바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요즈음 불란서 조각 중에 `로댕' 다음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세자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매우 특색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거의가 전통적인 개념을 뛰어 넘어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버린 물건들을 가지고 작품을 만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철제 폐품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집이 가난해서 배우지도 못하고 조각할 수 있는 재료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버려진 물건들을 줏어다가 그 물건의 특징을 살려서 조각품을 만들곤 하던 것이 오늘의 세자르가 되게 하였습니다.

사진으로 그의 작업장을 보았는데 그곳은 마치 철공소 같기도 하고, 폐품 수집상 같은 인상을 풍기기도 했습니다. 부서지고 녹슬고, 버려진 것들이 조각가 `세자르'의 손에 들어가면 매우 신기한 작품으로 바뀝니다.

우리도 역시 참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희생의 제단 위에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중한 의의 병기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점은 기뻐하는 것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약한 것, 깨어진 것을 싫어합니다. 언제나 화려하게 포장된 것, 꾸밈을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아닌 자기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 수술도 하고, 학벌을 속이기도 하고, 없으면서 있는 척 하기도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이 받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계성의 삶에서 자주 실망·허무·환멸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를 위장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자기는 의인·착한 사람·똑똑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 하는 것이 위장·허구·불성실입니다. 인간이 가장 진실해 질 수 있는 순간이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보는 순간입니다. 복음의 빛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드러냄과 아울러, 그러한 우리의 참모습을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결혼 후에 찾아오는 첫 번째 위기가 꾸밈 뒤에 숨겨진 참모습들이 드러나면서 상대방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결혼 전에는 다 미녀요, 미남이며 다 교양이 있고 온전해 보입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그러한 위장의 면사포가 벗겨지면서 뒤에 숨겨진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장된 것, 꾸민 것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우리 자신의 참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받아드린 산 제물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 제물은 계속적으로 "변형되어 가는 삶과 순종"입니다.

본문에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했습니다.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은 마음이 새롭게 되는 데서 시작됩니다. 외형이 화려하게 되어지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세상을 위하는 내적 동기의 변화입니다.

그 다음으로 형체의 변형입니다. 본문에 "이 시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변형 Transforming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전한 뜻을 분별해서 그 뜻에 순종해 가는 삶으로 되어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산 제물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말씀하기를,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 : 22)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시면서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 순종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길로 들어서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순종이 요구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제물은 우리의 능력에 따른 봉사입니다. 본문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남의 것이 아닌, 흉내가 아닌, 자기의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예배 처소를 마련해서 이제부터 매 주일 보다 좋은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예배처소와 함께 우리의 삶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서의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서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참 모습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형되어 가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결국 산 제물로서 몸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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