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11월 29일


혼돈의 대지 위에 무지개 설교자 : 임 영 수

말씀 : 창 9:8∼17, 계 21:1∼8


오늘부터 대강절 기간이 시작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력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예수님의 강림을 앞둔 대강절을 시점으로 해서 예수님의 탄생, 그의 부활 40일 전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그리고 부활, 승천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신 오순절로 이어집니다.

교회력의 특징은 과거 지향적이 아니며, 미래 지향적인 희망입니다. 대강절도 지난날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념 주간이 아니며, 장차 이루어질 희망의 약속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금번 대강절에는 우리 모두 기도와 묵상 가운데서 오늘 우리 시대에서 마음에 깊이 품어야 할 진정한 희망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지개를 쫓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어떤 나이 어린 소년이 자기 집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 중턱에 걸려 있는 무지개를 보고 그것을 잡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산 가까이 가보니 무지개는 다시 처음과 같이 앞에 바라보이는 산 중턱에 있었습니다. 소년은 다시 그곳으로 달려갔지만, 무지개는 그 산에서 바라 뵈는 넓은 들에 있었습니다. 다시 들로 뛰어가 보니 무지개는 그만큼의 거리를 둔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무지개는 인간의 갈구와 꿈의 상징으로 인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구약의 본문에 나타나 있는 무지개는 인간의 갈구와 꿈의 상징으로 인용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서 새로운 미래로 나아감과 함께 그 약속의 징표로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무지개는 어린 소년이 달려갈 수 있는 아름다운 대지 위에 떠 있지 않고, 땅 위에 모든 창조물들을 물로 쓸어버린, 쓸쓸하고 황폐한 혼돈의 대지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혼돈의 대지가 다시 과거의 안정에로 돌아갈 것이라는 약속으로 무지개를 보여주신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심판을 넘어서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점에서, 그 일을 실시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 속의 무지개는 인간의 의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의 죄 때문에 사람을 포함해서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까지 모두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노아의 가족과 노아가 불러들인 암수 몇 쌍씩의 피조물을 제외하고 모두 물로 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혼돈의 대지 위에 무지개를 두셨습니다. 무지개는 소수의 노아의 가족과 짐승들 외에 살아 있는 것들이란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대지 위에 떠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의 깊은 의도는 소수의 노아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다시 과거의 안정된 도시의 회복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무지개는 심판을 넘어서 새로운 미래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독자들이 그것을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혼돈의 대지 위에서 밝아 오는 새로운 아침을 보게 됩니다. 그때 그 대지 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밝아 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 무지개가 지시하고 있는 희망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신약 성서의 사 복음서 기자들은 정치적 억압·거짓·불의·폭력·종교적 위선·영적 고갈·허무로 가득 차 있는 도시 한 복판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희망의 사건이 그 당시 로마의 통치 아래서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겨자씨와 반죽한 밀가루 서 말 속에 들어 있는 소량의 누룩은 외형적으로 매우 왜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놀라운 성장력과 변화의 힘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역사 속에서 그러한 의미의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 창조의 역사는 신약 성서 마지막 책인 계시록 끝 부분에서 생명이 무성하며 하나님의 평화가 다스리는 "새 도시의 도래의 비전(Vision)"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이 새로운 도시에 대한 비전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계 21:1∼5 표준새번역)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 위에 새로운 도시 건설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를 위한 한 새로운 미래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미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새로운 미래는 병든 사람에게는 치유로,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받아 들임으로, 죄인들에게는 은혜로, 죽은 사람들에게는 부활로 나타납니다. 신약 성서의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미래에 대해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 (눅 7:22 표준새번역)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새로운 현실, 새로운 미래를 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미래는 주체사상도 아니고, 신 마르크스주의도 아니며,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하의 복지국가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존재 방식입니다.

1940년 세계 제2차 대전 말기 25세난 청년 로저(Roger)는 화해와 일치를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불란서 동부에 있는 한적한 마을로 가서 거처를 정했습니다. 2년 동안 그는 거기서 홀로 지내면서 나치에 쫓기는 유대인들을 숨겨 주기도 하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살아갈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후부터 여러 곳에서 한 두 명씩 그의 공동체 삶에 동참해 가기 위해 그 곳을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세계 각 곳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결심한 형제들로 구성된 화해와 일치의 본을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의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떼제 공동체에는 해 마다 세계 각 곳에서 수 천명의 젊은이들이 와서 오늘 우리 시대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화해의 공동체로서 매일 매일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오늘 우리 시대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현대인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의 선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 반드시 구체적인 희망의 삶의 방식을 창조해 냅니다. 그러한 희망의 공동체적 삶에서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눈물을 거두고 웃게 되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이 위로를 받게 되고, 분열과 갈등의 장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이념적인 사회 공동체와 다릅니다. 인간의 이념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 공동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착취와 인권유린, 창조 질서의 파괴 현상이 일어납니다. 분열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희망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삶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극복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이 희망의 약속은 유토피아나 환상이 아닙니다. 이 희망은 현실에 구체적인 창조적 삶을 만들어 내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적 삶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희망과 현실의 조화요, 영원과 현실의 이어짐입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이 약속은 오늘 이 시대 세속 도시 한 가운데 있는 무지개입니다. 오늘의 세속 도시에는 문화적 유산들도 있지만 살인·강도·매춘·마약·폭력·정치적 음모·술수와 같은 온갖 어두운 일들이 밀집되어 있는 혼돈의 대지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의 도시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노아 시대의 도시·바벨·소돔과 고모라·사도 바울이 선교지로 택했던 로마·고린도·에베소·빌립보·골로새 같은 도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혼돈의 대지 위에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희망의 무지개입니다. 교회는 희망의 무지개를 바라보는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혼돈의 도시를 바라보고 절망하거나, 도피한 사람들의 집단이 아닙니다. 희망의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함께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무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미래는 교회이며 교회의 미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떼제 공동체 창설자 청년 로저는 독일의 나치, 이태리의 뭇소리니의 독재, 일본의 군국주의가 패망한 황폐한 대지 위에 떠 있는 희망의 무지개에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이루시고자 하는 새 것이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강절에 우리는 약속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또 다시 혼돈의 도시 속으로 들어가서 눈물을 흘리는 자들의 눈에서 눈물을 거두게 하고, 고통과 한숨,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생을 포기한 사람을 위로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숨과 탄식 도피적인 삶 대신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참여해 갈 때 자기 연민의 눈물을 거두게 되고, 탄식과 한숨 대신에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대강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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