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18


지난 4월초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의 내부가 누전으로 인하여 완전히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2천년의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건대 인간의 실수로 인한 화재나 혹은 이교도들의 방화에 의하여 예배당이 불타는 사건은 가끔 있었기에, 예배당 화재 그 자체는 새삼스럽게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토리노 대성당의 화재가 많은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바로 그 성당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수의', 즉 예수님의 시체를 쌓던 것으로 알려진 세마포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가 3중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뜨린 뒤, 그`세마포'가 담긴 성궤를 안고 나오는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약 30년전 프랑스의 한 잡지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반출해야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1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토리노 성당에 보관중인 `예수님의 수의'였고, 2위가 미로의 비너스상이었습니다. 미로의 비너스상은 인간예술의 극치로 인정받고 있는 걸작 중에 걸작입니다. 실제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비너스상 앞에 섰을 때의 황홀감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정교한 예술품을 제치고 폭 1m 5cm에 길이 4m 20cm에 불과한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쌓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어떻게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을까요? 본문이 그 까닭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 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곳에 개켜 있더라.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3∼8)

 

안식 후 첫날 새벽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 졌다는 여인들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또 한 명의 제자인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뛰어 갔을 때,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세마포와 머리의 수건만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즉, 미의 극치인 미로의 비너스상을 제치고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삼베 수의가 지구상 최고의 보물로 꼽히는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 땅에 남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품으로 간주되는 까닭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왜 이탈리아의 소방대원들이 불길에 휩싸인 토리노 대성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 그 속에 있는 명화나 조각품을, 특히 금은으로 만들어진 호화스런 제기(祭器) 등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이 세마포만을 목숨을 걸고 반출해 내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2천년전 중동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세마포가 직조되고 또 통용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숱하던 세마포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아득한 옛날 이미 썩어 진토가 되었을 뿐입니다. 어찌 중동지방뿐이겠습니까? 전 세계적으로는 또 얼마나 많은 삼베가 있어 왔겠습니까?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삼베의 역사는 매우 길어, 한민족이 한반도로 이주할 때에 벌써 삼베를 가지고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삼베의 사용이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역시 신라 경주에서 추석날 삼베 짜기 시합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한반도에서 면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삼베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시대 때부터 크게 발달한 마직 기술은 이미 고려 때에 이르러 30승포, 40승포 같은 극세포 즉 본문이 말하는 세마포가 직조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이처럼 마직 기술이 일찌기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풍토상으로 한반도가 삼재배에 더없이 적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역사와 더불어 지난 수천년 동안 이 땅에서 직조되었던 그 수많은 세마포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 생산되고 있는 그 품질 좋은 세마포들이 2천년 후에는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이미 썩어져 흙이 되었고, 지금 쓰레기가 되고 있으며, 또 앞으로 진토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유한한 인간을 위하여 사용되는 인간의 소유는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영원한 생명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그것이 시체를 감싸는,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수의라 할지라도 그 영원한 가치를 결코 상실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의 세마포는 니고데모가 향품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에 감싸 드렸던 것임을 요한복음 19장 39절∼40절을 통해 이미 배워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니고데모가 2천년전 그 세마포로 자신의 수의로 삼았더라면, 그 세마포는 니고데모의 시체와 함께 벌써 흙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원하신 주님의 도구로 드렸을 때에, 전혀 귀할 것 없는 그 세마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제치고 `지구상 최고의 보물'이 되어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먼 훗날 그 세마포가 완전 부식되어 그 형체가 사라져 버린다고 할지라도 그 영원한 가치만은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누구에 의하여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 가에 따라 그 결과는 이처럼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그것들 중 2천년 후에까지 내게 남아 있을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값진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들이라면 우리는 실은 내일의 쓰레기, 미래의 진토더미 속에 쌓여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이 시체를 감싸는 수의, 아니 삼베조각처럼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신 주님, 영원한 진리의 도구로 쓴다면, 그 가치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상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들에 대해 소멸치 않는 가치를 부여하시는 분이시라면,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더더욱 존귀케 하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당신을 감쌌던 하찮은 수의를 지구상 최고의 보물 되게 하시는 주님께서 어찌 당신의 도구 되기를 주저치 않는 당신의 백성들을 더욱 존귀케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본문 속의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란 뜻입니다. 게네사렛 평원의 남단에 위치한 막달라는 농업 어업 제조업 조선업이 발달한 부유한 상업중심도시로써, 도시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있었습니다. 대형 경기장을 갖춘 로마의 모든 도시들이 그러했듯이 막달라 역시 환락과 타락의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 한가운데에서 살던 마리아는, 성경 속에 나타나는 다른 청순한 마리아들과는 달리 본래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눅8:2). 한 귀신도 아니요 일곱 귀신이나 씌운 여인이었다는 것은, 도덕적 정신적 영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한, 영육간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창녀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쓸모 없는 한심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 좇기를 중단치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줄 안 이상, 주님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 놀란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갈 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와 더불어 끝까지 그 현장을 지키고 있었음을 요한복음 19장 25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우기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던 주일 이른 새벽, 아직까지 온천지가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장사되신 무덤을 찾아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이른 시각에 그녀가 겁도 없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것은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함이었다고 마가복음 16장 1절∼3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무덤이 어떤 구조를 가졌기에 막달라 마리아가 이미 장사지낸바 된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릴 엄두를 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시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이 유월절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이었으므로, 이미 요한복음 19장 31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큰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의 장례식을 서둘러 끝내어야 했기에, 행여라도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이 덜 발라졌을까 우려하여 주일 꼭두새벽부터 주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의 중심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초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 중심이 귀한 까닭은 이때까지만 해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그녀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뛰어가 전한 말의 내용을 2절이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에다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2)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예수님의 시체가 도난 당한 줄로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빈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는 그 앞에서 슬피 울고 있었음을 본문 11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으로 부터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 마저 부활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도망가 버린 판에, 그 말씀을 들은 적이 없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인들 할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자신의 중심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완전히 돌아가신 줄만 알았음에도 주님으로 인해 얻게 된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 주님께 바친 그녀의 중심은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결코 흔들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막달라 마리아야말로 주어진 상황과 시간에 상관없이 자신의 전 인생을 바쳐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실천했던 진짜 제자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다음 시간부터 계속 살펴보겠지만 본문 18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18)

 

놀랍게도 그녀는 주님과 3년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제자들을 제치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첫번째 증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본래 막달라 마리아는 환락의 도시 막달라의 쓰레기 같은 창녀였습니다. 만약 그녀가 자신만을 위해 계속 살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창녀로 비참하게 썩어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찮은 여인이 주님의 도구로 자신을 온전히 바쳤을 때 인류 최초로 부활을 증언하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야 말로 부활의 증인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하찮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을 주님의 도구로 바칠 때 그 삶의 가치가 얼마나 영원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증명해 준 위대한 증인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막달라 마리아란 더 이상 비천한 창녀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녀야말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의 영원한 표상인 것입니다.

 

 

네덜란드 `자유대학'(The Free University)에서 미술사 교수로 봉직했던 한스 로크마커(H.R.Rookmaaker) 교수는 그의 저서 `예술은 변명을 요하지 않는다'(Art needs no justification)에서 1800년경 일본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호쿠사이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잘 아는 지인이 호쿠사이를 찾아와 수닭 그림 그려주기를 부탁하자 호쿠사이는 일주일 후에 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그가 찾아 왔을 때 호쿠사이는 약속을 2주일 연기해 줄 것을 청했습니다. 2주일 후에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호쿠사이는 이번에는 두 달을,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반년을 연기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3년이 흘러가자 그림을 부탁했던 사람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매우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호쿠사이는 알겠다며 그 자리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어 순식간에 수닭을 그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훌륭한 명화였습니다. 그림을 부탁했던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분노하면서 말했습니다.

"이렇게 순식간에 그려 줄 수 있으면서 왜 3년씩이나 기다리게 했소?"

그때 호쿠사이는 말없이 그 사람을 자신의 화실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놀랍게도 그 화실의 사방벽은 호쿠사이가 지난 3년동안 밤낮으로 습작한 수닭 그림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명화는 밤낮없는 훈련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비단 예술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밤낮없는 훈련을 배제하고서는 참다운 프로란 어떤 분야에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세계 또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왕 주님을 믿을 바에야 어설픈 기독교인이 아니라 프로 크리스천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처럼 밤낮 구별없이 주님께 우리의 중심을, 우리의 전 인생을 드립시다. 상황을 따짐 없이 진리의 도구 되기를 주저치 마십시다. 그것만이 이 타락한 도시 속에서 막달라의 창녀같이 비천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부활의 영광스런 첫 증인이 된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가치롭게 세우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을 위해 예비했던 새 무덤 속에 자신의 시체를 눕혔더라면, 그것은 썩은 시체의 악취만을 풍기는 더러운 죽음의 종착역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준비했던 세마포로 자신의 수의를 삼았다면, 그 세마포는 니고데모의 시체와 함께 벌써 진토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면, 끝내 막달라의 창녀로 그 인생이 썩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아침에도 우리를 사랑하시사 주님 앞으로 불러주시고, 나 자신의 본능과 욕망만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아무리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실은, 내일의 쓰레기 더미 속에, 미래의 진토 무더기 속에 나 자신을 방치해 두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시니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비옵건대 우리 모두 막달라 마리아처럼 프로 크리스천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밤이든 낮이든 새벽이든 구별없이 우리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주어진 상황을 따짐 없이 우리의 삶이 온전한 진리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타락한 이 환락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쓰레기처럼 썩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비천한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얻고 누리는 진리의 예술품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의 종착역이 공동묘지가 아니라, 육체의 생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안식후 첫날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18


드디어 이번 화요일(8월 5일)오전 10시에 정신여고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믿으시고 이 일을 맡겨주시고 오늘이 있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연건평은 정신여고생 전원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대강당, 밤에 잠을 자면서 영성훈련을 할 수 있는 수련관, 소강당과 각종 활동실및 우리 교회가 사용할 공간을 포함하여 총 2,380평에 이릅니다. 이에 대한 공사비는 설계료를 포함하여 70억원으로 예상하고 정신여고쪽에서 10억원, 우리교회에서 60억원을 부담키로 하고 일이 추진되었습니다. 60억원 이라면 참으로 엄청난 금액입니다. 만약 우리교회가 창립 때부터 헌금전액을 우리교회 자체만을 위해 사용하는 교회였다면, 정신여고가 아무리 미션스쿨이라 할지라도 남의 학교 강당을 지어드릴 엄두를 감히 낼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이런일에 개입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전 헌금액의 50%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게 하시므로, 교회가 이웃 즉 사회와 앞으로 어떻게 구체적인 나눔을 실천해야 할 것인지 미래의 본보기로 우리를 택하시고 이일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헌금의 50%를 이웃과 나눈다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헌금의 50%를 계속 모아 가다보면 몇년후에는 60억이 되겠지만, 공사가 1년여만에 끝나는 것을 감안하면 목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사부터 해준 뒤, 연차적으로 공사비를 결제 받는 건설회사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고맙게도 벽산건설이 우리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해 주었습니다. 만약 그때 벽산건설이 우리의 부탁을 거절했더라면, 이 일은 아예 진행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벽산건설은 만약 벽산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건설회사가 있으면 그쪽을 선택하라는 배려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설계가 끝난 뒤 벽산을 포함하여 세 건설회사를 상대로 입찰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개봉결과는 현대건설이 부가세를 포함하여 85억 7천 2백만원, 벽산건설이 80억 1천 4백만원 으로 모두 우리의 예상금액 70억원을 초과하는 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박재준 집사님이 경영하는 강산건설이 66억 5천 5백만원으로 응찰하였습니다. 그 금액은 설계비와 감리비를 포함하면 우리의 예산70억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금액이었습니다. 박재준 집사님은 주님의 교회 제직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맡겨주신 이 대 사명을 솔선수범하여 감당키 위해 오직 헌신과 봉사의 차원에서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내일 모래 뜻깊은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완공은 13개월 후인 98년 9월로 예상하고있습니다. 재정위원회에서는 공사가 끝난 2년후인 2천년 12월말까지는 공사비를 다 지불 할수있을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특별히 날을 정하여 따로 헌금치 않기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많은 성도님들이 정신여고 강당건축기금으로 헌금해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이 일에 관한 한 따로이 헌금일을 정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동참하기 원하는 분들은 아무때고 자유롭게 참여하면 되겠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징검다리역할을 해주었던 벽산건설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현대건설측에도 감사드립니다. 더욱이 이 궂은일에 앞장선 강산건설측에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공사가 끝날 때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더 크게 드러날 수 있도록 교우 여러분들의 중단 없는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17주 동안 살펴보았던 요한복음 19장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은 예비일, 즉 안식일 전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으므로 바로 금요일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무덤'이란 이미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식을 위하여 스스로포기했던 자기의 새 무덤이었으며, `예수를 거기 두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운명하신, 다시 말해 영혼이 돌아가신 예수님의 육체 즉 시신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1)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그때가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라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안식후 첫날, 즉 주일 새벽이었던 것입니다. 금요일 오후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사흘째 되는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흘동안 영혼이 떠나신 예수님의 시신은 분명히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 속에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질문 한가지가 제기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속에 누워있는 동안 그 육체를 떠난 예수님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 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이때 영혼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까? 그때 예수님의 영혼도 육체와 함께 죽어버렸습니까? 완전 소멸되어버렸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구원을 요청하는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말씀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바 `너'와 `나'는 예수님과 강도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뜻하시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마태복음 17장에는 소위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 가셨을 때에 하늘에서부터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장면을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 오시기 1천 5백년 전에 이미 그 육체가 죽은 자였습니다. 그의 시체는 분명히 모압땅에서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에 살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영혼이 살아있다면, 예수님의 영혼이 육체와 함께 죽어 버렸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더욱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최후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 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46)

 

운명하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드린 것은, 인간의 육체는 죽을 망정 영혼은 결코 죽지 않음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흘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 해답은 이미 성숙자반 제7과에서 배운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드리고있는 사도신경속에 제시되어있습니다. 먼저 첨부된<사도신경 한글 영어 원문비교표>를 살펴보십시다. 여섯 번째 항이 한글 쪽은 공난인데 반해 영어 쪽은 비어있지를 않습니다. 즉 한글에는 없는 내용이 영어 원문에는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He descended into hell" (그 분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예수님의 육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 속에 장사되셨지만, 주님의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 계시어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미국인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경험이 있는 분은 아시겠지만, 미국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속에는 반드시 이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찬송가중에 앞면에 사도신경 영어원문이 인쇄되어있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거기에도 이 구절은 어김없이 들어있습니다. 왜 한글에는 없는 구절이 영어원문에는 포함되어있습니까? 미국사람들이 독단적으로 첨가한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1천 3백년전 교회에 의해 확정된 사도신경 라틴어 원문에 이 구절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첨부된 <사도신경 발전과정표>를 보십시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 기초한 신앙고백이란 의미에서 사도신경, 혹은 사도신조로 불리우는 이 내용은 2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세례식에서 문답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령 표의 1번 항에서 보는바와 같이 집례자가 `당신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아버지를 믿느뇨?' 하고 물으면 수세자가 `예'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서면서 문답형의 내용이 고백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즉 수세자가 세례받기전에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이 내용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7세기를 거치면서 오늘과 같은 내용으로 확정되면서 일반 예배시간에도 지금처럼 암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도표를 자세히 보면 시대를 거듭하면서 고백의 내용이 계속 보완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네 번째 항입니다. 2세기와 4세기 때에는 보이지 않는 "음부에 내려 가셨으며"라는 구절이 8세기의 확정문속에 보완되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누워있는 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 라는 질문이 그때 이미 제기되었고, 교회는 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와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해답을 제시한 근거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 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 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벧전 3:18∼20)

 

하나님께서 패역한 인간들을 홍수로 심판하실 때에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식구 8명뿐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홍수에 휩쓸려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것은 그들의 육체였지 영혼까지 죽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영은 여전히 살아 `옥'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옥이라 함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이 떨어지는 `지옥'혹은 음부'라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그 육체가 운명하셨던 예수님의 영혼은 바로 그 지옥, 음부로 내려가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해 혹은 알지 못해 저주받았던 그 불쌍한 영혼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 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4:6)

 

지옥에 떨어진 저주받은 영혼들도 구원받아 살길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영이 그곳에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에 대하여 신학적 이견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지난 1,300년동안 교회는 한결같이 이 구절들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누워있는 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지옥에 내려가 복음을 증거 하셨다고 고백해왔으며, 오늘날도 캐톨릭을 비롯하여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사도신경의 원문인 까닭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의 개신교만은 이 구절을 빼버린 불완전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왜 어떻게 이 구절이 삭제되어, 한국의 개신교 신자만은 사도신경속에 이런 구절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지못하고 알려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이런 구절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 하지도 않습니다. 괜히 말 잘못했다가 구설수에 오를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한국교회는 정말 정직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에서 까닭없이 삭제되어있는 부분을 복원시키고 주님께서 영으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까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주저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이유인 즉은 이것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만이 첫째로 성경과 사도신경을 더 이상 왜곡하는 우를 범치 않는 것이요, 둘째 이것을 알 때에만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온전하신 구원자로 바르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신경을 그림으로 표시한 첨부된 도표를 보십시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을 구원하시려 영으로 음부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나라에 오르셨습니다. 말하자면 천상천하 음부의 세계가 모두 주님의 완전한 구원의 능력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음부의 세계만은 예수님의 구원능력에서 제외된다면 어찌 그 분이 온전한 구원자일수 있겠습니까? 천상 천하 음부가 모두 주님의 통제력 속에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영육간에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모 대학 기독신우회를 인도하는 목사님이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이 말씀을 우리의 정서에 맞게 `다 품었다'고 해석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형편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마음속으로 그를 품기만 하면, 그의 잘못과 모든 허물을 다 감싸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수치를 다 품어주셨습니다. 당신을 못박아 죽이는 군병들까지도 완전히 품어주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사 주님을 믿지 못해, 알지 못해 저주받은 음부의 영혼까지 품어주심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천상 천하 음부를 초월하여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영원한 사랑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으로 인해 낙망하거나 절망 속에 빠져있습니까? 그러나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다. 주님을 불신하여 지옥에 떨어진 영혼마저 품어주시는 주님께서 왜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의 미래를 품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왜 지금 우리를 그 사랑의 품으로 품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분의 본심을 의심치 마십시오. 온전히 그분의 법도안에 거하십시오. 이 세상의 그 어떤 상황도 우리의 심령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참 생명과 소망을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허망한 나의 뜻이 아니라 나를 품고 계시는 주님의 영원한 뜻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비로소 두 눈으로 확인하며, 주님을 진심으로 찬양케 될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아침 주님께서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시사 그곳의 불쌍한 영혼까지 품어주신 것을 알게해주셔셔 감사합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 나를, 나의 미래를 품고 계심을 깨닫게 하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주님의 품속에서 변함없는 소망의 사람,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어렵고 혼란한 세상을 따뜻하게 밝히는 희망의 등대, 진리의 등불들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시체를 구하매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31∼42


요즈음 폭력문제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단 하루도 끔찍한 폭력에 관한 기사가 보도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사회가 이 지경이 되다보니 학교인들 안전할 리가 만무합니다. 학교인지 폭력원인지 구별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성적타락 또한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습니다. 동네마다 환락가 줄지어 들어서고있습니다. 그러니 그 속에서 자라나는 10대들이 무사할 까닭이 없습니다. 10대들이 직접 출연·제작한 `음란 비디오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은 개탄을 금치 못하면서, 도대체 이 사회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우려하며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오늘만의 문제입니까? 어제는 그러지 않았습니까? 10년 전에는 괜찮았습니까? 100년전, 1000년전에는 오늘날과 틀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단지 오늘날과 형태의 차이가 있었을는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나 판단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이 증거 해주고 있는바 입니다.

성경을 열어보십시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나라의 모형인 에덴동산과 그 낙원 속에 살고 있는 아담과 하와를 증거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으로 넘어가면 인간의 타락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실낙원, 에덴동산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창세기 4장으로 넘어가봅시다. 에덴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나타난 제일 첫 번째 문제가 바로 폭력이었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동생을 쳐서 죽여버린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폭력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의 여인들과 놀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즉 성적 타락이었습니다. 그때의 성적타락이 얼마나 도가 지나쳤으면 창세기 6장∼7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홍수로 인간들을 심판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까? 전혀 아니었습니다. 인간 교만의 극치요 영적 부패의 본보기인 바벨탑이 창세기 11장에 등장하고 있으며, 창세기 13장에는 인류역사상 성적타락의 전형인 소돔과 고모라가 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인간의 폭력, 성적타락, 영적 부패의 문제는 성경전체를 통해 중단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적 사실은 무엇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있는 모든 병리현상은 결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늘 있어왔고,앞으로도 있을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자신을 신봉하며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자들은 계속 있을 것이며, 소돔과 고모라는 갈수록 더 번창할 것이며, 폭력을 숭상하는 카인들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찬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을 그저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합니까? 그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대안이라면 너무나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인간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나 희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야 이 암울한 세상에서 구태여 애써 살아야 할 삶의 이유와 의미와 가치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모두 비관주의자가 되던가 염세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비참한 현실속에서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우리는 여전히 에덴동산을 만날 수 있음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나라의 모형인 에덴동산을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에덴동산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낙원은 오늘도 창세기 2장속에 영적으로 실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되돌아가야할 영적 고향으로 말입니다.그 낙원을 되찾기만 하면, 우리의 심령 속에 그 낙원이 회복되기만 하면, 이 세상이 악으로 인해 아무리 요동쳐도 우리는 흔들림 없는 소망과 진리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허물어트리려는 악의 세력은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여전히 있을 것이나, 인류의 역사는 그 심령 속에 에덴을 품고있는 자, 진리의 등불이 되는 자들에 의해 언제나 바른 방향으로 인도되어왔고, 되고 있고,또 되어갈 것이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낙원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에덴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영적고향으로 되돌아갈 길을 제시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암울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희망이요 소망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천년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주님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당시의 율법에 의해 정죄당한 자들이었습니다. 참다운 의미에서 인간일 수가 없는 한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했을 때, 실낙원을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찾았을 때에, 그들은 정녕 새로운 사람, 에덴의 사람, 진리의 등불로 거듭나므로 이 땅을 에덴으로 일구어 가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적타락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추잡한 창녀였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에덴을 회복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폭력신봉자였지만,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덴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영육간에 부패한 자의 표본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나매 에덴의 참된 실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는 반드시 소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언제나 실낙원이 회복되는 생명의 역사, 에덴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당신의 `목회 철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서슴없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 즉`에덴의 회복'이라고 답합니다.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나라-에덴이 회복된 자만 이 세상을 바로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될 수 있는 탓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에덴을 회복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에 대하여는 `새 신자반'제7과 `교회'에서 상세히 다루었기에 여기에서 재론치는 않겠습니다. 단지 이 시간에는, 그 심령 속에 에덴을 회복한자에게 나타나는 분명한 특징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실(失)낙원 했던 자가 그리스도안에서 득(得)낙원했을때, 먼저 그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얻은 에덴의 절대적인 의미와 가치를 터득한 연고입니다. 그 결과 그의 삶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에덴이 점점 더 확장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좋은 예를 보여주고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운명하셨습니다. 로마군병 한 명이 예수님의 사망을 확인키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매 피와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심장파열로 이미 운명하신 뒤였던 것입니다. 그때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자들의 낙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 버렸으며, 그 죽음의 현장에 제자중 유일한 목격자로 남아있던 사도 요한 마저 그 절망적인 순간에 어찌할 바를 알지못한채 망연자실 예수님의 주검을 쳐다만 보고 있었겠습니까? 그저 모든 것이 암울한 순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38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시체란 절망과 부정과 비탄의 상징일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가족이외의 사람이 타인의 시체를 구하는 법이란 통상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란 사람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 가져가기를 구하였습니다. 요셉이 의사이기에 해부실습용으로 쓰기 위함이었습니까? 아니면 장의사이기에 돈을 벌기 위함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7장 57절에 의하면 그는 장의사와는 거리가 한참 먼 소문난 거부였습니다. 할일 없이 남의 시체나 거두고 다닐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의 시체를 구한 이유를 본문은 이렇게 설명하고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1∼42)

 

본문이 말하는 새 무덤이란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자신을 위하여 예비해둔 무덤이었다고 마태복음 27장 60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구했던 이유는 한 가지―정성을 다하여 자기 무덤으로 장례를 치루어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39절-40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일찍 예수께서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 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 마포로 쌌더라"

 

유대인의 장례법은 시체에 방부제를 바르는 애굽이나 로마의 장례법과는 달리, 죽은자의 몸에 오히려 향품을 바르고 부드러운 세마포로 감싸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존귀한 산헤드린 의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에 필요한 값비싼 향품과 세마포를 가져다, 유대인의 관습대로 예수님의 시체를 염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리마대 요셉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믿는 자기자신을 은휘- 즉 숨기던 자요, 니고데모 역시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밤중에 아무도 몰래 예수님을 찾았던 위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처음부터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 완전한 크리스천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하고 도주해버리는 그 죽음과 절망과 공포의 극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두렴없이 자신들을 노출시키면서까지 지성으로 예수님의 장례식에 앞장설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주님을 육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만났던 자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나라, 에덴이 회복된 자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산헤드린 의원이었기에 남의 눈을 의식하여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던 날, 니고데모가 예수님으로 부터 배웠던 것은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해 그 날밤 주님을 만난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덴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에덴이 복원되었을 때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의회가 예수님을 체포할 것을 결의할 때, 유일하게 그 부당성을 용감하게 지적했던 자가 바로 니고데모였습니다. 이처럼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그리스도안에서 진정으로 에덴의 사람으로 거듭난자들이었기에, 본문에서와 같은 참 제자다운 행동을 주저없이 지체치 않고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육적인 욕구로만 좇았을 뿐 아직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지 못한 제자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버리는 배신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아예 처음부터 부정하던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오직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다리를 꺾어 죽여주기를 구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구경꾼들은 한결같이 폭력의 신봉자요, 성적·육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이런의미에서 이날의 골고다는 절망의 언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절망의 언덕에서 절망보다 더 크고 찬란한 소망의 빛을 볼 수 있음은, 그곳에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얻은 자, 그리스도안에서 에덴을 회복한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영적으로 만난 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의 육적인 죽음으로 인해 그들의 심령 속에 회복된 에덴이 흔들릴 까닭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얻게 된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육적인 죽음 앞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더욱 사랑할 따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구했던 것은 단순히 숨이 끊어진 예수님의 시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구했던 것은 주님을 향한,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더 깊고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주님을 위한 더 큰사랑을 간구했을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사랑을 도구로 삼아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디에서 부활하셨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자신을 위해 마련해두었으나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포기했던 새 무덤이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시체를 장사지내는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눈부신 부활의 현장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요한복음 20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예수님 부활의 증거품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신 빈 무덤 속에 남겨진 세마포였습니다. 그것은 니고데모가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의 시신을 향품과 함께 싸드렸던 세마포였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그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심령 속에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에덴을 훨씬 더 확장시켜주었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포기한 자기 무덤이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부활의 시발점이 되고, 주님의 시신을 감싸드린 세마포가 부활의 증거품으로 존귀케 됨을 보았을 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심령 속에서 끝도 없이 확장되었을 하나님의 나라- 에덴을 생각만 해보아도 가슴이 설레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온전히 거듭난 에덴의 사람인 요셉과 니고데모가 있기에, 그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셨기에, 그들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부활의 새역사를 이루어 가시기에, 폭력과 타락, 배신과 죽음,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요한복음 19장속에서 우리들은 말할 수 없는 소망을 발견하고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다시 우리의 주위를 살펴보십시다. 도처에 폭력이 기승을 부리고있습니다. 무분별한 성적타락은 우리의 건전한 가정을 위협하고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이 날로 썩어질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 자체만을 바라보면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마십시오. 이것은 어제 오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소위 선진국들을 보십시오.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므로 실낙원한 인간의 삶이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요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절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만, 낙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만 보며 탄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마십시다. 실낙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덴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그 분을 육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만나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분 안에서 득낙원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분 안에서 얻은 에덴을 끊임없이 확장시켜 가는 자들이 되십시다. 아무리 카인이 득세하고, 소돔과 고모라가 창궐하며, 멀쩡한 사람의 다리를 꺾는 흉폭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 시대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되는 한,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통하여 이 땅의 역사를, 우리의 미래를, 우리 자녀들의 장래를 기필코 바르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껏까지 그렇게 해오신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아침에도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3년동안 주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이 구했던 것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실은 주님의 육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육체가 운명하는 그 현장에서 그들은 모두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구했던 것은 그리스도안에있는 하나님의 나라, 실낙원 했던 에덴의 회복이었습니다. 그결과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에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주님의 시신을 구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주님을 향한,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도구로 삼으시사 부활의 새 역사를 이 땅에 이루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폭력과 배신과 죽음이 난무하는 골고다 언덕 위에서 절망보다는, 말할 수 없는 소망을 얻게 됩니다.

주님! 이 사회가 골고다처럼 절망의 언덕이라 할지라도, 아니 아무도 부정할수 없는 분명한 골고다 언덕이기에, 절망하기보다는 도리어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므로, 한없는 소망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나라, 에덴을 회복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주님을 어떤 상황속에서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이 작은삶을 통하여, 골고다 곧 해골과 같은 이 세상이 부활의 언덕, 새 생명과 새 역사의 시발점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성경을 응하게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31∼42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기 직전,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누가복음 18장 31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 즉 구약성경이 당신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바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인 즉은 유대인들의 음모로 체포되시어 희롱과 능욕 그리고 채찍질을 당하시며,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기 전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을 때에,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인자는 자기에게 기록된 대로 간다(마 26:24a)'고 말씀하시므로, 당신의 행동이 결코 당신 임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따르시는 것임을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마침내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게 체포당하실 때에 놀란 베드로가 스승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검을 휘둘러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귀를 고쳐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영(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3∼54)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 당신께는 하찮은 군병들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지만,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하실 경우, 당신의 고난을 예언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성경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하여 순순히 체포당하신다는 의미였습니다.

또 2주전에는 요한복음 19장 28절∼30절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오직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하여, 타는 목마름에도 불구하고 식초같이 신 포도주를 삼키셨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하여 성경이 예언하신 말씀을 훤히 아시고 그 말씀을 성취하는 삶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성경 말씀 중 그 분의 삶을 통하여 응하지 아니한 말씀이 단 한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 분의 삶은 온전히 말씀을 위한 삶이었고 말씀에 의한 삶이었습니다. 아니 그 분은 말씀 그 자체이셨습니다.

그분을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말씀을 알고 좇고 자신들의 삶으로 성경말씀을 성취하려 하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성경 말씀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본문 31절을 보십시다.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달라 하니"

 

일반적으로 건장한 남자의 경우 십자가에 못 박히면 대개는 사흘,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일주일만에 죽었다고 합니다. 로마인들의 관습은 십자가 사형에 처해지는 죄수는 숨이 너머간 뒤에도 시체를 그대로 십자가에 매달아 새들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범죄를 저지를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로마인들의 관습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곤란한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그들이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모세의 율법은 로마의 관습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신 21:22)

 

즉 모세는 나무 위에 달린 시체를 당일로 끌어내려 장사지내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하나님의 땅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못박던 그 날은 금요일이었기에 이제 조금 있다 해가 지면 그들의 성일인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그 날의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는 안식일이었으므로 죄인들의 시체를 매달아 둔 채 그 성스러운 절기를 맞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십자가 죄수들의 다리를 꺾은 뒤 해지기 전에 시체를 치워 버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당시 십자가 형틀에는 아래 쪽에 조그마한 디딤대가 붙어 있어 못 박힌 죄수들은 그 디딤대를 딛고서므로 양팔과 가슴을 압박하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고, 그 까닭에 사형수의 목숨이 생각보다 오래 부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리를 꺾어 버리면 더 이상 죄수가 자기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 아래쪽으로 몸이 쳐져 버리는 동시에, 가슴의 압박이 가중되어 순식간에 질식하여 죽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유대인들은 죄수들을 인위적으로 빨리 죽여, 해지기전 시체를 치워 버릴 수 있기를 빌라도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로마인들 역시 필요한 경우에는 십자가 사형수들의 다리를 꺾어 빨리 죽이는 예가 있었던 터라, 빌라도 총독은 어렵잖게 유대인들의 청을 허가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3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표현을 부드럽게 했기에 `다리를 꺾는 것'이지, 실제로 로마군인들이 십자가 사형수의 다리를 꺾을 때에는 쇠망치나 몽둥이를 휘둘러 다리뼈를 으스러트려 버렸습니다. 이왕 인위적으로 빨리 죽게 할 바에는 충격을 주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죽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던 두 강도는 그렇게 다리뼈가 으스러지면서 이내 질식해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33∼34)

 

예수님께는 몽둥이를 휘둘러 다리뼈를 으스러트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군병이 정말 예수님께서 운명하셨는지 확인하려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피가 흐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겠으나 어떻게 사람의 몸에서 물이 흐를 수 있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영국의 의학박사 William Stroud는 그 해답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의 심장이 파열하면 심장 속에서 돌고 있던 피가 심낭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데, 이와 같은 일혈(溢血) 현상이 일어나면 혈액이 원래 상태로 분리되면서, 일반적으로 말하여 물과 피로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십자가 위에서 이미 운명하신 예수님을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며 찔러 올린 군병의 창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뚫고 심장에 가 꽂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계속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35)

 

이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사도가 자기 자신을 가리켜하고 있는 말입니다. 자신은 현장의 목격자이기에 자신이 하는 말은 참말이요, 자기가 그처럼 참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성경 속에 참말 아닌 거짓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성경의 말씀 중 믿지 못할 말씀이 단 한 줄이라도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성경은 성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사도는 왜 여기에서 구태어 참말을 강조하고 있으며 새삼스럽게 무엇을 믿으라는 것입니까? 오히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구절처럼 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36절에는 `gar', 즉 `왜냐하면'이란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요한 사도가 엉뚱하게 보일 정도로 참말과 믿음을 새삼스레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36절 속에 나타나 있다는 말입니다.

 

36절을 보십시다.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꺽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골고다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위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두 강도의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군병이 먼저 한 강도의 다리뼈를 으스러트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불문곡직하고 예수님의 다리를 으스러트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그는 예수님을 건너 뛰어 나머지 강도의 다리뼈를 먼저 부러트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앞으로 되돌아온 그는, 유독 예수님 앞에서만 신중하게 당신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는 몽둥이를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유월절 제물로 드려지는 양의 뼈는 하나라도 꺾여져서는 안된다는 민수기 9장 12절의 말씀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유월절의 어린양이었습니다. 만약 로마군인이 몽둥이를 휘둘러 예수님의 다리뼈를 꺾어 버렸다면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한 유월절 어린양이란 말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 37절이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몽둥이를 휘두르던 자가 예수님의 운명을 확인하고 몽둥이를 내렸다면 그것으로 모든 상황은 끝난 것입니다. 구태어 다른 병사가 창으로 찔러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 병사가 그 누구의 명령이나 상의도 없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므로써, 예수님께서 창에 찔리우는 수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한 스가랴 12장 10절 말씀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찌른다'는 동사 ekkent o는 성경에 딱 두번만 나타나는 특수한 용어로, 그 뜻은 찔러도 그냥 찌르는 것이 아니라 깊이 꿰뚫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 깊숙이 박히어 예수님의 심장까지 관통할 것을 시사한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만 유독 몽둥이를 멈춘 병사나, 느닷없이 예수님의 몸 깊숙이 창을 찔러댄 병사나, 모두 무심코 행한 행동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어김없이 성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되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마군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는 이방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졌습니다. 이번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로마군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직후 예수님의 속옷을 서로 갖기 위해 제비를 뽑았을 때, 그것은 시편 22편 18절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본장 24절은 이미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로마군인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을 능욕하고 채찍질을 가하였습니다. 로마군인들은 모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통하여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알건 모르건 믿던 믿지않던 상관없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예외없이 하나님 말씀의 도구들입니다. 단지 각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응하게 하는 도구인가 하는 것 뿐입니다. 사도요한이 이 본문 35절을 통해 자신의 말이 참말이므로 믿으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 말씀의 바르고 선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을 통하여는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생각해 보기로 하십시다.

잠언 10장 16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지금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무슨 말씀이 응하고 있습니까?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른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른다'는 말씀입니까?

 

잠언 14장 1절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어느쪽 말씀입니까? 지혜로운 여인에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미련한 여인에 적용되는 말씀입니까?

 

다니엘 선지자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5)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질타하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지금 우리를 통해 어떤 말씀이 응하고 있습니까? 다니엘서 12장 5절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마태복음 23장 15절의 말씀입니까?

 

또 주님께서는 마지막날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마 13:41∼43)

 

어떻습니까?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풀무불에 던지워 울며 이를 갈 것이란 말씀이 내게 응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란 말씀이겠습니까?

 

 

몽고에서 라마교사원을 찾았을 때 사진이나 TV를 통해서만 보았던 마늬퇴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마늬퇴란 라마교 경전을 그 속에 써 넣어둔 크고 작은 원통들로써, 그 통을 한번 손으로 돌리면 그 속에 든 경전을 한번 읽은 것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따라서 사원에 설치된 마늬퇴를 모두 한번씩 돌리면 라마교 경전 전체를 한번 완독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차례로 마늬퇴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라마교 신자들이 얼마나 경전을 읽지 않으면 고육지책으로 그런 편법을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그러나 라마교신자가 라마교 경전 속에 무슨 말이 들어 있는지 한 번도 읽어보지 않고서야 어찌 참된 라마교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마늬퇴 따위를 용인하는 라마교와 같은 종교는 결코 참된 종교, 진정한 종교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말씀이시요, 그 말씀에 의해 창조된 것이 이 세상이요, 그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알지 못하고서는, 다시 말해 마늬퇴 돌리듯 해서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의식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 말씀의 도구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망각한다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포악한 로마군병이나 주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와 같은 악한 도구가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날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가는 말씀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그때 우리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는 바른 생명의 도구가 될 것이며, 그와 같은 우리의 삶만이 이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는 진리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1~6)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 응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하시니 무한 감사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날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아가므로 말씀의 바르고 선한 도구, 참생명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말씀의 선한 도구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이 사회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바른 열매를 맺으며, 이 시대 역사의 잎사귀가 마르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 아 멘 ―

돌아가시니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최후 모습을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30)

 

요즈음 시간으로 아침 9시경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로부터 6시간이 경과한 오후 세시가 되어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드디어 운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의 운명을 `돌아가셨다'는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표현과 동일합니다. 우리 역시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갔다' 혹은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우리가 쓰는 용어와 예수님에게 사용된 용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상반된 용어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가리켜 `돌아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수동적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장본인은 돌아갈 의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하여 발버둥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타력적인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죽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최후를 묘사하고 있는 동사 `paradidomi'는, 그와는 정반대로 능동적, 자발적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 구체적인 뜻은 `give up', `포기하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 타력에 의해,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인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스스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사지가 못 박히셨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지 결과였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 의해 체포당하시기 전에, 대제사장들이 음모를 꾸며 예수님을 고발하기 전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기 전에, 이미 당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놓으시고 자발적으로 포기하셨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의 그 귀한 생명을 포기하셨습니까? 죄인 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의 값은 오직 사망일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죄값을 당신이 대신 치루어 주시므로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그 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자발적으로 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 의해 체포될 당시 놀란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칼을 휘둘러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귀를 고쳐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영(군단)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당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미 당신의 생명을 포기하셨다는 의미였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포기치 아니 하셨더라면 어찌 하찮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체포하고, 재판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위대한 십자가 구원의 사건은 예수님의 능동적인 `자기 버림' `자기 포기' 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 아침 두 가지의 진리를 마음 속에 되 새길 수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자발적으로 버릴 때에만, 자기를 능동적으로 포기할 때에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참 생명이실 수가 있었습니까? 당신 자신을 스스로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나무 막대기에 불과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영원한 구원의 표징일 수가 있었습니까? 그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15세기의 사람인 일본의 선승 이뀨(一休)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벚나무 가지를 아무리 부러트려 보아도 그 속엔 벚꽃이 보이지 않네. 그러나 보라. 봄이 되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벚꽃들이 절로 피어오르는가?"

그렇습니다. 벚나무 가지를 부러트린다고 벚꽃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달래고 얼른다고 피어나지 않습니다. 몽둥이로 때린다고 해서 피어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봄이 오기만 하면 아무리 막으려 해도 피어나는 벚꽃을 막을 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봄이 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겨울이 자기를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겨울이 더 이상 겨울이기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춘3월이 왔다 할지라도, 북극에서처럼 겨울이 마냥 버티고만 있다면 벚나무가 기를 써도 벚꽃은 결코 피어오를 수가 없는 법입니다.

한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모든 열매가 알차게 영글 수 있는 것은 봄이 봄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요, 가을이 되어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은 여름이 자기를 버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을은 가을대로 또 가을이기를 포기해 주었기에, 비로소 온 자연은 한 겨울의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밤이 밤이기를 포기하므로 생명이 약동하는 낮이 이르는 것이요, 낮이 자기를 버림으로 안식의 밤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유치함을 버릴 때 성숙함이 가능한 것이요, 성숙함을 포기할 때 원숙함이, 원숙함마저 떠날 때 비로소 영원히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버림' `자기 포기' `자기 떠남'이 있는 곳에만 생명의 역사가 있음은 하나님의 법칙이요 철칙입니다. 그 곳에서만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후로 모든 인간은 본질적인 죄인으로 태어납니다.본질적인 죄인이 죄인된 자기자신을 버리고 포기치 않으려 할 때, 어찌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가능할수 있겠습니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보십시오. 참으로 가관이요 점입가경입니다. 지도자다운 인품이나 인격을 찾아 보기란 쉽지 않고 그저 유치하기 짝이 없어만 보입니다. 그런 좁은 생각, 좁은 마음으로 어떻게 한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설수 있는지 그 용기가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란 그들과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는커녕, 분열과 다툼을 거쳐 죽음의 열매만 있을 뿐입니다. 자기를 포기치 못한다는 것은 여전히 죄와 노예와 자기 욕망의 노예상태에 갇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죄와 인간의 욕망이란 인간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약이요, 흉기인 탓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진리와 생명의 열매 그리고 역사는 오직 자기 버림의 텃밭에서만 거두어진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저없이 포기하셨던 분이시라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요,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난 6월초 몽고에 갔을 때 양을 잡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몽고인이 양을 잡기 위해 양을 끌고 오는 동안, 그 모습을 본 개는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듯 요란하게 짖어대는데, 막상 끌려오는 양은 너무나도 잠잠하고 평화스러웠습니다. 양을 마당 한 가운데 거꾸로 눕힐 때에도 양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양은 다른 가축의 경우처럼 정수리를 찍거나 혹은 목을 따서 죽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기 위해 거꾸로 눕힌 양의 배가죽만을 칼로 조금 갈랐습니다. 그러자 속에 있던 밥통의 윗부분이 잘라진 틈으로 불거져 오르면서 피가 흐르지 못하도록 자동마개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몽고인은 양의 배가죽과 밥통 사이로 손을 넣어 양의 숨통을 눌러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무지막지한 사람의 손이 그처럼 양의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숨통을 틀어쥐는데도 양이 신음소리를 한번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숨이 너머 가는 마지막 순간 허공을 향해 치켜든 네 다리를 파르르 떨 뿐이었습니다.

양이 죽자 손을 빼낸 몽고인은 양의 털가죽을 다 벗겨낸 다음 양의 배를 완전히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를 주걱으로 남김없이 다 퍼내었습니다. 그렇게 잡은 양고기와 내장, 피를 돌멩이와 함께 큰 통에 넣고 몇 시간을 삶은 뒤, 마침내 조리가 끝난 양고기를 시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식은 양고기를 씹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53장 7절의 의미를 되씹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도다."(사 53:7)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동물들 가운데 왜 구약의 사람들이 유독 양을 속죄의 제물로 즐겨 사용하였는지,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는지, 왜 성경이 하필이면 주님을 양에 비유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그날 확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양은 자기 생명을 남을 위하여 잠잠히, 그리고 기꺼이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넣어 숨통을 눌러도 반항 한번 없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므로 양이 인간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듯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내어놓으시므로, 잠잠히 포기하시므로 인류의 구원자,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신학자 C.S.루이스(Lewis)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해가 뜬다는 사실을 믿는 것처럼 주님을 믿는다. 단지 해를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해를 통해 모든 것을 비로소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위대한 깨달음입니까? 해가 중요함은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사물을 바르게 분간할 수 있음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절대적인 것은 주님으로 인해서만 이 세상을, 나의 상황을, 나 자신을 비로소 바르게 볼 수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 사랑의 빛으로 나를, 내 주위를, 이 세상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어느 것 하나, 어느 사건 치고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 그 분의 은총 아닌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롬8:31b~32)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리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시므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였다 할지라도, 막상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잠잠히 내어놓지 않으셨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침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잠잠히 포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도대체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찌 우리를 책임져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는 요즈음 수요 예배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심'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은 바벨로니아의 침공에 의해 멸망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성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2∼33)

 

예루살렘 멸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근심과 고난에 처하게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바로 그 고난을 통하여, 자기를 버리지 못한 채 자기에게 집착하여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허망하게 인생을 망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로 세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19년 전에 이미 다니엘과 에스겔 등을 미리 바벨로니아로 보내시어,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세우실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속에서 전혀 새사람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여건의 악화로 인하여 요즈음은 정말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도 회사를, 가계를 꾸려 가느라 얼마나 고생들 하셨습니까? 모든 상황이 호전되기보다는 점점 더 절망적으로 변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본심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께서는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잠잠히 내어 놓으셨던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분이, 어찌 우리에게 그 결과가 해로 끝날 것을 주실 까닭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본심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진리의 사람으로 바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의 어려움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사회적 경제적 정의와 개인적 정직, 그리고 일을 추진함에 있어 본질과 내실의 절대적 중요성을 인식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면 어찌 우리가 진리를 생각인들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근심과 고통이 없다면 어찌 하나님을 바라보기나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결코 절망치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망만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사 자기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에 그 분이 주시는 것이라면, 비록 고통과 고난처럼 보일지라도, 그 결국은 우리의 유익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이 기회에 우리 모두 주님처럼 자기를 버리는 자들이 되십시다.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는 자들이 되십시다. 진리 위에 바로 서는 진리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그때 우리는 머지않아 사도 바울처럼 고백치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니라."(롬 8:28)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7일동안 내내 절망하고 근심하며 한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버리지 않으시고 이 시간 불러 주시사,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잠잠히 내어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주님께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금 우리를 책임지고 계심을 확신케 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행여 어떤 어려움 속에 있다 할지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본받아 나를 버리고 나 자신을 온전히 주님 앞에 내어 드리는 은총의 기회로 삼는,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 썩어질 허망한 내 욕망의 열매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시는 영광된 열매들이 날마다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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