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7∼16


우리 나라의 상례법은 부모님이 돌아가실 경우 100일 동안 상복을 입도록 권하고 있니다. 요즈음은 상복이라고 해서 옛날처럼 격식을 갖춘 옷을 고집 하지는 않고, 대게 검은 색 옷을 입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일반적으로 상복이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살아 있는 자식들이 갖추는 예의인 것처럼 생각되기가 쉽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실제로 상복을 100일 동안 입다보면, 그 속에 더 깊은 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8장 21∼2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제자의 부친이 사망하였다면 응당 스승도 찾아가 조문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상을 당한 제자에게,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말씀하셨습니다. 얼핏보면 예수님은 인륜도 천륜도 무시하는 비도덕적 인간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장례예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역설적 표현인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살아 남은 자가 죽은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가 남긴 시신을 처리해 주는 일이 고작입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살아 남은 자들에게 훨씬 더 크고 많은 공헌을 합니다. 죽은 자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산 자들에게 죽음을 가르쳐 주는 동시에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을 바르게 일깨워 줍니다. 죽음을 알 때에만 생명의 참된 뜻을 제대로 터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 자들이 오직 죽음 앞에서만 자신의 삶을 바르게 가다듬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죽은 자의 죽음은 산 자의 생명의 질을 높여 주기에 죽음보다 더 위대한 메시지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부친 상을 당한 제자에게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케 하라 신 말씀은, 죽은 자만을 위해 장사를 치르는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부친의 장례식을 통해 살아 있는 네 자신의 인생을 진리 앞에서 바르게 정립시키고 돌아오라는 깊은 의미의 권고였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복이란,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주는 최후의, 그러나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100일간 상복을 입는 동안, 나 자신 역시 언젠가는 수의를 입고 관 속에 누울 존재임을 깊이 인식하므로, 남아 있는 내 생의 의미를 전혀 새롭게 승화시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입히는 옷을 '수할 수(壽)', 즉 생명을 뜻하는 수(壽)자를 사용하여 수의라 부릅니다. 이미 생명이 끝나 죽어버린 시신에게 입히는 옷을 '생명의 옷'이라니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 시신일 망정 땅속에서 오래오래 견디라는 의미로 수의라 부르는 것이라면, 천 중에서 제일 질기고 오래가는 천으로 만들어야 할 터인데, 그 반대로 정작 수의는 가장 쉽고 빠르게 썩는 삼베로 지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에게 입히는 옷을 생명의 옷이라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 또한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를 위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수의의 가장 큰 특징은 주머니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가 없는 탓입니다. 바로 이것이 죽은 자가 입는 수의가 산 자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호흡이 멎어 관 속에 드러눕는 그 순간,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그 무엇하나 가져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사는 순간부터, 우리 생명의 의미가 참다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릇 살아 있는 자들은 한결같이 '나의 것'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가져 갈 수 없는 것이라면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것'이란 과연 존재합니까? 정말 '나의 것'이라면 이 세상을 떠날 때 송두리째 들고 갈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아니 '나의 것'에 대해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해 죽어서도 '나의 것들'을 지닌 채 무덤 속에 묻히는 자들도 분명히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하기 때문에 그들의 무덤은 어김없이 파헤쳐져 그들의 '나의 것들'은 모조리 산 자들에 의해 노략질 당하므로, 죽은 자에게는 결코 '나의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웅변해 줄뿐입니다.

그렇다면 상복의 깊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왜 상복이 산 자를 위한 죽은 자의 위대한 선물일 수가 있습니까? 죽음으로 인해 죽은 자가 입는 옷이 수의라면, 그로 인해 산 자가 입는 옷이 상복입니다. 그러므로 상복이란 산 자가 입는 수의요, 산 자의 죽음 훈련복인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훈련복입니까? 이 세상에 '나의 것'이란 결코 있을 수 없음을 내 심령 속에 각인 하는 훈련복입니다. 그렇기에 상복은 위대한 선물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나의 것'이란 존재치 않는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으므로, 우리 생명의 의미가 비로소 구체적으로 참다워 질 수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도대체 무엇이 진정 '나의 것'입니까? 내 생명입니까? 내 생명이 '나의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인데 왜 내 마음대로 안 됩니까?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일평생 피땀 흘려 번 돈인데 죽어서 단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합니까?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밤을 세우며 쌓은 지식인데, 이 세상을 떠날 때 지식의 낱알하나 들고가지 못합니까?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지혜인지 아십니까? 이 세상 그 무엇하나 '나의 것'은 없다는 사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게 잠시 맡겨 진 것일 뿐이란 사실, 따라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주인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단지 그 관리인에 불과 하다는 사실―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인간의 모든 비극은 단순하면서도 엄연한 이 사실에 대한 무지에서부터 비롯되는 탓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유대인들이 사형에 처해 달라며 고발한 예수님을 심문해 보았지만 죽일만한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특사로 풀어 줄 수 있는 관례에 따라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석방시키려 했지만, 유대인들이 강도 바라바를 요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로마군병으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가하게 한 뒤,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끌고 유대인 무리들 앞에 다시 나타나, 이 정도로 혼을 내어 주었으니 이제 풀어주면 어떻겠느냐고 그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방자하게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참칭하였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소리쳐 외쳤습니다. 그 말에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주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않으셨습니다. 이미 빌라도 총독에게 할 말을 다 하셨기에, 새삼스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의 침묵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심문을 받는 죄수가 자신의 물음에 침묵한다는 것은, 곧 총독인 자기 자신의 권위에 대한 무엄한 도전이라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0)

계속하여 침묵으로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킨다면 정말 죽일 수도 있다는 협박인 동시에, 총독으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권세의 과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침묵하시던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본문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11a)

예수님과 빌라도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빌라도는 자신의 직책, 자신의 권세와 권한이 자신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확실한 '나의 것'이라 믿었던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은 '너의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네게 잠시 맡겨진 것에 불과할 뿐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신 바 '위에서'란 빌라도를 총독으로 임명한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천년 전 빌라도가 로마 총독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빌라도가 결코 우둔한 자가 아니었음의 반증입니다. 그는 당시 출중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는 것도 많았을 것이고 총독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험도 필히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빌라도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내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나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것이요 나는 관리인에 불과하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법, 진리를 따라 행사하고 처분해야 된다는 사실에 무지한 자였습니다. 만약 빌라도가 이 중요한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는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옳지 못한 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어리석은 죄를 범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에 무지하므로 인해, 빌라도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아 죽이는 가장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인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어리석은 빌라도야 말로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왜 아버지의 관을 옆에 두고 아버지가 남긴 유산 때문에 자식들이 다툽니까? 그 재산이 '나의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가깝던 사람들과 의절하면서까지 돈을 더 중시하여, 돈을 위하여 거짓과 불법을 일삼으며 심지어 살인까지 마다합니까?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있으리란 망상 때문입니다.

왜 자식이 갖고 있지 아니한 것을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강요하므로, 그들이 꽃 피울 수 있는 그들의 세계를 파괴합니까? 자식들이 '나의 것'이란 그릇된 인식 때문입니다.

왜 취임 초기 하늘을 찌를 것 같던 대통령의 인기가 불과 4년만에 바닥으로 떨어 졌습니까? 왜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국회 청문회에 불려 나가는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까? 권력을 '나의 것'으로 오인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인간의 모든 분쟁과 불행과 비극은 '나의 것'일 수 없는 것을 '나의 것'으로 오해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복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내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것임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태동됩니다. 그때에만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에 대하여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만 내게 있는 것으로 인해 교만해 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만 비인격적인 소유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때에만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만 내게 맡겨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뜻, 진리를 따라 관리하고 사용하므로 우리의 인생이 비로소 인격적이고 향기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만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수 있습니다. 그때에만 내가 죽은 뒤 내가 남긴 유산이 살아 있는 가족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는 화근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살 때에만,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살해하는 어리석은 빌라도의 삶으로부터 진정 자유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인 셋째 아이가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놀던 중 집 크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했는데, 중학교 1학년인 큰 아이가 보기에 그 정도가 심했던 모양입니다. 그날 저녁, 제 자신의 고백록을 직접 읽어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큰 아이가 셋째 아이를 조용히 불러, 앞으로 친구들에게 그런 자랑을 하는 게 아니라고 타일렀습니다. 셋째는 우리 집 내가 자랑하는 데 뭐가 나쁘냐며 형에게 따졌습니다. 큰 아이는, 우리보다 작은 집에 사는 사람에게 집 자랑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셋째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큰 아이가, 이 집은 우리 집이 아니라 고모네 집이므로 앞으로 그런 자랑은 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셋째가 펄쩍 뛰었습니다. 우리 집을 두고 형아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셋째가 제게 뛰어 오며 소리쳤습니다.

"아빠, 이게 우리집이예요? 고모네 집이예요?"

그것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임을 확신하는 반문이었습니다. 저로부터 고모네 집이란 대답을 들은 셋째 아이는 소스라칠 듯이 놀라며 도대체 제 말을 믿으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셋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이 세상에 우리 것이라고는 본래 아무것도 없단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을 빌려 쓰고 있는 거야. 이걸 알아야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란다."

세째는 무엇을 생각하는 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몇일이 지나 토요일이되었습니다. 위의 세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토요일이면 유치원을 가지 않는 7살짜리 막내만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위해 서재로 올라가려 하자, 막내가 가만히 다가오더니 두 손을 올려 자기를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습니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몸짓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올려 가슴에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러자 막내는 제 귀에 자기 입을 갖다 대고는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이 집이 정말 우리 집이 아니고 고모네 집이예요?"

아마 몇일전 들었던 이야기를 그 어린아이가 가슴 속에 꼭꼭 묻어 두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막내를 여전히 안은 채로 막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 그토록 진지한 표정으로 그처럼 진지한 질문을 던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아이가 난생 처음으로 아빠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졌으니, 아빠인 저도 아이의 이해 여부에 상관없이 진지하게 답변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막내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왜 우리는 고모네 집에 사는지, 왜 우리에게는 우리 집이 없는지, 왜 아빠는 우리 집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지 성의를 다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만약 이 다음에 네가 돈을 많이 벌어 네 이름으로 집을 산다고 해도, 그건 '너의 것.이 아니야.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일 뿐이야. 아빠는 아빠 아들들이 하루라도 빨리 이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 드린단다. 왠지 아니? 그 때에만 사람들은 정말 서로 사랑하면서, 진리 안에서 기쁨으로 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이야. 우리는 죽은 뒤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넌 절대로 잊어선 안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무슨 옷을 입고 있습니까? 무슨 색깔의 옷입니까? 주머니는 몇 개나 달려 있습니까? 그 속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까? 그러나 옷의 모양이나 색깔이나 그 속에 든 소지물에 상관없이, 이 시간부터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상복으로 여기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십시다. 죽음의 훈련복으로 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그래서 아침에 옷을 입을 때마다, 죽어서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음을 상기하십시다. 밤에 옷을 벗으면서는, 이 세상에 '나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가슴깊이 되새기는 자들이 되십시다. 나의 생명을 비롯하여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이요 나는 그 분의 청지기임을 고백하며 살아가십시다.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진리가 주는 자유 안에서 영원토록 새로와 질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빌라도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권세를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아 죽이는 가장 어리석은 인간의 표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빌라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실상임을 이 시간 일깨워 주시니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에,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는 나의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헛되이 나의 것을 탐하느라 나의 양심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진리를 짓밟았습니다. 사람들을 무수히 해쳤습니다. 그 결과 나의 소유가 늘어나는 만큼 나의 심령은 더 황폐해지고, 나는 더 짙은 어둠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졌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이 시간부터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청지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시간 이후로 우리의 생명이 진리안에서 영원히 참다와지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진리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시사, 우리모두 이 혼탁한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로 승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놓으려고 힘썼으나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38b-19:16


조선왕조 500년이 우리 민족 역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 한가지만 말해 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세종 대왕의 한글창제일 것입니다. 한 민족이 고유한 자기 말과 글을 갖지 못할 때, 고유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역사를 지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결국엔 소멸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타민족에 동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런 의미에서 1446년 9월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중요성과 가치, 그리고 우리 민족역사에 대한 기여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오히려 모자를 것입니다.

그러나 한글창제가 이처럼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해서, 전 국민적인 합의나 지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통용되던 한자에 대하여 까막눈이던 일반 국민들은 한글창제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이미 한자에 능숙하던 지배계층 중에는 오히려 반대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능수능란하게 한자를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따로이 우리 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공연히 한글 창제를 반대했을 뿐 아니라, 세종 대왕에게 한글창제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 반대론자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최만리는, 1444년 2월 20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는 예부터 대국 중화의 제도를 본받아 실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와 아무 관련이 없는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학문에도 정치에도 아무 유익함이 없는 줄로 압니다. 더구나 글자 제정은 의견을 두루 청취하면서 시간을 두고 가부를 논해야 마땅한 데도 너무 성급하게 발표했습니다. 혹시라도 중국 측에서 시비를 걸어올까 두렵습니다. 주변국들이 제 글자를 가지고 있다하나 그들은 모두 오랑캐 족들일뿐입니다. 우리가 중화의 은혜를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 족에 합류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더구나 이미 우리는 이두라는 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두는 반드시 한자를 익혀야 쓸 수 있기에 오히려 학문에 도움이 됩니다. 만약 관리들이 쉽게 언문만 익히게 된다면 결국에는 한자를 아는 이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할 일이 태산 같이 많은데 어찌하여 급하지도 않는 언문 익히기 부담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할지라도 한낱 기예에 불과합니다. 학업에 정진하고 정신을 연마해야 할 어린 왕자들과 유생들이 시간을 허비해 기예 익히기에 몰두한다면, 이는 크나큰 국가적 손실입니다. 감히 고하오니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당시 그 역시 집현전 고위 학자였던 최만리에게는, 이와 같은 반대 상소문을 올릴 수밖에 없는 개인적 인식과 시대적 상황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상소문을 볼 때, 그의 판단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의 심중에는 우리 민족 우리 문화보다도 중국, 중국문화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상소문을 만약 중국의 황제가 보았더라면 크게 만족하면서 큰 상을 내렸을 것입니다.

최만리는 학자로 관리로, 특히 말년에는 청백리의 표상으로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보다 중국을 더 염두에 둠으로 말미암아 훈민정음에 관한 한 그는 자신의 인생에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오점을 찍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의 심중이 중국보다 우리 민족을 더 우위에 두었더라면, 그 결과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인생이란 곧 '결정'이요 '판단'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살아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것을 결정해야 하고 또 많은 것들을 판단해야 합니다. 삶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그리고 직급이 높아질수록 더 중요한 것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사항을 결정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무엇을 염두에 두는가? 우리의 심중이 무엇에 더 큰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본문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요 18:38b)

유대인들이 사형에 처해 달라며 끌고 온 예수님을 심문해 보았지만, 빌라도 총독은 아무 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0절의 지적처럼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죽이려 함을 빌라도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특사로 풀어줄 수 있는 전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하였지만, 유대인 군중들은 오히려 강도 바라바의 특사를 요구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총독 빌라도는 군병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하게 한 뒤,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다시 군중들 앞으로 끌고 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19:4)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없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로 혼을 내 주었으니 이제 그냥 풀어주면 어떻겠느냐는 식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공관 안으로 들어가서 한번 더 예수님을 심문해 보았지만,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사형에 처할 만한 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12a)

총독 빌라도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예수님의 석방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본문 12절 하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2b)

참으로 그것은 무서운 협박이었습니다.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 참칭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가이사 즉 로마 황제의 신하일 수가 없다는 이 말의 의미는, 만약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지 않고 석방시키기만 하면 반역자를 풀어준 당신의 죄를 직접 로마 황제에게 진정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가끔 유대인들 중의 유력자들이 로마총독의 비리 사실을 황제에게 진정하여 역대 총독들이 곤욕을 치른 바가 있었음을 잘 알고 있던 빌라도는, 끝내 그 협박에 굴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16)

마침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가복음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니라." (막 15:15)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앞에 세워 놓고 무죄냐 혹은 유죄냐, 사형이냐 아니면 석방이냐를 판결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고서 나름대로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애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끝내 자신이 정당하지 못함을 잘 알면서도 사형을 언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빌라도가 더 염두에 두었던 것은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자기 자리였습니다. 애써 차지한 총독이란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보다는 불의한 다수를 만족케 하는 일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만이 최선의 선택이었노라고,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스스로 자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리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만 이 신앙고백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드리고 있는 전세계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은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 중의 중죄인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단지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빌라도는 지난 이천년동안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한결같이 정죄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의한 다수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잘못된 일 인줄 뻔히 알면서도 진리를 서슴없이 못박으면서까지 자기 자리, 자기 욕망을 우상으로 삼았던 어리석음에 대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가 그처럼 지키기를 원했던 그 자리가 빌라도를 평생토록 지켜주었습니까?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그로부터 불과 몇년 후 로마 황제로부터 파면 당한 뒤, 승진이나 다른 보직을 받지 못한 채 갈리굴라 황제때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못박으면서까지 고수하려한 자리였지만 허망하게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불의한 다수들에게 만족을 주면서까지 지키려 한 자기였지만, 그러나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면에서 그는 목매어 자살한 가룟 유다와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없음을 누구보다도 확신하고 예수님의 석방을 세번씩이나 시도했던 사람이었으므로, 만약 빌라도가 자기에게 연연하여 불의한 군중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풀어드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에게 빌라도 총독이 반역자를 살려 주었다고 모함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빌라도 총독은 파면을 당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영원한 의인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사후 이천년이란 긴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그토록 연연했던 총독자리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중요치 않은 것을 중요하다 착각하다가, 그는 막상 중요한 모든 것- 진리와 자기자신을 송두리째 다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갈 1:10)

바울은 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살전 2:4)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불의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라도와는 달리 불의한 자들의 환심을 사려하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자들의 환심을 사는 길은 오직 하나―진리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배신하여 불의한 다수의 환심을 사기보다는, 오히려 진리를 위해 불의한 다수들로부터 모함 받고 핍박받는 길을 기꺼이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에 대해 연연치 않는 자이었으므로 가능했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와 사도 바울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빌라도는 자기 자신, 자기 자리, 자기의 것들을 가장 중요시하여 진리를 미련없이 버렸다가, 그가 선택한 불의한 자들과 더불어 공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바울은 자신이 그 동안 추구해 오던 모든 것의 무익함을 깨달아, 자기의 것들을 배설물처럼 미련없이버리고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가 선택했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의인으로 영원한 세움을 입었습니다. 무엇이 진정 자기를 위하는 것인지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자기를 위해 진리를 버린 빌라도입니까? 아니면 진리를 위해 자기를 버린 바울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만족을 주려, 누구의 환심을 사려 애쓰고 있습니까? 옳은 길인 줄 알면서 옳은 길을 가는 자입니까? 틀린 줄 알면서 틀린 길을 가는 자입니까? 우리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불의한 다수입니까? 아니면 의로운 소수입니까?

영원이란 시간 속에서 볼 때 나라는 존재는 결코 나의 우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최만리의 어처구니없는 한글창제 반대 상소문이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듯이, 우리의 전 인생은 하나님 앞에 빠짐없이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자기를 위해 진리를 버린 빌라도가 오늘도 사도신경을 통해 단죄되고 있듯이, 진리를 위해 자기를 버린 바울이 영원한 사도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상급은 반드시 있다는 사실도 망각치 마십시다. 그때에만 우리 모두 어리석은 빌라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자는 나 자신이 아니라, 오직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밖에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9)

주님의 말씀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세부적인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으니, 자기를 진리보다 더 사랑하면 빌라도처럼 반드시 자멸할 것이요, 진리를 자기보다 더 사랑하면 필히 영원한 세움을 입으리란 사실입니다. 주님, 머지않아 공동묘지의 흙으로 돌아갈, 이 허망한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진리를 버리고 불의한 자들에게 환심을 사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지키려는 허물에서 헤어나게 하옵소서. 오직 진리를 위하여 날마다 나를 쳐 복종시키고 나를 버리므로, 영원한 진리의 증인되는 기쁨을 우리 모두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바라바라 하니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38b-19:7


서울 구치소의 요청으로, 지난 3월 29일 서울 구치소 강당에서 부활절 축하 기념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 이미 사형 확정을 받아 집행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 8명의 특송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할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수 있나요

많은 사람 찾아와서 나의친구가 되어도

병든 몸과 상한 마음 위로 받지 못했다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의지 할것 없는 이몸 위로 받기 원합니다

이 죄인의 애통함을 예수께서 들으셨네

못자국난 사랑의 손 나를 어루만지셨네

내 주여 이죄인이 다시 눈물흘립니다

오 내주여, 나 이제는 아무 걱정없어요

내 모든죄 무거운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

내 주여 이 죄인이 무한 감사드립니다

나의 몸과 영혼까지 주를 위해 바칩니다.

주를 위해 바칩니다.

일반 수인들과는 달리 사형수임을 나타내는 붉은 명찰을 달고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기에 사형언도를 받았음이 분명한 그들이, '주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하고 외치는 소리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는 동시에 처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앳띤 소년의 얼굴에서 부터 장년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9명의 사형수들이, 언제 사형을 집행당할른지 알 수는 없으나 남아있는 시간동안, '나의 몸과 영혼을 주를 위해 바칩니다'라는 걸단으로 찬양을 끝맺는 모습은 실로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특송을 마친 후 원언식씨가 잠시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그분은 몇 해전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본인이었기에 낯설지 않았습니다. 원주에서 한 직장에만 20년을 다닐 정도로 착실했던 그는, 어느 날 아내가 '여호와의 증인'에 빠져 가정을 내팽개치기 시작하면서부터 심각한 가정불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가정을 마다하고 '여호와의 증인'회관에 나가있는 아내와, 아내를 불러내는 사람들을 혼내주기위해 석유통을 들고 회관을 찾은 그는, 입구에 석유를 뿌리고는 성냥을 그었습니다. 불길은 삽시간에 집회장 안으로 번져갔고, 그 방화로 인하여 따로 비상구가 없는 실내에 있던 사람중 무려 15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불에 타죽었습니다. 그 아비규환의 현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직한 범죄요, 살인행위입니까? 사형제도가 없다면 모르되 법에 사형이 명시되어있는 한, 그처럼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사형이 언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것입니다.

마이크 앞에서 그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훔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직장 상사 내외분이 제게 전도하기 위해 목사님과 함께 저희 집으로 심방을 왔던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나는 일부러 술집에 앉았다가 밤 12시가 너머서야 귀가했습니다. 만약 그날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좇으십시오. 예수님 아니면 여러분들도 저처럼 붉은 명찰을 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그 사형수와 사형수의 말을 듣는 수인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이겠습니까?

정말 귀한 교우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매사에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에 존경치 않을 수 없는 그런 분입니다. 그분은 한때 도박에 빠져 젊음을 탕진해 버렸던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에도 가족들에 대해 늘 그 사실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도박만 하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행복했을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95년 9월 넷째 수요예배시간에 '자서전들을 쓰자'고 권해드린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설가 이청준씨의 소설제목이 아닙니다. 자서전이란 거창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무릇 살아있는 자들은 원고지 단 10장이라도 반드시 자서전을 쓸 의무가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글로 정리해 봄으로써, 주님 앞에서 우리의 실상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이 얼마나 큰지 비로소 구체적으로 확인하면서, 주님만을 좇는 더 분명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날밤 그 성도님 역시 자신의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의 글로 직접 들어보시겠습니다.

자서전을 써보라는 설교를 듣던 날 밤, 아내와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변한 제 자신의 대견스러운 모습을 확인시켜주기 위하여 연필을 잡았다가, 그만 제자신의 적나라한 실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밤 제가 확인한 것은, 삶자체가 더러운 죄인이었던 추하디 추한 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지난날의 제 모습은 가룟유다보다 더 흉칙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향해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 주님! 저 많은 죄를 정말 제가 다 지었군요, 언제 저토록 많은 죄를 범했습니까? 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죄를 구해야 합니까? 주님! 이 용서받지 못할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이전까지는, 자신이 범한 죄는 도박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 봄으로써, 자신의 삶속에서 죄아니었던 것이 없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지 않는 자가 어찌 죄아닌 것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자들은 자기욕망에 따라 선택하는 자인즉, 그들이 선택하는 것의 형태가 어떠하던 그 본질은 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만한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특사로 풀어줄수있는 전례가 있음을 상기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기위하여,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인들에게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39)

빌라도 총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대인들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40)

유대인들은 예수님대신 바라바를 선택했는데, 바라바는 강도였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7절은, 바라바는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 중에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된 자라고 기록하고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욕망을 위해서는 어떤 불법이나 폭력, 심지어는 살인도 불사하는 흉칙한 사형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마다하고 추악한 욕망의 상징인 강도 바라바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들 자신들이 진리는 안중에도 없는 더러운 욕망의 노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선택한 바라바와 함께 파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냐? 아니면 바라바냐? 이 양자에 대한 선택의 문제는 2천년전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생 자체가 이 양자에 대한 선택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할 것인가 혹은 강도 바라바를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되고, 또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선택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삶이 근본적으로 이 양자중 무엇을 선택했느냐에따라 일차적으로는 신·불신이 결정나고, 삶속에서 매 순간순간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의 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4년전 수요 예배시간을 통해 로마서를 공부할 때, 로마서 8장 29절로 30절을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 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강도 바라바와 같던 우리를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해주시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자녀로 친히 불러주시고, 주홍보다 더 붉고 먹보다 더 검은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주시사 의롭다 인정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성도가 되도록 인도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예정' '소명' '칭의' '성화', 이 네 단어는 '복음의 황금사슬'이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복음의 요체가 이 네 단어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까닭입니다.

칼빈은 이중에서 '예정'을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라 불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선을 행하기도 전에,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때 우리를 이미 예정해 두셨더라는 의미에서 였습니다. 그 다음 '소명'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면 강도든 창녀든 살인자든, 그 누구도 피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는 은혜가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였다면 우리같은 죄인들이 어찌 이 아침 이 귀한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칭의'는 '필승불패의 은혜'라 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시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할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있게 이렇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 있는것은 성화에 대한 의무와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소명 그리고 칭의의 은혜에 의해 의롭다 구원받았음을 정녕 믿는다면, 정말 구원받은 자 답게, 의인 답게, 거룩한 삶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소명, 칭의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이요 선물이라면, 성화는 철자하게 우리 자신의 책임 사항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본질적으로 예수님을 향하게 되었음에 만족하는 것이아니라, 삶의 매 상황상황마다 강도 바라바를 선택치 않고 어떤 경우에도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자기 훈련,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않된다는 말입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아름답고 바르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믿을때 다 구원을 얻지만, 구원 받았다고 해서 다 쓰임을 받는것은 아닙니다. 구원 받은 자 중에서 성화의 의무를 다 하는 자가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두 번째 부르심, 혹은 제 2의 구원이라 한다 했습니다.

지난 주초 개최되었던 신앙사경회를 통하여 강사 박 영선목사님 께서는, 칭의를 신분의 문제로 그리고 성화를 수준의 문제로 명쾌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신분을 지닌자로써 얼마나 거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수준이, 교회의 수준이, 민족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국민의 25%가 크리스쳔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갈수록 혼란스러워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즐기기만 할뿐 스스로 수준을 높이기위해 성화의 의무를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교관 신분으로 칠레에서 몇 년간 거주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처음 도착하여 칠레 운전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필기 시험을 치룰때 였습니다. 마지막 면접을 위해 면접관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을때 면접관은 놀랍게도 할머니 였습니다. 할머니가 술을 먹을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면허증을 받기가 까다로울것 같아 먹지 못한다고 답했습니다. 할머니가 당신의 직업이 외교관인데 파티에서 술 한잔이라도 먹어야 되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 분은 재차 먹을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 후 시간이 되어 면허증을 찾으러 갔더니 시험에서 탈락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면접관이 정신진단을 요하는 자라고 판정하였으므로 면허증을 줄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할머니 면접관을 찾아가서 왜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하느냐며 따졌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외교관이라면 파티석상에서 술 한잔 정도는 할줄아는 사람임이 분명한데, 내가 물을때 당신은 두번씩이나 거짓말을 했으니, 당신은 정신이 건강치 못한 사람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교통법규를 위반하고서도, 교통순경이 면허증을 달라하면 위반한 적이 없다고 거짓말할 사람일텐데, 내가 어찌 면허를 발급해 줄수 있겠습니까?'

잘 알려진대로 칠레는 카톨릭 국가입니다. 우리가 조금 먹고 살게되었다고해서 칠레와 같은 남미국가들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와 칠레사이에는 이만한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인 정신위에서 소위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나라들과의 수준의 차이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윌리엄 도일 신부는 그의 저서, '성인이 되는 비결'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이겨야 할 기회를 만날때마다 이것은 나의 힘에 너무겨웁다. 나는 성인이 아니잖아! 이렇게 말하고는 그 유혹에 스스로 빠져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대는 왜 성인이 못되는가? 성인이 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의무가 아닌가?"

성인이 된다는 것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성인이 되는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성도'라 부르고 있습니다.성도란 단어 hagios 자체가 영어로 saint, 곧 성자란 의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란 거룩한 신분을 얻은 자들이기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되었기에 이제 우리수준에 대한 의무를 지니게 된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인이 될수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도일 신부는 agere contra, 즉 자기를 거스려 행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자기의 욕망이나 탐욕을 거스릴수 있는자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매 순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를 거스리지 못하고 자기를 좇는자는 영락없이 강도 바라바를 선택하는 자가 될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수준은 얼마나 자기를 거스릴줄 아느냐로 판가름 나게됩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붉은 명찰을 달고있는 사형수들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가슴에 붉은 명찰을 달고있던 죽을수 밖에없는 사형수들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행적 은혜로 택정해 주시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불러주시고, 필승불패의 은혜로 우리 가슴에서 붉은 명찰을 떼어내시사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호돈의 주홍글씨처럼 수치스럽던 붉은 글씨를 천사의 상징으로, 성도의 표징으로 승화시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 사실을 정녕 믿는다면 이제는 의인답게, 성도답게, 성인답게, 우리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자기를 거스리는 자가 됩시다. 어떤 경우에도 강도 바라바가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을 선택하는 자들이 됩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거스려 우리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은 이 민족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임을 잊지마십시다. 자기를 거스리지 못하는 자는 언제나 강도 바라바의 편일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민족의 수준은 오직 그리스도인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 다 함께 '주여 이 죄인이'를 찬양하시므로 기도를 대신하겠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할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수 있나요

많은 사람 찾아와서 나의친구가 되어도

병든 몸과 상한 마음 위로 받지 못했다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의지 할것 없는 이몸 위로 받기 원합니다

이 죄인의 애통함을 예수께서 들으셨네

못자국난 사랑의 손 나를 어루만지셨네

내 주여 이죄인이 다시 눈물흘립니다

오 내주여, 나 이제는 아무 걱정없어요

내 모든죄 무거운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

내 주여 이 죄인이 무한 감사드립니다

나의 몸과 영혼까지 주를 위해 바칩니다.

주를 위해 바칩니다.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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