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을지라도 설교자 이재철

말씀: 하박국 3 : 17∼1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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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의사가 쓴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왜 모두 감사하질 않을까, 당연한 사실들을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계시다.

손이 둘이고 다리가 둘

가고 싶은 곳 어디든 자기발로 갈 수 있고

손을 뻗어 무엇이든 잡을 수도 있다.

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나온다.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아무도 당연한 사실들을 감사치는 않고

`당연한 걸'하며 웃어 버린다.

하루세끼를 먹는다.

밤이되면 편히 잠들고 아침이 오면

상쾌한 바람을 실컷 들이 마신다.

웃다가 울다가 고함치다가 뛸 수도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당연한 일

그렇게 멋진 것을 아무도 감사할 줄 모른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오직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뿐이다.

손가락을 하나라도 잃어본 사람만 남아 있는 손가락에 대해 감사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다리를 잃어 본 사람만 두 다리의 고마움을 절감케 됩니다. 건강을 상실한 사람만 건강의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재물을 잃어 본 사람만 재물의 참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세상의 것을 잃어본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잃음' `없음'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잃음'과 `없음' 이야말로 `있음의 의미'와 `있음에 대한 감사함'과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있음'을 가능케 하는 발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바국 선지자는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었지만,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었지만,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었지만, 밭에 식물이 없었지만, 우리에 양이 없었지만, 외양간에 소가 없었지만', 모든 것이 없음 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없음'으로 인하여 `살아 있음의 참 가치'를 알게 되었고, 그 `없음 투성'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영원한 생명의 충만함을 맛보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없음'으로 인해 비로소 생긴 그 빈 공간 속에 하나님의 것이 채워질 것임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박국은 `없음'의 한 가운데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여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지난 1년 동안 무엇을 잃었습니까? 무엇이 없어졌습니까? 무엇을 상실했습니까? 그렇다면 이 감사주일 아침 그 `잃음'과 `없음'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 드립시다. 그 `없음'으로 인해 `있음'의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된 것을 감사 드립시다. 그 없음으로 인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내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음을 감사드립시다. 나의 그 없음 속에서 주님께서 주님의 것으로 채워 주실 것에 대한 소망으로 인하여 감사 드립시다. 우리의 없음 속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의 것으로 채워질 때, 참 평강도, 행복도, 만족도 비로소 가능합니다. 세상에서 부족함이 있는 만큼,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세상에서 부족함으로 인하여 주님과의 관계에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없음으로 인하여 감사 드리며, 있음을 감사 드리며 있을 것임에 대하여 감사 드립니다. 무엇보다 우리 없음 속에 차고 넘치는 주님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1년 12달 365일이 매일 감사의 고백과 노래로 엮어지는 향기롭고 성숙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 아 멘―

 


돌아가니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18


모래 속에서 꽃이 필수 없는 것은 모래는 생명인 물을 머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물을 뿌려 주어도 이내 흘러 내려 버리거나 금방 말라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생명을 머금지 못하고 품지 못하는 모래밭은 언제 어디서나 황폐함과 죽음의 대명사일 뿐입니다. 만약 그 심령이 생명을 머금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의 호칭과 직책과 경력과 지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의 인생은 황폐함 이상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품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란 황량한 사막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코 끝의 호흡으로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그 심령이 참된 생명인 진리를,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여부에 따라 인간의 삶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황량하게 소멸되어 버릴 수도 있고, 반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참 생명을 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의 문이 열린 채 마땅히 그 속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단숨에 달려가 제자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없어 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사도들의 반응을 누가복음 24장 11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사도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주님의 부활을 깨달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말을 허탄케 여기며 믿지 않았습니다. 허탄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빌 虛' 즉 아무것도 없다는 `허'와 `거짓 誕' 혹은 `속일 誕'으로 이루어진 `허탄'이란 말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거짓말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생시에 그토록 강조하셨던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생각치 않았습니다. 그들의 심령이 모래밭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수없이 듣긴 들었으되, 그 말씀을 머금치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을 다 흘려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황량한 사막과 같은 심령을 지니고 있던 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허탄한 거짓말쟁이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심령은 진실을 담을 수 없는 밑빠진 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 만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끝나자 마자 즉시 일어나 주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과연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수건만 잘 정리되어 개켜져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대로 였습니다. 두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허탄한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그 현장에서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뛰어 너머,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던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할 차례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야 할 때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할 때였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바로 부활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

 

여기에서 `알지 못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 다음으로 부활의 현장에 들어간 두 번째 증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에서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지도, 깨닫지도, 생각하려 하지도, 없어진 주님을 찾아 볼 엄두를 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안타깝게도 본문 10절이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 가니라."

 

그들은 그냥 집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때의 상황을 더욱 상세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눅 24:12)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긴 했지만, 그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희한한 일이라 여기면서 그만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 역시 이때가지만 해도 그 심령이 다른 제자들처럼 모래밭 같은 자들이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심령이 주님의 말씀을 머금지 못하는 사막이었을 때,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져 주지 못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허탄한 거짓말로 여기어 아예 무덤에 가보지 조차 않았던 다른 제자들처럼, 그냥 집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황량한 심령밖에 지니지 못한 자가 거하는 집이란 어떤 곳입니까? 단지 생 노 병 사만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거하는 집이란 오직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있을 뿐이기에, 그 심령 속에 생명을 머금지 못한 인간들이 사는 집이란 실은 미래의 무덤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소멸해 버렸을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있어야 할 부활의 현장을 버린 채, 마땅히 떠나야 할 생노병사의 소굴, 내일의 무덤을 향해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곳에 지상최대의 행복이 있는 양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반면에 베드로와 요한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되돌아 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한 자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제자들에게 뛰어가 그 사실을 알린 자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녀가 허탄한 말을 한다며 그녀의 말 자체를 믿지 않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자기 집으로 되돌아감이 마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판에, 그녀에게 그 순간 달리 찾아 갈 만한 곳이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원문 11절은 `그러나'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는 달리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로 갔습니까? 본문 11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더니"(11a)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곳은 막달라 마리아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꺼려하는 묘지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이 사라져 버렸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의 무덤이라도 하루에 연거퍼 두 번을 찾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막달라 마리아는 비어 있는 주님의 무덤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줄 알지 못했음에도 그 빈 무덤을 다시 찾아갔습니까? 왜 막달라 마리아는 그냥 집으로 되돌아 가버린 제자들과는 달리 홀로 주님의 무덤 앞에서 서럽게 울어야만 했습니까?

 

그녀의 심령만은 생명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심령은 황량한 사막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생시에 주님께로부터 들었던 생명의 말씀들이 고스란히 그녀의 심령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 생명이, 그 생명의 능력이, 그 생명의 힘이 그녀로 하여금 다시 주님의 무덤을 찾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무덤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의 현장입니다. 사망의 확인장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다함없는 생명을 머금은 심령을 지니고 다시 주님의 무덤으로 돌아갔을 때, 그곳은 더 이상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거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뵙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 곳은 죽음이 묻힌 무덤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진원지 였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본래 주님을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심령이 모래알처럼 생명을 잃었을 때에, 그들은 주님의 무덤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본래 막달라의 창녀였습니다. 그녀의 심령이 사막처럼 황폐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창녀가 참생명을 머금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심령이 생명으로 충만했을 때, 그녀는 자기의 집이 아니라 주님 무덤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집으로 돌아갈 제자들은 바른 곳으로 갔고, 다시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는 못 갈 곳으로 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제자들은 미래의 무덤으로 돌아 간 것이요, 막달라 마리아는 참생명의 샘으로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에게 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이란 실은 모두 어디론가 돌아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란 거창한 호칭은 지니고 있으되, 그 심령이 황폐한 사막이어서 보금자리 같이 보이는 무덤으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막달라 마리아처럼 창녀라는 오명과 전력을 쓰고 있으되, 생명을 머금은 심령으로 무덤 같아 보이나 실은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본문 10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두 제자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갔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들은 지난 3년 동안 주님을 따라 다니긴 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심령이 생명을 머금치 못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진리이신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면 할 수록 자신의 늙어짐과 병듦과 죽어 감을 확인할 뿐인데, 제아무리 아방궁으로 돌아 간다한들 어찌 그 결국이 무덤으로 끝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반면에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은, 자기를 이미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그 심령이 생명을 머금고 있다는 것은, 자기에게 집착함이 없이 영원한 진리의 말씀에 자기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의탁할 때 어찌 무덤인들 영원한 생명의 호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나 자신에게 입니까? 아니면 주님에게 입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 나 자신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진리입니까? 우리는 이 아침에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수십년 전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 자살이 열병처럼 유행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자살자들은 후지산을 자살지로 선택했습니다. 후지산 정상에 있는 분화구 속으로 뛰어 내려 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국에서는 자살을 막기 위하여 분화구 곁에 경비원을 두기도 해 보았지만, 관광객들 사이에서 갑자기 뛰어 내리는 사람을 제지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당국에서는 어느 날 분화구 입구에 다음과 같은 팻말을 설치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라."

죽음의 노예된 너 자신을 벗어나 생의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표어였습니다. 죽음에 사로잡혀 후지산 꼭대기까지 올랐다가 그 팻말을 보고 되돌아가는 자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한 청년이 자살을 결행키로 하고 후지산 정상으로 올랐습니다. 워낙 죽음에 몰두해 있느라 그 팻말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후지산 정상에 서서 분화구 속으로 뛰어 내리려 하니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생각 끝에 비겁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자살을 포기하고 뒤돌아 섰습니다. 그때 청년의 눈에 팻말이 보였습니다. 무슨 팻말인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라."

그 팻말을 본 청년은 죽음의 노예 된 자신에 사로잡혀 다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자살을 감행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 아침 정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되 바르게 생각해야 하고, 그 기준은 언제나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지금 어디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죽음의 분화구를 향해서 입니까? 아니면 생명의 근원을 향하여 입니까? 우리의 심령은 지금 무엇을 머금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지금 무엇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본문 속의 막달라 마리아를 본받지 않는다면, 우리가 억만금을 손에 쥐고 집에 돌아간다 한들, 온 나라의 권력을 한손에 움켜쥐고 귀가한다 한들, 그 곳에 참생명과 평안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계시지 않는 곳의 결국은 죽음이요, 무덤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케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막달라 마리아가 되게 하옵소서. 생명을 머금은 막달라 마리아가 되게 하옵소서. 자신을 버릴 줄 알았던 막달라 마리아를 닮게 하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만을 끝까지 좇았던 막달라 마리아를 본받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주님께로 돌아가는 우리의 이 작은 삶을 통하여 무덤 같은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일터가, 우리의 사회가 영원한 생명의 진원지가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개켜 있더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18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암석을 뚫은 인공동굴이나 혹은 자연동굴을 무덤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좁은 입구를 통하여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세 면의 벽 아래에는 돌로 쌓은 긴 의자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수의로 싸여진 죽은 사람의 시신은 그 위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의 입구는 큰 돌로 막아 언제든 여닫을 수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시체가 완전히 썩고 나면 사람들은 무덤 문을 열고 들어가 유골을 수습하여 유골함에 넣은 뒤, 무덤의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습니다. 만약 시체가 다 썩기 전에 가족 중 누군가가 죽으면, 무덤 속에는 동시에 2구 혹은 3구의 시체가 안치되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무덤은 거의 모두 한 가문이나 씨족이 대를 이어 사용하는 가족 공동묘지인 셈이었습니다.

그나마 가족 공동묘지가 없는 가난한 자들은 죽는 즉시 땅 속에 매장되어 버렸고, 흉악한 범죄자나 저주받은 자들의 시체는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일반공동묘지'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완전 새 무덤에 장사된다는 것은 여간 부자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가난한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의 경우에는 시신이 그냥 땅 속에 매장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흉악범으로 십자가 형에 처해졌기에 기드론 골짜기의 일반 공동묘지 속에 던져져야만 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 41∼4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께서는 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빈민중의 빈민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장사된 일이 없는 완전 새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셨습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아리마대의 거부 요셉이란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새 무덤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단지 자기에게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을 사랑했기에 그렇게 했을 터였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의 그와 같은 행동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아리마대 요셉때문에 이사야 53장 9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죽음)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기에서 `그 죽음이 악인과 함께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완전한 의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강도와 같이 강도처럼 못 박혀 죽으실 것이란 뜻이요,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다'는 말은 빈민 중의 빈민이셨던 주님께서 부자의 완전한 새 무덤에 장사되실 것이란 의미였습니다.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새무덤을 주님께 드리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이 땅속에 매장되거나 일반 공동묘지 속에 버려졌더라면 이사야의 예언은, 아니 구약성경은 거짓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둘째로 아리마대 요셉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이 정말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아니었더라면, 주님께서는 땅속에서 온몸에 흙을 뒤집어 쓰신 채 일어 나셨거나, 기드론 공동묘지로 부터 다른 시체의 썩은 물에 흠뻑 젖으신 채 부활하셨을 터인데,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째로 무엇보다도 아리마대 요셉때문에 막달라 마리아가 꼭두새벽처럼 주님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시신이 비천한 자처럼 땅속에 매장되었더라면 어찌 막달라 마리아가 땅을 파헤치고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릴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흉악한 범죄자들의 시체가 우굴거리는 기드론 공동묘지라면, 어찌 그녀가 겁도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엄두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완전 새 무덤에 안치되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목격했기에, 다시 말해 그 속에는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그녀는 연약한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 주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안았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사랑하는 주님께 자신의 새 무덤을 드릴 때 이와같이 위대한 역사가 그곳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행하는 일이 아무리 하찮은 일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상상치도 못할 위대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미약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권면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는 한숨에 달려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그 말에 놀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뛰어 왔을 때 과연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수의―즉 세마포와 수건만 놓여 있었습니다. 이 세마포의 가치에 대하여는 이미 지난 주일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6절∼7절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쌓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우리가 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단어는 `놓였다'는 동사와 `개켜 있더라'는 동사입니다.

 

`놓였다'는 동사 ke mai는 아무렇게나 놓여진 상태가 아니라 정돈되어 놓여 있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또 `개켜 있더라'는 동사 entuliss 는 마치 붕대를 감듯 정성을 다한 행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 버린 무덤 속에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의와 수건만 남아 있되,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정돈되어 있었다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본문을 기록한 요한 사도는 본문을 통해 무엇을 강조하려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마태복음 27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수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마 27:57∼66)

 

예수님의 장례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뒤에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헛소문을 퍼트릴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 총독의 허가를 얻어 예수님의 무덤의 돌문을 봉인한 뒤 무장한 파수군으로 하여금 사흘동안 그 무덤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상상치도 못한 그들은, 사흘동안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하지 못하도록 막기만 하면, 부활을 예언한 예수님이야말로 허황한 사기꾼이었음이 저절로 증명되는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제일 먼저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2절)'고 말했습니다. 그녀 역시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은 이에 대한 반론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무덤 속에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의가 내팽개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결코 도난 당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한 것이 사실이라면, 무장한 군인들이 서슬퍼렇게 경비를 서고 있는 그 무덤에서 무슨 여유가 있다고 수의를 벗겨 정돈해 둔 뒤 시신만 훔쳐가겠습니까? 시간이 급한 만큼 수의가 입혀진 시신을 그대로 들고 나가는 것이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또 만에 하나라도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하는 자가 그 시신이 과연 예수님의 것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얼굴을 감싼 수건을 벗겨 보았다 치십시다. 그렇더라도 그 수건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어야지 어떻게 정성스럽게 개켜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문은 예수님의 시신이 절대로 도난 당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채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와 수건이 무덤 속에 정성스럽게 개켜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무덤 속에서 부활하셨음을 웅변하는 말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아니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을 정성스럽게 개켜놓아 두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예수님 부활의 귀중한 증거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 무덤을 자신을 위하여 마련해 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새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저 무덤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덤 속에 예수님을 장사 지내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찬란한 부활의 현장이요, 영원한 부활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는 그 부활의 현장에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는 무엇으로 남아 있습니까? 질서 정연하게 개켜진 세마포와 수건이었습니다. 만약 그 무덤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 무질서 하였더라면 그것은 단지 무덤이었을 뿐이요, 예수님의 시신은 도난 당했음이 분명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 있는 질서―그것이야말로 부활의 증거였고, 그 질서로 인해 그곳은 부활의 현장일 수가 있었습니다. 부활은 곧 질서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지 아십니까?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는 변함없이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고, 우주를 가리키는 단어 `cosmos'가 곧 `질서'라는 의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 신지 아십니까? 질서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의 현장에 남아 있는 부활의 증거가 바로 주님의 질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함인지 아십니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질서를 되찾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함인지 아십니까? 이 생명의 영원한 질서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 질서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하며 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이 질서를 생활화하고 매일 구현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질서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 생명이 무질서 속에 빠져 있다면 설령 그의 육체가 호흡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죽은 자와 진배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생명의 질서 속에 거하고 있는 자라면, 그의 육체는 호흡이 끊어졌다 해도 그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처럼 실은 영원한 부활의 현장 속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대한 은총이요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일이란 곧 하나님 앞에서 흐트러진 내 생명의 질서가 추스러지는 은혜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무질서한 내 삶의 혼돈(카오스)이 하나님의 코스모스(질서) 속에서 바로 세워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날로 인하여 새로이 일주일 동안의 우리의 삶이 생명의 질서와 진리의 질서를 누리고 구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수필가이자 철학자인 아하드 하암(Ahad Haam)은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켜 왔다기 보다는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켜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없이 2,600년 동안이나 유랑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나라도 민족도 벌써 완전 소멸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라를 잃은지 2,600년 만에 다시 옛날의 그 땅에 이스라엘을 복원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강인한 민족으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 안식일의 가치를 깨달아 철저하게 안식일을 준수하므로 하나님의 질서 속에 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질서 속에 있을 때 이 세상의 그 어떤 무질서도, 심지어는 히틀러의 광란의 무력도 그들을 영원히 쓰러트릴 수 없었음을 오늘도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정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도 주일을 휴일 되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치 마십시오. 일주일에 한번씩 주어지는 주일을 진정 주님의 날이 되게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안식하며 주님의 질서로 자신을 바로 세우십시오. 주님의 생명의 질서가, 진리의 질서가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일터에, 이 사회 속에, 모든 사람과의 관계속에 충만케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코스모스가 되게 하십시오. 그때 우리가 어디에 있던 그곳은 찬란한 부활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설령 무덤 속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질서의 주님.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주님의 질서 속에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신 주님! 오늘 우리를 주님의 질서 속에 바로 세워주시기 위해 주일을 허락해 주시니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매주 돌아오는 이 주일이 결코 휴일이 됨이 없이 언제나 질서의 주님의 날이 되게 하옵소서. 주일이 거듭될수록 우리의 생명 속에, 삶 속에 주님의 질서가, 생명의 질서가, 진리의 질서가 충만케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던 우리의 삶이, 우리로 인하여 우리가 있는 그곳이, 새 생명의 역사가 질서 정연하게 일어나는 영원한 부활의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막달라 마리아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18


지난 4월초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의 내부가 누전으로 인하여 완전히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2천년의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건대 인간의 실수로 인한 화재나 혹은 이교도들의 방화에 의하여 예배당이 불타는 사건은 가끔 있었기에, 예배당 화재 그 자체는 새삼스럽게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토리노 대성당의 화재가 많은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바로 그 성당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수의', 즉 예수님의 시체를 쌓던 것으로 알려진 세마포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가 3중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뜨린 뒤, 그`세마포'가 담긴 성궤를 안고 나오는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약 30년전 프랑스의 한 잡지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반출해야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1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토리노 성당에 보관중인 `예수님의 수의'였고, 2위가 미로의 비너스상이었습니다. 미로의 비너스상은 인간예술의 극치로 인정받고 있는 걸작 중에 걸작입니다. 실제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비너스상 앞에 섰을 때의 황홀감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정교한 예술품을 제치고 폭 1m 5cm에 길이 4m 20cm에 불과한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쌓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어떻게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을까요? 본문이 그 까닭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 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곳에 개켜 있더라.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3∼8)

 

안식 후 첫날 새벽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 졌다는 여인들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또 한 명의 제자인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뛰어 갔을 때,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세마포와 머리의 수건만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즉, 미의 극치인 미로의 비너스상을 제치고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삼베 수의가 지구상 최고의 보물로 꼽히는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 땅에 남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품으로 간주되는 까닭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왜 이탈리아의 소방대원들이 불길에 휩싸인 토리노 대성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 그 속에 있는 명화나 조각품을, 특히 금은으로 만들어진 호화스런 제기(祭器) 등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이 세마포만을 목숨을 걸고 반출해 내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2천년전 중동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세마포가 직조되고 또 통용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숱하던 세마포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아득한 옛날 이미 썩어 진토가 되었을 뿐입니다. 어찌 중동지방뿐이겠습니까? 전 세계적으로는 또 얼마나 많은 삼베가 있어 왔겠습니까?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삼베의 역사는 매우 길어, 한민족이 한반도로 이주할 때에 벌써 삼베를 가지고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삼베의 사용이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역시 신라 경주에서 추석날 삼베 짜기 시합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한반도에서 면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삼베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시대 때부터 크게 발달한 마직 기술은 이미 고려 때에 이르러 30승포, 40승포 같은 극세포 즉 본문이 말하는 세마포가 직조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이처럼 마직 기술이 일찌기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풍토상으로 한반도가 삼재배에 더없이 적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역사와 더불어 지난 수천년 동안 이 땅에서 직조되었던 그 수많은 세마포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 생산되고 있는 그 품질 좋은 세마포들이 2천년 후에는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이미 썩어져 흙이 되었고, 지금 쓰레기가 되고 있으며, 또 앞으로 진토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유한한 인간을 위하여 사용되는 인간의 소유는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영원한 생명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그것이 시체를 감싸는,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수의라 할지라도 그 영원한 가치를 결코 상실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의 세마포는 니고데모가 향품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에 감싸 드렸던 것임을 요한복음 19장 39절∼40절을 통해 이미 배워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니고데모가 2천년전 그 세마포로 자신의 수의로 삼았더라면, 그 세마포는 니고데모의 시체와 함께 벌써 흙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원하신 주님의 도구로 드렸을 때에, 전혀 귀할 것 없는 그 세마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제치고 `지구상 최고의 보물'이 되어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먼 훗날 그 세마포가 완전 부식되어 그 형체가 사라져 버린다고 할지라도 그 영원한 가치만은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누구에 의하여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 가에 따라 그 결과는 이처럼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그것들 중 2천년 후에까지 내게 남아 있을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값진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들이라면 우리는 실은 내일의 쓰레기, 미래의 진토더미 속에 쌓여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이 시체를 감싸는 수의, 아니 삼베조각처럼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신 주님, 영원한 진리의 도구로 쓴다면, 그 가치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상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들에 대해 소멸치 않는 가치를 부여하시는 분이시라면,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더더욱 존귀케 하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당신을 감쌌던 하찮은 수의를 지구상 최고의 보물 되게 하시는 주님께서 어찌 당신의 도구 되기를 주저치 않는 당신의 백성들을 더욱 존귀케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본문 속의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란 뜻입니다. 게네사렛 평원의 남단에 위치한 막달라는 농업 어업 제조업 조선업이 발달한 부유한 상업중심도시로써, 도시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있었습니다. 대형 경기장을 갖춘 로마의 모든 도시들이 그러했듯이 막달라 역시 환락과 타락의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 한가운데에서 살던 마리아는, 성경 속에 나타나는 다른 청순한 마리아들과는 달리 본래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눅8:2). 한 귀신도 아니요 일곱 귀신이나 씌운 여인이었다는 것은, 도덕적 정신적 영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한, 영육간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창녀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쓸모 없는 한심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 좇기를 중단치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줄 안 이상, 주님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 놀란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갈 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와 더불어 끝까지 그 현장을 지키고 있었음을 요한복음 19장 25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우기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던 주일 이른 새벽, 아직까지 온천지가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장사되신 무덤을 찾아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이른 시각에 그녀가 겁도 없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것은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함이었다고 마가복음 16장 1절∼3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무덤이 어떤 구조를 가졌기에 막달라 마리아가 이미 장사지낸바 된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릴 엄두를 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시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이 유월절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이었으므로, 이미 요한복음 19장 31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큰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의 장례식을 서둘러 끝내어야 했기에, 행여라도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이 덜 발라졌을까 우려하여 주일 꼭두새벽부터 주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의 중심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초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 중심이 귀한 까닭은 이때까지만 해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그녀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뛰어가 전한 말의 내용을 2절이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에다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2)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예수님의 시체가 도난 당한 줄로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빈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는 그 앞에서 슬피 울고 있었음을 본문 11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으로 부터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 마저 부활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도망가 버린 판에, 그 말씀을 들은 적이 없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인들 할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자신의 중심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완전히 돌아가신 줄만 알았음에도 주님으로 인해 얻게 된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 주님께 바친 그녀의 중심은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결코 흔들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막달라 마리아야말로 주어진 상황과 시간에 상관없이 자신의 전 인생을 바쳐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실천했던 진짜 제자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다음 시간부터 계속 살펴보겠지만 본문 18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18)

 

놀랍게도 그녀는 주님과 3년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제자들을 제치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첫번째 증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본래 막달라 마리아는 환락의 도시 막달라의 쓰레기 같은 창녀였습니다. 만약 그녀가 자신만을 위해 계속 살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창녀로 비참하게 썩어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찮은 여인이 주님의 도구로 자신을 온전히 바쳤을 때 인류 최초로 부활을 증언하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야 말로 부활의 증인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하찮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을 주님의 도구로 바칠 때 그 삶의 가치가 얼마나 영원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증명해 준 위대한 증인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막달라 마리아란 더 이상 비천한 창녀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녀야말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의 영원한 표상인 것입니다.

 

 

네덜란드 `자유대학'(The Free University)에서 미술사 교수로 봉직했던 한스 로크마커(H.R.Rookmaaker) 교수는 그의 저서 `예술은 변명을 요하지 않는다'(Art needs no justification)에서 1800년경 일본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호쿠사이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잘 아는 지인이 호쿠사이를 찾아와 수닭 그림 그려주기를 부탁하자 호쿠사이는 일주일 후에 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그가 찾아 왔을 때 호쿠사이는 약속을 2주일 연기해 줄 것을 청했습니다. 2주일 후에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호쿠사이는 이번에는 두 달을,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반년을 연기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3년이 흘러가자 그림을 부탁했던 사람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매우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호쿠사이는 알겠다며 그 자리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어 순식간에 수닭을 그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훌륭한 명화였습니다. 그림을 부탁했던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분노하면서 말했습니다.

"이렇게 순식간에 그려 줄 수 있으면서 왜 3년씩이나 기다리게 했소?"

그때 호쿠사이는 말없이 그 사람을 자신의 화실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놀랍게도 그 화실의 사방벽은 호쿠사이가 지난 3년동안 밤낮으로 습작한 수닭 그림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명화는 밤낮없는 훈련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비단 예술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밤낮없는 훈련을 배제하고서는 참다운 프로란 어떤 분야에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세계 또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왕 주님을 믿을 바에야 어설픈 기독교인이 아니라 프로 크리스천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처럼 밤낮 구별없이 주님께 우리의 중심을, 우리의 전 인생을 드립시다. 상황을 따짐 없이 진리의 도구 되기를 주저치 마십시다. 그것만이 이 타락한 도시 속에서 막달라의 창녀같이 비천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부활의 영광스런 첫 증인이 된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가치롭게 세우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을 위해 예비했던 새 무덤 속에 자신의 시체를 눕혔더라면, 그것은 썩은 시체의 악취만을 풍기는 더러운 죽음의 종착역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준비했던 세마포로 자신의 수의를 삼았다면, 그 세마포는 니고데모의 시체와 함께 벌써 진토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면, 끝내 막달라의 창녀로 그 인생이 썩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아침에도 우리를 사랑하시사 주님 앞으로 불러주시고, 나 자신의 본능과 욕망만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아무리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실은, 내일의 쓰레기 더미 속에, 미래의 진토 무더기 속에 나 자신을 방치해 두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시니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비옵건대 우리 모두 막달라 마리아처럼 프로 크리스천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밤이든 낮이든 새벽이든 구별없이 우리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주어진 상황을 따짐 없이 우리의 삶이 온전한 진리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타락한 이 환락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쓰레기처럼 썩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비천한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얻고 누리는 진리의 예술품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의 종착역이 공동묘지가 아니라, 육체의 생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안식후 첫날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18


드디어 이번 화요일(8월 5일)오전 10시에 정신여고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믿으시고 이 일을 맡겨주시고 오늘이 있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연건평은 정신여고생 전원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대강당, 밤에 잠을 자면서 영성훈련을 할 수 있는 수련관, 소강당과 각종 활동실및 우리 교회가 사용할 공간을 포함하여 총 2,380평에 이릅니다. 이에 대한 공사비는 설계료를 포함하여 70억원으로 예상하고 정신여고쪽에서 10억원, 우리교회에서 60억원을 부담키로 하고 일이 추진되었습니다. 60억원 이라면 참으로 엄청난 금액입니다. 만약 우리교회가 창립 때부터 헌금전액을 우리교회 자체만을 위해 사용하는 교회였다면, 정신여고가 아무리 미션스쿨이라 할지라도 남의 학교 강당을 지어드릴 엄두를 감히 낼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이런일에 개입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전 헌금액의 50%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게 하시므로, 교회가 이웃 즉 사회와 앞으로 어떻게 구체적인 나눔을 실천해야 할 것인지 미래의 본보기로 우리를 택하시고 이일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헌금의 50%를 이웃과 나눈다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헌금의 50%를 계속 모아 가다보면 몇년후에는 60억이 되겠지만, 공사가 1년여만에 끝나는 것을 감안하면 목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사부터 해준 뒤, 연차적으로 공사비를 결제 받는 건설회사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고맙게도 벽산건설이 우리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해 주었습니다. 만약 그때 벽산건설이 우리의 부탁을 거절했더라면, 이 일은 아예 진행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벽산건설은 만약 벽산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건설회사가 있으면 그쪽을 선택하라는 배려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설계가 끝난 뒤 벽산을 포함하여 세 건설회사를 상대로 입찰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개봉결과는 현대건설이 부가세를 포함하여 85억 7천 2백만원, 벽산건설이 80억 1천 4백만원 으로 모두 우리의 예상금액 70억원을 초과하는 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박재준 집사님이 경영하는 강산건설이 66억 5천 5백만원으로 응찰하였습니다. 그 금액은 설계비와 감리비를 포함하면 우리의 예산70억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금액이었습니다. 박재준 집사님은 주님의 교회 제직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맡겨주신 이 대 사명을 솔선수범하여 감당키 위해 오직 헌신과 봉사의 차원에서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내일 모래 뜻깊은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완공은 13개월 후인 98년 9월로 예상하고있습니다. 재정위원회에서는 공사가 끝난 2년후인 2천년 12월말까지는 공사비를 다 지불 할수있을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특별히 날을 정하여 따로 헌금치 않기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많은 성도님들이 정신여고 강당건축기금으로 헌금해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이 일에 관한 한 따로이 헌금일을 정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동참하기 원하는 분들은 아무때고 자유롭게 참여하면 되겠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징검다리역할을 해주었던 벽산건설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현대건설측에도 감사드립니다. 더욱이 이 궂은일에 앞장선 강산건설측에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공사가 끝날 때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더 크게 드러날 수 있도록 교우 여러분들의 중단 없는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17주 동안 살펴보았던 요한복음 19장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은 예비일, 즉 안식일 전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으므로 바로 금요일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무덤'이란 이미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식을 위하여 스스로포기했던 자기의 새 무덤이었으며, `예수를 거기 두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운명하신, 다시 말해 영혼이 돌아가신 예수님의 육체 즉 시신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1)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그때가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라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안식후 첫날, 즉 주일 새벽이었던 것입니다. 금요일 오후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사흘째 되는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흘동안 영혼이 떠나신 예수님의 시신은 분명히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 속에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질문 한가지가 제기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속에 누워있는 동안 그 육체를 떠난 예수님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 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이때 영혼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까? 그때 예수님의 영혼도 육체와 함께 죽어버렸습니까? 완전 소멸되어버렸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구원을 요청하는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말씀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바 `너'와 `나'는 예수님과 강도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뜻하시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마태복음 17장에는 소위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 가셨을 때에 하늘에서부터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장면을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 오시기 1천 5백년 전에 이미 그 육체가 죽은 자였습니다. 그의 시체는 분명히 모압땅에서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에 살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영혼이 살아있다면, 예수님의 영혼이 육체와 함께 죽어 버렸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더욱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최후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 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46)

 

운명하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드린 것은, 인간의 육체는 죽을 망정 영혼은 결코 죽지 않음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흘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 해답은 이미 성숙자반 제7과에서 배운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드리고있는 사도신경속에 제시되어있습니다. 먼저 첨부된<사도신경 한글 영어 원문비교표>를 살펴보십시다. 여섯 번째 항이 한글 쪽은 공난인데 반해 영어 쪽은 비어있지를 않습니다. 즉 한글에는 없는 내용이 영어 원문에는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He descended into hell" (그 분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예수님의 육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 속에 장사되셨지만, 주님의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 계시어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미국인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경험이 있는 분은 아시겠지만, 미국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속에는 반드시 이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찬송가중에 앞면에 사도신경 영어원문이 인쇄되어있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거기에도 이 구절은 어김없이 들어있습니다. 왜 한글에는 없는 구절이 영어원문에는 포함되어있습니까? 미국사람들이 독단적으로 첨가한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1천 3백년전 교회에 의해 확정된 사도신경 라틴어 원문에 이 구절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첨부된 <사도신경 발전과정표>를 보십시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 기초한 신앙고백이란 의미에서 사도신경, 혹은 사도신조로 불리우는 이 내용은 2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세례식에서 문답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령 표의 1번 항에서 보는바와 같이 집례자가 `당신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아버지를 믿느뇨?' 하고 물으면 수세자가 `예'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서면서 문답형의 내용이 고백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즉 수세자가 세례받기전에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이 내용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7세기를 거치면서 오늘과 같은 내용으로 확정되면서 일반 예배시간에도 지금처럼 암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도표를 자세히 보면 시대를 거듭하면서 고백의 내용이 계속 보완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네 번째 항입니다. 2세기와 4세기 때에는 보이지 않는 "음부에 내려 가셨으며"라는 구절이 8세기의 확정문속에 보완되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누워있는 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 라는 질문이 그때 이미 제기되었고, 교회는 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와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해답을 제시한 근거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 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 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벧전 3:18∼20)

 

하나님께서 패역한 인간들을 홍수로 심판하실 때에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식구 8명뿐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홍수에 휩쓸려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것은 그들의 육체였지 영혼까지 죽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영은 여전히 살아 `옥'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옥이라 함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이 떨어지는 `지옥'혹은 음부'라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그 육체가 운명하셨던 예수님의 영혼은 바로 그 지옥, 음부로 내려가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해 혹은 알지 못해 저주받았던 그 불쌍한 영혼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 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4:6)

 

지옥에 떨어진 저주받은 영혼들도 구원받아 살길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영이 그곳에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에 대하여 신학적 이견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지난 1,300년동안 교회는 한결같이 이 구절들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누워있는 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지옥에 내려가 복음을 증거 하셨다고 고백해왔으며, 오늘날도 캐톨릭을 비롯하여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사도신경의 원문인 까닭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의 개신교만은 이 구절을 빼버린 불완전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왜 어떻게 이 구절이 삭제되어, 한국의 개신교 신자만은 사도신경속에 이런 구절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지못하고 알려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이런 구절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 하지도 않습니다. 괜히 말 잘못했다가 구설수에 오를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한국교회는 정말 정직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에서 까닭없이 삭제되어있는 부분을 복원시키고 주님께서 영으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까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주저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이유인 즉은 이것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만이 첫째로 성경과 사도신경을 더 이상 왜곡하는 우를 범치 않는 것이요, 둘째 이것을 알 때에만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온전하신 구원자로 바르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신경을 그림으로 표시한 첨부된 도표를 보십시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을 구원하시려 영으로 음부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나라에 오르셨습니다. 말하자면 천상천하 음부의 세계가 모두 주님의 완전한 구원의 능력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음부의 세계만은 예수님의 구원능력에서 제외된다면 어찌 그 분이 온전한 구원자일수 있겠습니까? 천상 천하 음부가 모두 주님의 통제력 속에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영육간에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모 대학 기독신우회를 인도하는 목사님이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이 말씀을 우리의 정서에 맞게 `다 품었다'고 해석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형편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마음속으로 그를 품기만 하면, 그의 잘못과 모든 허물을 다 감싸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수치를 다 품어주셨습니다. 당신을 못박아 죽이는 군병들까지도 완전히 품어주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사 주님을 믿지 못해, 알지 못해 저주받은 음부의 영혼까지 품어주심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천상 천하 음부를 초월하여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영원한 사랑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으로 인해 낙망하거나 절망 속에 빠져있습니까? 그러나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다. 주님을 불신하여 지옥에 떨어진 영혼마저 품어주시는 주님께서 왜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의 미래를 품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왜 지금 우리를 그 사랑의 품으로 품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분의 본심을 의심치 마십시오. 온전히 그분의 법도안에 거하십시오. 이 세상의 그 어떤 상황도 우리의 심령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참 생명과 소망을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허망한 나의 뜻이 아니라 나를 품고 계시는 주님의 영원한 뜻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비로소 두 눈으로 확인하며, 주님을 진심으로 찬양케 될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아침 주님께서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시사 그곳의 불쌍한 영혼까지 품어주신 것을 알게해주셔셔 감사합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 나를, 나의 미래를 품고 계심을 깨닫게 하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주님의 품속에서 변함없는 소망의 사람,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어렵고 혼란한 세상을 따뜻하게 밝히는 희망의 등대, 진리의 등불들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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