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집에 모시니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개신교 목사님 중에 직접 수도원을 창설하고, 그 속에서 수도자로 살아오는 분으로 엄두섭 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 노 목사님이 교회를 목회 하는 목회자의 삶으로부터, 한평생 수도원 운동에 앞장서는 수도자로 돌아서게 된 데에는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30세 되던 해에 목사 안수를 받고 처음 부임한 곳은, 전라남도 광주 인근의 남평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막상 그 곳에 당도하고 보니 교회의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하였습니다. 까닭을 알아보았더니, 그 교회에서 신앙적으로 가장 모범적이었던 집사님 한 분이 얼마 전에 교회를 떠나 `산중파'를 따라 가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산중파'의 지도자는 이현필이란 사람이었는데, 그 무리들은 산 속에서 기거하면서 기성교회에는 다니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 성경을 공부하며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그들을 `산중파'라 부르면서 아예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부임한 엄목사님 역시 그렇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라도에는 공산당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는데, 엄목사님이 목회 하는 교회에도 공산당원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5명이나 될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6 25 전쟁이 터졌습니다. 인민군들에 의해 서울이 점령되었다는 정보를 제일 먼저 입수한 사람들은 광주를 비롯한 도시 큰 교회 목사들과 힘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연줄을 대어 상무대 장교들의 군 트럭을 타고 서둘러 부산으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인민군들이 전라도까지 쳐들어 왔을 때 곤욕을 치루어야 했던 사람들은, 시골 작은 교회 목사들과 힘없는 교인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는 미국 여인으로 한국명이 유화례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끝까지 돕다가 그만 피난 시기를 놓쳐 버린 채, 인민군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국적상 만약 인민군에게 붙잡히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도와 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미국 여선교사의 생명보다는 각자 자기의 생명이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목숨을 걸고 미국 여선교사를 구출해 낸 사람들이 바로 `산중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던 미국 여선교사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된 자의 의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큰 궤짝을 만들어 여선교사를 그 속에 들어가게 한 뒤 번갈아 지게에 지고, 도중에 사람들이 물으면 짐짝이라 대답하면서 70리나 떨어진 화순 화학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산중턱에 있는 동굴에 선교사님을 숨겨놓고, 인민군들이 해를 넘겨 물러갈 때까지 산중파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해 그녀를 지켰습니다. 그 와중에서 산중파 사람 두 명이 빨치산에 발각되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산중파 사람들의 이와 같은, 생명을 건 헌신과 사랑에 의해 미국 여선교사는 끝내 무사히 구출될 수가 있었습니다.

 

엄목사님은 그 사실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으면서 과연 누가 진정한 크리스천인지, 누가 참으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인지, 어느쪽이 정말 교회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8년만에 서울로 목회지를 옮기어 도시 그리스도인들의 타락상을 더욱 절실하게 확인한 뒤, 옛날 산중파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목회를 관두고 수도원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크리스천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크리스천이란 그 심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만 어떤 상황 속에서든, 자신이 모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분별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생모 마리아를 가리켜 `보라, 네 어머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당신의 어머니를, 요한이 친 어머니처럼 봉양해 줄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27)

 

그 날로부터 제자 요한은 지체없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서 모셨습니다. 하루 이틀 혹은 한 두 달 모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요한은 장수한 마리아가 늙어 죽을 때까지, 다시 말해 요한 자신이 늙은이가 될 때까지 마리아 모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친 어머니를 한평생 한 집에서 모시고 사는 것도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때론 뜻이 맞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서로 마음이 상할 때도 있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자기 어머니도 아닌 남의 어머니를 한평생 모셨습니다.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과 제자 요한을 사촌지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의 어머니가 친 자매지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25절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모가 서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는바, 그 이모가 바로 요한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촌 요한에게도 이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요한이 마리아를 한평생 모시기에 이모인 까닭에 특별히 편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척지간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으므로 남남일 때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한결같이 모시기를 중단치 않았습니다.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성미가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에게 은밀히 부당한 청탁을 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던 인간이었습니다. 그와같은 요한이 어떻게 한평생 그 일을 해 낼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사도 요한이 그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집에 모시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만 모신 것 같습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요한은 남의 어머니를 한평생은 고사하고 한 두 달도 제대로 모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기 이전에, 자신의 심중에 주님을 먼저 모셨던 것입니다. 자신 속에 모시고 있는 주님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님의 사랑에 의해, 어떤 상황 아래서든 변함없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노인이 될 때까지 할머니 마리아를 모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주님을 모셨을 때 단지 마리아만 섬겼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자신이 모신 주님으로부터 늘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모신 그의 심중에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마리아 봉양이 끝났을 때에, 노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요한1서, 2서, 3서를,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한평생 주님을 모시고 살지 않았더라면 결코 가능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한평생 주님을 모시고 살면서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아니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날마다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 4:7∼8)

 

큰 교회 목사들과 힘있는 교인들이 관심도 없이 내팽개쳐두고 가버린 미국 여선교사님을, 그들로 부터 이단시 당하던 산중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건 채 지게에 지고 70리나 떨어진 산 속으로 들어가 동굴에 숨겨놓고 해가 바뀔 때까지 먹을 것을 구해 공궤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들이 여선교사님을 극진히 모셨음을 의미합니다. 모두 자기 살 궁리만 하는 그 살벌한 전쟁판에서 어찌 산중파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아니 두 사람의 생명을 잃으면서까지 미국 여선교사님을 끝까지 모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야말로 진정 그 심중에 주님을 모신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심중에 계시는 주님 때문에,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 사랑을 힘입어 그들은 그녀를 모시고 섬기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산중파의 지도자였던 이현필은, 추운 겨울 신발도 없이 선교사를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산속을 헤매고 다니면서도 주님을 향해 이런 사랑의 시를 남겼습니다.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 준령 험치않소

방울방울 땀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주님 가신 길이라면, 가시밭도 싫지 않소

방울방울 피방울만 보고 따라가오리다.

 

주님 계신 곳이라면, 바다끝도 멀지 않소.

물결물결 헤엄쳐서 건너가서 뵈오리다.

 

주님계신 곳이라면, 하늘 끝도 높지 않소.

믿음 날개 훨훨 쳐서 올라가서 뵈오리다.

오, 주예수, 주님이여, 이 천한 맘에 계시오니

밝히 인도하여 주옵시기

꿇어 엎드려 비나이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만약 교회가 타락하고 교회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건물이 낡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교인들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을 그 심중에 모시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고서는 교세가 아무리 커도 사도 요한처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참 제자가 될 수 없고, 주님을 심중에 모시지 않고서는 예배당이 제아무리 웅장해도 소위 `산중파' 사람들과 같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은 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방법이 없고, 주님을 모신 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니 될래야 아니될 수도 없음은,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빛이요 소금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고서는 교회가 교회다울 수 없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다울 수 없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은 창립 9주년을 맞는 기념주일입니다. 9년전 우리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교회가 되자는 의미에서 교회 이름을 `주님의 교회'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에 속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각자가 사도 요한과 같은 제자, `산중파' 사람들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목사를 비롯하여 모든 임직자들은, 그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분명한 본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교회 역시 우리가 주위에서 더러 볼 수 있는, 추악한 사람들의 교회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 개인 신상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1년 후면 저는 이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저 스스로 저의 임기를 10년으로 정하고 떠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 아닌 사람을 우상으로 섬기고 모시는 우를 피차 범치 않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교회가 진정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주님의 교회로 지속되는 데에 저 자신이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얼마전 익명의 교우님으로부터 편지를 한통 받았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이 지금의 제 심정을 너무나도 잘 피력하고 있기에 이 시간 읽어 드리겠습니다.

 

목사님께 드립니다.

 

저는 주님의 교회에 등록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밖에서 들은 이야기도 있었고, 막상 등록하고 다녀보니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 나름으로는 신앙도 성장한 것 같고, 교회와 목사님과 구역 식구들과 모든 성도들이 큰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 자랑은 그 안에 내재하시는 주님께 대한 자랑임은 말할 것도 없구요. 그런데 최근에 제 마음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금년에 착공할 정신여고 강당 건축과, 내년 중반이면 떠나실 목사님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이기심에서 비롯된 근심, 걱정의 소리를 듣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속 남아 계셔서, 늘 신앙의 좌표가 되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 뿐, 목사님의 하나님에 대한 서원을 우리는 당연히 더 우위에 두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그러기에 저는 목사님의 결단을 존중하며, 정신여고 강당 건축도 한국 교회 건축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두손들어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일부에서, 정신여고 강당 건축이 끝날 때까지는 목사님이 계셔야 한다는 둥, 심지어는 목사님이 떠나시고 나면 교회에 동요가 있을 것이라는 둥, 지극히 인간적인 염려의 소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저는 심히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입으로는 주님의 교회가 참 좋은 교회이고 이재철 목사님은 훌륭한 분이라고 칭찬하면서, 막상 그 배후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결국 눈에 보이는 교회와 상대적으로 다른 목사님보다 좀 나은 자연인 이재철 목사님만 보았기에 이런 염려의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염려의 소리는 그 동안 목사님께서 일관되게 가르치신 내용과도 크게 배치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가 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목사님의 결심까지도 존중할 수 있어야 하고, 목사님께서 떠나신 후에도 정신여고 강당 건축은 물론, 교회가 전혀 동요없이 더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줄 때, 비로소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했다는 증거가 드러날 줄 믿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일부의 염려처럼, 목사님 떠나시고 난 다음 교회가 흔들린다면 주님의 교회를 주목하고 있던 교계로부터 "그러면 그렇지 주님의 교회인들 별 수 있나" 이런 비웃음을 받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우리 교회 교우님들이 이재철 목사님만 보고, 이재철 목사님을 있게 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우를 정말 범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저는 이 익명의 교우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교우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이 분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이미 이분과 같은 믿음을 갖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지난 9년동안 여러분들께서 이 부족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해 주셨는지 눈물겹도록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사랑이 없었던들 오늘의 저는 존재치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누구보다도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해도 우리는 주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그 분을 중심에 모시고 그 분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만약 제가 주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로 변함없이 존속케 하기 위하여 떠남으로 인하여 이 교회가 흔들린다면, 이것이 어찌 주님의 교회일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어찌 믿을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정말 살아계시고 진정 이 교회의 주인이 되신다면, 저처럼 부족한 사람과는 비교가 안될 훌륭한 분을 이미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 왜 훈련시키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 분을 도구 삼아 어찌 이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우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만에 하나라도 여러분의 심중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인간 이재철이 더 깊게 각인 되어 있다면, 이제부터 1년 내에 그것을 지워야만 합니다. 주님보다 인간 이재철을 더 깊이 새기는 것은 여러분과 저 자신을 동시에 망치는 일입니다. 자금부터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내년에 새로 오실 목사님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맞을 준비를 해야합니다. 그때 우리의 교회는 진리와 생명과 사랑과 봉사와 개혁과 헌신이 멈추지 않는 영원한 주님의 교회가 될 것이며, 우리 모두는 썩어 가는 이 도시 속에서 참된 생명의 밀알이 되는 진정한 산중파 사람들―곧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참 제자 요한이 될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우리의 고백을 기뻐 받으시고, 그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친히 세우시사, 지난 9년 동안 주님께서 한결같이 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 주셨던 것을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일 수 있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을 중단치 말게 하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우상시되고 사람이 주인 되는, 사람의 집단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심령을 붙들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교회가 언제나 진리와 생명, 사랑과 헌신, 봉사와 개혁이 넘치는 주님의 교회 되게 하시고, 모든 교인들이 썩어 가는 이 세상에 생명의 불씨를 던지는 산중파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1년 후에 오실 새목사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하시고 주님의 방법으로 멋지게 훈련시키시고 계심을 믿사오니, 그 분과 더불어 이 주님의 교회가 21세기 이 땅의 역사를 밝히고 맑히며 선도하는 빛과 소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 아멘 ―

네 어머니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작가 조연경씨의 작품 중에 `효도별곡'이란 콩트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만두집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부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어김없이 만두가게에 나타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만두집 부부는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주 수요일 3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따로따로 만두집으로 들어선다든가, 식탁에 마주앉아 서로 쳐다보는 표정 등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개는 할아버지가 먼저 오는 편이었지만, 비나 눈이 온다거나 날씨가 궂은 날이면, 할머니가 먼저 와서 구석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할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만두를 시킨 뒤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먹을 생각도 않고, 마치 이별을 앞둔 젊은 연인들처럼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로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상대에게 황급히 만두를 권하다가 다시 눈이 마주치면,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였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부지간 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만약 부부라면 매번 만두집에 따로 나타날리도 없고, 만날때마다 그처럼 서로 애절하게 쳐다보다가 헤어질 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를 옛날 `첫사랑'의 관계로 잠정 결론을 내렸습니다. 몸은 늙어도 사랑은 늙지 않는 법이기에 나이 들어 우연히 재회한 첫사랑의 연인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젊은 시절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의 아쉬움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그날 따라 할머니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만두 하나를 집어 할머니에게 권했지만 할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따라 할머니는 눈물을 자주 닦으며 어깨를 들먹이곤 했습니다. 한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만두 값을 치룬 할아버지는, 그날 만큼은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만두집을 나섰습니다. 곧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며 걷는 할머니를 어미 닭이 마치 병아리를 감싸듯 감싸안고 가는 할아버지―그 두 노인의 뒷모습이 왠지 가슴 아프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수요일도, 또 그 다음 수요일에도 두 노인은 영영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어느 수요일 정각 오후 3시에,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만두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부부는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얼굴은 예전과는 달리 몹시 초췌해 보였고, 진심으로 반가와하는 부부를 향해 할아버지가 답례로 보인 웃음은 울음보다 더 슬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만두집 여자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도 곧 오시겠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습니다.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만두집 부부는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뜨릴 만큼 놀랐습니다. 그리고 마치 독백하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사연을 듣고서는, 부부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첫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어엿한 부부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수원에 있는 큰 아들의 집에서,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둘째 아들의 집에서 각각 떨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두 분의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식들이 싸운 결과였습니다. 큰 며느리가 다 같은 며느리인데 자기 혼자만 시부모를 모두 모실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서는 바람에, 아들들이 공평하게 한 분씩을 모시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서울과 수원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 세시만 되면 마치 견우직녀처럼 그 만두집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온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 나만 죽으면 돼, 천국에서는 같이 살 수 있을거야."

 

 

연로한 부모님을 생이별시켰던 그 자식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자식들에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피치 못할 절박한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자식들이 부모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있었더라면, 부모로 인해 이 땅에 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었고, 부모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음에 대한 긍지가 있었다면,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다못해 달동네 삭월세 방이라도 얻어 함께 기거토록 해 드릴지언정, 그 어느 때보다도 삶의 반려자가 필요한 노부모를 생이별시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가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십계명 중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작년 어버이 주일 `공경하라'는 히브리어 `k bad'는 `무겁다'는 뜻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즉, `공경한다'는 것은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부모님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경륜의 무게, 인식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를 인정하면 귀히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게'란 `긍지'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 인생의 무게를 존중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만약 이 긍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무게를 인정하기는커녕 깃털보다 더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란 함께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 용돈을 얼마나 드리느냐, 얼마나 호강을 시켜 드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효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에 대한 긍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벌써 15 년전의 일입니다. 일본 혹가이도의 삿뽀로에서 돈을 많이 번 재일교포 한 분이, 형편이 어려운 재일교포 노인들을 위한 최신 시설의 양로원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지를 직접 답사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연 소문대로 양로원은 호텔과 같은 수준의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많은 노인들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영양사와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재일교포 노인을 위해 지어진 그 양로원에 재일교포 노인은 막상 1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막상 시설 좋은 양로원에 재일교포 노인들이 들어가고 싶어해도, 자식들이 혹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까 두려워 반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효자이어서 노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불효자라는 욕을 듣지 않기 위하여, 실제로는 전혀 효도를 하지 않으면서도 부모님을 단지 가두어 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낳아 주신 부모님이 단지 귀찮아서, 혹은 남의 손을 빌어 형식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양로원에 보내는 것은 물론 천륜을 어기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자식이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부모님께서 노인들을 위해 특수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양로원에서 같은 또래의 노인들과 함께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시기에 양로원에 모셔다 드리고 정기적으로 찾아뵙는다면, 그것은 결코 불효가 아닙니다. 도리어 참된 효도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한 집에 모시고 살면서도 함께 사는 애완용 강아지만도 못하게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씻을 수 없는 불효입니다.

 

따라서 내 부모님의 재산이 얼마냐, 내 부모님이 얼마나 출세한 분이냐, 얼마나 배운 분이냐에 상관없이, 그 분의 자식으로 태어난 데 대한 긍지가 참된 효도의 필수조건이 됩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도 존중도 섬김도 오직 이 긍지로부터만 비롯되는 까닭입니다.

 

 

본문 26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사용한 호칭 `여자'란 단어 `gunee'는 이스라엘인들이 존경하는 상대에게 사용하는 경칭이라는 것과,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에 하신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한 성도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신 것은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을 일컫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적절한 질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모친 곁에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사도요한이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7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제자 요한과 예수님은 친형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자기 친 어머니처럼 모셔 줄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해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고 말씀 하신 것은 당신 자신이 마리아의 아들이란 뜻이 아니라, 요한을 가리켜 앞으로 요한을 양아들로 삼으라는 의미란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래서 표준 새 번역 성경은 아예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어머니를 보시고, 또 그 곁에 자기가 사랑하는 제자가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자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셨다."

 

즉 본문에서의 아들이란 사도 요한임을 단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황적으로나 문맥적으로 대단히 설득력있는 해석입니다. 저 역시 원문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 자신이 아들이란 말인지, 아니면 사도요한이 아들이란 말인지를 밝혀 줄 주어와 동사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본문의 아들을 사도요한과 예수님 중 어느 쪽으로 번역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이야말로 예수님의 효성을 강조하는 구절로 인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친 어머니였던 마리아에 대하여, 효도와는 거리가 멀었던 분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12살 되던 해 가족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어머니 마리아가 그만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심정이 어떻했겠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사흘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어린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그리스도로서의 공생애를 위해 출가한 예수님을 어머니 마리아가 찾아갔을 때 에도,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48∼50)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이와 같은 언행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볼 때 불효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리켜 불효자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부모공경의 본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그 근거는 요한복음 2장에 나타난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와 오늘의 본문 두군데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라는 곳의 혼인 잔치 집에 어머니와 함께 참석하셨을 때, 마침 그 집의 포도주가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기적을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직은 당신의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강권하자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굽히고 어머니의 명령에 순종하여 생애 첫 번째 기적을 행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효성을 강조할 때마다 늘 인용되는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의 일이었습니다. 그 이전은 물론이요 그 이후 역시 예수님의 효성을 엿볼 수 있는 기사는 복음서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운명하시기 직전, 오늘의 분문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효성을 발견하고 강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이 구절은 정말 중요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이 구절이 없다면, 가나의 혼인 잔치 기사 하나 만으로 예수님을 효자라 강조하기엔 너무나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란 주님의 말씀은 모친 마리아에게 단순히 사도 요한을 아들로 삼고 살라는 소개의 말 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말해 어머니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살다가 기껏 죽기 직전 다른 사람을 아들로 소개나 시켜주는 예수님이야말로, 단지 자식으로서의 형식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이별시켜 놓고도 부모를 모신다고 생각하는 자식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저 애정도 없이 남의 손을 빌어 효도아닌 효도를 하기 위해 부모를 양로원에 떠 맡겨 버리는 자식들과 다를 바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구서야 어찌 예수님께서 부모공경의 본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본문 속의 아들은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던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발견하셨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에게 어머니보다 더 그리운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에 두 팔을 벌리신 채, 당신 자신을 가리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 보십시오. 바로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그것은, 어머니 마리아가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동정녀 처녀의 몸으로 당신을 잉태하고, 당신을 낳고, 당신을 키워 주었기에,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시어 그리스도로서 구원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다는, 어머니에 대한 주님의 긍지의 대선언이었던 것입니다. 동정녀 처녀였던 어머니가 내 어머니 되어 주지 않았던들, 그 모든 일이 가능할 수 없었다는 긍지로운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 한 마디로 인해,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으므로 마리아가 세상사람들로 부터 겪어야만 했던 온갖 고초와 고난의 고통이 눈녹듯 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머니에 대하여 이처럼 긍지를 갖고 계셨기에, 비록 주님께서 어머니와 떨어져 사셨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성만은 변할 수가 없었고, 바로 이 긍지로 인해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 하시며 당신 모친의 여생을 간절하게 부탁하실 수 있었고, 남의 손을 빌어 효도하려는 여타 인간들과도 구별되실수 있었고,그래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예수님의 삶 속에서 성취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 살아생전 효도를 다 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나이들수록 그것을 예외없이 후회하게 되는지 아십니까? 이제 곧 죽으면 하나님과 먼저가신 부모님을 만나게 될 것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효도라는 단어의 의미가 퇴색해 가는 비정상적인 세태 속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제5계명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주셨던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찾으십시오. 비천한 달동네 나사렛 출신의 마리아가 단지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긍지가 되듯이, 우리의 부모님이 아무리 늙고 병들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에 의해 우리 부모님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긍지가 될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해 이 긍지를 갖고 있는 한, 설령 남에게 불효처럼 보이는 행동도 그 본질은 실은 효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긍지를 갖지 못한 자식이라면, 그가 부모에게 행하는 것들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또다른 불효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녕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오늘부터 우리 모두 부모님을 향하여 주님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긍지로운 고백의 삶을 시작치 않겠습니까?

`보십시오. 저는 바로 부모님의 자식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아름답게 펼쳐질 것입니다.

 

 

기도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부모님 아니셨더라면 지금 우리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서 빼시고 빼시어, 우리 존재의 통로가 되게 하신 부모님에 대해 긍지를 갖는 자식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 긍지로부터만 참된 효도가 시작됨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자녀된 긍지로부터 비롯됨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 긍지 속에서 하나님 공경과 부모 공경이 우리 삶으로 성취되게 하시고, 그 누구도 아닌,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분별하고 실천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불효자처럼 보이는 효자 가 될지언정, 효자처럼 보이는 불효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부모 공경이 연례행사가 아니라 매일의 삶이 되게 하옵서소. 진정한 부모공경의 본이 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옵서소.

― 아멘 ―

여자여 보소서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얼마 전부터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이야기 중에 `만득이 씨리즈'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득이라는 아이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귀신과, 그 귀신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만득이에 얽힌 이야기 씨리즈입니다. 귀신이라고 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호칭만 귀신일 뿐 실은 사랑과 인간미 넘치는 존재입니다. 한가지 이상한 것은 아이들은 `만득이 씨리즈'를 이야기하면서 깔깔거리며 재미있어 하는데, 어른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전혀 우습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아이들이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즐기는지 이해하기조차 힘듭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식사 시간에 아이들이 서로 `만득이 씨리즈' 이야기를 하며 저희들끼리 우스워할 때, 무엇이 그토록 우스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오히려 아이들이 이상하다는 듯 `왜 아빠는 우습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만득이 씨리즈'에 대한 정신분석학자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즉 이야기 속의 귀신은 아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간섭하며 잔소리하는 부모를, 그리고 만득이는 그러한 부모의 잔소리로부터 해방되기 원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나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만득이 씨리즈'를 서로 이야기하고 폭소를 터트리면서, 끊임없는 부모의 잔소리로 인한 스트레스를 자신들도 모르게 해소한다는 것입니다. 그 글을 읽은 뒤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만득이 씨리즈'를 들으니 저도 아이들과 함께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설을 덧붙여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하루는 만득이가 길을 걸어가는 데 엄마가 `만득아 만득아' 하고 따라 오며 어딜 가는지 묻습니다. 귀찮아진 만득이가 얼른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 지하철을 탔습니다. 설마 여기까지야 못 좇아오겠지 하고 있는데, 갑자기 천정에 붙은 스피커가 울려 퍼졌습니다.―`만득아, 만득아' 바로 엄마의 목소리였습니다.

이번에는 만득이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갑니다. 갑자기 자동차 앞 유리창에 엄마가 나타나 `만득아'하고 불렀습니다. 짜증이난 만득이는 유리창 앞 와이퍼를 켰습니다. 그랬더니 유리창으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만득-득득-아득'. 만득이를 부르는 엄마소리와 자동차 와이퍼 소리가 겹친 음향이었습니다.

만득이가 화장실 변기에 앉았을 때입니다. 갑자기 변기 아래쪽에서 엄마가 `만득아!' 하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언짢아진 만득이가 변기의 물을 틀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아래에서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 `만푸-득푸-아푸'

아이들이 지하철을 타건, 자동차를 타고 가건, 심지어 화장실에 가건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부모들의 모습이, 그 간섭 속에서 살아야하는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비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또 `삐삐'라는 게 있어, 심지어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한테 까지 삐삐를 채워주고 원격조종하는 부모까지 있는 한, 만득이 씨리즈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될 것입니다.

 

 

비단 요즈음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 모든 아이들은 부모하면 먼저 잔소리를 연상할 만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아이들은 부모의 끝없는 간섭과 잔소리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책임이요 의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그 숱한 간섭과 잔소리 중에 정말 자식에게 필요한 말, 자식이 격랑의 세상을 살아 갈 때 도움이 될 생명의 말, 지혜의 말, 진리의 말들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2년 전 삼풍 백화점이 붕괴되어 수많은 사람이 졸지에 생명을 잃었던 그 참혹한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던 사람 중에 유지환양이 있었습니다. 당시 18세의 어린 소녀였던 유양은 무려 13일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구조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연약한 소녀가 무려 열 사흘 동안이나 죽음의 구렁텅이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제 죽었구나' 하고 절망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평소 엄마가 들려주던 말들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고학력자가 아니었습니다. 넉넉한 가정의 주부도 아니었습니다. 5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의 병간호와 생계를 도맡은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상을 졸업하고 대학생인 오빠의 뒷바라지와 생계를 돕기 위해 취직한 딸에게, 늘 희망의 말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유양은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 평소 어머니가 들려주던 희망의 말들을 곱씹으면서, 절망과 죽음을 끝내 이긴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자 한 어머니는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13일간이나 갇혀있으면서 엄마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힘을 얻었다는 18세 소녀의 말을 들으며, 저는 저와 제 아이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말은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가라는 잔소리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인생의 지혜를 들려줄 지혜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어머니는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나는 이제껏 내 아이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까? 아이들이 훗날 역경에 처했을 때, 과연 내가 가르쳐 준 어떤 말에 의지하여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을까?"

 

죽은 줄 알았던 딸이 13일만에 살아 나왔을 때 어머니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딸을 대견스러워하는 어머니에게 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가르쳐 줬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자기가 그 지옥으로부터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란 의미입니다. 그 말을 듣는 어머니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때 서로 부딪치는 어머니와 딸의 시선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감동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에게 생명과 지혜의 말과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부모, 그리고 그 말을 가슴 속에 새기는 자식 사이에서만 일어 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땅의 모든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다 이러하다면, 쉬임없는 부모의 잔소리를 귀찮아하는 `만득이 씨리즈'와 같은 이야기들은 발붙일 틈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벌였던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그가 100세 때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 명령하십니다. 마치 짐승을 잡듯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모리아산으로 갔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당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성경은 이렇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7∼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리라 약속하신 이상, 이삭은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이삭이 죽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시 살려 주시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거짓말장이가 될 것인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리아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지체없이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눕혀 놓고 칼을 치켜들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됩니다. 이때 아들 이삭은 15살 안팎의 소년이요, 아브라함은 115세 경의 노인이었습니다. 사내 아이 15살이라면 115세 노인이 당할 수 없을 정도로 한참 힘이 넘칠 때입니다. 그런데 그 팔팔한 나이의 아들이 어떻게 노인 아버지의 결박을 순순히 받고 죽겠다며 제단 위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지금 자기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게 된 이삭이 도망쳤더라면, 아브라함의 기력으로는 이삭을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전혀 반항하지 않고 아버지가 하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그것은 아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의 결과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모리아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말하는 장면을 머리 속에 그려보십시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지금부터 너를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다. 그러나 너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너를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루실 것을 약속하신 이상, 설령 네가 죽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너를 살려 주실 것을 아빠는 확신한다. 너 내 말을 믿어 주겠니?"

"네, 아빠 말씀이라면 믿어요."

이런 과정없이 어찌 이삭이 아버지의 칼 아래 가만히 누워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아들 이삭을 가르쳐 왔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삶이 이삭에게 본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소년 이삭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 눈에 보이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음을 뜻합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믿었던 대로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제지하시고, 그 부자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는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정도의 믿음이라면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날 아브라함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믿고 따라 주었던 아들 이삭이 얼마나 대견스러웠겠습니까? 아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까요?

"아빠가 말씀하셨잖아요. 하나님께서 죽어도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고 말이에요."

함께 손을 잡고 모리아산을 내려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참으로 황홀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성경에서 가장 황홀한 부자지간을 보여주고 있다면, 오늘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자,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25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사지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흐릅니다. 죽어 가는 예수님 앞에서 군병들은 서로 제비를 뽑아가며 예수님의 유류품을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순간입니다. 그 비극적인 현장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다른 세 여인과 함께 서 있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은 의붓 관계아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친 어머니요, 친자식이었습니다. 자신의 태에 10달동안 품고 있었고, 자신의 젖을 물려 주었고, 자신의 품속에서 말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시작했고, 자신이 지어주는 밥을 먹고 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30년 동안이나 한 집에서 모자지간으로 살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자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자식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갑니다.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군병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옷은 자기 자식의 옷입니다.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직한 광경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땅을 치고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뒤로 넘어져 실신하지도 않았습니다. 불한당 같은 로마군병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홀로 슬픔을 삼키면서 아들의 죽음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마리아의 행동이야말로 예수님이 자신의 친자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기의 아들로, 자신의 소유로 키워오지 않았음의 증거였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괴로와 하시던 예수님의 시선이 어머니와 마주쳤습니다. 마지막 순간 당신의 친어머니를 보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해 하신 말씀을 본문 26절은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자'란 호칭 `gunee'는 존경하는 상대에 대한 경칭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원문의 뜻에 더 가깝게 번역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어머님, 보십시오.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돈 많이 벌어서 어머님을 호강시켜 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죽어가서 죄송합니다라는 실패자의 한탄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어머니야말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왜 그토록 참혹하게 돌아가셔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입니다. 아니 어머니 마리아야말로 예수님의 어린 시절부터 그 모든 사실을 일깨워 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시켜준 스승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인이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란 예수님의 말씀의 깊은 의미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덕분으로, 어머니 아들답게,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다한 아들의 긍지로운 자기 선언인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그 마지막 순간 이런 고백을 하셨겠습니까? 전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당신을 낳고 키워준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하시는 이 장면보다 더 눈부신 모자지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위대한 자식은 위대한 부모로부터 비롯됩니다. 위대한 부모란 아브라함처럼, 마리아처럼,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자만 자식에게 참된 지혜, 참된 생명, 영원한 진리를 전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13일간이나 갇혀 있으면서 엄마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힘을 얻었다는 18세 소녀의 말을 들으며, 저는 저와 제 아이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말은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가라는 잔소리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인생의 지혜를 들려줄 지혜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껏 내 아이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까? 아이들이 훗날 역경에 처했을 때, 과연 내가 가르쳐 준 어떤 말에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을까?"

 

부모가 어떤 삶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 자식의 삶이 결정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숱한 말들 가운데, 정말 자식들에게 참된 생명과 영원한 힘이 될 진리와 지혜의 말들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 이 시간 되돌아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나를 먼저 드리지 않는 한, 나의 모든 말들은 의미 없는 잔소리에 불과하며, 의미 없는 잔소리는 부모와 자식간의 골만 넓힐 뿐임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먼저 아브라함과 같은 아버지, 마리아와 같은 어머니가 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자식들에게 채워 주는 부모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식들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삶을 다 산 뒤에 우리의 자식되었음을 가장 큰 긍지로 여기게끔, 지금부터 우리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참 신앙인이 되게 해 주옵소서. 내가 어떤 삶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내 자식의 삶이 결정됨을, 늘 기억하며 살게 하옵소서.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결과가 죽음일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만 잘 살게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 아 멘 ―

각각 얻고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해골이란 이름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두 강도들 역시 예수님의 양옆에 함께 못 박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일시적인 고문이나 체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지가 십자가에 못 박히었다는 것은,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결코 연습이거나 장난이 아닙니다. 시시각각 정말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자에게나 살아 있는 자에게나, 죽음보다 더 장엄하고 엄숙한 순간은 없습니다. 죽음이란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 인간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거사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인간의 임종 앞에서만큼은 모든 사람이 숙연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골고다 언덕 위에서 한사람도 아닌 세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의 빛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그 골고다, 그 순간이야말로 비장하고 엄숙하고, 숙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아니하였음을 본문 23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십자가 바로 아래에 서 있는 군병들이 세 사람의 죽음 앞에서 한 짓이란 예수님의 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각각 한 깃씩 얻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죄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사형시킬 때에 군인 네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사형을 집행하게 했고, 사형 당하는 죄수의 유류품을 집행하는 군인들의 몫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못박은 네 명의 군인들은 먼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네 깃에 나누어 한 깃씩 얻었다'는 표현은 얼핏, 예수님의 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씩 가졌다는 의미로 이해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같은 장면을 증거하고 있는 마가복음 15장 24절에 의하면, 이때 군병들이 서로 먼저 무엇을 가질까하고 제비를 뽑았다는 점으로 보아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정장은, 속옷 위에 겉옷을 입고 천으로 된 허리띠를 두른 뒤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발에 샌달을 신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네 명의 군병들은 먼저 예수님의 겉옷, 허리천, 머리수건, 샌달 ― 이 네 가지를 놓고 제비를 뽑아 순서에 따라 하나씩 챙긴 것입니다. 그러고도 하나가 더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속옷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23b∼24a)

 

그 속옷은 통으로 짜진 것이었기에 4등분으로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나눈다면 누구에게도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속옷만큼은 한 사람이 독식하기로 하고 누가 가질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그들은 다시 한번 더 제비를 뽑았습니다.

어디에서? 지금 숨이 너머 가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언제 ? 가장 엄숙하고 숙연해야만 할 임종의 순간!

그들은 타인의 죽음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 지금 자신의 손으로 무엇을 움켜 쥘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군병들의 한심한 작태를 보고 요한 사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24b)

 

요한 사도는 군병들의 행동을 보면서 시편 22편 18절의 예언이 사실화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고 골고다 산상에서 죽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주님의 죽음 앞에서 단지 손 안에 잡힌 소유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인간 ― 그것이 어찌 본문 속의 군병들만이 겠습니까? 그것은 실은 우리 모두의 적나라한 실상이 아닙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나누어 가질 권리를 가졌던 것은, 그들의 손으로 예수님에게 못질을 한 댓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 손으로 얻은 것을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희생시킨 결과, 아니 예수님을 못질한 댓가인 것은 아닙니까?

군병들이 서로 먼저 갖기 위해 제비까지 뽑아가며 취했던 것들이 군병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갑부가 아니셨습니다. 그 분은 달 동네 나사렛 출신이었고 삶의 거점은 갈릴리의 빈민촌이었습니다. 그 분이 입고 계셨던 옷이 좋을 리가 만무합니다. 더우기 총독 관저에서 모진 채찍질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신 채 골고다까지 오셨기에, 그 분의 옷은 피와 땀으로 절어 있었을 것입니다. 가져가 보아야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를 쓰고 그것을 가지려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금 손 안에 넣은 것들―그것들은 진정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며 참된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까?

네 명의 군병들 중에서 제비를 뽑아 통으로 짜여진 속옷을 독차지하게 된 군병은, 남이 갖지 못한 것을 자기 홀로 손에 넣었다는 것 때문에 그 순간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특히 사형수의 옷은 재수가 좋다는 풍설까지 있었으니, 그는 그 속옷을 힘껏 움켜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억세게 움켜잡았다 한들, 그것은 죽어서까지 가져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힘을 다해 무엇을 움켜쥐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관 속에 드러눕는 날에도 쥐고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관속에 눕기도 전에 누군가가 앗아가 버릴 것입니까?

본문 속의 군병들은 마지막 순간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바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누구보다도 주님 가까이에 서 있습니다. 그들이 만났고, 여전히 그들 곁에 계신 주님은 누구십니까? 인간을 죄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주실 구원자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분을 마지막 순간 친히 뵙는다는 것은 참으로 선택받은 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님을 친히 만나고서 얻은 것이라고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이 아니라, 이내 썩어 없어져 버릴 천조각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언제 만났습니까? 크리스천이라 불리운지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그 몇 년 동안 우리가 얻은 것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영원한 진리, 영원한 생명입니까? 아니면 언젠가 재가 되어버릴 지푸라기와 같은 것들입니까?

 

요한 사도는 이 어리석은 군병들에 대하여 본문 24절 중반절에서 `군병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이런 일'이란 단어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쓰여져 있습니다. 즉 `군병들이 이런 일들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값지고 귀한 일들을 행하였다는 칭찬의 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어리석고 한심한 짓만 골라 가며 했다는 한탄의 말입니다.

만약 오늘 요한 사도가 우리를 향해 `너희들은 이런 일들을 하였다'고 군병에게와 똑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칭찬하는 감탄사이겠습니까 아니면 안타까와 하는 탄식이겠습니까?

 

 

우리는 누가복음 8장에서 본문 속의 군병들과는 정반대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혈루증, 즉 그치지 않는 하혈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던 여인이었습니다. 만나보지 않은 의사가 없었고, 써보지 아니한 약이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재산마저 다 날려 버린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어느 날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기에, 도저히 예수님을 1대 1로 대면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파를 뚫고 나아가 예수님의 등 뒤에서 간신히 팔을 뻗친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잡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움켜 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팔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가에 손이 닿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8장 45절을 통하여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나의 옷가'에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내게' 즉 `나의 몸'에 손을 댄자가 누구인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지금 밀리고 있을 뿐, 누가 특별히 주님의 몸에 손을 댄 자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눅8:46)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을 뿐인데, 그 순간 예수님의 능력 생명의 능력이 여인에게 임했고, 그와 동시에 12년 동안이나 그녀를 괴롭히던 혈루증은 씻은 듯이 치유되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은 전혀 새 생명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 이제 골고다 위에 있는 네 명의 군병들과 이 갈릴리 여인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각각 나누어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움켜잡은 것입니다. 이에 비해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기만 한 여인에게 이처럼 놀라운 주님의 능력이 전해졌다면, 아예 예수님의 옷을 움켜 쥔 군병들에게는 태산이 진동할 만한 큰 능력이 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에게는 실날같은 능력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움켜잡았던 것은 그 옷 자체가 목적이었던데 반해, 여인이 군중들 틈에서 팔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던 것은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구원, 예수님의 생명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군병들이나 여인이나 예수님의 옷에 그들의 손이 닿았다는 면에서는 동일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군병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우악스런 손으로 소유를 움켜쥐었지만, 여인은 그 연약한 손으로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붙잡았습니다.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지만 주님만은 내막을 아시고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말씀하시며 그 여인을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군병들과 여인을 상상해 보십시다. 귀가하는 군병들의 손에는 여전히 예수님의 옷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기만 했던 여인의 손은 텅 비어 있습니다. 비어 있는 여인의 손보다는 군병들의 손이 훨씬 더 알찬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군병들의 손안에 든 것이란 곧 썩어버릴 천 조각인데 반해 여인의 손은 비어 있기에, 그 빈손 안에는 그녀가 붙잡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 영원한 은총, 영원한 진리가 충만하게 넘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우리의 손안을 한번 들여다보십시다.

우리 각자는 도대체 어느 쪽입니까? 골고다 군병의 손입니까 아니면 갈리리 여인의 손입니까?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70명을 따로 부르셔서 훈련시키신 뒤, 2명씩을 한 조로 하여 각 마을에 전도실습을 보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도 여행을 끝낸 제자들이 돌아와 현장에서 경험한 것들을 주님께 보고 드리는 데, 그들이 한결 같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서운 귀신들이 그들 앞에서 항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 할 긍극적인 목적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임을, 우리가 주님을 붙잡아야 할 이유가 영원한 구원임을, 우리가 우리의 두 손으로 얻어야 할 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단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보기에 진정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성도님이 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저는 가진 것이 많진 않지만, 늘 채워 주시는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의 작은 것들을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 만든 종이가 저의 전부라거나 저의 것만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져야 할 도구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성도님이 말한, 사람이 만든 종이란 바로 돈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은 자의 관속에 저승길 노자 돈으로 쓰라며 종이를 넣어 줍니다. 죽은 자에게 돈이란 종이 이상의 의미일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영원한 것으로, 자신의 전부로, 또 자신만의 것으로 생각하여 거기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다가 어이없이 파멸해 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돈이란 하나님을 위한 종이로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하다는 그 분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그 글을 쓴 성도님의 손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영원한 생명, 그리고 흘러 넘치는 진리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다시 우리의 손을 들여다보십시다. 내가 지금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추구하고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어서까지도 들고 갈 수 있는 영원한 것들입니까?

만약 지금 나의 손이 골고다 언덕 로마 군병의 손과 같다면, 내가 움켜 쥔 것이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더 많다 할지라도 바로 그것 때문에 몰락하고 말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자기 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은 사람, 그 손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를 얻은 사람만, 참된 생명의 향기를 진동하면서 혼탁한 이 세상을 맑힐수 있습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지금 모두 무엇인가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생명입니까, 죽음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까, 세상입니까? 주님입니까, 종이에 불과한 욕망의 부스러기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얻은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까? 아니면 썩어질 지푸라기에 불과한 것입니까? 이 시간 우리 모두 혈루증 앓던 그 가련한 여인의 겸손한 마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두 손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붙잡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손이,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나라로, 영원한 생명으로, 주님의 치유하심으로 충만케 되기를 간구합니다. 골고다 언덕 로마군병의 삶을 청산하기를 결단합니다. 우리 모두 참된 생명의 향기를 진동하는 갈릴리의 여인이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해골이라는 곳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17∼22


지난 4월 방문했던 코스타리카에서 창립 2주년을 기념하는 집회는 사흘간 계속되었는데, 마지막 날은 4월 20일 주일이었습니다. 주일 낮 예배가 끝난 뒤, 저녁시간 마지막 집회를 위해 숙소에서 쉬고 있을때였습니다. 갑자기 열린 창 밖으로부터 폭포수 떨어지는 것과 같은 요란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식간에 폭우가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창문을 닫아걸어도 소리는 여전하였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물을 쏟아 붓는 것 같은 굉장한 광경이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그 폭우를 바라보면서, 오늘 저녁 교우님들이 저 폭우를 뚫고 교회를 오려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괜히 저의 마음이 안스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녁 집회 시작 시간인 5시 30분에 맞추어 우리 일행을 데리러 그곳 장로님이 숙소에 당도할 때에도, 여전히 비는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만난 장로님의 제1성은 `비가 와서 너무 너무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낮에 비가 오는 것이 너무 기뻐 평소에 자던 낮잠도 그날만은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숙소 마당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를 가지러 갈 때에도 우산을 쓸 생각을 않고, 그 폭우를 그냥 맞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날의 비는 5개월만에 내리는 비였던 것입니다. 아열대 지방인 코스타리카는 5월부터 11월말까지는 우기, 12월부터 4월까지는 건기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건기가 계속되는 다섯달 동안은 모든 식물들이 다 바짝 바짝 말라 들어갑니다. 급수 사정도 나빠집니다. 온 거리는 먼지투성이가 됩니다. 그러다가 5월에 접어들어 하루 한번씩 정기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모든 생명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 곳을 방문했을 때는 건기의 마지막 무렵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든 식물이든 상관없이 모든 생물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비를 더더욱 절실하게 고대할 때였습니다. 그때야말로 생명이 가장 고갈되는 때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은 5월에 접어들어 첫 비가 내리는 날이 되면 너나할것없이 기뻐하게 되는데, 그날은 예년에 비해 무려 열흘이나 더 빨리 비가 쏟아졌으니 그곳 장로님이 그토록 기뻐했던 것입니다.

교회를 향하여 자동차를 몰면서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첫 비가 오면 이 비를 맞으면서 나무와 잔디들의 색깔이 벌써 새파랗게 변하고 있습니다."

다섯달 동안 뜨거운 햇볕아래에서 얼마나 비에 갈했으면 첫 비를 맞으면서 초목의 색깔이 변하겠습니까? 5시경 교회에 도착하자 언제 그토록 왔느냐는 듯 비가 뚝 그치더니, 하늘이 개이면서 서산에 해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그 햇빛은 3,500평에 달하는 교회 잔디밭을 부드럽게 비추었습니다. 그 잔디밭을 본 순간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장로님의 말대로 정말 잔디밭의 색깔이 달라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일낮 예배를 드릴 때만해도 말라비틀어진 채 먼지만 펄펄 날리던 잔디밭은 온통 누런 색 천지였는데, 그 잔디들이 꼿꼿하게 선 채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초록빛을 머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 만해도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경이로운 광경이었습니다. 저는 잔디밭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참다운 생명은 오직 위로부터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산 증거였습니다. 잊지마십시오. 이 세상에는 참 생명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도리어 생명을 고갈케 할뿐입니다. 모든 생명은, 참된 생명은 언제나 위에서부터 내려옵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는 곳에 나오시니"(17)

 

마침내 빌라도 총독으로부터 사형이 선고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친히 지신 채 사형이 집행될 장소로 나아가셨는데, 그 장소의 이름이 골고다요, 그 뜻은 `해골'이란 의미였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이 골고다를 가리켜 갈보리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라틴어 Calvaria를 영어화한 것으로 그 뜻 역시 `해골'입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장소의 지명이 왜 골고다, 즉 `해골'이었는지에 대하여는 세 가지의 견해가 유력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의 지형이 마치 해골모양과 흡사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그 장소가 옛날부터 사형 집행장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여기 저기에 해골들이 나뒹굴고 있었던 까닭이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이 오시기 훨씬 이전부터 유대인 사이에 내려오던 전설처럼 바로 그곳에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으로부터 아담의 해골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머나먼 서울에 앉아 있는 우리로써는 그 옛날 그 곳 지명이 왜 `해골'로 명명되었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왜 그 곳 이름이 `해골'이냐를 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넓은 천지에서, 하필이면 `해골'이라 불리우는 골고다에서 못 박히셨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십자가의 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해골이라 불리우는 곳 위에 세워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번 그려보십시오. 그 자체로서 얼마나 위대한 메시지입니까? 해골이란 바로 죽음의 결과인 동시에 십자가란 참 생명의 표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넒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유독 해골이라 이름지어 진 곳에 세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아무리 죽음이 난무하여 백골만 남아 있다 할지라도 그 곳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만 임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지기만 하면 바로 그곳에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임함을, 바로 그 해골의 땅에서 새로운 생명의 열매가 맺힐 수 있음을 만방에 보이시기 위해서는 골고다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해골 위에 세워진 십자가, 그 십자가에서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타고 위로부터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그 생명의 보혈에 의해 생명이 회복되고 소생하는 해골들 ― 세상에 이보다 더 극적인 생명의 역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니, 성경의 핵심을 어찌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본문 속의 골고다란 예루살렘성 밖의 특정한 한 지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이 세상 전체를 뜻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치고 죽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헬쓰클럽에서 체력을 단련하고 고급 화장품으로 가꾼다 한들 그 육체가 썩어 끝내 해골이 되지 않을 자가 있습니까? 이 세상 살아 있는 자란 너나 할 것 없이 실은, 모두 미래의 해골에 불과합니다. 우리라고 해서 예외인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이 온통 골고다, 우리 각자 각자가 곧 해골 언덕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골고다인 이 세상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골 언덕인 우리의 심령 속에 갈보리의 십자가를 높이 세우라는 것이 오늘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 때 십자가의 보혈을 타고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해골 같은 이 세상을, 골고다 같은 내 심령을, 마치 코스타리카 교회의 잔디처럼 파릇파릇 소생케 하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은 옆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옆으로부터 오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명을 미혹케 할뿐입니다. 참된 생명은 아래로 부터 오지 않습니다. 아래로 부터 오는것은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고갈시킵니다. 참된 생명은 언제나 위로부터만,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흘러내립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의 질문이 제기됩니다.

첫째,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나무로 십자가를 엮어서 아무데고 세우기만 하면 그 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내리느냐는 것이 첫째 질문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누구에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시하고 증거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나무 십자가 위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세우기만 하면, 그 나무가 위로부터 내리는 생명의 통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천년 전 골고다 위에 세워졌던 십자가가 중요하다면 그것이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십자가 위에 해골같이 사망에 처한 인간들을 살리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분의 그 희생이 위로부터 임하는 참 생명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해골 같은 인간을 살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어지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겐가 십자가를 제시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아무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그의 생명을 위하여 어떤 희생이나 헌신도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희생과 헌신이 없는 곳에서는 결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속에서 갓난 아이의 생명이 자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자기 희생만이 위로부터 임하는 생명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골고다 위에 세워졌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둘러보십시오.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전국이 십자가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는 곳마다 십자가 천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날이 갈수록 생명의 빛을 상실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나무나 아크릴로 만들어진 모조 십자가 세우는 일에만 열심일 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헌신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참 십자가 세우는 일에는 전혀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정녕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나무 십자가의 제조자나 공급자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희생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써 치루어야 할 헌신과 희생을 주저치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는 것이요,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길입니다.

 

영국 런던 교외인 줴라드 크로스(Gerrads Cross)란 곳에 WEC International, 즉 국제복음선교회가 있습니다. 몇해전 그곳을 다녀온 강윤식집사님의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WEC International은 20년간의 선교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C.T. Studd란 분이 1913년, 다시 20년간의 아프리카 선교를 새로이 떠나기에 앞서 설립한 단체입니다. 그 분은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인기 절정의 크리켓(Cricket) 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그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와 중국으로 떠납니다. 우리로 치면 마치 선동열 선수가 어느 날 갑자기 캄보디아 선교를 간다며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출국해 버리는 것과 같은 신선한 충격을, 그 분은 영국민들에게 주었습니다. 다시 아프리카로 떠났던 그 분은 끝내 아프리카에서 뼈를 묻습니다. 아프리카에 머물던 20년동안 그 분은 영국에 남겨 둔 가족을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는 그만큼 먼 나라였습니다. 그 분이 아프리카에서 순교한 뒤, 그 분의 부인은 남편의 뜻을 받들어 WEC를 오늘의 모습으로 일구어 놓았습니다. 그 WEC 본부의 지하실에 내려가면 수 십개가 넘는 가방들이 바닥과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된 채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임지로 떠나는 선교사님들이 임기를 마친 뒤 귀국 길에 찾아가겠노라고 남겨둔 가방들입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선교사님들의 가방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남아있는 가방들 - 바로 그 가방들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위한, 타인을 위한 자기 희생, 자기 헌신의 표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방의 주인들이 어느 곳에서 생을 마감했건, 그들이 있었던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 주기에 합당한 참된 십자가의 증인들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남긴 가방은 단순한 가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또다른 형태의 십자가요 이 땅이 남겨진 참 생명의 흔적인 것입니다. 서구 선진사회의 자산이란 바로 이런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란 결국 삶이란 하나의 가방으로 남게됩니다. 지금껏 여러분들께서 꾸려온 가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기 희생과 헌신의 표적입니까, 아니면 자기 욕망과 이기심의 결정체입니까?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위로 부터의 생명과 부활입니까, 아니면 아래로부터의 죽음과 해골입니까?

우리가 해골 언덕과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이 골고다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 이 땅을 살리기 위해, 공동 묘지 같은 이 세상 위에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를 세우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인생은 위로부터 임한 생명이 충만한 가방이 되어 이 세상에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인지 아십니까? 이와같이 생명이 충만한 가방이 많이 남겨진 나라- 그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지금 이 사회에는 이기심과 욕망의 다툼만 있을 뿐, 자기 희생 자기 헌신을 행하려는 자는 지극히 드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희생의 삶이 배제된 나무 십자가만을 양산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헌신과 자기 희생 없이 십자가는 있을 수 없고, 십자가 없는 곳에 생명의 역사는 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이 사회를 위하여,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지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으로 해골같은 이 땅위에 십자가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모두 이 땅을 골고다 언덕으로 만들어 가던 죽음의 삶에 분명한 종지부를 찍게 하옵소서. 오직 위로부터 임하는 생명의 통로가 되어, 갈보리 같은 이 사회를 바로 세우는 십자가의 실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단순한 십자가의 전파자가 아니라, 변함없는 십자가의 실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