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얻고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해골이란 이름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두 강도들 역시 예수님의 양옆에 함께 못 박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일시적인 고문이나 체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지가 십자가에 못 박히었다는 것은,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결코 연습이거나 장난이 아닙니다. 시시각각 정말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자에게나 살아 있는 자에게나, 죽음보다 더 장엄하고 엄숙한 순간은 없습니다. 죽음이란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 인간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거사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인간의 임종 앞에서만큼은 모든 사람이 숙연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골고다 언덕 위에서 한사람도 아닌 세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의 빛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그 골고다, 그 순간이야말로 비장하고 엄숙하고, 숙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아니하였음을 본문 23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십자가 바로 아래에 서 있는 군병들이 세 사람의 죽음 앞에서 한 짓이란 예수님의 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각각 한 깃씩 얻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죄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사형시킬 때에 군인 네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사형을 집행하게 했고, 사형 당하는 죄수의 유류품을 집행하는 군인들의 몫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못박은 네 명의 군인들은 먼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네 깃에 나누어 한 깃씩 얻었다'는 표현은 얼핏, 예수님의 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씩 가졌다는 의미로 이해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같은 장면을 증거하고 있는 마가복음 15장 24절에 의하면, 이때 군병들이 서로 먼저 무엇을 가질까하고 제비를 뽑았다는 점으로 보아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정장은, 속옷 위에 겉옷을 입고 천으로 된 허리띠를 두른 뒤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발에 샌달을 신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네 명의 군병들은 먼저 예수님의 겉옷, 허리천, 머리수건, 샌달 ― 이 네 가지를 놓고 제비를 뽑아 순서에 따라 하나씩 챙긴 것입니다. 그러고도 하나가 더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속옷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23b∼24a)

 

그 속옷은 통으로 짜진 것이었기에 4등분으로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나눈다면 누구에게도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속옷만큼은 한 사람이 독식하기로 하고 누가 가질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그들은 다시 한번 더 제비를 뽑았습니다.

어디에서? 지금 숨이 너머 가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언제 ? 가장 엄숙하고 숙연해야만 할 임종의 순간!

그들은 타인의 죽음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 지금 자신의 손으로 무엇을 움켜 쥘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군병들의 한심한 작태를 보고 요한 사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24b)

 

요한 사도는 군병들의 행동을 보면서 시편 22편 18절의 예언이 사실화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고 골고다 산상에서 죽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주님의 죽음 앞에서 단지 손 안에 잡힌 소유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인간 ― 그것이 어찌 본문 속의 군병들만이 겠습니까? 그것은 실은 우리 모두의 적나라한 실상이 아닙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나누어 가질 권리를 가졌던 것은, 그들의 손으로 예수님에게 못질을 한 댓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 손으로 얻은 것을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희생시킨 결과, 아니 예수님을 못질한 댓가인 것은 아닙니까?

군병들이 서로 먼저 갖기 위해 제비까지 뽑아가며 취했던 것들이 군병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갑부가 아니셨습니다. 그 분은 달 동네 나사렛 출신이었고 삶의 거점은 갈릴리의 빈민촌이었습니다. 그 분이 입고 계셨던 옷이 좋을 리가 만무합니다. 더우기 총독 관저에서 모진 채찍질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신 채 골고다까지 오셨기에, 그 분의 옷은 피와 땀으로 절어 있었을 것입니다. 가져가 보아야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를 쓰고 그것을 가지려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금 손 안에 넣은 것들―그것들은 진정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며 참된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까?

네 명의 군병들 중에서 제비를 뽑아 통으로 짜여진 속옷을 독차지하게 된 군병은, 남이 갖지 못한 것을 자기 홀로 손에 넣었다는 것 때문에 그 순간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특히 사형수의 옷은 재수가 좋다는 풍설까지 있었으니, 그는 그 속옷을 힘껏 움켜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억세게 움켜잡았다 한들, 그것은 죽어서까지 가져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힘을 다해 무엇을 움켜쥐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관 속에 드러눕는 날에도 쥐고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관속에 눕기도 전에 누군가가 앗아가 버릴 것입니까?

본문 속의 군병들은 마지막 순간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바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누구보다도 주님 가까이에 서 있습니다. 그들이 만났고, 여전히 그들 곁에 계신 주님은 누구십니까? 인간을 죄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주실 구원자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분을 마지막 순간 친히 뵙는다는 것은 참으로 선택받은 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님을 친히 만나고서 얻은 것이라고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이 아니라, 이내 썩어 없어져 버릴 천조각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언제 만났습니까? 크리스천이라 불리운지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그 몇 년 동안 우리가 얻은 것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영원한 진리, 영원한 생명입니까? 아니면 언젠가 재가 되어버릴 지푸라기와 같은 것들입니까?

 

요한 사도는 이 어리석은 군병들에 대하여 본문 24절 중반절에서 `군병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이런 일'이란 단어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쓰여져 있습니다. 즉 `군병들이 이런 일들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값지고 귀한 일들을 행하였다는 칭찬의 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어리석고 한심한 짓만 골라 가며 했다는 한탄의 말입니다.

만약 오늘 요한 사도가 우리를 향해 `너희들은 이런 일들을 하였다'고 군병에게와 똑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칭찬하는 감탄사이겠습니까 아니면 안타까와 하는 탄식이겠습니까?

 

 

우리는 누가복음 8장에서 본문 속의 군병들과는 정반대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혈루증, 즉 그치지 않는 하혈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던 여인이었습니다. 만나보지 않은 의사가 없었고, 써보지 아니한 약이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재산마저 다 날려 버린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어느 날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기에, 도저히 예수님을 1대 1로 대면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파를 뚫고 나아가 예수님의 등 뒤에서 간신히 팔을 뻗친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잡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움켜 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팔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가에 손이 닿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8장 45절을 통하여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나의 옷가'에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내게' 즉 `나의 몸'에 손을 댄자가 누구인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지금 밀리고 있을 뿐, 누가 특별히 주님의 몸에 손을 댄 자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눅8:46)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을 뿐인데, 그 순간 예수님의 능력 생명의 능력이 여인에게 임했고, 그와 동시에 12년 동안이나 그녀를 괴롭히던 혈루증은 씻은 듯이 치유되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은 전혀 새 생명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 이제 골고다 위에 있는 네 명의 군병들과 이 갈릴리 여인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각각 나누어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움켜잡은 것입니다. 이에 비해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기만 한 여인에게 이처럼 놀라운 주님의 능력이 전해졌다면, 아예 예수님의 옷을 움켜 쥔 군병들에게는 태산이 진동할 만한 큰 능력이 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에게는 실날같은 능력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움켜잡았던 것은 그 옷 자체가 목적이었던데 반해, 여인이 군중들 틈에서 팔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던 것은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구원, 예수님의 생명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군병들이나 여인이나 예수님의 옷에 그들의 손이 닿았다는 면에서는 동일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군병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우악스런 손으로 소유를 움켜쥐었지만, 여인은 그 연약한 손으로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붙잡았습니다.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지만 주님만은 내막을 아시고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말씀하시며 그 여인을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군병들과 여인을 상상해 보십시다. 귀가하는 군병들의 손에는 여전히 예수님의 옷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기만 했던 여인의 손은 텅 비어 있습니다. 비어 있는 여인의 손보다는 군병들의 손이 훨씬 더 알찬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군병들의 손안에 든 것이란 곧 썩어버릴 천 조각인데 반해 여인의 손은 비어 있기에, 그 빈손 안에는 그녀가 붙잡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 영원한 은총, 영원한 진리가 충만하게 넘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우리의 손안을 한번 들여다보십시다.

우리 각자는 도대체 어느 쪽입니까? 골고다 군병의 손입니까 아니면 갈리리 여인의 손입니까?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70명을 따로 부르셔서 훈련시키신 뒤, 2명씩을 한 조로 하여 각 마을에 전도실습을 보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도 여행을 끝낸 제자들이 돌아와 현장에서 경험한 것들을 주님께 보고 드리는 데, 그들이 한결 같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서운 귀신들이 그들 앞에서 항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 할 긍극적인 목적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임을, 우리가 주님을 붙잡아야 할 이유가 영원한 구원임을, 우리가 우리의 두 손으로 얻어야 할 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단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보기에 진정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성도님이 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저는 가진 것이 많진 않지만, 늘 채워 주시는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의 작은 것들을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 만든 종이가 저의 전부라거나 저의 것만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져야 할 도구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성도님이 말한, 사람이 만든 종이란 바로 돈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은 자의 관속에 저승길 노자 돈으로 쓰라며 종이를 넣어 줍니다. 죽은 자에게 돈이란 종이 이상의 의미일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영원한 것으로, 자신의 전부로, 또 자신만의 것으로 생각하여 거기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다가 어이없이 파멸해 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돈이란 하나님을 위한 종이로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하다는 그 분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그 글을 쓴 성도님의 손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영원한 생명, 그리고 흘러 넘치는 진리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다시 우리의 손을 들여다보십시다. 내가 지금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추구하고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어서까지도 들고 갈 수 있는 영원한 것들입니까?

만약 지금 나의 손이 골고다 언덕 로마 군병의 손과 같다면, 내가 움켜 쥔 것이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더 많다 할지라도 바로 그것 때문에 몰락하고 말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자기 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은 사람, 그 손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를 얻은 사람만, 참된 생명의 향기를 진동하면서 혼탁한 이 세상을 맑힐수 있습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지금 모두 무엇인가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생명입니까, 죽음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까, 세상입니까? 주님입니까, 종이에 불과한 욕망의 부스러기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얻은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까? 아니면 썩어질 지푸라기에 불과한 것입니까? 이 시간 우리 모두 혈루증 앓던 그 가련한 여인의 겸손한 마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두 손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붙잡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손이,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나라로, 영원한 생명으로, 주님의 치유하심으로 충만케 되기를 간구합니다. 골고다 언덕 로마군병의 삶을 청산하기를 결단합니다. 우리 모두 참된 생명의 향기를 진동하는 갈릴리의 여인이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해골이라는 곳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17∼22


지난 4월 방문했던 코스타리카에서 창립 2주년을 기념하는 집회는 사흘간 계속되었는데, 마지막 날은 4월 20일 주일이었습니다. 주일 낮 예배가 끝난 뒤, 저녁시간 마지막 집회를 위해 숙소에서 쉬고 있을때였습니다. 갑자기 열린 창 밖으로부터 폭포수 떨어지는 것과 같은 요란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식간에 폭우가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창문을 닫아걸어도 소리는 여전하였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물을 쏟아 붓는 것 같은 굉장한 광경이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그 폭우를 바라보면서, 오늘 저녁 교우님들이 저 폭우를 뚫고 교회를 오려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괜히 저의 마음이 안스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녁 집회 시작 시간인 5시 30분에 맞추어 우리 일행을 데리러 그곳 장로님이 숙소에 당도할 때에도, 여전히 비는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만난 장로님의 제1성은 `비가 와서 너무 너무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낮에 비가 오는 것이 너무 기뻐 평소에 자던 낮잠도 그날만은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숙소 마당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를 가지러 갈 때에도 우산을 쓸 생각을 않고, 그 폭우를 그냥 맞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날의 비는 5개월만에 내리는 비였던 것입니다. 아열대 지방인 코스타리카는 5월부터 11월말까지는 우기, 12월부터 4월까지는 건기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건기가 계속되는 다섯달 동안은 모든 식물들이 다 바짝 바짝 말라 들어갑니다. 급수 사정도 나빠집니다. 온 거리는 먼지투성이가 됩니다. 그러다가 5월에 접어들어 하루 한번씩 정기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모든 생명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 곳을 방문했을 때는 건기의 마지막 무렵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든 식물이든 상관없이 모든 생물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비를 더더욱 절실하게 고대할 때였습니다. 그때야말로 생명이 가장 고갈되는 때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은 5월에 접어들어 첫 비가 내리는 날이 되면 너나할것없이 기뻐하게 되는데, 그날은 예년에 비해 무려 열흘이나 더 빨리 비가 쏟아졌으니 그곳 장로님이 그토록 기뻐했던 것입니다.

교회를 향하여 자동차를 몰면서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첫 비가 오면 이 비를 맞으면서 나무와 잔디들의 색깔이 벌써 새파랗게 변하고 있습니다."

다섯달 동안 뜨거운 햇볕아래에서 얼마나 비에 갈했으면 첫 비를 맞으면서 초목의 색깔이 변하겠습니까? 5시경 교회에 도착하자 언제 그토록 왔느냐는 듯 비가 뚝 그치더니, 하늘이 개이면서 서산에 해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그 햇빛은 3,500평에 달하는 교회 잔디밭을 부드럽게 비추었습니다. 그 잔디밭을 본 순간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장로님의 말대로 정말 잔디밭의 색깔이 달라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일낮 예배를 드릴 때만해도 말라비틀어진 채 먼지만 펄펄 날리던 잔디밭은 온통 누런 색 천지였는데, 그 잔디들이 꼿꼿하게 선 채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초록빛을 머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 만해도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경이로운 광경이었습니다. 저는 잔디밭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참다운 생명은 오직 위로부터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산 증거였습니다. 잊지마십시오. 이 세상에는 참 생명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도리어 생명을 고갈케 할뿐입니다. 모든 생명은, 참된 생명은 언제나 위에서부터 내려옵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는 곳에 나오시니"(17)

 

마침내 빌라도 총독으로부터 사형이 선고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친히 지신 채 사형이 집행될 장소로 나아가셨는데, 그 장소의 이름이 골고다요, 그 뜻은 `해골'이란 의미였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이 골고다를 가리켜 갈보리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라틴어 Calvaria를 영어화한 것으로 그 뜻 역시 `해골'입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장소의 지명이 왜 골고다, 즉 `해골'이었는지에 대하여는 세 가지의 견해가 유력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의 지형이 마치 해골모양과 흡사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그 장소가 옛날부터 사형 집행장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여기 저기에 해골들이 나뒹굴고 있었던 까닭이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이 오시기 훨씬 이전부터 유대인 사이에 내려오던 전설처럼 바로 그곳에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으로부터 아담의 해골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머나먼 서울에 앉아 있는 우리로써는 그 옛날 그 곳 지명이 왜 `해골'로 명명되었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왜 그 곳 이름이 `해골'이냐를 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넓은 천지에서, 하필이면 `해골'이라 불리우는 골고다에서 못 박히셨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십자가의 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해골이라 불리우는 곳 위에 세워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번 그려보십시오. 그 자체로서 얼마나 위대한 메시지입니까? 해골이란 바로 죽음의 결과인 동시에 십자가란 참 생명의 표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넒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유독 해골이라 이름지어 진 곳에 세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아무리 죽음이 난무하여 백골만 남아 있다 할지라도 그 곳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만 임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지기만 하면 바로 그곳에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임함을, 바로 그 해골의 땅에서 새로운 생명의 열매가 맺힐 수 있음을 만방에 보이시기 위해서는 골고다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해골 위에 세워진 십자가, 그 십자가에서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타고 위로부터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그 생명의 보혈에 의해 생명이 회복되고 소생하는 해골들 ― 세상에 이보다 더 극적인 생명의 역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니, 성경의 핵심을 어찌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본문 속의 골고다란 예루살렘성 밖의 특정한 한 지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이 세상 전체를 뜻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치고 죽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헬쓰클럽에서 체력을 단련하고 고급 화장품으로 가꾼다 한들 그 육체가 썩어 끝내 해골이 되지 않을 자가 있습니까? 이 세상 살아 있는 자란 너나 할 것 없이 실은, 모두 미래의 해골에 불과합니다. 우리라고 해서 예외인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이 온통 골고다, 우리 각자 각자가 곧 해골 언덕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골고다인 이 세상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골 언덕인 우리의 심령 속에 갈보리의 십자가를 높이 세우라는 것이 오늘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 때 십자가의 보혈을 타고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해골 같은 이 세상을, 골고다 같은 내 심령을, 마치 코스타리카 교회의 잔디처럼 파릇파릇 소생케 하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은 옆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옆으로부터 오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명을 미혹케 할뿐입니다. 참된 생명은 아래로 부터 오지 않습니다. 아래로 부터 오는것은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고갈시킵니다. 참된 생명은 언제나 위로부터만,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흘러내립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의 질문이 제기됩니다.

첫째,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나무로 십자가를 엮어서 아무데고 세우기만 하면 그 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내리느냐는 것이 첫째 질문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누구에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시하고 증거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나무 십자가 위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세우기만 하면, 그 나무가 위로부터 내리는 생명의 통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천년 전 골고다 위에 세워졌던 십자가가 중요하다면 그것이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십자가 위에 해골같이 사망에 처한 인간들을 살리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분의 그 희생이 위로부터 임하는 참 생명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해골 같은 인간을 살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어지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겐가 십자가를 제시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아무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그의 생명을 위하여 어떤 희생이나 헌신도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희생과 헌신이 없는 곳에서는 결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속에서 갓난 아이의 생명이 자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자기 희생만이 위로부터 임하는 생명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골고다 위에 세워졌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둘러보십시오.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전국이 십자가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는 곳마다 십자가 천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날이 갈수록 생명의 빛을 상실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나무나 아크릴로 만들어진 모조 십자가 세우는 일에만 열심일 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헌신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참 십자가 세우는 일에는 전혀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정녕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나무 십자가의 제조자나 공급자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희생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써 치루어야 할 헌신과 희생을 주저치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는 것이요,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길입니다.

 

영국 런던 교외인 줴라드 크로스(Gerrads Cross)란 곳에 WEC International, 즉 국제복음선교회가 있습니다. 몇해전 그곳을 다녀온 강윤식집사님의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WEC International은 20년간의 선교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C.T. Studd란 분이 1913년, 다시 20년간의 아프리카 선교를 새로이 떠나기에 앞서 설립한 단체입니다. 그 분은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인기 절정의 크리켓(Cricket) 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그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와 중국으로 떠납니다. 우리로 치면 마치 선동열 선수가 어느 날 갑자기 캄보디아 선교를 간다며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출국해 버리는 것과 같은 신선한 충격을, 그 분은 영국민들에게 주었습니다. 다시 아프리카로 떠났던 그 분은 끝내 아프리카에서 뼈를 묻습니다. 아프리카에 머물던 20년동안 그 분은 영국에 남겨 둔 가족을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는 그만큼 먼 나라였습니다. 그 분이 아프리카에서 순교한 뒤, 그 분의 부인은 남편의 뜻을 받들어 WEC를 오늘의 모습으로 일구어 놓았습니다. 그 WEC 본부의 지하실에 내려가면 수 십개가 넘는 가방들이 바닥과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된 채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임지로 떠나는 선교사님들이 임기를 마친 뒤 귀국 길에 찾아가겠노라고 남겨둔 가방들입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선교사님들의 가방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남아있는 가방들 - 바로 그 가방들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위한, 타인을 위한 자기 희생, 자기 헌신의 표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방의 주인들이 어느 곳에서 생을 마감했건, 그들이 있었던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 주기에 합당한 참된 십자가의 증인들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남긴 가방은 단순한 가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또다른 형태의 십자가요 이 땅이 남겨진 참 생명의 흔적인 것입니다. 서구 선진사회의 자산이란 바로 이런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란 결국 삶이란 하나의 가방으로 남게됩니다. 지금껏 여러분들께서 꾸려온 가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기 희생과 헌신의 표적입니까, 아니면 자기 욕망과 이기심의 결정체입니까?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위로 부터의 생명과 부활입니까, 아니면 아래로부터의 죽음과 해골입니까?

우리가 해골 언덕과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이 골고다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 이 땅을 살리기 위해, 공동 묘지 같은 이 세상 위에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를 세우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인생은 위로부터 임한 생명이 충만한 가방이 되어 이 세상에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인지 아십니까? 이와같이 생명이 충만한 가방이 많이 남겨진 나라- 그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지금 이 사회에는 이기심과 욕망의 다툼만 있을 뿐, 자기 희생 자기 헌신을 행하려는 자는 지극히 드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희생의 삶이 배제된 나무 십자가만을 양산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헌신과 자기 희생 없이 십자가는 있을 수 없고, 십자가 없는 곳에 생명의 역사는 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이 사회를 위하여,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지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으로 해골같은 이 땅위에 십자가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모두 이 땅을 골고다 언덕으로 만들어 가던 죽음의 삶에 분명한 종지부를 찍게 하옵소서. 오직 위로부터 임하는 생명의 통로가 되어, 갈보리 같은 이 사회를 바로 세우는 십자가의 실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단순한 십자가의 전파자가 아니라, 변함없는 십자가의 실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유대인의 왕

말씀: 요한복음 19 : 12∼22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의 무죄를 믿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자처하는 자를 사형시키지 아니하면 로마황제의 충신일 수가 없다는 유대인들의 협박에 굴복하여, 박석위에 설치되어있는 재판석에 앉아 사형을 선고하고 말았습니다.

 

본문16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여기에서 `저희란'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고발한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무리들을, 그리고 좁게는 이제 빌라도의 선고에 따라 예수님에게 십자가 사형을 집행할 로마 군병들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전개되었는지 본문이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 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새 다 른 두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 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17∼18)

 

마침냬 예수님을 못박을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외에 다른 두사람도 같은 현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는바, 그 두사람이란 다른 복음서가 알려주는 바와 같이 강도들이었습니다.

자, 이제 이 장면을 머리 속에 한번 그려보십시다. 지금 골고다 언덕 위에 세개의 십자가가 세워져있습니다. 각각의 십자가위에는 남자 1명씩이 못 박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옷을 벗기운채입니다. 세사람 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사람은 지금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부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겉으로 보기에 세사람의 모습은 똑같습니다. 피흘리며 괴로워하는 그 자체로서는 세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좌우 편에 있는 자들은 흉측한 강도들이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강도가운데에서 외관상 강도와 똑같은 모습으로 못박히신채 피 흘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께서는 강도사이에서 강도처럼 못 박히어 강도처럼 죽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고발한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원하고 바라던 바였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대인의 왕이라 자처하는 달동네 나사렛 출신의 빈민 예수는 흉측한 강도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자는 강도와 함께 강도처럼 처형당함이 마땅하다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꾸몄던 대로 모든 상황이 종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19절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 었더라"

 

당시 죄수를 십자가형에 처할 때에는 죄수의 이름, 직책 혹은 죄명을 쓴 패를 십자가위에 부착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팻말은 이례적으로 빌라도가 직접 썼는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십자가에 못박힌자의 이름은 나사렛 출신 예수요, 그의 직책과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해 여기 못 박힌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요, 또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형에 처해졌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팻말을 본 대제사장들은 그 내용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유대인의 왕일 수 없는 예수님이 스스로 왕임을 자처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데 반해, 빌라도가 쓴 팻말은 오히려 예수님의 유대인 왕되심을 로마총독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셈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시 빌라도 총독에게 몰려가 예수님의 팻말을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때 빌라도의 반응을 본문이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 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것을 썼다 하니라"(21∼22)

 

빌라도 총독은 그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빌라도 총독이 유대인들에 대해 이처럼 단호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협박으로 인해 굴욕적으로 사형을 언도할 수밖에 없었던 빌라도로서는, 대로마제국 총독으로서의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유대인의 압력에 굴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아 버린 유대인들에 대한 빌라도의 복수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 자처하였던데 대해 유대인들이 분개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음을 잘 알고 있는 빌라도이기에, 오히려 예수님의 팻말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명기함으로써 유대인들을 멋지게 골탕 먹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 본인으로서는 로마황제의 충신으로서, 로마황제로부터 인정받지 아니한 유대의 왕을 처단한 것이므로 당연지사일 뿐, 아무런 하자가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혹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유대인의 왕이심을 믿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빌라도 총독에게 그럴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정확한 이유의 규명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빌라도가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빌라도의 복잡미묘한 성격을 도구로 삼아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빌라도가 그 팻말을 쓰고 부착한 것 같으나, 그것은 실은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골고다의 광경을 머리 속에 그려보십시다. 그 언덕 위에 십자가 세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두 강도 가운데에 주님께서 강도와 같은 모습으로 못 박혀 계십니다. 강도와 같이 피를 흘리고 계십니다. 만약 그 팻말이 없었더라면 주님께서는 강도와 함께 강도처럼 운명하시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주님의 십자가 위에 친히 팻말을 붙여 주셨습니다. 이 분은 `유대인의 왕',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만인의 구세주'시라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 골고다 언덕에서 그 팻말의 가치는 측정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본문 20절이 더 놀라운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로 기록되었더라"

 

경이롭게도 그 팻말은 3개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아람어였고, 로마어란 정복자 로마제국의 공식용어인 라틴어였고, 헬라어란 로마제국 이전 오랫동안 당시의 세계를 지배했던 헬라제국의 언어로써 그 당시 라틴어보다 더 폭넓게 사용되던 대중언어 였습니다.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 그분이야말로 온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만인의 구세주이심을 만방에 친히 공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팻말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가깝게는 바로 곁에 있는 흉측한 강도로부터 구별되실 수 있었고, 넓게는 자신의 죄로 죽어 가는 모든 인간들과도 구분되실 수 있었고, 죽음을 깨트리고 다시 사실 영원한 부활주이심이 증명될 수도 있었습니다.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 `유대인의 왕'이란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팻말이야말로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선물을 예수님께서 직접 요구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셨을 뿐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길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은총을 베푸셨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본문 17절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 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자, 본문의 장면도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다. 박석 위 재판석에 앉은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에게 십자가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이내 로마군병들이 예수님을 끌고 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깨 위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운 뒤에 골고다 언덕까지 끌고 갑니다. 이것이 본문을 형상화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은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놀랍다는 것은 본문에 나타난 `지셨다'는 동사 bastazo가 수동형이 아닌 능동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로마군병들이 지워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메고 간 것이 아니라, 때가 되매 당신 스스로 져야할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지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나오셨다'는 동사 exerkonai 역시 능동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록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힘이 부쳐 도중에서 넘어지기도 하셨고, 다른 복음서의 증언처럼 구레네 시몬의 도움을 받기는 하셨을 망정, 개 끌려가듯이 어쩔 수 없이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친히 자진하여 죽음의 골고다 언덕으로 나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중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사형을 선고했기 때문에, 로마군병들의 폭력에 굴복하여 어쩔수 없이, 원치 않는 십자가를 억지로 지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이루는 길임을 아시고 하나님의 그 뜻에 순명하시기 위해, 그 참혹한 십자가를 당신 것으로 생각하시고 자발적으로, 기꺼이 지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유대인의 왕'이란 선물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 속에 방치시켜 두시지 않고, 죽음속에서도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이란 부활의 보증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 그토록 강조하셨던 바가 예수님 자신에 의해 구체적으로 증명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매일 매일 이 현실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향하여 주님께서 주셨던 가르침의 핵심을 한 구절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태복음 6장 33절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 에게 더 하시리라"

 

사람들은 먼저 자기의 욕망을 구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욕망을 좇고 따릅니다. 그 결과 한 순간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고 잠시 정상을 차지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나, 결국엔 그것때문에 화를 당하고 맙니다. 지금 세상을 온통 뒤흔들고 있는 크고작은 사건들이란, 먼저 자기 욕망을 구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순서를 바꾸라 당부하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 분의 법도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좇는 결과로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주시는 것만 우리에게 화근이 되지 않고, 그것만 진정한 은총, 참된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한절의 말씀 속에 우리 신앙의 요체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는 먼저 자기의 욕망을 구할 수 밖에 없고, 먼저 자기 욕망를 좇는 자는 바른 신앙인이 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아시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의 죽음을 자취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책임져 주시사 만인의 왕으로, 영원한 생명의 부활주로 영원히 세워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심을, 십자가 위에서 친히 증명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지난 4월 중 우리의 형제교회로써 창립 2주년을 맞이 한 코스타리카 시온교회를 다녀왔습니다. 그때 심한 독감을 앓고 있었는데 특히 고통스러운 것은 체온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거듭되는 번열증과 한기였습니다. 열이 오르면 식은 땀이 마구 흐르다가 갑자기 체온이 떨어지면서 주체할 수 없는 한기가 몰려 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가방을 챙기면서 비행기 속의 에어콘 냉기에 대비하여 긴소매 쉐타와 소매없는 조끼를 한개씩 넣었습니다. 그러나 들고가는 가방이 작은 휴대용 가방인지라 짐을 줄이기 위해 소매 없는 조끼를 두고 갔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비행기 속에서도 번열증과 한기는 계속 번갈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기가 들때 쉐타를 입으면 오히려 번열증이 일어나고, 그렇다고 벗으면 한기가 그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온도에서 제게 필요한 것은 소매없는 조끼였지만, 집에 두고 왔기에 어쩔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비행기 승무원이 사은품을 주었는데, 그 사은품이 소매없는 조끼였습니다. 집에 두고 온 조끼와 색깔마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조끼 덕분에 무리한 일정에 강행군을 하면서도 체력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코스타리카에 도착하여 첫날 집회를 시작하기 전 숙소에서 면도를 하던 중 면도기의 작동이 그만 멈추어버리고 말았습니다. 1.5V짜리 밧데리 2개를 넣는 초소형 면도기였는데, 밧데리가 다 소진된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코스타리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던 중, 그 곳에서 만난 교우님이 기념품이라며 주었던 조그만 상자가 생각났습니다. 가방 속에서 상자를 찾아 끌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면도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치밀한 예비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코스타리카를 떠나기 전날 밤 그곳 장로님 댁에서 저녁식사가 있었습니다. 젊은 집사님의 차를 타고 장로님의 댁으로 갔는데, 그 차의 뒷 트렁크에는 우리 일행의 여권과 항공권이 든 가방과 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식사를 하려는데 자리에 앉아 있던 또 한 분의 노 장로님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한참 후에 들어온 그 분은 코스타리카에는 잡범들이 많아 혹시나 싶어 그 차 뒷 트렁크에 실려 있던 우리 짐을 집안으로 옮겨 두었다고 했습니다. 식사가 다 끝나고 나갔을 때, 놀랍게도 길 양옆에 세워져 있는 그 많은 차들 중에 유독 우리가 타고 갔던 차의 유리창이 깨어진 채 뒷 트렁크가 열려 있었습니다. 만일 노 장로님이 짐을 집안으로 옮겨놓지 않았더라면, 여권과 항공권을 잃어버린 우리의 일정은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코스타리카에서 L.A.에 도착하던 날 밤, 미국 남가주 주님의 교회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남가주 주님의 교회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학교 강당을 빌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도착해 보니, 그날의 집회장은 강당이 아닌 체육관이었습니다. 학교 측에서 그날밤 강당을 쓸일이 있어 부득불 체육관을 사용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뒤 교회측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날 집회에 참여한 분이 약 700여명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평소처럼 400명 밖에 수용할 수 없는 강당에서 집회가 열렸더라면 300여명이나 되돌아가야 할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에 따라 미리 취하신 신비스런 조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 비해 정말 부끄러운 삶을 살았던, 형편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보다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중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려 애쓸 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책임져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개인의 행복과 평강도, 그리고 사회 정의도 여기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 나를 망치는 화근도 남을 해치는 독소도 아닌, 모두를 살리는 하나님의 참된 은총, 영원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을 더하시 리라"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마음 속에 계시면서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심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우리는 먼저 우리의 욕망을 좇고 구하는 허망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토록 혼란스러움은, 우리 모두가 잘못 구해 왔음의 결과임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구하오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성령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조명아래 바로 거하여 먼저 구해야 할 것을 먼저 분별하고 먼저 실행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한 주님의 십자가가 생명과 구원의 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듯이,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 땅에 성육신케 하옵시고, 그와같은 우리의 삶으로 인해 이 사회가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과 정의로 충만한, 복되고 참된 사회가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재판석에 앉았더라

설교자 이재철

 
저녁을 먹으면서 셋째 아이가 수수께끼를 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통한 도술을 행하는 도사를 만나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도사님, 이제껏 저는 늘 엑스트라 아니면 졸개로 살아 왔습니다. 제발 부탁드리오니 저를 위대한 스타인 동시에 왕의 자리에 앉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도사가 그 사람의 청을 즉석에서 들어주었는데, 과연 그 사람이 무엇이 되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태껏 아이들의 수수께끼에 답을 맞혀 본 적이 없는 저였기에, 그날도 셋째에게 답을 물었습니다. 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스타킹'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원했던 대로 스타와 킹(king), 즉 왕이 동시에 된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에 식사하던 온 식구들이 웃었습니다. 저도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박장대소를 하는 제 마음 속으로부터 이런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맞다 맞다, 넘볼 수 없는 자리를 넘보거나 차지하면 아무것도 안된다."
60년대 말경에 이런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 의자에

주인이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이지."

당시 자고 일어나면,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아무 자리나 마구 차지하는 세태를 풍자, 비판하는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까 어떻습디까? 어느 자리이건 아무나 앉기만 하면, 정말 그 사람이 그 자리의 주인이 됩디까? 앉아 있는 동안 주인이라 불리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일때, 혹은 자신의 자리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일 때, 그 자리에서 제대로 되어 지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리에 앉아 있는 장본인은 물론이요,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다는 것이 과거가 주는 교훈입니다.

근래에 들어와서 조선왕조의 제 26대 왕인 고종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시도되고 있습니다. 즉 고종이 무능하게만 전해지는 것은 일제에 의한 조작이요, 실제로는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여러모로 애썼던 기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 왕치고 자기 나라와 자기 왕권이 망하는 것을 달가와 할 왕이 있겠습니까? 그런 경우엔 누구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쓸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는 것과 나라를 지킬 능력을 갖추고 실제로 나라를 지켜 낸다는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 대원군과 왕비 민비 그리고 외척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왕권 한번 제대로 행사해 보지 못한 채 망국의 발판만을 제공했던 고종은, 그 격동의 시기에 왕의 자리에 앉을 만한 적격의 인물이 었다고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가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왕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왕의 자리에 앉았을 때, 왕의 자리에 앉은 후에도 왕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그것은 고종 한 개인이 독살 당하는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온 민족이 나라를 송두리째 잃고 오랜 기간 동안 식민통치의 고통을 겪어야 했고, 그 후유증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각 방면에 걸쳐 남아 있습니다. 인간과 자리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무릇 살아 있는 사람이란 다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게도 죽은 자를 위한 자리가 있기 마련인데, 어찌 산 사람에게 산 사람으로서의 자리가 없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어떤 자리이든, 여하튼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입니다. 그 자리가 높은 자리일 수도 있고 낮은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큰 자리일 수도 있고 작은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의 자리일 수도 있고 사회 속에서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의 모양은 다 다를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들이 앉아 있는 모든 자리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 13절 상반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도대체 빌라도가 누구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 1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유대인들이 고발한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 총독이 그 분의 죄없음을 거듭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풀어 주려고 하자, 유대인들이 일제히 `스스로 왕이라 참칭한 반역자를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가이사, 즉 로마황제의 충신일 수가 없다'고 소리쳐 외쳤습니다. 그것은, 이미 지난 4월 둘째 주일날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왕을 자처한 자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아니하면, 반역자를 풀어 준 당신을 로마황제에게 고발하겠다는 무서운 협박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귀가 얇은 사람인지라 온 로마에 모함이 횡행하고 있음을 유대인들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그 협박의 함성을 들은 빌라도가 무엇을 했는지 본문 13절 중반절이 이렇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박석이란, 넓고 얇게 뜬 돌을 모자이크형으로 깔아 포장한 장소를 가리키는데, 빌라도는 바로 그 곳으로 예수님을 다시 끌고 오게 했습니다. 그 이유를 13절 하반절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판석에 앉았더라"

바로 그 곳 한 쪽 높은 단위에 재판석이 있었습니다. 그 재판석에 빌라도 총독이 앉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는 빌라도 총독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총독의 자리란 백성를 재판하는 자리였습니다. 따라서 빌라도의 착석 여부에 상관없이 그것은 빌라도만의 자리였고, 그렇기에 빌라도가 서 있을 때에도 그는 실은 재판석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라도는 조금도 거리낌없이 자기 자리인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성경 원문은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본래 헬라어에는 `자리에 앉는다'는 의미의 동사가 여러개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kathizo란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동사의 특징은 다른 동사들과는 달리 자동사인 동시에 타동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동사를 자동사로 볼 때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해 스스로 재판석에 앉았다는 의미가 되지만, 타동사로 간주할 때에는 빌라도 자신이 재판을 받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재판석에 앉혔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석에 앉혔다고 해석하는 일부 주경가들의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얼마나 놀라운 메시지입니까? 빌라도는 지금 예수님에게 최후의 선고를 내리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리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어떤 선고이든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석에 앉아 있는 빌라도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 분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겉으로만 보면, 지금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하여 자기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두껑을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정반대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 대해 얼마나 능력을 갖추고, 얼마나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다하고 있는지, 주님의 재판을 받기 위해 주님의 재판석 앞에 자기 자신을 앉혀 두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빌라도가 이 놀라운 사실을 알았더라면 빌라도의 판결은 분명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중요한 사실을 알지도 알려 하지도 않았기에, 그 자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8절), 더우기 예수님을 직접 심문했던 자로서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그 순간 목전의 여론이었던 사악한 유대인들의 협박에 못 이겨 진리이신 주님게 사형을 선고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을 고발했던 목전의 유대인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았을 것입니다. 소위 그들로부터 압도적인 여론의 지지를 한수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갈채의 순간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뒤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라도는 진리를 못박아 죽인 중죄인으로 오늘도 사도신경에 의해 정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개인은 물론이요 자기 가문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그와 타협했던 유대인들의 비극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그 날 빌라도의 법정에서 정작 재판을 받았던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빌라도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주어진 자기 자리에 대한 바른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데 대한, 주님의 공의로운 재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앉아 있는 우리 자리의 모양과 형태는 다 틀린다 할지라도, 그 모든 자리가 갖는 하나의 공통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든, 그것은 실은 내가 내 자신을 주님 앞에 앉혀 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앉아 있는 우리의 자리란 곧 주님의 재판정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가 요구하는 능력을, 그리고 책임과 의무를 얼마나 갖추고 다하느냐에 따라 사도바울처럼 주님의 상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빌라도처럼 수치와 모멸속에서 끝나 버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자신의 능력으로 넘볼 수 없는 자리를 단지 욕심으로 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자리에 대해 나태하거나 태만할 수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자리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재판정이기 때문입니다.

95년 말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었을 때, 그해 12월 첫째 주일 당부 드린 바가 있지만, 우리 대통령이신 김영삼 장로님을 위해 우리 모두 더욱 간절히 기도 드립시다. 우리 손으로 선출한 대통령이시기 이전에, 같은 그리스도인이기에 그 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다.

그 분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대통령으로 하나님 앞에 앉혀 두고 있음을, 그 분이 앉아 있는 청와대가 곧 그 자리를 맡기신 하나님의 재판정임을, 사람이 누구를 무엇으로 헤아리던 바로 그 헤아림으로 자기 자신이 헤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임을, 사람이 무엇을 심든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진실에 대한 참된 평가는 순간적인 여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떠난 내일의 역사 곧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판가름됨을, 그 분이 깊이 깨달아 남아 있는 당신의 임기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장로님으로 후회함이 없이 잘 마무리하실 수 있도록, 그래서 오늘의 혼란이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날마다 그 분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만에 하나라도 그 분에게 끝내 불행한 결과가 초래된다면,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의 불행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대통령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기에, 우리 자신과 자리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법정 역시 하늘 위에 산 너머 바다 건너 멀리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우리의 자리가 곧 하나님의 재판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결국은 빌라도 일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자리는 실은 선택의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정치인이나 공직자의 자리를 선택할 수도 있고, 기업인이나 교육가의 자리를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의 자리 그리고 부모의 자리도 따지고 보면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 자리를 원치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결코 인간 선택의 대상이 아닌 자리, 아무도 선택할 수 없는 자리가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식의 자리입니다. 자식의 자리만큼은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식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선택할 권리를 갖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자식이란 자리는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자리인 것입니다.

나머지 모든 자리에 대해서는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식의 자리만큼은 친히 결정해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리 중에 자식의 자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부모님에 대하여 자식으로서의 자리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내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짓인 동시에, 부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중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첫 번째 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명령하시는 이유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판하시는 첫 번째 재판정은 그 어떤 자리보다도 우리가 앉아 있는 자식의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부모공경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진정으로 공경할 수 있는 자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버이 주일을 맞는 이 아침, 내가 자식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나 자신을 자식의 신분으로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 세우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은 부모 공경에도 예외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진리라(출 20:12)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어떤 자리에 앉아 있든 실은,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재판정임을 잊지 말게 하소서. 그 자리를 맡은 청지기로서 갖추어야 할 능력과 자질을 배양하기에 최선을 다하게 하시고, 그 자리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 하시므로,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덧없는 나의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날마다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선택의 여지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자식의 자리를 잘 감당케 하여 주시옵소서.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바르게 공경할 수 있는 사람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충심으로 섬길 수 있으며, 그 사람만이 부모의 자리를, 남편의 자리를, 아내의 자리를, 사회인으로서의 자리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리를 바르게 지킬 수 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특별히 이 시간 우리의 대통령이신 김영삼 장로님을 위하여 기도드립니다. 지금 은, 대통령인 자신을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사, 노련한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은 임기를 잘 마무리할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조변석개하는 여론이 아니라, 내일의 역사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선택할 수 있도록 대통령께 은총을 베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늘의 이 모든 혼란이 보다 건실하고 정의로운 내일을 건설하기 위한 생산적인 진통으로, 긍정적인 발판으로 승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 아 멘 ―

더 크니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7∼16


조선왕조를 세운 이 태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 태조가 새나라를 세운 뒤, 하루는 왕비와 개국공신인 이지란(퉁두란)과 더불어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세우기까지 어렵고 고생스러웠던 과거 담을 서로 나누던 중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 태조가 서로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보자는 제안을 하자 나머지 두 사람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정자 앞에 있는 뽕나무를 증인으로 세웠습니다. 속마음을 정말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뽕나무가 흔들릴 것이고,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하면 미동도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이 태조가 말했습니다.

"나야 뭐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누가 나를 찾아 올 땐 빈손으로 오는 사람보다 뭔가 두툼한 걸 들고 오는 사람이 이쁘더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뽕나무가 마구 흔들렸습니다. 그게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태조의 뒤를 이어 개국공신 이지란이 입을 열었습니다.

"내 위에는 오직 한 사람뿐이요 내 아래에는 억조창생이 있으니 무슨 모자람이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한번쯤은 왕 노릇을 해 보고 싶습니다."

이번에도 뽕나무는 어김없이 흔들렸습니다. 이지란 역시 참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왕비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왕비는 선뜻 입을 열지 않고 얼굴만 붉힌 채 한참 뜸을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길어지자 이 태조와 이지란은 물론 정자 앞의 뽕나무까지도 바짝 긴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왕비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하중에 젊고 잘 생긴 남자를 보면 웬지 공연히 마음이 끌립니다."

그러자 뽕나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구 흔들렸습니다. 왕비 역시 솔직했던 것입니다.

 

지위가 높아진다거나 소유가 많아진다고 해서, 인간의 욕망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망이란 밑빠진 독과 같아서 도대체 끝이 없다는 것이,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비록 바람직하지 못한 욕망을 갖고 있었을 망정 자신에 대하여 솔직하였고, 또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태조가 신하들에게 천문학적인 뇌물을 부당하게 요구했다는 기록도 없고, 이지란이 왕 노릇해보기 위해 쿠테타를 일으킨적도 없었고, 왕비가 젊은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 사람보다, 욕망대로 무슨 짓이든 서슴치 않고서도 자기 자신 마저 속이고 거짓말로 일관하는 현대인들이, 오히려 더 큰 문제를 갖고 있음을 발견케 됩니다.

 

 

바로 이 세 사람의 이야기와 빗대어서 시인 정해종씨는 현대인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라 안팎이 어수선해지자 이를 걱정하는 지도급 인사 세 명이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는 북한산 자락에 있는 요정에 모여들었어.

새나라당 김치국의원, 중견그룹의 총수인 문어발 회장, 고위관료 한미천 차관이 그들인데, 술이 몇 순배 돌자, 얼마 전 나라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금융특혜 사건으로 대화가 모아졌고, 요정 뜰 앞에 있는 튼실한 뽕나무를 증인으로 세워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기로 했지. 그 뽕나무가 이태조 정자 앞에 있었던 뽕나무 종자였다나 봐.

먼저 김치국의원.

"거 난 전혀 몰랐던 일이요."

그런데 뽕나무가 요지부동인 거야. 김의원이 다시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지.

"험 알긴 알았지만 당의 입장을 생각해서 모른 척했소이다."

그래도 뽕나무가 요지부동이자, 김의원의 얼굴이 흙빛이 되며 말했지.

"뭐, 우리끼리니까 얘기하는 건데 적당히 간여는 했소이다만 다 그렇고 그런것 아니겠소."

그때서야 뽕나무가 사정없이 흔들렸지.

다음 문어발 회장.

"도대체 기업을 그런 식으로 운영해서야. 난 그렇게 기업한 적이 없지요."

이번에도 뽕나무는 요지부동이었어.

"뭐, 조금 뿌리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기업을 하자면 "

그래도 뽕나무는 역시 미동도 않았어. 할 수 없어진 문어발 회장이 마지막으로 말했어.

"음 기왕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엄청 뿌렸지요. 그 액수를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벌렁 뛰어서 잠도 오질 않는다니까요."

그러자 뽕나무가 심하게 흔들렸지.

한미천 차관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어.

"정말 나라 일이 걱정이구료. 나란 사람은 워낙 주변머리가 없어서 "

역시 뽕나무는 꼼짝도 않았지.

"가끔 사과 상자를 보내오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제가 원래 과일을 싫어해서."

그래도 뽕나무는 요지부동인 거야. 한미천 차관 역시 다시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지.

"그냥, 떡값으로 조금 그래, 먹을 만큼 먹었다. 이제 됐냐?"

그제서야 뽕나무가 있는 힘을 다해 흔들거렸지.

이렇게 뽕나무가 세번 크게 흔들리는 동안, 무성했던 뽕나무 잎은 죄다 떨어지고, 튼실했던 뽕나무는 마침내 뿌리가 드러난 채 길게 드러누워 버렸다는 슬픈 얘기가 있어.

 

이 글 속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마침내 뿌리가 뽑혀 쓰러지는 뽕나무는 이 사회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이 글을 통해, 욕망에 사로잡혀 온갖 탈법과 불법을 자행하고서도 자신마저 속이며 거짓으로 일관하는 우리 모두에 의해, 마침내 뿌리 채 흔들리며 쓰러져 가고 있는 이 사회를 풍자,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1일 끝난 한보청문회를 두고, 그런 청문회라면 아니함만 못하다는 비판론이 만만치 않습니다. 출석한 증인들 대부분이 부인과 거짓으로 일관한데 비해, 그들을 심문하는 의원들의 한계로 인해 진실과 사건 실체 규명이 턱없이 미흡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는 선진국의 청문회를 예로 들며 이 땅에서의 청문회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다 타당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그러하기 때문에, 이번 청문회는 우리 모두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교훈과 소득을 안겨 주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즉, 이번 청문회를 통하여 우리 국민 모두는,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비도덕적인지, 얼마나 거짓이 체질화 되어있는지,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에 대해 얼마나 게으른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청문회의 심문석과 증인석에 앉았던 그들은 우리와 다른 별천지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 우리 자신들의 실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우리 모두가 정직하게 살면서 정직한 사회를 이루어 왔다면, 증인들이 그처럼 천연덕스럽게 거짓 증언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정직한 사회였다면 한보사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평소 우리 모두가 주어진 책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내 직업을 통해 사회 정의를 구현하려 애쓰는 자들이었다면, 국회의원들이 그처럼 준비없이 혹은 무책임하게 심문에 임한다든가, 철저하게 당리당략에 의해 청문회장에서 여야 의원들끼리 서로 싸우는 추태를 부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청문회장에 앉아 있던 사람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감사를 드려야 할 판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실체를 정확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 역할을 잘 담당해 준 까닭입니다.

 

이제 한보사건은 관련자 몇몇 사람들이 사법처리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 수순을 밟게 될 것입니다. 그 몇 사람들이 단죄 당하는 것으로 이 사회가 정의로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우리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불의와 거짓에 관한 한 우리 모두 공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정직해지지 않는 한, 두고 보십시오, 온 나라를 뒤흔들 대형 비리 사건은 앞으로도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형이 확정되는 사람들은 소위 유죄가 될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죄입니까? 그렇습니다. 현행법으로는 우리는 분명 무죄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건들이 우리 모두의 부정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우리가 요행히 세상법정은 피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법정을 모면할 수는 없습니다. 철저하고 완벽한 사전 준비없이 청문회장에 나와 호통이나 일장 연설을 일삼던 국회의원들은, 이 다음 선거 때가 되면 또 현란한 말솜씨로 선거구민들의 표를 모아 의원직을 계속 유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 시대의 의원직을 맡겨 주신 하나님의 냉엄한 평가만큼은, 어떤 경우에도 그들이 오도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평가는 사람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틀리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결과가 아니라 원인과 동기, 형태가 아니라 본질, 과녁판이 아니라 과녁을 향한 조준에 대한 심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망각할 때 우리가 세상의 법정은 용케 피해 갈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유죄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 11절 상반절을 통하여 주님께서,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라고 말씀하신 바,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하여는 지난 주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11절 하반절을 통하여 오늘 아침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권세를 `나의 것'으로 착각하여, 그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빌라도는 참으로 어리석은 죄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이신 성자 하나님을 못박아 죽이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빌라도보다 더 큰 죄인이 있다고 단언하고 계십니다. 그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을 죽여 달라며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였습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좁게는 이 살인극의 음모를 뒤에서 총지휘한 대제사장이요, 넓게는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며 함성을 질러 대었던 유대인 모두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모함하여 빌라도에 넘기고 빌라도에게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던 들, 빌라도가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할 리가 없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께서는 맡겨진 권세를 오용하여 진리를 못박은 빌라도의 죄를 묵과하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무고히 넘긴 유대인들의 죄를 간과치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의 죄보다도, 빌라도로 하여금 사형을 언도할 수밖에 없도록 원인제공을 한 유대인들의 죄가 더 큼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동기와 원인, 본질과 조준에 대한 심판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자는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 판결에 대해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 판결을 내린 빌라도의 책임일 뿐이었습니다. 그들 자신은 철저하게 무죄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7장 24절∼25절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면서 유대인들을 향해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니 너희가 피값을 당하라'고 말했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있게 `그 피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쳤습니다. 자신들은 무죄이기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습니까? 그들은 그 직후 고향을 잃고 온 세계를 나라없이 유리하며 2천년 동안이나 도처에서 피흘리는 고통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원인과 동기에 대한 심판, 조준과 본질에 대한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청소년 문제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통제 불능입니다. 그러나 문제 청소년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청소년 문제는 곧 어린이 문제인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 뿌려진 문제의 씨앗들이 청소년기에 들어 발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어린이들의 심성은 날로 황폐화되어 지고 있으며, 정서는 더욱 불안해지고, 언행은 점점 거칠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어린이들이 이제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숫자가 소위 문제 청소년으로 전락할 것인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적발된 비행 청소년들은 법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청소년기를 지난 우리 어른들은 무죄입니까? 그렇습니다. 분명히 세상의 법정에서 우리는 완전한 무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은 다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땅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병들 수밖에 없도록 병든 사회를 만들어 놓은 우리 어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시고 중형을 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원인과 동기, 조준과 본질에 대한 심판인 까닭입니다.

 

이 도시에 어린이들의 심성을 순화시켜 줄 수 있는 숲이라도 하나 제대로 있습니까? 어린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한국 영화 한 편, TV프로그램하나 제대로 있습니까? 이 땅에 어린이들의 정서를 아름답게 개발시켜 줄 어린이들만의 공간이 있습니까? 이 땅에 어린이들의 인격을 포근히 감싸줄 참된 교육이 있습니까? 이 땅위의 크고 작은 집들은 모두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꿈과 행복을 심어주는 사랑의 공동체입니까? 이 땅의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믿고 맡겨 주신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진정 열심히 애쓰며 노력하고 공부하는 부모들 입니까?

어떻습니까? 들여다볼수록 이 도시는 거대한 욕망 덩어리 아닙니까? 범죄의 소굴이 아닙니까? 온통 콘크리트 감옥이 아닙니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태연히 거짓말을 일삼는 위선자들의 수용소가 아닙니까? 무엇을 만들던 어떻게 광고하든 상관없이 돈만 벌면 된다는 배금주의자들의 격투장이 아닙니까? 온 길거리와 극장, TV는 음란물이나 폭력물 아니면 저질 코메디의 전시장 아닙니까?

 

누가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부정직하게 살았던 우리 자신들 아닙니까? 우리 모두가 병든 아이들의 원인이요, 동기 아닙니까? 이러고서도 우리의 어린이들이 바르게 자라기를,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그보다 더 큰 자가당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정말 참되고 바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 아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서도, 세상에서 무죄라 하여 하나님 앞에서도 무죄인 것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현실을 보면 너무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은, 우리에겐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내일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믿으시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소망이 또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제 잘못 살았던 결과로 오늘 이 땅의 어린이들이 시들어가고 있다면, 내일 그들이 건강하게 설 수 있도록 오늘부터 먼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십시다. 도마 위에 오른 몇몇 정치인이나 기업인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공범이었던 우리 자신들을 진리 위에서 바르게 가꾸기 시작하십시다. 우리 모두 뛰쳐나가,진리 안에서 정직과 정의와 사랑으로 이 사회를 새로이 건설하십시다. 그것만이 어린이 주일을 맞는 오늘 이 땅의 어린이들을 위한 가장 값진 선물인 동시에, 우리를 믿으시고 당신의 자녀를 맡겨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답이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어린이들이 밝고 아름답게 자랄 수 있는 건강한 내일을 친히 일구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바른 원인과 동기, 참된 조준과 본질을 기뻐 사용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이 사회가 거짓과 불의, 부정과 부패로 가득찬 병든 사회라면, 이제껏 부정직했던 우리 모두가 공범이었음을 주님 앞에 고백드립니다. 이 병든 사회 속에서 사랑하는 어린이들이 무참하게 시들어가고 있다면, 우리 모두가 가해자였음을 주님 앞에 자복합니다. 동기와 원인, 조준과 본질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주님, 바로 우리가 유죄임을 알아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진리 위에서 우리를 먼저 바로 세우고, 나아가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이 나라를 새로이 가꾸는 주님의 참된 역군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 병들고 시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치유가 임하게 하옵시고, 그들이 밝고 아름답게 살수 있는 건강한 내일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심판과 평가는 언제나 원인과 동기, 조준과 본질에 관한 것임을 기억하며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부모가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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