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4월 26일

    나를사랑하느냐 (II)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1:15~17


    우리말로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지만,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는 의미와 대상에 따라 사랑 을 네 단어로 구별하고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란 단어로 이것은 남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성 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가족간에 주고받는 사랑은 '스토르게'라 합니다. 세 번째로 친구간의 사랑 즉 우정은 '필리아'입니다. 이 세 가지 사랑의 공통점은 모두 조건적이라는 것입 니다. 남녀간에 이루어지는 에로스적 사랑의 생명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까닭은 에로스 자체가 본래부터 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변함과 동시에 에로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 입니다. 흔히 가족간의 사랑엔 조건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 갈수록 부모 자식간의 갈등이 왜 점점 더 커져가기만 합니까? 한 부모의 몸 속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남남보다 더 못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형제들이 어찌 그다지도 많습니 까? 가족간의 사랑인 스토르게 역시 조건적 사랑 이상 일수가 없는 탓입니다. 같은 학교에 다녔 다고 해서 모두 다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 참된 친구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게됩니다. 친구지간의 사랑인 필리아 또한 조건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조건적인 사랑과 구별하여 사용되는 헬라어의 네 번째 단어가 바로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란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상대의 상태나 수준, 나에 대한 상대의 태도여하에 상관없이 행하는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이처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뜻하는 헬라어 동사는 'agapao'입니다. 이동사의 본뜻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진정으로 잘되기를 바랍니다' '중심으로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누구를 기뻐하다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싫어진다 면, 불현듯 상대의 승승장구에 배가 아프도록 시기심이 인다면, 느닷없이 어떤 형태로든 상대를 한 번 짓밟아 버리고 싶어진다면, 그것은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었음을 의 미합니다. 아가페는 조건을 따지지 않기에 오직 아가페만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나 변함없는 사 랑일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사랑이 바로 이 아가페의 사랑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구별할 수가 없지만 그러나 헬라어 원전을 보면, 본문이 사랑을 분 명히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됩니다.

    새벽이 동터오는 갈릴리바닷가―제자들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침묵을 지 키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 지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새벽녘 갈릴리의 정적과 고요를 가르시며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조건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물음이었습니 다. 주님께서는 길이요 생명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조건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 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곧 이런 뜻이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어떤 경우에도 이 길을 진심으로 기뻐하느냐?' '네가 변함없이 진리가 흥왕하기를 진정으로 즐거워하느냐?' '네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을 중심으로 귀하게 여기느냐?' 이것없이는 이 세상속에서 참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원한 삶을 바르게 추구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주님을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이것이 베드로의 답변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앞에 계신 주님께서는 여자가 아니었기에 베드로는 이성간의 사랑인 에로스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고백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가족관계가 아니었으므로 가족 간에 주고받는 스토르게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가페의 참뜻을 알지 못했던 베드로로서는 주님을 향해 친구지간의 사랑, 즉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고백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서는 그것이 주님께 드릴 수 있었던 최고의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 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토록 자신 있게 고백한 그 필리아의 사랑이란 실은 조건적인 사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이 그처럼 조건적인 사랑이었 기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더 이상 쓸모 없는 존재로 보였을 때, 주님을 배신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 베드로는 무지하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조건을 따지는 사랑으로서는 얼마든지 주님을 또다시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전혀 인식치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 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두 번째로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나 베드로 는 이번에도 주님께서 던지시는 질문의 진의를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께 대답 을 드렸습니다.

    '내가 주님을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처음과 똑같은 답 변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베드로는 자신 있게 처음의 대답을 되풀이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의 한계요 수준이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베드로와 숙식을 함께 하시면서 베드로를 가르치셨던 주님의로서는 참으로 한심하실 수밖에 없는, 무어라 질책치 않을 수 없는, 정녕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베드로에 게 세 번째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필리아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주님께서는 또다시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을 다그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여태 그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고 질책하 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말 네가 친구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어주심으로써 베드 로의 불완전한 고백을 고스란히 수용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베드로가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베드로의 수준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조건 없는 아가 페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베 드로를 사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한심함에도 불구 하고, 베드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베드로를 'agapao'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처럼 형편없는 베드로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아가페의 사 랑이란 상대가 나의 수준에 맞추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수준에 나를 맞추어 주 는 자발적인 자기 부인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인간을 'agapao' 한다는 것은 그의 모든 허물과 유치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있는 그대로의 그의 전 존재를 먼저 수용하는 것입니다. 아가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베드로의 수준으로 당신을 낮추어 주셨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 까? 그는 자신의 수준이 최고의 경지라 착각했습니까? 자신이 모든 면에서 완성된 존재인양 오해 하는 교만에 빠졌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17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 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의 수준에 당신을 맞추어 주셨을 때 베드로가 근심하였다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 나타나 있는 단어 'lupeo'는 근심 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다거나 비탄에 빠진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지를 물었을 때 엉뚱하게도 필리아의 사랑을 두 번씩이나 그토록 당당하게 고 백했던 베드로가, 주님께서 베드로의 수준에 당신을 맞추어주셨을 때 더욱 의기양양해지기는 커 녕 오히려 그는 가슴에 찢어지는 아픔을 느낌과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비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자신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 까? 베드로에게 당신의 수준을 맞춰 주시는 주님의 베드로에 대한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이 베드로에게, 베드로 자신의 실상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세 번째에도 베드로가 아가페의 수준에 이르기를 요구하시는 질문을 던졌다 면, 주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답변은 계속 평행선을 그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필리아의 답을 하고서도 변함없이 당당하기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조건 없는 사 랑으로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 가시어 있는 그대로의 베드로를 온전히 품어 주셨을 때, 그 사랑 앞에서 그 사랑에 의해 베드로는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불완전함과 형편없음과 한심함을 처절하게 확인했던 것입니다. 불과 열흘여전에 그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 인하여 저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주님을 버리고 배신치 않았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지난밤, 아니 몇 시간 전까지만 할지라도 주님을 까맣게 잊은 채 공허한 갈릴리가 마치 인생의 모든 것인 양 헛그물질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해 두 번씩이나 주님을 사랑하노라 그토록 당당하게 고백했으니 자기란 인간은 얼마나 뻔뻔스러운 존재 입니까? 베드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자신에 대한 비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처절함 속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17b)

    처음과 두 번째 그의 대답은 이러 하였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당당하기 짝이 없는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 번째 답변 속에서는 방금 전의 당당함 을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전히 아가페의 사랑이 아닌 필리아의 사랑으로 고백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본질적인 의미 는 먼저 두 번의 고백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먼저 두 번의 답변이 자기 수준을 완전하다 착 각하는 자의 교만한 자기 과시라 한다면, 마지막 답변은 자기 수준의 불완전함을 깨달은 자의 겸 손한 자기 회개로써 바로 다음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 등을 돌렸던 배신자였습니다. 아직도 저는 허물투성이입니다. 주님을 향 한 저의 사랑은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이 무 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다하여 주님을 진심으로 사 랑하기 원하는 저의 중심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비록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저의 그 중 심을 주님께서 열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드렸던 숱한 고백 중에서 가장 진실 된 그리고 겸손한 고백이었습니다. 그 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계속하여 이 고백의 수준, 다시 말해 필리아의 사랑의 수준에 안주해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이후 베드로가 사도행전의 막을 올리는 진정한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필 리아의 수준에서 벗어나 아가페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의 막은 아가페에 의 해서만 열려지는 까닭입니다. 베드로의 수준이 이처럼 장성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조건 없 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형편없는 베드로의 수준에 맞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는 자신의 수준으로 내려와 주신 주님의 사랑에 의해, 그 사랑을 힘입어, 그 사랑에 이끌려 아가 페의 수준에 다다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당신을 낮추시어 'agapao' 해 주시지 않 았던들 결코 있을 수 없는 오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침 우리가 추구해야 할 아가페의 사랑을 다시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 니다.―'아가페의 사랑이란 상대의 수준에 나를 맞추어 주는 자발적인 자기부인의 능력인 동시 에, 나를 주님의 수준에 다다르게 하는 능동적인 힘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던 이날로부터 30여년이 흐른 뒤, 노인이 된 베 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7절∼8절을 통하여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서로 필리아의 사랑으로 우정을 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서로 'agapao'하라는 말입니다. 아가페의 사 랑 속에서만 허물투성이인 상대의 수준까지 내려갈 수 있고 그를 그리스도의 수준까지 끌어 올려 줄 수 있기에, 아가페의 사랑 아니고서는 누구도 참 사랑을 아는 참 사람다울 수 없음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가페를 알지 못했을 때 그는 주님과 사람을 동시에 배 신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에베소서 4장 15절 말씀이 누구에게든 가능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어떻게 우리 같은 하찮은 인간이 범사에 그리스도에게 까지 다다를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 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아예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고 증 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사랑 역시 아가페의 사랑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오직 아 가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수준에까지 이를 수 있음은, 그 사랑 안에 거할 때 그 사랑의 원천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오시사 우리를 범사에 걸쳐 당신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 주 심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 사람과 주님을 동시에 바르게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바른 사람 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암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아가페 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오늘도 주님께 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수준으로 낮추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위하여서 입니까? 지금 현 재의 나를 그대로 품으시사 당신의 수준을 향해 또 한 단계 끌어올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로 그 아가페 속에 거하십시오. 그 아가페를 힘입어 사람을 향해서는 땅 아래에까지 내려 가십시다. 그 아가페의 능력으로 위로는 주님에게까지 올라가십시다. 신앙이란 이처럼 주님의 아 가페 안에서 우리의 수준을 확장시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확장 없이는 내몸에서 태어난 자 식도, 내게 생명을 주신 부모님도 바르게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은 결코 겅제나 소유 그 자 체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적으로서의 경제와 소유는 인간의 행복을 파괴하는 흉기일 뿐입니 다. 행복은 언제나 지금 나의 수준을 깨트려 가는 존재의 완성 즉 참사람이 되어 가는 속에 있고 그것은 아가페의 사랑 속에서만 가능하기에, 결국 인간의 행복은 아가페 안에만 존재하는 것입니 다. 그렇기에 2천년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은 단순히 베드로 개인 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실은 우리 모두를 주님의 아가페로 초청하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도 우리는 주님 앞에 설 수조차 없는 부끄러운 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오 늘도 우리의 수준으로 친히 내려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또 다시 끌어 올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 오늘 이 아침이 2천년전 갈릴리 바닷가의 새벽이 되게 해 주시옵 소서. 베드로처럼 이 사랑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사랑을 힘 입어 아래로는 사람을 향해, 위로는 주님을 향해 우리 수준의 폭이 매일 확장되게 하옵소서. 이 사랑 속에서 사람과 주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희열을 맛보게 하옵소서. 이 사랑을 힘입어 나의 수 준을 끊임없이 탈피하여 그리스도의 참사람 되어 가는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 사랑에 이끌 려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이 암울한 사회속에서 새 역사의 막을 올리는 이 시대의 사도행전이 되 게 하옵소서. ― 아멘 ―  

    주님의교회


    주일 설교말씀 / 1998년/4월 19일
    나를사랑하느냐(Ⅰ)

    요한복음 21:15∼17

    설 교 자 : 이 재 철


    새벽이 동터오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친히 준비해 주신 조반을 소리 없이 나누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들리는 것이라곤 바닷가에서 부서지는 파도소리 그리고 바람소리뿐이었습니다. 그 정적 속에서 요한복음 마지막장 마지막 단락의 막이 오르고있습니다. 만약 우리 자신들이라면 이 최후의 극적인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지, 우리 각자 이 상황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다.

     

    내가 지난 3년 동안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먹여 주고 입혀 주었으며, 나의 마지막 진액이 다하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던 나의 수하들이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했습니다. 공개석상에서 나를 욕하고 저주하면서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신이 내게 안겨 준 것은 처참하면서도 고독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배신자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배신자들이 내 앞에 앉아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내 입에서 과연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며 귀를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라면, 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후회할 망정 일단 배신자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부터 휘두르고 볼 것입니다.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상기시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나를 배신했는지 그 이유를 따지려 들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지나간 과거는 모두 불문에 붙인 채 다시는 인간답잖게 배신자가 되지 말 것을 점잖게 그러나 따끔하게 훈계할 것입니다. 배신자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모르되 일단 찾아간 이상, 대게의 경우 우리는 이 세 가지 대응방법 중 한가지를 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들에게 보복을 가하시거나 배신의 원인을 규명하시려거나 훈계하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에게 단지 이렇게 물으셨을 뿐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먹으로 때린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를 따지거나 훈계를 한다고 해서 다시 배신치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기회만 닿으면 몇 번이고 다시 배신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은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사랑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사랑엔 오직 따름과 좇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님을 배신했던 제자들을 향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춘향이가 변학도의 회유와 협박 그리고 모진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정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에서 이몽룡보다 더 귀한 사람이 적어도 그녀에게는 있을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하여 심청이가 인당수 물 속으로 꽃다운 자신의 청춘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생명보다는 아버지의 눈뜸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조국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그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조국의 독립보다 더 귀한 일은 없었음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면서 까지 이 땅에 오시어 인간의 구원자 되셨던 것은, 하늘의 보좌를 지키는 것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그분에게는 더 귀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배신의 전과자를 향해 주님께서는 본문 15절을 통하여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지금 주님 앞에 사람이라고는 11명의 제자들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이란 베드로를 제외한 10명의 나머지 제자들을 뜻하게 됩니다. 즉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른 10명의 제자들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보다'란 단어 우측 상단에 `2'란 숫자가 붙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아래쪽 주 난을 보면 2번에 `혹 것들보다'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경 사본에는 `이 사람들보다'`이것들보다'로 기록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셨더라도 거기에는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체포 당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베드로는 주님을 저주하기까지 하여 결과적으로 제자들 중 가장 큰 배신자가 되었었기에, 이제는 역으로 누구보다 더 앞장서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촉구하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더욱 의미심장한 말씀이 됩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가리키는 `이것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제자들의 삶의 터전인 갈릴리 바다를 의미합니다. 지금 제자들 앞에 놓여 있는, 방금 잡은 생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모든 것으로 여기며 살아 온 세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말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헛그물질만 하던 갈릴리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네가 이 공허한 갈릴리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고 있느냐?'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주님과의 약속을 망각하면서까지 소유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었던 물고기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이제 곧 썩어질 이 소유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께서는 팔을 벌려 이 세상을 가리키시며 물으셨습니다.`네가 공동묘지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 덧없는 세상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께서는 이 아침 우리 앞에 서시어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며 불끈 움켜쥐고 있는 그것을 가리키시면서 묻고 계십니다.`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의 이 질문에 응답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참된 신앙은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마침내 침묵을 깨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15b)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였다'고 과거형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주를 사랑하고 있다'고 현재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주님보다 허망한 갈릴리 바다를 더 귀하게 여겼었기 때문입니다. 곧 썩어질 생선에, 덧없는 세상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도 주님도 망각한 채 밤이 맞도록 헛그물질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내가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노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베드로 앞에 계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셨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부활의 주님 앞에 다시 섰을 때 그가 밤이 맞도록 추구해 왔던, 갈릴리로 통칭되는 이 세상이 얼마나 공허하고 덧없는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입니다. 주님 없는 세상을 목적으로 삼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지를 통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내가 지금은 주님을 사랑한다', `내가 이제는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노라'고 고백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고백이 얼마나 진실 된 고백이었던지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단언할 정도였습니다. 자신이 이제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음을 주님께서 이미 아신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지, 이 세상에서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의 여부는, 이 세상 사람은 아무도 모를지라도 그 당사자와 주님만은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정녕 주님만을 귀하게 여기며 사는지 이 세상 것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사는지 나 자신은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아는 것을 왜 내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숙달된 나의 위선으로 세상 사람은 속일 수 있을 지 언정 나 자신과 주님만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진정으로 `내가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김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베드로가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위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배신자였던 베드로를 친히 찾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베드로가 한 것이라고는 단지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확인한 것뿐이었습니다. 2천년전 베드로를 찾아 갈릴리로 향하셨던 그 부활의 주님께서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그 분의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확인할 차례입니다. 보십시오. 그 분의 생명, 그분의 사랑이 아니셨던들 어찌 우리 같은 죄인이, 나 같은 진리의 배신자가 감히 이 거룩한 자리에 거룩한 성도의 자격으로 나와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영원한 생명 속에, 그 사랑의 법칙 속에 거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그 생명과 사랑의 영원한 가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가치를 알므로 세상을 더 귀하게 여기던 여러분의 어리석은 삶은 비로소 종식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삶보다 더 귀한 삶은 있을수 없기에, 여러분은 스스럼없이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한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6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으로 그치신 것이 아닙니다. 17절 역시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주님께서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고 계십니까? 베드로의 대답이 미덥지 못했던 탓입니까? 베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셨던 까닭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것도 불가항력적인 무력이나 강압의 위협 앞에서가 아니라 대제사장 집의 비천한 여종 앞에서 지레 겁을 먹고서 말입니다. 그 직후 베드로는 밖으로 뛰쳐나가 땅을 치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통곡한들 한심한 자신에 대한 자괴심이 가셔졌겠습니까? 주님의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배신은 베드로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새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되풀이 해 물으시사, 베드로로 하여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 반복하여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시므로, 베드로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한심한 자신의 허물을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시어 베풀어주실 때 베드로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날 아침 그 귀한 기회를 베드로에게 허락치 않으셨던들 베드로의 심령에 새겨졌던 상처는 치유되지 못했을 것이고,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영적 억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이후 베드로가 위대한 사도로서 그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날 아침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님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 주셨던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것이 실은 기회로 설명됨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신 것이 구원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또 한번의 기회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무엇입니까? 또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다시 기회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구제가 무엇입니까? 삶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죽음을 깨트리시고 영원히 부활하셨습니까? 인간답잖은 우리에게 참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에 의해 쓰임 받는 기회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어떤 의미에서건 기회를 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후 베드로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는 일에 자신의 전생애를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남에게 기회를 줄줄 모르는 삶, 오히려 남의 귀한 기회를 박탈하는 삶은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나를 배신한 사람에게까지도 기회를 베푸는 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생명이요 사랑이신 주님을 그 중심에 모신 자요, 주님께서 주님을 배신했던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내 중심에 좌정하고 계신 것은, 나를 배신한 그 사람에게 나를 통하여 나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기회를 주시기 위함임을 알고 있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인 까닭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배신자였던 내게 새 삶의 기회를 주신 주님을 힘입어 그 분의 생명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가슴속에 배신의 못을 박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금 여러분이 버리려고 작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아침 주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에 기회를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니 여러분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 친히 기회를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오늘 하루가 주어졌다는 것은 또 하루의 기회가 더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위한 또 하루의 기회이겠습니까?

     

    내 마음속에서 버려 버리기로 작정한 바로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또 한번의 기회인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철저하게 고독할수 있으나, 그러나 그 고독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배신한자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고독하면 할수록, 배신자였던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도록 고독하셨던 주님께서 더 더욱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실천할 때 우리는 비로소 경제논리에서 자유 하는, 사랑의 논리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 ― 이 삭막한 세상을 밝히는 따스한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경제논리가 아닌 오직 사랑의 논리로 당신 자신을 태우므로 배신자였던 우리에게 생명의 빛과 기회를 주신 주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 심령의 갈릴리에서 이렇게 묻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모두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가치에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주님께 등을 돌린 채, 공허한 갈릴리를 귀하게 여기느라 정작 귀하신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찾아와 주셨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연거퍼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도 구원도 자비도 용서도 모두 이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이 기회 주심은 경제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사랑의 논리에 의해서임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값진 기회를 다시는 의미 없이 상실해 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외면하고픈 사람―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는 사람―바로 그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베푸는 주님의 도구가 기꺼이 되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기회의 의미를 극대화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또 하루의 기회를 주신 오늘의 가치를 바로 세우기를 원합니다. 그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하므로 배신자였던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불가능하나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의 생명과 사랑으로는 가능하오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간구 드립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그와 같은 삶을 통하여 우리 주위가 살만한 하나님의 나라로 일구어져가게 하시고, 우리 모두 주님 앞에서 베드로처럼 고백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 아 멘 ―

     

     

     

     

    주님의교회사랑의나눔터기도의샘터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4월 5일고난주일

    죽은자 가운데서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1:1∼14


    태어남이 시작이라면 죽음이란 끝남을 의미합니다. 태어남이 생성을 뜻한다면 죽음이란 소멸입니다. 한 인간의 태어남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가져다준다면, 죽음이란 남은 자들에게 슬픔과 절망을 안겨 줍니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태어남과 죽음이란 완전히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 이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무소유의 의미에서 태어남과 죽음은 동일합니다.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져오지 못하는 인간은 죽을 때에도 무엇하나 가져 갈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 뿐입니다. 설령 누군가가 태어날 때에나 죽을 때에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가 쥔 것은 허공 이상 일수는 없습니다. 둘째 고통의 관점에서 동일합니다. 모든 인간은 울음과 더불어 태어납니다. 그것은 환희의 울음이 아니라 고통의 울부짖음입니다. 좁디좁은 태문을 통하여서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은 산모나 태아나 모두에게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죽음 역시 고통입니다. 생명인 호흡이 끊어진다는 것 자체가 육체의 크나큰 고통입니다. 셋째 도움의 측면에서 동일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누군가가 받아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탯줄을 끊어주어야만 하고 누군가가 젖을 물려 주어야만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 치고 누구도 그 일을 스스로 해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죽을 때에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누군가가 시체의 눈을 감겨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시체를 닦아 주어야만하고 누군가가 시체에 수의를 입혀 주어야만 하고 누군가가 장례식을 치루어 주어야만 합니다. 인류의 역사이래 이 땅에 태어났다가 죽은 사람 중 자신의 장례식을 직접 치른 사람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넷째 고독이란 의미에서 동일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에나 죽을 때에나 벌거벗은 자신의 육체를 송두리째 남의 손에 맡겨야만 합니다. 거기에는 체면이나 자존심이 게재될 틈이 없습니다. 오직 그곳에는 벌거벗은 채로 남의 도움 없이는 태어날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유한한 자기 존재에 대한 절대적이고도 본능적인 고독감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군중 속에서도 때로 고독감을 씹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섯째 허물을 벗는다는 관점에서 동일합니다.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은 자궁이란 허물을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리 산일이 지나가도 태아가 자궁이란 허물을 벗기 전까지는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궁이란 허물을 완전히 벗어난 시간이 바로 출생 시간이 됩니다. 이처럼 죽음 역시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허물을 벗는 의식입니다.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보다 더 장엄한 의식이 있을 수 없음은 둘다 새로운 존재를 위한 옷갈아 입기인 까닭입니다. 마지막으로 삶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동일합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간은 좁디좁은 자궁에서 벗어나 이 대명천지에로 그 삶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삶의 영역이 확장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확장되고 연륜이 확장됩니다. 자궁 속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확장입니다. 죽음 역시 이 유한한 세상으로부터 영원으로 그 삶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로 삶이 확장되는 것이요, 이 땅을 먼저 떠난 믿음의 선진들과의 관계가 확장되는 것이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영원토록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태어남과 죽음이란 서로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일치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태어남과 같이 새로운 시작이요, 소멸이 아닌 생성이요, 절망과 슬픔이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의 소망과 기쁨인것입니다.

    사형 집행장에서 사형수들의 마지막 모습을 여러차례 지켜본 현 서울 구치소 경비 교도대 대대장인 동시에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의 저자이기도 한 박효진 장로님은, 타종교와 기독교의 차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은 자와 건성으로 믿은 자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곳이 바로 사형 집행장 이라고 말합니다. 사형집행장이란 죽음이 집행되는 곳입니다. 사형수 치고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형수중 주님안에서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들만 일말의 두려움이나 주저함 없이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죽음이 아닌 허물벗기로, 새로운 삶의 확장으로 믿는 까닭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14) 예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한 구절입니다. 기회있을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하여 고백하는 내용인 까닭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 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이처럼 사도신경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매번 고백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 고백 속에 나타나 있는 `죽은 자'란 의미를 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의미를 무의식중에 과소평가하고 있거나 혹은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란 참 의미가 무엇입니까? 본문에 사용된 단어 nekros의 뜻은 시체란 말입니다. 시체란 결코 친근감을 주는 대상이 아닙니다. 낭만적이거나 희망적인 대상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처절하리 만치 처참하고 단절적인 대상입니다. 오죽하면 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일단 시체란 딱지가 붙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같은 방에 조차도 두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낭만적으로 죽은 자처럼 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온몸이 찢기운채 처참한 시체가 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독생자가 비참한 시체가 되셨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모든 죄인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의 노예된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시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죄값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신 치루어 주시므로 그분이 시체가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그저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시체 되게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로 그저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시체 되시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시체가 될 것이요 시체란 모든 것의 종결과 소멸의 의미 이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경우라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하여 시체가 되었다 한들, 감사의 대상은 될지언정 영원한 구원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살아나다'는 동사 egiro'는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시체는 일어 날수가 없습니다. 움직일 수조차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체는 시체가 되는 순간부터 모든 순환이 멈추어져 썩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시체가 된 예수님이 일어나신 것입니다. 다른 시체들도 다 일어나기에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시체들은 모두 시체로 썩어 가고 있는 중에 예수님의 시체만 일어나신 것입니다. 한 번 벌떡 일어났다 다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일어나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시체 되게까지 하셨던 하나님께서 시체된 예수님을 시체 가운데서 영원히 일으켜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시체 되셨던 예수님의 시체가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일어나셨기에 그분의 시체 되셨음이 비로소 참된 의미를 갖게 되었고, 그분은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시체 되셨다가 영원히 일어나셨기에 그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의 년수가 다하여 이 땅에서 우리의 호흡이 멎고 우리가 시체 되는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의 허물을 벗는 순간이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삶이 확장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박효진 장로님이 만났던 사형수들은 이 사실을 확신하였기에, 죽음 앞에서 오히려 살아 있는 자들을 감동시키면서 죽음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이번 금요일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이기에 그날을 기념하기 위한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던 십자가와 관련하여 캐톨릭에는 다음과 같은 전승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했던 로마제국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열렬한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녀가 79세 되던 해인 AD325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곳을 발굴하다가 땅속에서 십자가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곁에 있던 한 다리를 절던 여인이 그 십자가에 손을 대자 다리가 깨끗하게 회복되어 그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믿게 된 헬레나는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의 주요 부분을 교회 안에 보관케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중 일부분은 비잔티움에 세워진 아들 콘스탄틴 황제의 입상 속에 넣게 하였고, 또 다른 부분은 로마에 세워진 `성 십자가 교회'에 보관토록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 십자가의 조각을 구입하려는 열풍이 불면서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예수님의 진짜 십자가에서 나왔다는 수많은 나무 조각들이 금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비싼 값에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많은 나무 조각들을 다 합친다면 십자가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만들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캐톨릭에서는 그 나무 조각들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대신 그것을 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토막으로 수천명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하나의 진정한 십자가로부터 많은 십자가가 가능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전승의 신빙성 여부는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에 논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무 조각 그 자체에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던 진짜 십자가의 나무 조각을 구할 길이 없는 우리에게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자격이 없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의 참된 의미와 가치는 예수님의 시체 되심과 시체로부터 일어나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시체 되셨다가 사흘만에 시체 가운데서 영원히 일어나셨기에 십자가는 구원의 표징이요, 소망의 상징이요, 영원한 생명의 증표요,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것, 십자가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는 것, 주님께서 명령하신 바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죽은자'가 되셨다는 것은 시체가 되셨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용된 nekros는 시체 이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으니 곧 `헛것'이란 뜻입니다. 시체가 무엇입니까? 시체란 헛것의 총체적인 표현입니다. 시체란 총체적으로 헛것일 뿐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총체적으로 헛것인 시체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시체인 채로 그냥 썩어 버린 것이 아닙니다. 시체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헛것의 종속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헛것을 깨트리시고 헛것의 허물을 벗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숨어 있는 마가의 다락방 한 가운데에 문을 열지 않고 나타나신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으로 그 삶을 확장 시키신 것―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요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제의 헛것으로부터 헛것의 허물을 벗는 것입니다. 눈이 있다면 돌이켜 인류의 역사를 보십시오. 인간이 기를 쓰고 추구하던 것중 진리 이외에 헛것 아닌 것이 어디 있었습니까? 영원치 아니한 것, 나를 영원하게 만들어 줄 수 없는 것은 모두 헛것일 뿐입니다. 그 헛것의 허물을 날마다 그리스도안에서 벗어 던지므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내 삶의 영역이 진리를 향해 계속 확장되어 나아가는 것―이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삶을 가리켜 새 생명의 삶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주님을 등졌을 때 제자들은 허망한 갈릴리 바다 위에서 참으로 헛것일 수밖에 없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뵙고 그 모든 헛것의 허물을 벗어 던졌을 때에 영원한 십자가의 증인들로 그 삶이 확장되었던 연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겠습니까? 아직까지 헛것의 허물을 벗지 못하고 있음을, 헛것 속에 헛되이 안주하려는 헛된 어리석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시체 되셨음과 시체로부터 일어나셨음의 의미를 알지도 믿지도 않음을 뜻하기에, 그 삶의 결국은 총체적 헛것인 시체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따르는 자에게만, 육체가 시체되는 죽음이란 육체의 허물을 벗고 영원 속으로 그 삶을 확장시키는 지상 최대의 축제요,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대구 남산동 높은 구릉에는 천주교의 교구청이 있고, 그 안에는 성직자의 묘지가 있다고 합니다. 신부나 수녀로 평생을 봉직한 자들이 이 땅에서의 생을 마친 후에 그들의 시신을 매장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성직자 묘지 입구에는 `HODIE MIHI, CRAS TIBI'라는 라틴어로 된 팻말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내차례, 내일은 네차례'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이 팻말이 일반 공동묘지에 붙어 있다면, `오늘은 내가 시체 되었기에 나를 매장해 주기 위하여 네가 여기와 있지만, 그러나 내일은 네가 시체 되어 누군가에 의해서 이곳에 매장될 것이다.'라는 뜻으로,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반드시 총체적 헛것인 시체되기 마련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팻말이 일평생 동안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해 온 성직자들의 묘소 입구에 붙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오늘의 묵상을 토대로 하여 전혀 다른 의미를 음미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육체의 허물을 벗고 영원 속으로 나의 삶을 확장시켜 나아갑니다. 내일은 당신이 육신의 허물을 벗고 영원 속으로 나아 올 수 있도록 오늘을 십자가 앞에서 소중하게 가꾸기를 기원합니다.'―이런 심오한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내차례, 내일은 네차례'란 이 짧은 구절은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십자가의 삶을 사느냐 아니냐에 따라, 예수님께서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시체 되셨음과 일어나셨음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의미는 완전히 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다시 말해 우리의 죽음이 완전한 헛것을 뜻할 수도 있고, 헛것의 허물을 벗는 새로운 옷입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이 오늘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HODIE MIHI, CRAS TIBI'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험한 십자가 능력 있네>

    ―Willian J. Gaither―

    목적도 없이 나는 방황했네

    소망도 없이 나는 살았네

    그때에 못 자국난 그 손길

    나에게 새생명 주셨네

    험한 십자가에 능력 있네

    거기서 나의 삶이 변했네

    찬양하리 그 이름 영원히

    주의 십자가 능력 있네

    나는 믿네 갈보리 언덕 십자가

    나는 믿네 그 누가 뭐라 해도

    이 세상 다 지나고 끝날이 와도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나는 믿네 십자가에서 못 박힌 주

    오늘도 새 삶을 주시네

    날 새롭게 하셨네

    나는 새 피조물

    십자가 잡고 살아가리

    나는 믿네 갈보리 언덕 십자가

    나는 믿네 그 누가 뭐라 해도

    이 세상 다 지나고 끝날이 와도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아멘―

    주님의교회사랑의나눔터기도의샘터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3월 29일사순절 다섯째 주일

    묻는 자가 없더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1:1∼14


    삼성그룹의 창업주였던 고 이병철 회장님이 생전에 각 공장의 공터에마다 나무를 심게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그분이 각공장을 시찰할때면 공장장 사무실에서 서류보고를 받거나 생산라인을 점검해보기전에 반드시 그 공장에 심겨진 나무를 먼저 살폈다고 합니다. 나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면 그 공장의 공장장을 신뢰하였고, 만약 나무에 이상이 있으면 그 공장의 서류보고가 아무리 훌륭해도 공장장에게 100% 신뢰를 주지않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거대한 공장을 책임지는 공장장의 손길이 공장밖 나무에까지 미친다면 그 공장장은 공장안 괸리는 두말할것도없이 잘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고, 그 반대 경우의 공장장이라면 공장 자체의 관리마저 버거울 것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실제로 공장에 심겨진 나무로 공장장의 역량을 가늠하는 그분의 판정은 거의 정확했다고 합니다.

    한 구도자가 유명한 선사를 친견하기 위하여 그 선사가 기거하는 산사를 찾았습니다. 깊은 산 속의 산사 아래에 막 당도했을 때에 산사를 끼고 도는 계곡 물 속에 산사에서 버려진 콩나물 대가리와 밥알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구도자는 발길을 돌려 하산해버리고 말 았습니다. 저처럼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면 선사가 아니라 신령이라 할지라도 만나볼 가치가 없 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불교에 귀의하여 스님이 되고자 하는 모든 불자는 먼저 밥짓는 일부터 하 게 됩니다. 구도란 섬김과 봉사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갓 귀의한 불자에게 스님이 첫날 첫 번째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방금 말씀드린 이야기라고 합니다. 산사의 참됨의 정도는 그 산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의 물속을 들여다 보면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눈은 밖을 향하여있기에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자신에 관한 한 우리는 거 의 눈먼 자와 진배없습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하 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 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도 자기 눈 속의 들보 있음은 보지 못하는 형편이니,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나 눈먼지 두말해 무었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당연시 하며 살 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절망감과 무력함 그리고 교만과 과오 등이 다 우리자신을 보지 못함 으로 인하여 비롯되고있는 까닭입니다. 고 이병철 회장님이 공장의 나무를 보고 공장 전체를 알 수 있었다면, 불가의 구도자들이 산사를 끼고 도는 계곡의 물을 보고 산사를 바르게 알 수 있다 면,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나 자신을, 나의 상태를, 나의 상황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겠습니까?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주님의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린 제자들은 갈릴리바다로 고기잡이 에 나서고 말았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헛 그물질만 게속하느라 하룻밤을 허망하게 버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지만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주님의 말씀을 좇아 그물을 배 오른편에 한번 더 던지면서도 그 말씀의 주인공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누구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던진 그물에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잡 힌 것을 확인하고서도 그것이 주님의 역사임을 알았던 것은 요한뿐이요, 요한의 말을 듣고 물 속 으로 뛰어든 사람은 베드로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그물을 배위로 끌어올리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육지에 당도하였을 때에 숯불 위에 생선도 놓였고 떡도 준비되어있었으나, 그들은 그 음식의 용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 히 묻는 자가 없더라(12)"

    제자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망각하고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언제 주님을 알았던가 싶을 정도로 오직 헛그물질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중 누구도 감히 주님을 향해 당신이 누구시냐고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을 주님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단지 주 님의 정체성에대한 확고한 인식만을, 다시 말해 주님의 정체성에대한 더 이상의 질문 없음만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확고히 인식하므로 자기 자신들에 대한 여러 모양의 의문이나 혼돈이 해소되었음을 의미하고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를 향하면서도 왜 가야하 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갈릴리에 가서 무었을 해야할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헛그물질만 하면서도 그 실패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 를 잡았지만 그 성공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주님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 모든 의문들이 해소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속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확연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치 않게 된 것입니다.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이 이후 주님의 승천을 거쳐 사도행전이 끝나기까지 이들이 다시는 헛그물질과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치 않고 걸어야 할 길을 바르게 걸어간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주님과 자신들에 대한 질문이 동시에 해소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 까? 이에 대하여 본문12절 하반절은 이렇게 대답하고있습니다.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그들의 질문이 해소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동사 'eido'는 본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공허한 갈릴리바다를 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물고기만을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눈을 들어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저 한 번 스치듯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응시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켰습니다. 주님을 외면했 을 때 주님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자신도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불확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응시하였을 때 주님도, 그들 자신도, 확연히 보였습니다. 현재의 그들 실상과 되어져야 할 미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무엇을 취하고 버려야 할지가 확연히 보였습니 다. 그들의 삶이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가 뚜렷이 보였습니다. 왜 살아야하며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가 분명히 보였습니다. 자신들의 거듭되는 배신에도 불구하 고 결코 중단 없이 계속되는 주님의 사랑이, 사랑의 주님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이병철회장님이 나무를 통해 전체를 보듯, 구도자가 계곡 물을 통해 산사의 모두를 보듯, 제 자들은 주님을 응시하므로 써 주님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부터 사도행전의 막이 오르게 된 것은 사필귀정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리고 성을 나서실 때, 소경 바디매오가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주님을 향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신 주 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께서 바디매오를 긍휼히 여기시사 보게 해주셨습니다. 평생 장님이었던 자가 보게 되었 다면 얼마나 볼것이 많겠습니까? 온 천지를 두루 다니며 보고싶은 것 마구 보고 다녀야 하지 않 겠습니까? 그러나 바디매오는 보게되는 즉시 주님을 좇아갔다고 마가복음 10장 52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눈이 열리는 즉시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랑이요 생 명이요 진리이신 주님을 똑바로 응시했던 것입니다. 그 주님의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육신의 눈 뿐만 아니라 영혼의 눈마저 멀어있던 자신의 추한 몰골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추구해 야할 삶이 무엇인지가 보였습니다. 그는 감사하며 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리고성의 세리장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으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키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뵐 도리가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삭 개오는 뽕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예수님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심정을 아신 주님께서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시매 삭개오는 주님을 더 가까이에서 뵐 수 있었습 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삭개오는 부정축재한 자신의 재산중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은 4배로 갚아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응시하므로써 돈의 노예 로 추악하고 불의하게 살았던 자신을 바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과 함께 하시는 주님 의 사랑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구원을 받은 자로써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 삶인지를 확연히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본대로 실천하는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그가 응시한 주님 이 그 용기의 원천이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욥에게 느닷없는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처음에는 꿋꿋하게 견디는 것 같았으나 계속되는 고 난에 마침내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같은 욥이 욥기 42장 5절∼6절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고백하고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 스로 한하고 티끝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자신의 의로움만 내세우며 주님을 원망하던 욥이 어떻게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는 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눈으로 주님을 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보았을 때 자신 에게 닥쳤던 시련이야말로 자신의 교만을 깨트리시고 더 온전한 의인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 주시기위한 사랑이었음이 보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했던 자신의 어리석 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욥은 주님의 사랑 앞에서 재를 뒤집어쓰며 회개치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디매오도, 삭개오도, 욥도, 아니 갈릴리의 제자들도 주님을 응시하므로 비로소 자신들을 바로 보았습니다. 주님을 응시하므로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주님을 응시하므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불분명했던 것들이 모두 확연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질문이 해소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혹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까? 혹 병들어 있습니까? 혹 궁핍하게 되었습니까? 왜 그런 일을 당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까?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습니까? 모든 것이 오리무중 속에 빠져 있습니까? 더 이상 여러분 자신을, 자신의 문제를 보지 마십시오. 그것은 보면 볼수록 더 큰 절 망과 근심을 안겨줄뿐 전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못합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우 리와 함께 하신 주님을 보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응시하십시오. 주님 의 사랑을, 사랑의 주님을, 주님의 생명을, 생명의 주님을, 주님의 진리를, 진리의 주님을 응시 하십시오. 주님께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주님을 응시하면 내게 주어진 연단의 뜻을 알게 됩니 다. 주님을 응시하면 지금 내가 왜 병들어 있는지 그 의미를 알게됩니다. 주님을 응시하면 내가 왜 지금 궁핍해야하는지 알게됩니다. 주님을 응시하면 지금 내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를 알게됩니다. 주님을 응시하면 모든 의문이 해소됩니다. 주님을 응시하면 모든 것이 확연 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한한 힘을 얻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의 바탕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의 사랑임을 보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참되고 성숙한 믿음은 중단없이 주님 을 응시하는 것으로 가능해집니다.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3년이나 주님을 따라다녔으나 그들의 시선이 주님을 떠나 있을때 그들은 공허한 갈릴리의 오리무중에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주님을 응시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삶속에는 감동적인 사도행전이 펼쳐졌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응시 한다는 것은 나 자신과, 나 자신의 미래를 새로이 얻는 것을 의미하기에 우리에게 주님을 응시하 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에는 지난 수요일 세례를 받은 한 성도님의 신앙고백문을 읽어드리는 것으로 오늘의 기도를 대신하겠습니다. 우리는 이글을 통하여 한 인간이 주님을 응시할 때 그 삶이 얼마나 새로 워 질수 있는지를 확인할수 있을 것입니다.

      '7형제중 막내이면서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까지 밥을 못 먹고 자랐습니다. 취학 적령기가 되었을 때 초등학교에 입학도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셋째 형님이 저의 손을 이끌고 데려다 준 곳이 집에서 약1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조그마한 동산위 교회였고, 내부는 늘 컴컴하고 어두웠던 그 군용 대형 천막 속에서 초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친 후 2학년이 될 무렵, 공립학교로 전학을 가게되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여전히 형편이 어려워 이번에도 정식으로 인가된 중학교엔 못 가고 길거리에서 학생모집 포스터를 보고 찾아가 입학등록한 곳이 전농동에있는, 역시 언덕 위의 작은 교회학교였습니다. 아침이면 콩나물로 끓인 죽을 먹고 미아동에서 전농동까지 걸어서 통학하였습 니다. 이후 오랜 삶을 살아오던 중 어느 날 불현듯, 여덟살 때 저의 손을 잡고 그 천막교회 학교로 인도해 주신 분은 형님이 아니라 주님이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형님의 눈에 띄게 어린이 모집 포스터를 친히 붙이시고 형님의 손길을 잠시 빌려 저를 천막교회 학교로 인도하셨음 을 알게되면서, 그 이후 제삶의 과정 속에 일어났던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과 일들중 전능하신 주님의 은총과 역사 하심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지금도 없으며, 미래에 도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하게 되었습니다. 신비하고도 오묘하며 감탄스러운 하나님 아버지의 기적과 은혜의 증거와 증거들의 연결이었 고 연속이었습니다. 늘 잠시 뒤면 그분께서 구출하여 주셨다고 깨닫게 되었던 수없이 많았던 위험한 순간들 꼭 필요한 것은 반드시 주신 일들 교회도 다니지 않던 그 옛날, 만 5년을 기도 드렸더니 정확하게 내가 원하던 현재의 아내를 만나게 해주신 그분 등산중 험한 산속오지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홀연히 그때 그 장소에 나타난 한 사 람으로부터 길을 안내 받게 해주셨던 일 굶고 자라 허약하게 될 것을 미리 예방하여 주시려고 중학교까지 먼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정하여 주시사, 걸어서 통학토록 하시어 오늘날까지 건강을 유지하도록 배려해주신일―빠른 속도 로 많이 걷는 것이 최고의 운동이며, 일설에 의하면 사람의 수명은 자기가 걷는 거리 만큼이라고 하니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얼마나 심원하신지요 죄많고 허물 많으며 방탕했던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도 잊지도 않으시고 용서하여주시며 사랑 하여 주시사,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 울타리 안으로 인도하여 주신 주님 저를 선택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온전히 건강한 몸으로 이날까지 살아오도록 티 끌만큼의 오차도 없이 구체적이시고, 참으로 우리 곁에서 인격적으로 도와주시고, 늘 바른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그분 이제 그분의 뜻을 바르게 살펴가면서 감사하기만 하는 나날들입니다. 과거라면 불평했을 일 들이 이제는 모두 감사의 조건들일 따름입니다. 집앞에 세워 놓았던, 아이에게 새로 사준 자전거를 누군가 도난 방지체인을 끊고 가져갔을 때에도,―'잘됐다. 꼭 갖고싶은 사람에게 선사하게 되었으니!' 어느 날 퇴근때 아파트 엘리베이트가 고장으로 서있어 11층까지 걸어서 올라가게 되었을 때 에도―'아! 요즈음 운동 부족한 줄 아시고 하나님께서 운동 좀 하라 그러시네!' '흥분치 말고 한 계단씩 천천히 밟고 오르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 하루 일들을 반성하라시는구나. 감사합니 다.' 생활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에는―'아! 좀 겸손하라시는구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경계에서 너무 멀리 벗어났으니 가까이 오라시는구나. 감사합니다.' 때로 병으로 눕게될때에도―'너무 허덕이며 앞만 보고 달리면 욕심만 커지고 주님을 망각케 되니 잠시 쉬면서 들에 핀 꽃을 보라 하시네. 감사합니다.' '모두다 나의 잘못이니 주위의 모든 분들을 용서하라시는구나. 감사합니다.' 주님! 앞으로도 저의 소원은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주님의 소망만이 온전히 있게 하여주옵소서! ―아멘―

    주님의교회사랑의나눔터기도의샘터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3월 22일사순절 넷째 주일

    조반을 먹으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1:1∼14


    저희 집 2층 한쪽 벽에는 세로로 된 긴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액자의 한 가운데에는 `빛을 발하라'는 큰 글자가 쓰여있고, 그 양옆으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는 이사야 60장 1절의 말씀이 아주 작은 글씨로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왼쪽 아래에는 `홍성사 이재철 사장 위해, 묵농'이란 서명과 함께 낙관이 찍혀있습니다. 묵농이란 젊은 서예가가 20년 전 사업을 하던 저를 위해 써준 작품이었습니다. 우연한 자리에서 친구의 소개로 통성명을 하게 된 그를 그 이후 공식석상에서 한 두 차례 더 스쳤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전 연락도 없이 느닷없이 제 회사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저를 위해 썼다는 그 작품을 화선지 채로 동그랗게 말아 손에 쥐고서 말입니다. 이유인즉은 같은 젊은 사람끼리 사귀고 싶어서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던 그의 예기치 않은 호의에, 저는 그를 고급식당으로 인도하여 극진하게 식사 대접하는 것으로 보답하였습니다. 그 뒤 그로부터 따로 연락이 없는 가운데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묵농을 저에게 소개 시켜 주었던 친구로부터 묵농이 죽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간경화증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가슴아픈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년의 그는 경제력을 완전 상실한 채 조금이라고 안면이 있는 사람이기만 하면 무조건 글씨를 써서 가져다주곤, 혹 몇 푼이라도 받게되면 그 돈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저를 위해 쓴 글씨를 들고 느닷없이 저를 찾았던 것도 그의 말대로 저와 사귀고 싶어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를 존경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날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제가 고급식당에서 베푸는 거창한 식탁이 아니라 돈이었습니다. 엄청난 사업자금이 아니라 그저 며칠을 더 연명하는데 필요한 최저 생계비 였을것입니다. 만약 제가 그날 그를 대접하느라 지불한 돈을 그에게 현금으로 주었더라면 그는 그 돈을 며칠동안 훨씬 더 요긴하게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정말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우둔한 자였습니다. 그가 저를 만나 단지 단 한 번의 끼니만을 해결하고 돌아설 때 그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의 가슴은 또 얼마나 아렸겠습니까? 저는 그때까지 책상서랍 속에 아무렇게나 넣어두었던 묵농의 작품을 찾아 표구를 한 뒤 사무실 벽에 걸었습니다. 첫째로 저로 인해 잠시나마 가슴아팠을 묵농에게 속죄하기 위함이요, 두 번째는 같은 어리석음을 두 번 다시 범치 말자는 의미에서였습니다. 그것이, 지난 20년동안 많은 액자를 처분하는 가운데에서도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그의 작품만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 액자를 계속 벽 위에 걸어둔다고 해서 같은 잘못을 전혀 되풀이 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닙니다. 지나온 20년 동안 묵농에게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수도 없이 범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모두의 고백일 것입니다. 상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막상 필요한 것은 주지 않고 필요치도 않는 것을 인심쓰듯 안겨주는 실수를 얼마나 자주 저질러 왔습니까? 설령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다 할지라도 때로는 능력이 없어서, 혹은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웬지 싫어서 그 필요를 외면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것은 부모 자식간이나 부부사이라고 해서 예외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의 진정한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실망감만 더 커질 뿐입니다. 마치 제게 기대를 걸고 왔다가 그저 밥한 끼 얻어먹고 무거운 발길로 되돌아서던 묵농처럼 말입니다.

    혹 무슨 일을 하기 위해 밤을 꼬박 새워 본 적이 있습니까? 시간이 깊어갈수록 점점 더 분명하게 찾아오는 것은 배고픔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오후 7시경에 식사를 한 뒤 자정을 넘기고 새벽까지 버티고있는 데 어찌 허기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밤샘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밤참을 준비하기 마련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책상 앞에서 책을 읽거나 혹은 방안에서 가만히 묵상하느라 밤샘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갈릴리바다에서 계속 그물질을 하느라 밤을 꼬박 새운 것입니다. 그물을 던졌다 끌어올리고 다시 던지기를 반복한다는 것은 중노동중의 중노동입니디. 그런 만큼 날이 밝아올수록 그들의 허기는 더욱 심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밤 베드로의 선동에 의해 충동적으로 고기잡이에 나섰기에 밤참을 준비했을 리가 없었습니다. 새벽녘 그물을 거두고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한들 빈민촌에 살고있는 그들의 집에 그 이른 시각, 그들을 위한 아침이 따로이 마련되어 있을리도 없었습니다. 모든 여건을 생각할수록 더 더욱 허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마지막 순간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물 가득히 고기를 잡아 육지에 당도하고 보니, 거기에는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준비해 두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음식의 용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본문12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놀랍게도 그 음식들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조반으로 마련해 두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망각한 채 허망한 갈릴리에서 의미 없이 헛그물질을 하고있는 동안, 주님께서는 그 한심한 제자들을 위하여 조반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주님의 이 짧은 한 마디야말로 주님께서 인간을 위한 진정한 구원자 되심의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첫째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순간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 중 누구도 배고픔을 호소한 자가 없었습니다. 제자 중 누구도 조반을 간구한 적도 없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밤새워 헛그물질 하느라 너무나 허기졌기에 허기졌다는 사실자체를 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떨어져 육지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그 순간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둘째,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아무리 제자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계셨다 할지라도 그 필요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지 않았더라면, 그 분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물질하는 동안 친히 조반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치 않으셨습니다. 육지에 막 당도한 제자들에게 이제 방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주님께서 마지막 순간 제자들에게 그물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고기를 허락하신 주된 목적중의 하나가 제자들에게 조반을 만들어 주시기 위함이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능력 아니었던들 그날 새벽 그 조반은 애시당초 불가능하였을 것이기에, 그 조반이야 말로 주님 능력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셋째,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고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위하여 그 능력을 베푸시는 넉넉한 사랑을 갖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한마디로 배신자들 아닙니까? 정작 주님 곁을 지켜야할 때 도망가버렸던 배반자들 아닙니까? 지난밤만 할지라도 주님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오직 욕망의 헛그물질만 해대던 쓸모 없는 인간 인간쓰레기들 아닙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그들에게 꼭 줄것이 있다면 저주 이상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햐여 조반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한심한 인간들의 상태에 상관없이 그들을 위해 당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조반을 먹는다'는 동사 'aristao'는 오찬이나 만찬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음식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간단한 아침이 아니라, 오찬이나 만찬처럼 성의를 다하여 준비된 풍성한 것이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들을 위하여 그토록 온정성을 다해 조반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본문 13절은 이렇게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자신들이 범한 죄과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주님께서 친히 준비해 주신 음식에 감히 손을 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송구스러워 하기만 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친히 음식을 나누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진정 넉넉한 사랑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이 짧은 한마디야말로 제자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고백인 동시에, 당신이 누구 신지를 다시 밝히시는 주님의 자기 선언이었습니다. 주님이시야 말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구원자셨던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이나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출애굽의 대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3천5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이 살 수 없는,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없는 광야에서 40년이란 긴 세월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임져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가 떡이라면 메추라기는 고기였습니다. 물이 없는 곳에서는 반석을 터트리기까지 하시면서 매일 필요한 물을 풍족하게 내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게 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그들을 위하여 주시는 것은 그것이 모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광야의 여정을 다 끝내고 마침내 가나안 땅 맞은편 요단강 동편에 도착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40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신29:5)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40년 동안 광야를 행진하는 동안 먹을 것과 마실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까? 만약 옷이 없다면 광야의 그 불볕 태양을, 그리고 한밤중의 한기를 어찌 견딜수 있겠습니까? 만일 신이 없다면 그 거친 광야를 어찌 걸어서 횡단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옷과 신발이란 음식과 물처럼 필수불가결 한 것이었습니다. 400년 동안이나 노예로 살던 그들에게 옷이나 신발이 몇 벌이나 있었겠습니까? 있었다한들 광야생활에서 그 수명이 몇 년이나 가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따져본다면 매일 걸어야 하고 입은 옷채로 잠까지 자야하는 그들의 경우, 옷과 신발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다 거덜나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40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경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옷은 전혀 낡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신발 역시 어느 곳 하나 헤어진데 없이 말짱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 하나 하나님께 의복이나 신발을 구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옷과 신임을 먼저 아시고 당신의 능력을 40년 동안 변함없이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매일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던 배은망덕한 인간들이었습니다. 40년 동안 그들의 의복과 신이 낡지 않고 헤어지지 않음을 당연하듯 여길 뿐,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으려고 조차 하지 않던 우둔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먼저 아시고 당신의 능력을 끊임없이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사랑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완전한 구원자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보내신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온전한 메시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참되고 성숙한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내개 없는 것으로 인해 절망하거나 좌절치 않은 것입니다. 지금 내게 없는 것을 나의 방법으로 무리하게 구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내게 있어야 할 것을 나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필요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나의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베풀어주시는 완전하고 넉넉한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지금 내게 있는 것이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이요, 내게 지금없는 것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보시기에 불필요한 것이거나 혹은 해로운 것입니다.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이라면, 때가 되면 주님께서 순리대로 반드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지금 내게 있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지금 있는 것을 족하게 여기며 감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권면 하고 있습니다.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득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지족'―`알 지(知), 족할족(足)'―즉 지금 내게 있는 것이 족함을 아는 마음만이 경건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족함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불평과 불만 그리고 욕망과 불의의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참된 싱앙과 경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이 이후 사도행전에서 경건의 삶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위해 조반을 만들어 주시는 주님을 바로 알게된 뒤부터, 있는 것으로 자족하는 삶을 살았던 까닭입니다. 온 나라에 불어닥친 경제적 한파 때문에 우리의 가계가 형편없이 위축되었습니다. 실직을 당하거나 도산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근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일시적인 위기를 당했다고 해서 왜 염려하고 근심합니까? 예전의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없어진 것에만 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으로 족한 줄을 안다면 불안해할 까닭이 없습니다. 오히려 남아 있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무엇을 갖고 왔습니까? 적수공권으로 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 떠날 때 역시 빈손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이 땅위에 나의 것이라곤 본래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에게 입을 옷이 있습니다. 신을 신이 있습니다. 하루세끼 먹을 것이 있습니다. 가정이 있습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친구가 있습니다. 교회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복음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호흡할 공기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족한 삶입니까? 내가 구하지 아니한 이 모든 것을 이처럼 아낌없이 주시는 주님이시라면, 주님 보시기에 내게 필요한 것을 왜 주님의 때에 허락치 않으시겠습니까? 목사인 저는 돈을 벌거나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왜 궁핍할 때가 없으며 곤궁할 때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1984년 8월 2일 이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근심하거나 염려해 본적이 없음을 고백드릴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7:7∼8)

    우리 하나님께서는 내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또 그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고, 그 능력을 베풀어 줄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내게 있어야 할 것은 당신의 방법으로 반드시 있게 하시고 필요치 않은 것은 절대로 허락치 않으심을 알게 되었으매, 있는 것을 족하게 여기며 감사함으로 살기에도 인생이란 턱없이 짧은데 왜 없는 것으로 인해 걱정하며 근심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경제 위기 속에서 무엇을 잃었습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잃은 것으로 인하여 더 이상 절망치 마십시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족하게 여깁시다. 오히려 잃은 것을 감사드립시다. 잃음으로 인해 생긴 빈 공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해두신 새로운 `조반'을 담을 그릇임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더 이상 사람으로 인해 절망하거나 실망치 말고, 지난 수요 예배시간에 시편 23편을 통하여 묵상했던 다윗의 고백을 모두 우리의 고백으로 삼읍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참으로 걸어 나아가리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보십시요. 나의 필요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나의 필요를 채워줄 능력을 가지신 주님, 그 능력을 무시로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랑이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와서 조반을 먹으라"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이 세상에 적수공권으로 왔습니다. 아무 것도 가져온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옷이 있습니다. 신발이 있습니다. 세끼 양식이 있습니다. 가재도구가 있습니다. 가정이 있습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친구가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호흡할 공기가 있습니다. 교회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복음이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갈 나라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 세려해도 너무 많아 셀 수조차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많은 것들에 대하여 자족 줄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것 하나가 없음으로 인하여 원망과 불평과 절망을 터트리며 살아왔습니다.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맞는 이 아침, 우리의 이 어리석은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필요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주님, 그 능력을 무시로 베푸시는 사랑의 주님을 온전히 믿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필요한 것은 반드시 주시는 분이시오 필요치 않은 것은 허락치 않는 분임을 확실히 알아,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을 족히 여기며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에 이 경제위기를 주셨음도 감사케 하옵소서. 이 위기의 계곡을 통해서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새로운 조반을 얻을 수 있음을 믿어, 참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우리의 삶이 날로 경건을 이루어가게 하옵소서.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땅에서의 소유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경건한 삶뿐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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