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마태복음 11:25∼30/설 교 자 임 영 수 목사님

구원의 현실성(1998. 8. 9.)


오랜 세월 동안 구도자의 삶을 통해 도를 깨친 석가는 "삶은 고행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위대한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이 진리를 진실된 마음으로 깨우치기만 한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삶은 고행이며 동시에 "삶이란 문제의 연속입니다" 삶의 문제는 그 성격에 따라서 우리를 좌절·비탄·슬픔·외로움·죄의식·후회·분노·고민·고뇌 또는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삶의 의미란 이런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모든 과정 속에 있습니다. 삶에 성공하느냐, 아니면 실패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얼마만큼 해결하는가에 따라 판가름납니다. 삶의 문제를 바르게 해결해 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실현해 가는 바른 길을 터득해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삶은 더욱 더 힘들어지고 피곤해집니다. 삶의 실현의 문제와 관련해서 비유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계절적으로 가을을 내다보는 늦여름에 있습니다. 이미 지난 계절이지만 잠시 봄으로 돌아가 봅시다. 농경 사회에서 봄에 제일 중요한 일은 밭과 논을 경작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기계를 사용하지만 저의 어린 시절에는 소를 사용해서 밭을 갈았습니다.

소를 이용해서 논밭을 경작할 때 소에 멍에를 메웁니다. 그때 소의 목에 메운 멍에가 너무 크거나 작아 잘 맞지 않을 때 목적했던 일을 마치기 어렵습니다. 그때 현명한 방법은 맞는 멍에로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자신이 실현해 가야 할 자기 몫의 생이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몫의 생을 바르게 실현해 가기 위해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생의 실현의 길을 바르게 터득해 가야 합니다. 그 실현의 길을 잘못 선택했을 때 삶은 힘들어지고 계속 뒤엉키게 됩니다. 그때 말할 수 없는 피곤이 오게 되고 깊은 무의미성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여기서 생을 실현해 가는데 필요한 통합적 가치나 목적을 멍에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맞지 않는 멍에는 삶을 더욱 더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문제의 연속인 삶의 문제를 바르게 해결해 가며 살아갈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이란 삶의 멍에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그들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보다 삶의 짐을 더욱더 가중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바르게 헤아리지 못하고 그것을 활용해 갔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책임을 맡고 있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습니다.

한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안식일 법은 사람을 위해서 주셨는데 오히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법과 관련해서 무려 130가지의 지켜야 할 조문을 만들었기 때문에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다 없어지고 오히려 안식일은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아래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피폐 할대로 피폐한 상태에서 생활의 염려와 불안으로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은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기보다는 갈등과 좌절 고민을 더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은 다 내게 오라"는 초청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짐을 대신 져 주시겠다고 하지 않고 "와서 먼저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멍에를 바꾸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역시 인생이 고행이며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가 많은 생을 바르게 실현해 가는 길을 알고 계시며 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인도하는 길은 그 시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인도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삶을 복잡하게 만들어 더 무겁게 하지 않고, 삶을 단순하게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 드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배운자들 자신의 노력으로 생의 완성에 도달할려는 사람들에게는 숨겨져 있는 길을, 젖먹이나 어린아이, 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달파 하는 사람들에게 그 길로 도달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다 배운 자들이며 스스로 지혜 자들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한 구원의 길은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인데 그 길은 예수님만이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길은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예수께 직접 가서 그를 통해 배움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에게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멍에는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멍에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멍에로만 문제가 많은 생을 실현 해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로 가면 인생의 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쉼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쉼은 용서·화해·받아 드림·죄사함·불안과 염려의 해방에서 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세상적인 쉼의 길은 귀찮은 것이 없어질 때, 미움의 대상이 멀리 떠날 때, 좌절과 고통을 주는 문제가 없어질 때, 경제적으로 부요할 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문제의 생을 직시하고 받아 드릴려고 하지 않고 피할려고 하며, 책임을 지지않을려고 하며, 종교적 의식이나 계율을 지켜 면제 받아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삶은 더 어려워지고 영적 성장이나 생의 올바른 실현은 어려워집니다.

그 다음으로 "와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문제의 생을 면제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문제가 있는 현실로 오셔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사랑의 멍에를 끝까지 지고 갈려면 끊임없이 자기 부인을 배워 가야 합니다.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시험은 예수께서 가셔야 할 메시아의 길을 어떤 방식으로 실현해 가느냐 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사탄이 제시한 길은 진정한 메시아의 삶을 실현 해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영웅심, 세속적인 야망은 일시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그것을 거절하고 진정한 자기 부인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길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제의 생을 실현해 가지 못하고 실패하는 이유는 자기 부인의 삶을 포기하고 지나치게 자기 중심의 삶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의 삶에는 영적성숙도 없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참된 생의 실현의 길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저와 교분을 가졌던 한 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분 내외는 해외에서 공부하고 귀국해서 내외가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그 아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떳떳이 드러내놓을 수 없는 짐이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사람들에게 그 아이를 숨길려고 하였고 말하지 않을려고 했습니다. 그들 내외에게 그 아이는 걱정의 대상이요 부끄러움과 음울한 삶의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공휴일 늦은 오후 저는 그 댁 남편 되는 분으로부터 집으로 와 달라는 부탁 받고 잠시 후 그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기쁨으로 저를 맞이하는 그 분의 안내를 받으며 권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분은 전화로 저를 갑자기 부른 사연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공휴일이지만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하루종일 이 자리에 앉아서 성경을 읽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 성경을 읽어 오면서 여러 가지 구원의 경험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 특별한 것 몇 가지를 말씀드린다면 이제부터 담배를 끊을 수 있게 되었고, 내일 아침부터 저는 저의 아이의 손목을 잡고 산책을 할려고 합니다"

저는 그 분이 아들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겠다는 말을 들으며 내적으로 희망, 기쁨 감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어떤 의미의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아들이 정상인으로 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더 이상 부끄러움과 무거운 짐이 아니고 감사와 기쁨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한 인격적 존재였습니다. 그 분은 그때부터 그 아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자기 부인의 삶을 배워 가며 그 아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그는 아들과 함께 살았지만 아들과의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하나의 귀찮은 문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부터 아버지와 아들간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가정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 아이와 함께 늘 고통하시던 예수님은 눈물을 거두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셔야 할 일은 이미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을 바꾸지 않고, 우리를 바꾸십니다. 상황은 예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힘과, 그 상황에 맞붙는 새로운 능력을 갖게 함으로써 그것에 대응할 수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현실에게 도피시키시지 않고 우리를 도와 주셔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하여, 이를 사랑으로 정복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므로 보다 성숙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저의 지내 온 날 들을 돌이켜 볼 때 저 역시 많은 생의 문제에 부딪혀 좌절할 때도 있었고, 고민하며, 불면의 밤을 보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생의 짐 때문에 부끄러워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생의 짐을 치워 주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짐을 지고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한 생의 짐들이 그래도 저의 오늘의 현실이 있도록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후회되는 것은 좀더 사랑으로, 믿음으로, 용서로, 생의 짐을 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의 짐이 무겁고 힘든 것은 문제 그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우리의 용기 없음, 정직하지 못함, 지나친 체면 의식, 미움, 적대감, 불신앙, 책임 회피, 자기중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것들에서 우리를 자유 하게 해주시고 문제를 직시하게 하고 사랑으로 받아 드리게 합니다. 그때 문제의 생은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으로 우리 자신의 삶의 형식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일본에 어떤 젊은 크리스천 부부가 있었습니다. 부인이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해산하는 시간에 남편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해산의 고통 가운데서 태어난 아이는 의외로 기형아였습니다. 남편은 그 사실을 숨기고 몇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드디어 결심하고 부인께 사실을 다 말했습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난 부인은, "여보,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우리 부부에게 양육하도록 맡기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젊은 부부에게 그 아이는 부끄러운 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통해 그 부부는 다른 어느 부부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곤란한 생의 문제를 가지고 있든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생을 아름답게 성취시켜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생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드리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성된 인생을 제공해 주시지 않습니다. 인생의 재료를 제공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재료로 우리 자신의 인생을 지어내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재료로서 우리에게 재능과 능력을 가진 우리 자신을 제공해 주시고, 아름답고 풍성한 세계를 제공해 주시고, 다시 우리와 더불어 함께 살아갈 동료를 제공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재료들을 다루어 가치 있는 인생을 지어내어라"

생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인생을 지어 가는 과정에서 생깁니다. 그 과정에서 생긴 문제들을 도피할 때 문제는 더욱더 힘들게 됩니다. 우리는 그 복잡하게 된 문제의 생을 바르게 실현해 가기 위해 예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에게 가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초청의 말씀을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개역 개정판)

- 아 멘 -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시편 1 : 1∼6/설 교 자 임 영 수 목사님


인간의 길 1998. 8. 2.


 
먼저 동양의 옛 성현의 글 한 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도(道)를 찾아가는 젊은이의 촌스런 고집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화려한 나비가 되기 전 험상스러운 애벌레가 나무를 갉아먹듯 자기의 근거를 파 들어가는 구도자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하다. 얼핏보면 그들의 차이는 얼마 안되는 것 같으나 나비가 될 때에는 그들의 차이는 한없이 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빨리 성공할 수 있는 길,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서는 데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캐물으며 그 삶의 완성의 길을 찾아 나서는 젊은이의 모습은 왠지 시대를 역행해서 살아가는 것 같은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이 세상에서 그러한 젊은이는 다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고, 오직 약삭빠르고 줄타기를 잘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에 보편화된 신념이며 인생철학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근거를 파 들어가는 구도자적 삶이 겉보기 촌스럽고 한심해 보여도 그들이 인생의 어느 경지에 올라서게 되면 그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인생의 행복이 진정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삶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야 할 길 때문에 고심하게 됩니다. 특별히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는 젊은이의 경우 그가 가야 할 길을 찾아서 가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길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길을 찾는 데는 지식보다 지혜가 더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길을 바르게 가고자 하는 사람은 지혜의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인간으로서 진정 가야 할 길을 묻고 있는 사람에게 그 길로 안내하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이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면 많은 시행착오를 하지 않고 바른 길로 찾아 나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하는 방향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좀 촌스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하는 그 길을 따르면 그 결과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결과를 얻게 되고, 그렇지 않고 세속적인 길을 따르게 되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결과를 얻게 됩니다.

본문에 제시된 인간의 길은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 두 가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먼저 소극적인 면으로 불의한 자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에 불의한 삶의 방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고안해 낸 성공 방법, 행복의 길을 따르지 않으며, 그러한 바탕 위에서 살아가는 생활 방식을 부러워하거나 모방하지 않고, 그들과 삶의 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 전체를 나타내는 단어가 "좇다, 서다, 앉다"와 같은 동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사고의 출발점이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들의 길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성서에서 말씀하는 중요한 경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길은 그 길이 아무리 명예롭고 재물이 많이 따른다 해도 헛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그러한 생이 바람에 나는 겨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겨는 알곡이 아니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것의 움직임은 수평적입니다. 그러한 삶은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삶의 성취가 수반되지 않는 허무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적극적인 면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 하는 삶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야 할 진정한 길을 율법에서 찾으며 살아가는 삶의 형식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율법은 단지 십계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 오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망망대해와 같은 세상에서 바른 길을 찾아가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제시하는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닌 영생으로의 길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입니다.

말씀에서 길을 찾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 하는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을 깊이 묵상할 때 영감의 말씀이 들려 옵니다.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갖고 있는 유럽 국가들을 여행할 때 관광 대상들이 대부분 옛 성이나, 성당, 교회입니다. 각 시대별로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지은 웅장한 성당 안에 들어가 보면 음미해 볼만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느 성당이나 교회 안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스테인글라스에 그려 있는 성화들입니다. 오랜 건물의 것은 먼지로 많이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잘 알아 볼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햇살이 창문을 통해서 들어올 때 창문에 그려진 그림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성서를 오래된 성당의 창문으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 정치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 가운데서 묵상해 가지 않으면 지루하고 복잡한 사건만 접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깊이 묵상해 가면서 성령의 빛이 비췰 때 그 사건을 통해 말씀해 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들은 말씀에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가야 할 길의 방향을 아는 것으로 끝나면 의미 없습니다. 그리로 발걸음을 내 디뎌야 합니다. 그 길로 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 가며 인생을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해 가는 데서 보여지는 길이 평탄하고 쉬운 길만은 아닙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가기가 어렵고 힘이 들고 고독이 수반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 기쁨, 성취의 자족감이 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한 길에서 형성되어 가는 삶의 모습이 본문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에는 계절에 따라 열매가 열리고, 시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의 움직임은 수직적입니다. 그러한 나무는 시냇가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메마름이 없습니다. 햇볕이 내려 쬐이고 바람이 불어도 마르거나 날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견고하고 확실한 삶인가를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마른 잎사귀는 죽음과 심판의 상징입니다. 반면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생명·희망·성취의 상징입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복(福)은 부·건강·성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형성되어 가는 삶과 관련됩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복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시하는 길을 따라 형성되어 가는 삶 그 자체를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좀더 부언해서 말씀드리면 영생으로 지향해 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비록 거기에 고난이 따르고 고독이나 가난이 수반되어도 그러한 삶을 복된 자의 삶이라 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복된 자의 삶이 바로 그러한 생의 길을 걸어가는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그 길이 결코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가지 않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을 바르게 형성해 갈려는 사람, 생의 허무를 원치 않는 사람은 그 좁은 길을 선택해서 가야 합니다.

우리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모범적인 한 기업인이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 나라 사람이면 누가나 잘 아는 유 일한씨입니다. 그는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세계에 내놓을 만한 기업인입니다. 그는 큰 기업의 재벌 총수도 아니었고 어느 정당의 실세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한 소박하고 단순하게 살아간 작은 제약 회사의 설립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후세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은 기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을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성직자, 기업인, 정치인, 교육자, 예술인, 의사, 군인, 상인 등 모든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 누구나 거기에서 그가 걸어가야 할 의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자신의 삶을 완성해 가는 길입니다. 삶은 투기도 아니며 돈을 벌기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삶은 우리 각자가 형성해 가야 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삶을 바르게 형성해 가는 사람을 가리켜 복있는 자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전문직에 들어섰다고 해서 또는 사회적으로 평생 보장받는 지위를 확보하였다 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태어나서부터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그가 가야 할 길이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오로지 전문인으로, 기능인으로서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인간의 길을 가는 전문인, 인간의 길을 가는 기능인으로서의 길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인간의 길에서 우리의 삶이 형성되어 가기 때문에 여기서 나타나는 우리의 모습이 야수의 모습이나,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형상대로 형성되어 가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해 가는 인생의 도상에서 우리 자신에게 수시로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인가, 내가 지금 나의 삶을 바르게 형성해 가고 있는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진정 복된 자의 길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시편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갓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 받을 그 때에 얼굴을 들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어서지 못한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표준새번역)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 아 멘 -

 
 

주님의교회/주일낮 예배/마태복음 13:1∼9/설 교 자 임 영 수


하나님 나라의 위기(1998. 7. 2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실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는 달라서 구체적인 사건을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이 육신으로 오셔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낡은 삶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삶으로 바뀌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역사를 만드십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러한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입에서 나가는 말로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55:1011)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실 누구나 자신의 생의 역사의 과정에서 만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년기라는 생의 계절에 사는 어린이에게는 유년기까지의 생의 역사가 있고, 청년기나 장년기, 노년기에 있는 사람은 유년기 때보다 좀더 다양한 생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생의 역사가 어떤 경험의 역사였느냐에 따라 현재 사람의 모습이 됩니다.

사람의 생의 역사는 시대의 문화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생의 역사에서 사람은 긍정적 부정적 경험을 갖게 됩니다. 누구나 자신의 생의 역사가 긍정적일 수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요인이 많습니다. 문제는 현재 그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현재 그의 처지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지난날의 죄와 상처, 아픔이 치유 받은 상태일 그에게 지난날은 긍정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그에게 지난날의 경험은 말하고 싶지 않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형성된 기존의 생의 바탕에 떨어지기 때문에 반응 역시 일정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러한 것과 관련이 됩니다. 본문 내용은 비유입니다.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서 맞는 위기 상황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시대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경험적 사건들을 가지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비유의 표현들이 낯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비유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쉽지 않았습니다.

먼저 길가에 뿌려진 씨앗의 경우입니다.

옛날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는 밭들의 대부분은 가운데 사람들이나 가축들이 지나 다니는 길이 있었습니다. 파종기에 씨를 뿌리면 씨앗들 중에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어떤 가능성도 나타내지 못하고 씨앗 자체의 가치를 상실해 버립니다. 이유는 오가는 많은 사람들과 짐승들에 의해 밟히고, 새들에 의해 먹히기 때문에 싹이 돋아 없습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생각해 있는 삶의 유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일에 너무 얽매어 있는 삶입니다. 일상적인 것들에 너무 깊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에 얽매어 있을 하나님 나라가 자리할 있는 곳이 없게 됩니다.

다음으로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의 경우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던 밭들 중에 표면적으로 흙이 부드럽고 식물이 자랄 있을 같지만 부드러운 바로 밑에는 엷은 층의 넓은 바위가 깔려 있어서 씨앗이 싹은 나지만 뿌리를 내릴 없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밭을 연상할 문득 떠오르는 하나의 삶의 유형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살아가는 유형의 , 그렇지 않으면 이데올로기라는 편견에 완전히 심취해서 다른 어떤 진리도 배격해 버리는 절대적인 유형의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상황에서 역시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저는 소련 체제가 붕괴되고 얼마 안되어 러시아와 발틱해에 있는 나라를 방문했었습니다. 땅을 밟으면서 계속해서 자신 스스로 가졌던 질문은, 도대체 공산주의 80 역사의 의미가 무엇 인가였습니다. 현장에서 얻은 해답은 공산주의는 허구 자체라는 것이었습니다. 80년이 지난 역사의 현실은 황폐함이었습니다. 80년이라는 역사의 기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기간에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들은 민중학살, 인간성 파괴, 소수의 특권 계급 형성, 문화의 황폐, 경제파탄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하고 있는 역사 사건이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받아 드리지 않는 , 역사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말해 줍니다. 이것은 비단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국한된 것만은 아닙니다. 거짓된 사상, 거짓된 종교적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박태선의 신앙촌에서 거의 반평생을 보내고 나온 사람들의 공통된 말은 헛살았다는 것과 속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은 어디서 다시 보상받을 없었습니다.

다음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의 경우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생각해 있는 삶의 형태로 현실에서 많은 생의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혀 사는 삶입니다. 생의 염려와 걱정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염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좋은 땅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사는 도덕적인 , 그렇지 않으면 때부터 소지한 착한 본성, 자기 나름대로 삶의 원칙을 정해 놓고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가는 율법주의적 삶을 연상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의 의미는 그러한 것과는 거리가 멈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속에서 썩어 씨의 형체는 없어지면서 싹이 나고 줄기와 잎이 생기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옛것의 형체가 없어지고 새로운 형체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해 , 육십 , 삼십 배의 열매를 맺을 있는 여건은 고난, 회개, 진지함, 묵상, 순종입니다. 그러한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변화,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미국 플로리다 플랜트 시티에서 있었던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1965 여름 시에 사는 어느 가정에 일가친척이 모두 모였습니다. 새벽 두시에 갑자기 할머니가 식구 모두를 깨우더니 콜라 병과 코르크 마개와 백지를 준비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가족들에게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하면서, 백지 위에 개의 성경 구절을 써내려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식구들은 할머니가 성경 구절을 말아 속에 넣고 코르크 마개로 막았습니다. 그날 아침 할머니와 모든 식구들이 해변으로 나가 무려 이백 개의 콜라 병을 파도에 실어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수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보내고, 또는 직접 찾아와서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콜라 병에 성경 구절을 읽고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1974 11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음달인 12월에 마지막 편지가 할머니에게 도착했습니다.

편지의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우스 부인께,

지금 촛불 아래서 편지를 씁니다. 우리 농장엔 이상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남편은 트랙터가 전복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내게 명의 아이들을 남겨 두었습니다. 큰애가 살이랍니다. 은행은 이상 대출을 거부하고 있고, 이제 우리에겐 덩어리 밖에 남은 없습니다. 눈이 세상을 뒤덮고 있고, 크리스마스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주님께 용서를 빌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강으로 나갔습니다. 주째 강이 얼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돌을 가져다가 얼음을 깨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구멍을 뚫자 콜라 하나가 떠올라 오더군요. 코르크 마개를 열고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손으로 안에 적힌 희망의 글귀를 읽었습니다. 전도서 9 4절의 말씀이 적혀 있더군요.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다 비록 개라고 하더라도, 살아 있으면 죽은 사자보다 낫다"

당신은 히브리서와 요한복음서의 다른 구절들도 적어 놓았더군요. 집으로 돌아왔고, 지금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내 주신 메시지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고난을 헤쳐 나갈 것입니다. 부디 우릴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하지만 우리 모두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자녀들을 축복해 주실 거예요.

오하이오 농장에서

지금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귀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말씀에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매일 매일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삶의 순간이 우리의 일상성의 삶에서 마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과거의 역사의 한때에 말씀이 육신으로 오셔서 직접 우리 가운데 빛으로 거하셨고, 지금은 말씀이 성령과 함께 우리에게 찾아오고 있습니다. 영원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영원 가운데서 언제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교회의 희망과 존재 의미는 말씀을 위탁받았다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 열쇠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말씀의 열쇠로 세상 사람들에게 닫혀진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 들어갈 있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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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고린도후서 5:16∼21/ 설 교 자 임 영 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1998. 7. 19)
 

  여러분이 복음서를 읽어보시면 예수께서 당시에 만나고 함께 지내신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지식층이나 권력을 가진 지도층이 아니고, 오히려 그 당시 사회의 풍습과 제도에 의해 밀려난 사람들이며, 그 당시 극히 형식화된 종교적 기준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열거해 보면 세리, 창녀, 귀신들린 사람, 나병인, 각종 신체적 장애인, 각색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만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시의 종교와 사회에 의해 배척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지도층 인사들의 이상과 상상대로 연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당시에 만난 사람들은 정죄되어 희망 없이 막장 인생을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막장 인생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정죄되어 희망이 없는 그들 자신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되고 하나님에 의해 새로 준비되고 있는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놀라고 기뻐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는 외인 부대를 상대로 몸을 팔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가장 주요한 메시지는, 끝이라고 생각하고 좌절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삶을 하나님을 위해 내어놓고, 자신들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에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고 경험한 새로운 삶의 내용이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경이로운 경험은 문밖에 서서 기다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만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인 동시에 나 한사람만이 독점할 수 없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고, 치유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와 인격적인 사귐을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시는 생각은 심판이 아니며, 평안과 소망이십니다.

  어느 종합병원에서 전문의로서 일하는 여의사 한 분이 대학생 시절부터 복용해 오던 마약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이 되어 병원에서 사임하고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저녁 자기 집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는 호수로 가서 뛰어내릴려고 할 때 "죽기 전에 기도하라"는 세미한 음성이 갑자기 그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는 즉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오 하나님 저를 구해 주세요"라는 짤막한 기도를 몇 번 반복했습니다. 짧은 기도였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절규였습니다. 잠시 후 어떤 손길이 그를 어루만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면서 그 동안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움이 다 없어지고 온 몸이 날 듯이 가벼워졌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마약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기뻐서 집으로 돌아와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 여의사는 절망에서 심판의 하나님이 아닌, 그를 위해 새 삶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은 현재와는 다른 새로운 자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새로운 자기는 하나님과 화해되고, 용서되고, 치유된 자신과의 만남입니다. 다시 여의사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그 후 그 여의사는 마약 중독자를 치료하는 교육과 훈련을 받아 그의 생을 과거의 자기처럼 마약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여의사의 경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자아상은 마약으로 파멸해 가고 있는 여인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러한 것이 극복되고, 치유되어 다른 사람을 위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함께 초대되어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상(Image)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우리의 자아상은 눈물, 한숨, 시기, 질투, 미움에서 몸부림치다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한 생이 아닙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이미 극복되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도록 초청 받고 있는 새로운 우리 자산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신을 바라보며 그 미래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낡은 것에 안주할려는 옛 사람과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과감히 옛 것을 벗어버리고 새것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친교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밖에 있을 때의 교제는 주로 세상적인 동기인 정치, 경제, 자연, 학연, 혈연과 같은 이해관계에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러한 것을 넘어섭니다. 성만찬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친교는 모든 세상적인 조건을 초월해서 한 형제, 자매로 만나게 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매일 갖는 하나님과 대화로서 기도의 교제는 우리를 거짓된 합리화에서 벗어나게 하고 옛것에서 새것의 삶으로 계속 나아가게 하며, 하루하루 우리 자신을 초월해서 하나님께 순종해 가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형제, 자매와 갖는 믿음의 교제는 우리들 서로가 안위와 위로를 받게 하고, 주님의 지체로서 일치를 이루어 가게 합니다.

  우리의 찬송가 525장은 성도들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생활이 어려운 교회에서 목회 하던 목사님이 큰 교회의 목회자로 초빙되어 이삿짐을 싸던 중,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이 작은 교회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부인의 눈물어린 권고에 감동을 받아 그 교회에서 계속 목회 하기로 결정하고 그 기쁨과 깨달음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습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한 기도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안에서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 동락하는 중 위로를 나누네,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안에서 교통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닌 섬기는 삶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어 갑니다. 그러한 삶의 방식에서 삶의 의미, 기쁨, 희망을 발견해 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현실 긍정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다스림으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섬김이라는 삶의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 본을 보여 주신 삶의 모범이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예수님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 6∼8)  세상의 권위는 자리와 명칭에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권위는 그러한 것에 있지 아니하고 섬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섬김을 받는 자리로 부르지 아니하시고, 그 자신이 섬김의 자리에 계시면서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하나의 삶의 유형은 금욕적이 아닌 단순성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기르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하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게" 받아 드립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부요하게 살아갑니다. 그 부요함은 창고에 쌓아 둔 재물로 인함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부터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해 가는 고귀한 경험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해 가는 경헙입니다. 이 자유와 관련된 기도문 하나를 소개하면서 설교를 맺겠습니다.

      오 예수님 나를 해방시켜 주옵소서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높임을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명예롭게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칭찬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다른 사람 보다 더 우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낮아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멸시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책망의 두려움으로부터,

      비방의 두려움으로부터

      잊혀짐의 두려움으로부터,

      실수의 두려움으로부터,

      조롱의 두려움으로부터.

      ― 마더 테레사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이런 새로운 경험이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이러한 새로운 경험이 시작됩니다. 그러한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피조물의 삶으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 현실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 피조물의 삶을 계속해서 형성해 가야 합니다. 이 삶은 부활의 시간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 아 멘 -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시편 23:1∼6/설 교 자 임 영 수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1998. 7. 12.)


저는 이 시간 설교를 시작하면서 교우 여러분께 먼저 신앙적인 질문 하나를 드립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왜 필요하십니까?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보시면서 말씀에 귀를 기우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23편은 유대교인 보다 그리스도인에게 더 사랑 받는 시입니다. 이 시편은 인간이 왜 하나님이 필요한가에 대해 실제적인 면에서 해답을 주는 시입니다. 이 시는 신학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말씀하지 아니하고 시인 자신이 삶의 체험에서 만난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이상론을 말하지 아니하고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현실주의(realism)입니다. 이 시편에서도 역시 그러한 현실주의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필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어두운 생의 경험에서 하나님을 아주 가까운 분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하나님은 영원히 가까이 섬겨야 할 고귀한 존재가 됩니다.

시인이 경험하는 생의 어두운 경험들은 생의 결핍, 죽음의 골짜기, 인간의 불완전함, 죄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한 경험들은 물로 그가 처한 생의 곤고한 상황을 통해서입니다. 요즈음과 같이 하나님의 상이 흐려져 가고 있고 아울러 그 분의 존재의 필요성까지 회의적인 때에 이 시를 통해 우리의 삶에 아주 구체적으로 관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을 구체적인 분으로 만난다는 것은 세상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얻는 것 이상입니다.

먼저 시인은 존재의 결핍이라는 어두운 생의 경험에서 그 결핍을 채워 주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시인 다윗은 실제로 여러 가지 생의 위기 상황에서 많은 생의 결핍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 목동으로서 양을 돌볼 때 맹수의 공격 가운데서 공포와 두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다니면서 그는 말할 수 없는 피곤과 고독 생명의 위험을 경험합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서 그는 생의 깊은 허무감과 치욕을 경험합니다.

그러한 고난의 상황에서 시인은 한 인간으로서 존재의 결핍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존재의 결핍이란 고난 가운데서 경험하는 힘의 소진 영적 고갈이라는 특수한 인간 체험입니다. 그러한 인간 체험이 상황에 따라서 깊은 좌절과 절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질투와 시기, 반항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러한 상황에서 목자와 같은 분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에서 그러한 사실을 목자와 양의 표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1∼3)

좋은 목자의 인도를 받은 양들은 사막을 통과하더라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좋은 목자는 생명을 던져 양들을 보호하고 양들이 만족하게 풀을 뜯으며 물을 마시고 쉴 수 있는 푸른 초장과 물가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생의 두려움·고독·내적고갈·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위로 용기·희망·믿음·사랑을 공급받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이 생의 모든 결핍을 채워 주는 근원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좀 더 어두운 생의 경험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시인이 당면한 모든 위기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이 죽음이었습니다. 죽음과 함께 그에게 찾아온 것은 단절 고독이었습니다. 죽음이 느껴지는 곳에서 그 누구도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습니다. 그의 부모, 형제, 사랑하는 사람, 친구 그 누구도 그와 동행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그의 손을 잡고 그와 함께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 영원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본 시편과 관련된 일화 가운데 이 대목과 관련해서 소개하고 싶은 일화가 있습니다.

영국 웨일즈 산악 지방에 따뜻한 봄날 한 목동이 양을 돌보고 있는데 두 사람의 등산객이 그 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목동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대화 중에 그 등산객은 목동에게 하나님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목동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등산객은 목동에게 하나님은 목자와 같은 분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부터 양을 칠 때 하루에 한 번씩 오른손 손가락을 하나씩 굽혀 가면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다라고 반복해서 외우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해 봄 어느 날 그 지방 산 밑에 있는 조그마한 음식점에 다시 한 사람의 등산객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벽에 걸린 소년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소년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면서 그 소년은 자기 아들인데 작년 겨울 양을 돌보다가 눈사태에 깔려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얼마 후에 아들의 시신을 꺼내 보니 오른 손이 주먹으로 꼭 쥐여 있어서 펴기가 어려웠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손님은 그 비밀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그 소년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소년은 눈에 갇혀 죽어 가면서 오른손 손가락을 굽혀 가면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반복하면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 영원한 세계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은 큰 연회를 베푼 주인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옛날 히브리 전통에 주인이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그의 잔에 포도주를 넘치게 따라 주는 것은 손님에 대한 최상의 존경의 표시입니다. 본문에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시인의 허물과 죄를 언제나 용서하시고 감싸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하나님을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믿든지, 믿고자 할 때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각자의 생의 문제와 관련될 것이기 때문에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듣게 되는 해답은;

* 하나님은 우리의 결핍을 채워 주시는 분이시며,

*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갈 때 유일하게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시오,

*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사랑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로서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의 결핍을 채워 주셨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면제시켜 주거나 초인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고난이 있는 현실에서 선한 목자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쉴 수 있는 곳으로 의의 길로 영원한 곳으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서 영원한 곳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로서 도상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하나의 비유로 저의 설교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요즈음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 말의 뜻은 그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사고방식 또는 행동, 습관을 의미합니다. 고상한 품격을 가진 한 사람이 여행을 위해 좋은 자동차를 마련해서 여행에 지장이 없도록 연료도 충분히 채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여행용 안내 지도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목적지로 운전해 가고 있습니다. 운전하면서 철저히 교통법규도 준수합니다. 그러나 지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본래 목적지와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생의 패러다임이 잘못되면 비유의 여행자와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올바른 패러다임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패러다임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데서 형성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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