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교회/주일낮예배/1998. 5. 31/ 설 교 자 이 재 철


죽음으로 영광을 ―성령강림주일/성찬주일―

말씀 : 요한복음 21:18∼24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로마의 카타콤베―즉 지하묘소를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 로마제국은 로마
시내에서의 매장을 법률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로마 교외의 땅 속에 거대한 지하묘소를 만들었습니다.
지하4층 깊이에 너비 1m 가량의 지하도를 만들고, 그 좌우 벽에 벽감을 층층이 내어 그 벽감 마다에 죽은 사람들의 유해를
안치한 다음 벽돌이나 대리석판으로 밀폐하였습니다. 이런 형태의 지하 묘소가 거미줄같이 얽혀 있어 로마교외의 지하
묘소의 총 연장 길이가 무려 20여km에 이른다니,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실제로 로마의 카타콤베 속으로 들어가 옛날 시체가 안치되어 있던 층층의 벽감들 사이 지하도를 걸으면서, 그리고 그 웅대한 규모에 압도당하면서, 하필이면 지하에 그 엄청난 카타콤베를 건설한 로마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로마의 카타콤베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그곳의 토양으로 인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카타콤베가 만들어진 곳의 토양은 예외 없이 응회질이라고 합니다. 응회질의 토양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맨손으로도 파낼 수 있지만, 일단 공기가 닿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응회암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별다른 기구나 기술 없이도 대를 거듭하면서 지하 4층 깊이에 길이 20여km에 이르는 거대한 지하 묘소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나라 매장보다 그들이 지하 묘소를 파는 것이 더 쉬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응회질은 토양이 공기와 맞닿아 응회암으로 응고되는 과정에서 시체의 썩는 냄새와 썩은 물을 완벽하게 흡수하기에 묘소로서는 최적의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산 사람들이 지하 묘소 속의 지하도를 언제나 왕래할 수 있었고, 더욱이 죽은 자의 시체가 안치된 벽감 앞 혹은 아래에서 가족들이 죽은 자를 기리며 거리낌없이 음식을 나눌 수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 카타콤베가 로마의 초기 교회 시절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복음이 로마에 막 전파된 후 폭군 네로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공개 장소를 피하여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고, 그때 기독교인들의 비밀집회 장소가 카타콤베였습니다. 카타콤베는 땅속이라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가 용이하였고, 만일의 경우 발각되었을 때에도 지하 묘소의 통로가 미로처럼 얽혀 있어 피신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로마의 기독교가 카타콤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써 크나큰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카타콤베란 지하 묘소라 했습니다. 아니 지하묘지 세계라함이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위에도 아래에도 앞에도 뒤에도 있는 것이라곤 온통 죽은 시체들뿐입니다. 땅속 전체가 거대한 죽음 그 자체입니다. 그 죽음 한 가운데에서 기독교인들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죽음 속에서 로마의 초기 기독교는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음을 알지 않고서는,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죽음을 외면하고서는,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저 죽음들이 곧 자신의 모습이요 실체임을 바르게 아는 자만,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카타콤베 속에 누워 있는 즐비한 시체들의 공통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왔다는 것입니다. 억만금을 소유한 부자였건 깡통만을 지닌 걸인이었건 간에 상관없이, 무엇하나 가지고 온 시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지니고 온 것이 있다면 숨이 너머간 육체이지만 그나마 이내 썩어져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이란 모든 것을 두고 가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두 손 털고 가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곧 이런 것임을 증명해 주는 곳이 카타콤베요, 그 증거가 카타콤베의 시체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현장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무엇을 뜻함입니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결코 영원히 지니고 가지 못함을 바로 아는 자만, 비로소 손을 뻗어 영원한 것을 붙들 수 있음의 의미였습니다.

초기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네로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카타콤베에서 예배를 드리던 때는 주후 60년경이었습니다. 그때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늘에 오르신 뒤였습니다. 그대신 유대인의 절기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께서 교회의 주체가 되신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교회의 주관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초기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카타콤베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폭군 네로의 박해를 피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자진하여 카타콤베를 찾아가 예배드린 것 같지만, 실상은 네로의 박해를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카타콤베로 인도한 분은 성령님이였음을 의미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죽음의 한 복판인 카타콤베 속에서, 죽음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가는 것임을 증명하는 지하묘소 속에서 예배드리게 하신 분이 그 누구도 아닌 성령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충만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자신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직시하는 자요, 모든 것을 두고 가는 것이 죽음이란 죽음의 의미를 꿰뚫고 있는 사람―그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만 거대한 카타콤베같은 이 세상 속에서 죽음을 뛰어 너머, 성령님을 좇아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동터 오는 갈리리 바닷가―그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한다 함은 주님의 양들을 치고 먹이는 구체적 삶이어야 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본문 18절을 통하여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를 19절 상반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구절로 인해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고하신 것으로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말년의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것을 감안한다면 그와 같은 해석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와 같은 해석이 본문으로부터 몇 십년 후에 벌어질 베드로의 순교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면, 그것은 본문의 깊은 의미를 간과해 버린 결과가 되고 맙니다.

본문 속의 베드로는 지금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직도 앞길이 창창한 20대 청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한 기간은 이제 겨우 3년에 불과합니다. 이 시간 이후 사도행전 즉 새시대의 막을 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문턱에 서 있습니다. 지나간 3년이 사도가 되기 위한 수습기간이었다면, 이제 후로는 몇 십년에 걸친 사도로서의 삶이 구체적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베드로의 일생을 놓고 볼 때 지금 베드로는 한평생 중 가장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 베드로가 참된 사도로 살아갈 수 있느냐 아니냐가, 주님과 마지막으로 마주한 지금 이 순간에 의해 판가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순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일깨워 주셨다면, 그것은 몇 십년 후에나 베드로에게 닥칠 순교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넉넉하게 분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인생의 본질을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에게 그 어떤 인간도 예외일 수 없는 죽음-원치않는 때에 원치 않는곳에서 원치 않는 방법으로 느닷없이 엄습할 죽음을 직시하게 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죽음의 의미를 각인 시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네가 지금은 젊은이라 할지라도 너 역시 반드시 무덤 속에 시체로 드러누울 수밖에 없다는 것, 그때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을 고스란히 두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공허한 갈릴리로 대변되는 이 세상의 것을 움켜쥐기 위하여 욕망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밤낮 헛그물질 하느라 안달하던 손을 이제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두 팔을 벌려 항복하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만이 죽음에 이르도록 하나님께 영광된 삶일 수 있음을, 지금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뒤 19절 하반절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이르셨습니다.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사람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진정으로 따를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바로 깨달은 베드로가 이 이후 사도행전의 막을 여는 주역이 되며,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기까지 그의 삶이 참된 사도의 삶으로 일관될 수 있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바꾸어 말해 4복음서가 끝나는 요한복음 21장의 마지막 단락에서 주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죽음을 알게 하시고 직시케 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베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죽음을 가르쳐 주는 것보다 더 큰사랑도 없습니다. 죽음을 아는 자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참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의 삶만 하나님께 영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바르게 깨닫고 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잃어 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한평생을 사노라면 재산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건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것이 귀한 만큼 우리는 속상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바로 그것을 되찾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발버둥을 치곤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더러운 죄인인 우리를 죽음 속에 버려 두지 않고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우리를 사랑치 않으십니까?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귀히 여기는 그 무엇을 잃게 하셨다면, 어찌 그 속에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의 의미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것입니다.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죽음이란 모든 것을 두고 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쥐고 있던 모든 것을 툴툴 털고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잃어 본다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연습해 보는 것입니다. 버리는 훈련을 해보는 것입니다. 손을 터는 공부를 해보는 것입니다. 살아생전 이 훈련 없이 어떻게 어느 날 느닷없이 엄습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죽음을 바르게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바르게 수용할 수 없는 자가 어떻게 죽음이 이르기까지 주님을 따라 바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살아 생전 주님을 쫓아 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자가 자신의 육체가 시체 되는 그 죽음의 순간에 어찌 죽음을 너머 하나님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부끄럼 없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무엇인가를 잃어 보게 하십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모든 것을 털고 가야 하는 죽음을 연습케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잃게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엄청난 은총이요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잃지 않고서는 삶과 죽음을 바르게 수용할 수 없고, 그 당연한 결과로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영원히 설 수 없음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국민의 25%에 해당되는 2백만 여명의 양민을 학살하여 캄보디아를 온통 붉은 피로 물들였던 킬링필드의 주범 폴포트가 지난달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체 사진이 지난 4월 17일 메스컴을 통하여 공개되었습니다. 수의를 걸칠 형편도 되지 못하여 남루한 옷을 입은 채 헝클어진 머리, 솜으로 틀어막힌 코, 허공을 향해 벌어진 입, 새파란 입술―한편으로 측은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시체 역시 빈손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그 사실을 진작부터 알았더라면, 그 역시 시체가 될 수밖에 없고 이 세상 그 무엇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고 있었다면, 권력을 쥐고 있던 불과 3년 8개월 동안 2백만 여명을 학살하는 인간 백정은 분명히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음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지 못하는 자의 삶이 얼마나 무지막지 할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인도의 언론인이자 철학자인 M.V.카마스가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긴 51명의 위인들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마지막 말과 행동을 정리하여 「위대한 인물 51인의 마지막 행적」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속에서 특별히 두 사람의 마지막 말이 서로 대조되면서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자신의 친형제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친아버지마저 감옥에 가두고 왕위에 올랐던 인도 무갈제국의 아우랑제브는 임종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혼자 왔다가 이제 방랑객이 되어 떠난다. 권력을 잡는 순간, 그 뒤에는 슬픔만 남았다'

왜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그에게 죽기 직전 남은 것이라고는 슬픔뿐이었겠습니까? 그 자신도 반드시 죽어야 하며, 죽음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을―권력마저도 두고 가야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흑인 인권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킹은 암살범이 쏜 흉탄에 맞아 운명하기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마침내 자유를,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도다.'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흑인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불과 35세때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세계적 지도자의 반열에 오른 그가 겨우 39세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흉탄에 맞아 비명횡사한다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죽지 않으려 결사적으로 발버둥이라도 쳐야 마땅치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찌 죽음 앞에서 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까? 평소 그는 죽음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며 살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원치 않는때에 원치 않는 곳에서 원치 않는 방법으로 느닷없이 죽음이 찾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세상 그 무엇에도 얽매임이 없이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누가 과연 성령충만한 사람이겠습니까? 보십시오. 이 세상이 실은 거대한 카타콤베임이 보이십니까? 그 속에 시체로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가져가지 못한 채 철저하게 빈손으로 누워 있는 자신의 시체가 보이십니까? 바로 그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죽음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고 있는 그 사람은 날마다 주님을 따라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아는 자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우리는 우리의 태어난 날을 알고 있지만, 우리의 죽을 날과 시간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비록 우리 죽음의 날과 시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시간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닥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며 살아왔기에 지나온 우리으 삶은 인간 백정이었던 폴 포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주님!

이 시간 우리를 사랑하시사 예외 없이 찾아 올 죽음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을 향해 우리의 두팔을 벌립니다. 이 팔을 뻗어 오직 주님만을 붙좇기를 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진리로 띠 띠워 주시고 날마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충만한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된 사도행전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안에서 바르게 살다가 바르게 죽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 아멘 ―

주님의교회 주일 설교문

1998. 5. 24./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요한복음 21:15∼17/설 교 자 이 재 철


한 가수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진리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자연히 그는 모든 면에 걸쳐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가치 기준이 달라 졌습니다. 부르는 노래가 바뀌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이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결정의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일이면 사업장의 문을 닫았습니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그의 사업장은 일주일 중 일요일의 매출이 가장 높았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제4계명 즉 하나님의 명령을 안 이상, 일주일의 첫날이 자신에게 가장 큰 매출을 안겨다 주는 일요일이 아니라 주님에게 받쳐져야 할 주일임을 안 이상, 그는 주일이면 주저 없이 사업장의 문을 닫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종업원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서 진심으로 그들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동안 주일에도 영업을 해 왔음은 종업원들이 주님을 만나 주님께 경배 드릴 기회를 박탈한 범죄 행위라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5월초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 콘서트를 개최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눈물을 닦았습니다.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그 공연은 은혜스러웠습니다. 그날 그 공연장이야말로 한 인간이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본보기였습니다. 만약 그가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었다면 그날 그가 부르는 노래의 레퍼토리가 달랐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청중도 달랐을 것이요, 그가 청중에게 던지고자 한 메시지도 달랐을 것이며, 공연장의 분위기 또한 광란 이상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나므로 인하여 노래도 밴드도 청중도 분위기도 모든 것이 다 바뀌어지고 만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한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세계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신앙의 실체입니다.

신앙이란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껏 걸어오던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걷노라면 전개되는 세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욕망의 세계에서 진리의 세계로, 굴종의 세계에서 자유의 세계로, 카오스의 세계에서 코스모스의 세계로 향한 대전환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성숙도란 바로 이 새로워진 세계의 넓이, 즉 이 세계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초청하고 수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새벽이 동터 오는 갈릴리 바닷가―그 새벽의 고요함을 깨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배신자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해 주심으로,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되풀이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이 끝날 때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명령 하셨습니다.
    `내 arnion을 먹이라'
    `내 probation을 치라'
    `내 probaton을 먹이라'
주님께서는 이 세 번에 걸친 명령을 통하여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갓 태어난 새끼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간기를 거쳐 큰 양에 이르기까지 만나는 모든 양을 구별 없이 먹이고 치는 것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즉 만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돌봄없이 주님을 사랑한다 함은 성립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지난주일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양들을 치고 먹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양을 먹인다는 동사 bosko 그리고 친다는 동사 poimaino는 아무에게나 해당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오직 목자에게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것도 어설픈 목자가 아니라 전문 목자이어야 합니다. 양을 먹이고 치는 전문 목자가 행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시편 23편 1절∼2절을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 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아무 꼴이든 눈앞에 있는 것을 양에게 먹이는 것은 비단 전문 목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진정 좋은 목자란 자신의 양떼에게 최상의 꼴을 먹일 수 있는 초장과 최적의 안식처가 될 물가를 알고 그곳으로 양떼들을 인도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 양떼들에게 가장 좋은 환경, 최선의 세계를 제공하는 자입니다. 그 세계를 향하여 양들의 방향을 바꾸어 주는 자입니다. 그 세계를 향하는 길 위로 양들을 인도하는 자 입니다.

그래서 방향과 길을 바꾼 양떼들 앞에는 최상의 세계가 전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그 세계를 이미 알고 있는 그 세계의 전문가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세계가 푸른 초장이요 쉴 만한 물가라 할지라도 그 속으로 인도하여 들인 양이 몇 마리에 불과하다면 그 목자는 전문 목자일 수가 없습니다. 참된 목자란 최상의 세계속으로 한 마리라도 더 많은 양을 인도하고 수용하며 책임지는 자임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주님의 양들을 치고 먹이는 자란 어떤 자라 정의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의 세계가 바뀌어진 자요, 그 생명의 세계, 진리의 세계, 빛의 세계 속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인도해 들이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 그 세계를 향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의 삶의 방향과 길을 바꾸어 주는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400년에 걸친 에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을 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를 찾아 나온 역사적 기록이 구약성경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입니다. 이 출애굽기를 영어로는 exodus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대 이동' `대 탈출'이란 뜻입니다. 1∼20명 혹은 수백 명이 아닌 거대한 한 민족이 출애굽 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대 이동이요, 출애굽할 때 마치 도망치듯 황급히 나왔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대 탈출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영어 exodus의 어원인 헬라어 exodos의 본뜻은 `대 이동' 혹은 `대 탈출'과는 거리가 멉니다.

주전 250년경 랍비들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는 구약성경을 당시의 공용어인 헬라말로 번역하면서 출애굽기의 제목을 헬라어로 exodus라 붙인 이래, 이것은 출애굽기의 공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exodos란 전치사 ex와 명사 hodos가 합쳐진 합성어인데 ex란 `∼로부터' 혹은 `∼밖으로'란 뜻이고, hodos란 `길'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ex-hodos'의 본래 의미는 `그 길 밖으로'의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껏 걸어오던 길을 바꾸었다는 말이요, 방향을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죄악과 죽음과 어둠과 욕망의 노예 상태를 상징하는 애굽의 길을 벗어 던졌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향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가나안에 이르는 길을 향하여 말입니다. 그렇다면 `ex-hodos'의 참된 의미는 세계의 전환입니다. `ex-hodos'하므로써 애굽이란 어둠과 죽음과 욕망의 노예된 세계가, 가나안이란 빛과 생명과 자유의 세계로 바뀌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ex-hodos'의 대역사를 이끈 자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모세였습니다. 어떻게 그가 이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그는 이미 40년전에 ex-hodos를 실천했던 사람, 애굽이란 어둠의 세계를 벗어 던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의 몸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란 공간 속에 거하고 있었지만, 그의 심령 속에는 이미 새로운 빛의 세계가 찬란하게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세계를 품고 애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 이번에는 400년 동안 어둠의 노예 생활하던 그 백성들을 품었을 때 가나안을 향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세계가 바뀌어지는 대장정이 시작되었으니, 바로 이것이 출애굽의 의의요 ex-hodos의 본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는 훌륭한 목자였습니니다. 이와같은 출애굽의 역사, ex-hodos는 구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약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변화산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제자 중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만을 데리고 기도하러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어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처럼 희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순간 하늘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오더니 주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무슨 말씀을 나누었는지를 누가복음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눅 9:30∼31) 주님께서는 이제 곧 당신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별세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의미함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별세하실 것'이란 이 단어를 헬라어 원문은 ex-hodos, 즉 출애굽기의 제목과 꼭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가 ex-hodos, 또 하나의 출애굽기였습니다. 십자가야 말로 죽음과 멸망으로 이를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세계로 이르게 해 주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중의 목자, 목자장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먼저 ex-hodos 하시사 우리를 영원한 새 세계로 품어 주셨기에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깨닫는다면, 이 세계 속으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인도해 들이는 이 시대의 ex-hodos, 이 시대의 출애굽기를 우리의 삶으로 엮어 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ex-hodos는 그냥 엮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ex-hodos는 자기희생, 자기헌신을 기꺼이 감당하는 자에 의하여만 이루어집니다. 출애굽기의 대역사는 모세의 자기 희생과 헌신 위에서 이루어졌고, 부활의 ex-hodos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양초가 자기를 태우는 희생을 감수하므로 빛의 세계를 던져 주고, 소금이 스스로 소멸되는 헌신을 주저치 않으므로 생명의 세계를 제공해 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양초가 자기를 태우는 것이 과연 자기의 희생이기만 합니까? 소금이 스스로 녹아지는 것이 정녕 자기 헌신입니까? 빛을 발할 수 없는 양초라면 그것은 이미 양초가 아닙니다. 양초라면 반드시 어둠 속에 빛의 세계를 던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양초는 필히 스스로를 태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양초의 자기 희생이 아니라 스스로 빛의 세계가 되기 위한 자기 승화입니다.

짠맛을 낼 수 없는 소금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처럼 길가에 버리워져 사람의 발아래 짓밟히는 무용지물일 뿐 어떤 경우에도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소금은 짠 맛을 내어야 생명을 지킬 수 있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녹아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금이 기꺼이 녹아지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생명의 세계로 화하기 위한 자기 존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향하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지 않았다면 인간으로 오신 그 분이 어찌 우리를 위한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이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당하신 죽음이야말로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이신 하나님 당신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자기 증명이었습니다. 출애굽의 대역사를 위하여 모세는 자신의 여생을 온전히 던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모세의 말년이 미디안 광야에서 의미 없는 실패자로 끝나 버렸을 것을 감안한다면, 모세의 자기 던짐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새세계를 얻은 목자로서의 자기 완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못박고 자기를 불태운다는 것은 엄청난 아픔이요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불태우지 않거나 자신을 못박지 않고서야 어찌 자신을 빛으로 생명으로 승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던지지 않고서야 어찌 타인을 수용하는 빛과 생명의 세계로 자신을 완성시켜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그 아픔은 아픔일 수만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이 아픔으로 시작하나 태어난 생명으로 인해 환희로 끝나듯이, 새로운 ex-hodos의 시발점이기에 전혀 다른 차원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는 이 이후 사도행전의 막을 여는 첫 목자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이 무엇입니까? 어둠과 죽음의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을 빛과 생명의 세계로 인도해 낸 또 다른 출애굽기, ex-hodos를 이루어 낸 목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진리의 빛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므로 `내양을 치고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을 완수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배신자였던 자기 자신에 대한 눈부신 자기 승화였습니다.

진리 안에서 자기를 못박고 진리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기를 두려워 마십시오. 그것은 자기를 빛으로 승화시키는 동력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이 시대의 ex-hodos, 이 시대의 출애굽기를 자신의 삶으로 기록하는 목자의 지혜입니다. 그것은 바로 목자장 되신 주님을 사랑하는 참 그리스도인 됨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기 이전에 바로 나 자신을 바른 사람 만들어 주시려는 주님의 은총이요, 사랑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진리의 배신자였던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여 주시사 죽음과 어둠의 세계로부터 우리를 빛과 생명의 세계로 ex-hodos 시켜 주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세계속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생명을 인도해 들이기 위하여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주저치 말게 하소서. 그것은 자기 희생이 아니라 자기 승화요, 자기 존중이요, 자기 완성을 뜻하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에 대한 우리 사랑의 증거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진리를 위하여 자신을 불태우는 우리의 삶이 많은 사람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주는 생명의 신호등이 되게 하소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의 삶의 길을 바꾸어 주는 진리의 길잡이가 되게 하소서. 경제 위기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이 나라의 백성들을 위해, 이 시대의 ex-hodos를 엮어 가는 진정한 출애굽의 목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 아 멘 ―

 

1998. 5. 17./ 주님의교회 / 주일 낮 예배 / 설교자 이 재 철

내 어린양, 내 양, 내 양(요한복음 21:15∼17)


아주 작은 도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젊은 목회자로부터 상담 전화를 받았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남자 집사님이 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신앙 생활을 목사님은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몇 해 전 목사님의 부임당시, 누군가가 그를 가리켜 `천사를 가장한 악마'라 말했을 때에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숨겨지겠습니까? 그 남자 집사님이 교회 밖에서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를 목사님이 뒤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오래 토록 육체적으로 유린 당해왔던 한 여인이 자살을 결심하고 죽기 전, 목사님을 찾아와 하소연하므로 모든 것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집사님으로부터 피해 당한 여인은 그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업장에 있는 여인들을 야비한 수법으로 벌써 몇 명이나 짓밟았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이 사실로 확인되자 목사님의 충격은 참으로 컸습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정작 그 남자 집사님은 타인이 자기의 비행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이 유린한 여인들에게, 만약 사실을 누구에게든 누설하기만 하면 반드시 죽여 버리겠노라고 단단히 협박해 둔 터라 누구도 알 리가 없으리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나와 태연하게 봉사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집사님이고 보면 젊은 목회자가 그로 인해 인간에 대해 느낄 배신감과 절망감, 그리고 목회자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 통감할 무력감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처참한 상황 속에서 저에게 상담을 청해 온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까지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머지않아 백일하에 공개될 것이고, 그때에는 작은 도시 전체가 떠들썩함은 물론 교회가 큰 시험에 빠지게 될 터인데 자신이 목회자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생각되는 방도를 밝힌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었습니다. `목사님 보기에 그처럼 위선적인 집사님은 목사님 교회의 교인이요 목사님은 그 교회의 목회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 말해 그 분이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 땅의 수없이 많은 교회 중에서 하필 목사님이 목회 하는 교회의 교인이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집사님을 목사님에게 맡기셨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을 통해 그 분을 바로 세우시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분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을 믿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목사님은 변함없이 목회자로서 그 분을 대할 수 있고, 사람을 함부로 포기하거나 버리는 실수를 범치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목회자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 이란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을, 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으시고 자신에게 맡겨주시거나 보내주신 사람이라 인식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이란 모든 인간의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동터오는 갈릴리 바닷가―그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고, 베드로 역시 자신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이 끝날 때마다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향해 이처럼 당신의 양을 치고 먹이라는 말씀을 세 번 되풀이 하시므로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임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의 양들을 돌봄이 없이 주님을 사랑한다 함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써 우리가 돌보아야 할 주님의 양떼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본문을 다시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실 때 처음에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 말씀하셨고,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내 양'이라 언급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첫 번째의 언급에서 `어린'이란 형용사를 제쳐놓고 보면, 세 번 다 `양'으로 표기 되어 있어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헬라어 사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세 번 다 양을 각각 다른 단어로 표현하시므로 분명히 구별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처음 명령하실 때 주님께서는 arnion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arnion이란 양 중에서도 특별히 어린양을 가리키는 areen의 `지소어'입니다. 전문용어 diminutive를 직역한 `지소어'란 우리말에는 없는 문법적 형태로써, 어떤 단어로부터 그 단어가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보다 훨씬 작은 개념을 나타내기 위하여 파생된 말을 뜻합니다. 이를테면 악기 비올라(Viola) 중에 가장 작은 비올라에 `in'이란 접사를 붙여 바이올린(Violin)이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즉 바이올린이란 비올라의 지소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이올린이란 처음부터 독립적인 악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비올라를 계속 작게 만들다 보니 그 이름이 비올라의 지소어인 바이올린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어린양을 가리키는 areen의 지소어인 arnion을 말씀하셨음은 어린 양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작은 양, 이제 갓 태어난 양을 의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번째 `내 양을 치라'고 명령하실 때에는 probation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성한 양의 통칭인 probaton의 지소어입니다. arnion보다는 크지만 그러나 장성한 양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의 양을 뜻합니다. 사람으로 말한다면 청소년기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발육이 끝나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양을 의미하는 probaton을 사용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당신의 양을 돌보라고 명령하시되 어떤 특정상태의 양만을 국한하여 지칭하신 것이 아니라, 갓 태어난 양에서부터 중간치를 거쳐 발육이 끝난 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양들을 구별 없이 돌보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즉 어떤 장소 어떤 상황 어떤 시간에 상관없이 만나는 모든 양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나에게 믿고 맡겨주신 주님의 양으로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짐 덩어리일 뿐이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춘기에 처한 청소년처럼 매사에 반항적이고 심사가 꼬여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중심으로만 살아온 어른처럼 지배자와 같이 군림하려고만 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일단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 모두를 구별 없이, 주님께서 나를 믿으시고 맡겨주신 주님의 양들로 생각하고 돌보라시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명령을 내리시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다 베드로이처럼 주님 앞에서 때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arnion아니었습니까? 매사에 반항적인 probation아니었습니까?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을 지배하려는 probaton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우리를 향해 너는 내 양이 아니라고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변함없이 끝까지 책임져 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이처럼 주님과 함께 영적인 갈릴리 바닷가에 거하는 거듭난 베드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믿는 우리 역시 주님을 본받아 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변덕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변함없이 우리를 당신의 양떼로 인정하시고 품어주신 결과로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었기에, 우리 역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람으로 인정하며 사는 것이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임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이제 비로소 주님께서 마태복음 13장을 통해 말씀하신 `가라지 비유'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곡식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못된 원수가 밤에 와서 몰래 나쁜 가라지 씨앗을 덧뿌리고 도망쳤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밭에는 좋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되었습니다. 가라지를 발견한 종들이 알곡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라지를 뽑아 버리려 하자 주인이 종들을 제지합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도리어 알곡까지 잘못 건드릴 수 있으므로 가만히 두었다가, 추수 때에 가라지를 따로 뽑아 불에 태우자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좋은 곡식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라지는 악의 자식들을, 그리고 밭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밭에 악한 자들이 가라지를 뿌리는 것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아예 처음부터 가라지를 뿌리지 못하게 막아 주셨다면 알곡들은 더 편안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가라지를 용인하시고 추수 때까지 알곡들이 가라지와 함께 살지 않을 수 없도록 하셨습니까?

알곡들이 가라지와 함께 살면서도 도태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가라지보다 더 크고 강한 생명령을 지니는 것입니다. 가라지 때문에 알곡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 생명력이 강인해 지는 것입니다. 가라지가 아니라면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가라지야말로 하나님께서 알곡을 온상 속에서 자라는 연약한 생명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강한 생명으로 세워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풍성하기만 한 수확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모든 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강하고 큰, 바른 생명력입니다. 바른 생명이 아니고서 맺는 열매란 아무리 양이 많아도 참된 생명의 알곡일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알곡이 바르게 이해했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겠습니까? 적어도 알곡은 지금 자기 곁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가림 없이 모든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알곡이라면 더불어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어서 좋고, 가라지라면 자신의 생명력을 더욱 강인케 해주는 좋은 도구가 되어 줄 것이기에 배척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내게 맡겨주신 사람 혹은 나를 위하여 내 곁에 두신 사람들로 인식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곁에 있는 자가 설령 가라지와 같이 못된 자라 할지라도 그가 내 곁에 있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더 크고 강하게 가꾸어 주시기 위해 마련해 두신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살아갈 때에만 우리는 당신의 arnion을, 당신의 probaton을 구별 없이 치고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에 바르게 응답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의 수적증가는 늘 새로운 다툼과 분열의 시작일 뿐입니다.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에 아이들로부터 감사 편지와 함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이의 선물이 좀 특이했습니다. 일본인 나카타니 아키히로가 쓴 책으로, 책 제목이 <20대에 운명을 바꾸는 50가지 작은 습관>이었습니다. 그런 제목의 책을 선사했다는 것이 그 아이가 아직까지 저를 20대의 젊은이로 보고 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제게 바꾸어야 할 좋지 못한 습관이 50가지나 될 정도로 저를 한심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그 아이가 서점에서 저를 위해 생각 끝에 고른 책이라고 하니 아들을 사랑하는 아비로서 읽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책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직장 같은 곳에서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과 부딪힐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어째서 이 사람은 이렇게 배려가 없을까 하고 실망합니다. 이렇게 싫어하는 사람과 부딪히면, `나도 혹시 이 사람과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하고 자신을 돌이켜 보도록 합시다. 싫어하는 사람은 신(神)이 대신 보낸 사람입니다. `때때로 너도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구. 어때, 언짢지?'하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신이 보낸 사람이다 생각하고 감사하십시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진정 바뀌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들을 둘러쌓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건, 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믿으시고 맡기신 사람들이요 여러분을 위하여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총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 모두와 더불어 살아가는 강하고 큰 그릇―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생명이 되십시오. 이것 하나로 여러분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요, 그 같은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한 사도행전의 새 역사가 시작되기 대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우리의 삶 속에는 늘 분열과 다툼, 대립과 대결밖에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수적 증가가 오히려 이 사회의 혼란만 가중시켜 왔음을 회개 드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처럼 형편없는 우리를 향해 `너는 내 양이 아니다', 한 번도 거부치 않으시고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찾아와 주님의 양으로 품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란 열과 성을 다하는 헌신과 봉사 이전에,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과 먼저 더불어 사는 사람이어야 함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진정한 주님의 교회란 교회의 호칭이나, 예배당을 소유치 않고 헌금의 50%로 선교 구제하는 제도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문턱을 너머서는 모든 부류의 사람을 주님의 양으로 알고 진심으로 영접하며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삶에 의해 구축되는 것임을 늘 기억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게 보내주신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강하고 바른 생명력을 지니는 것으로 증명됨을 망각치 말게 하옵소서.

그와 같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절망과 암울과 혼돈의 이 세상 속에 새로운 사도행전의 서막이 오르게 하옵소서.

― 아 멘 ―

1998. 5. 10./ 주님의교회 주일 낮 예배/설 교 자 이 재 철

요한의 아들 시몬아(요한복음 21:15∼17)


우리가 어떤 사람을 부를 때,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호칭이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호칭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자녀들을 부를 때 이름을 사용할수도있고, `애야'라고 말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놈'하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호칭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실은 우리의 인격과 성품, 나아가 생각과 철학까지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호칭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을 처음 만난 주님께서 게바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게바란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반석'이란 뜻이었습니다. 아람어란 앗수르 제국의 언어로써, 앗수르의 지배를 오래도록 받았던 이스라엘은 그때까지 아람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여태껏 중국의 한자를 병용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반석이란 의미의 새 이름을 주셨던 것은, 시몬이 반석과도 같은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반석이란 뜻을 지닌 헬라어가 `petros'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베드로라고 더 잘 알려진 이 이름은 본래 시몬의 본명이 아니라, 주님께서 시몬에게 지어주신 게바란 이름의 헬라식 표기인 것입니다.

평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시몬이란 유대식 이름의 호칭을 가장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있다.(눅7:40)' `시몬아 자느냐? 네가 잠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14:37)' ―주님께서 평소에 베드로를 베드로가 가장 친근감을 느낄 유대식 이름 시몬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단순한 제자가 아닌 때로는 자식으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형제로 여기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최초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밝히셨던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며 주님의 말을 가로막고 나서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16:23)'―그렇다고 이 이후로 주님께서 베드로를 계속 사단으로 취급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사단이라 호칭하시므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생각을 더 중시하는 것은 결국엔 사단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주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신 직후였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게 될 최후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절대 절명의 순간에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높은지 또다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침통하게 보시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극히 이례적으로 베드로라고 헬라식으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눅22:34)'- 베드로란 이름의 뜻은 반석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전혀 반석 같잖게 행동하는 그 한심한 순간에 오히려 반석이라 부르시므로, 어떤 경우에도 반석이어야만 할 베드로의 정체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대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매우 특이한 호칭을 사용하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15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15a)"

평소 베드로를 시몬이라 부르시던 주님께서 이번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본래 족보를 중시하던 유대인들은 제3자를 소개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누구의 자식인지를 밝히는 관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혹은 `나는 누구의 아들 누구입니다'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2인칭 상대에 대한 호격으로 이와 같은 호칭이 사용되는 예는 흔치 않았습니다. 굳이 사용한다면 상대에 대하여 격식을 갖추어 예의를 표할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상대를 존중히 여기는 표현인 셈이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예의를 갖추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신 것이 이번이 처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호칭을 예전에 딱 한번 사용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도대체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거침없이 고백하였습니다.―`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주님을 향한 인간의 고백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극찬하시면서,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바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실 때에도 베드로에게 최고의 예의를 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한번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런대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을 한 번만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16절에서도 그리고 17절에서도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베드로를 향해 같은 자리에서 연거푸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호칭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모든 호칭에 의미가 있었음을 상기할 때 여기에는 필히 더 깊은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 주시기 위하여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호칭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셨겠습니까?

우리는 본문의 상황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님깨서는 새벽이 동트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으심으로,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잡히시던 밤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속죄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말해 베드로가 주님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기회를 부여키 위함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조건적인 필리아의 사랑으로 응답하였습니다.그러나 주님께서는 세 번째 질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 주심으로, 주님을 조건에 따라 제한적으로밖에 사랑하지 못한 베드로를 온전히 품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베드로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필리아의 수준에 있는 베드로를 온전히 품어 주시므로,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의 모든 죄와 허물과 잘못을 깨끗이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 사랑의 실체는 바로 용서였던 것입니다. 이 이후 만약 베드로가 본문 속의 갈릴리를 일평생 잊지 못했다면, 새벽이 동터 오는 이 갈릴리야말로 베드로 자신을 향한 주님의 위대한 용서의 선포식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를 선포하시는 이 극적인 순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의를 갖추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두 가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참된 사랑은 참된 용서요, 참된 용서는 반드시 상대에 대한 예의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참된 용서는 상대에 대한 존중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용서한다면 그에게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귀하고 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할 때 큰 은혜를 베푸는 시혜자가 됩니다. 시혜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곳에서 용서의 대상을 내려다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를 베푼 내가 언제나 그보다 우월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용서를 하고서도 그 대상을 존중하거나 그에게 예의를 표할수가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용서가 상대를 변화 시키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상대를 없수이 여기는 교만한 마음으로 행하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라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자기 과시적 용서는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철회되거나 상대에 대한 굴종을 강요하기에, 그곳에는 참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십시오. 진리의 배신자였던 우리를 구원하시고 더러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의 독생자를 친히 우리에게 보내어 주셨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예의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 주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향한 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예의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하찮은 우리와 날마다 함께 해주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지극히 존중히 여기고 계심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벌레만도 못한 우리에게 왜 이처럼 하나님의 예의를 다하시면서 우리를 존중히 여겨 주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용서며, 용서는 예의이고, 예의는 존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는 겸손한 용서이고, 그 겸손한 용서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담겨지고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참된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예의와 존중으로 귀결되는 참된 용서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내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사랑의 사람으로 바로 서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는 주님 호칭 속에서 우리가 두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주님의 용서를 믿는 자란 먼저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는 자요, 용서 받은 자신을 스스로 존중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기는 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긴 하지만 죄의식에서부터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난 안된 다고,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 할 수 없는 자는 자신을 존중할 수 없고, 자신을 존중할 수 없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설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그리스도인들 을 잡아죽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런대 그가 어느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용서하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루아침에 성인 군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시각각 엄습하는 죄의 유혹 앞에서 아직 정죄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수없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탄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2∼24)" 바울의 이 실패의 탄식은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정죄감의 노예 되었을 때 바울은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보다 과거의 죄가 더 크게 보였고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죄성이 더 중하게 여겨 셨던 까닭이 였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때 자신은 도저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였고, 당연한 결과로 그는 자신을 형편없는 자로 자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대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자포자기하던 사도바울이 마침내 자신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여기에서 너란 두말 할것도없이 바울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바로 바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의 선포였습니다. 그 용서의 근거는 재론할 것도 없이 주님의 용서였습니다. 주님께서 먹물보다 더 더럽던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지못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채 자포자기하며 탄식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를 확신할 때 바울은 주저 없이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셨거늘 자기가 자신을 용서치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기에 자기 또한 자기를 용서함이 마땅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저는 성경에서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있는 힘을 다해 외치는 바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외침입니까? 그것은 타인을 향한 외침이기 이전에 바울 자신을 향한 외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주님의 용서하심을 믿으므로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도 주님 안에서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 됨을 믿고 인정했을 때, 그는 평생 자기 자신에 대하여 예의를 다하며 자신을 존중하는 삶으로 일관했으니 곧 주님께 예의를 다하고 주님을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예의와 존중을 다 바치는 것이야말로 주님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자기 자신에 대한 최고의 예의요,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최상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면전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뛰어나가 땅을 치고 통곡했지만 그러나 자신에 대한 정죄 감으로부터 자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간밤만 하더라도 주님을 까마득하게 잊고 허망한 헛그물질만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다시 찾아 오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베드로의 자신에 대한 절망감이 얼마나 커 겠습니까? 난 안된 다고, 난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며 정죄 감에 몸서리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배신자였던 베드로를 용서하시면서 예의를 다해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불러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이만큼 존중하니 내가 존중하는 너를 너 자신도 용서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예의를 다할 정도로 너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으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하는 만큼 내가 사랑하는 너 자신에 대해 너 스스로 예의와 존중을 다하라는 촉구였습니다. 이 이후 우리는 사도행전 속에서 전혀 다른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사랑과 용서의 베드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예의와 존중을 다하는 베드로- 곧 거듭난 자기자신에 대해 예의와 존중을 다하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베드로로 부터 우리는 참으로 귀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자신을 먼저 용서할 줄 아는 사람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 된 자신에게 예의와 존중을 다 할줄 아는 자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예의를 다하며 존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에게 예의를 다 할 줄 아는 사람만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진정으로 믿는 믿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43:25)"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여호와께서)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2)"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신 것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치 마십시오. 죄에 민감 하라는 말은 지금 죄와 맛서 싸우라는 것이지, 이미 회개한 것을 다시 기억하고 그로 인한 죄의식의 노예가 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함의 증거일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룟유다가 되지 마십시오. 가룟유다는 두가지의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주님을 판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유익에 따라 늘 주님을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의 더 큰 잘못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자살로 그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판 뒤에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서 받았던 은30냥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의 선한 양심이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채 정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가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믿음으로 자신을 정죄치 않았던들 그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그 누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죄의식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자포자기 하지 마십시오. 이미 회개한 죄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을 정죄치 마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므로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실 정도로 존중해주신 자신을 존중하십시오.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으십시오. 새로운 피조물답게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확신하십시오.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예의를 다하므로 거듭난 자신에 대해 예의를 갖추십시오.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주님을 은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용서하며 존중하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 역시 진리의 사람으로 굳건하게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면전에서 배신한 베드로도 되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죽이던 바울도 되었는데,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여버리기까지 했던 다윗도 되었는데 어찌 우린들 가능치 않겠습니까? 나로서는 불가능하지만 내게 하나님으로서의 예의를 다하시며 나를 존중해 주시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므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의 복음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주신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주님께서 존중해 주시는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우리의 삶은 늘 무기력했고, 무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신자였던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불러 주시고 용서해주신 주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예의를 다해 오늘 아침 우리를 다시 불러 주시고 품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용서케 하소서.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용서하신 주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시작됨을 잊지않게 하옵소서. 주님을 존중히 여기므로 새로운 피조물 된 나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 예의를 다하므로 거듭난 나 자신에 대한 예의를 갖추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사랑은 용서요, 용서란 예의요, 예의란 존중임이 이 세상에 보여지게 하옵소서. 그와 같은 삶을 통하여 우리 모두 사도행전 속의 베드로와 사도바울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하옵소서.

―아멘―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5월 3일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설교자 이재철

    말씀: 시편 144:12∼15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친구들끼리 모여서는 가정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이웃과 친형제처럼 서로 가까이 지난다 할지언정 이웃은 가정과 구별됩니다. 정상적인 가정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들로 구성됩니다. 부모와 자식 없이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해도, 그것이 가정일 수는 없습니다.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와 자식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이란 어떤 관계입니까? 생명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부모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 간의 생명은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가족이란 서로 생명을 주고받는 관계의 사람이요, 가 정이란 서로 생명을 주고받는 사람끼리 모여 사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절친하다 할지라 도 친구와 이웃의 모임을 가정이라 부르지 않는 것은, 친구와 이웃은 서로 생명을 주고받은 관계 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정이란 서로 생명을 나눈 가족으로서만 구성되기에 가정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생 명을 나누고, 나눈 생명을 지키고 가꾸며 이어가는 곳이 가정이기에 생명을 떠나서는 가정이 존 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의 본질인 생명의 실체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 다. 참 생명은 언제나 참된 사랑입니다. 미움이란 참생명의 몫이 아닙니다. 미움이란 거짓 생명 의 소산일 뿐입니다. 참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참생명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본질이 생명 인 동시에 생명의 본질이 또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실체가 생명이며 생명의 실체가 곧 사랑인 것 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본질은 생명인 동시에 사랑인 것입니다. 왜 집은 돈으로 살 수 있는데 비하여 가정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습니까? 가정의 본질인 생명과 사랑은 매매의 대상이 아 니기 때문입니다. 왜 주머니가 텅빈 빈털터리가 되었다 할지언정 가정이란 말만 들어도 말할 수 없는 포근함과 따스함을 느끼게 됩니까? 가정이란 생명과 사랑의 보금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인 가정을 동경하기만 하 고 있습니까? 왜 참된 가정의 기쁨을 삶속에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왜 가정이란 단어 자체 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낯설기만 합니까? 가정의 본질인 사랑과 생명이 결여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생명에서 벗어난 가정이란 마치 사막과 같아서 그곳에서 더불어 살아간다 는 것은 피차 생명을 고갈시키는 자해행위일 뿐입니다. 사랑 없는 울타리 안에서 밤낮 함께 산다 는 것은 불화의 동기가 될 따름입니다. 그것은 필히 인생의 황폐화로 귀결되기에 사랑과 생명을 상실한 가정에서 사는 것보다 더 큰 고통과 비극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정을 이루기 전까지 정 상적이던 사람이 가정을 이룬 이후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이란 그 본질에 충실하느냐 혹은 벗어났느냐에 따라 천국 일수도 있고 지 옥 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느 쪽입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좌우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과 서로 생명을 나눈 부모님과 자식들을 쳐다 보십시오. 이 세상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족들끼리만 서로 생명을 나누었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 로운 일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렇다면 가족들끼리 진정 행복한 가정을 일구어 가 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복된 가정을 구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 고 있는 오늘의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있도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이시오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요 사랑의 본질이신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 하나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삼았음을 의 미하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 위에 세워진 가정이 어찌 복된 가정이 되지않을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가정 속에만 참된 위로가 있습니다. 흔들림 없는 소망이 있습니 다.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꽃꽂이 전문가들에 의하면 교회 예배당에 꽂아 두는 꽃의 생명력이 가장 길다고 합니다. 그 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예배당에서 울려 퍼지는 말씀과 찬양의 본질이 모두 생명과 사랑인 데 그 속에서 어찌 꽃의 생명력이 연장되지 않겠습니까? 한낱 미물에 불과한 꽃도 이러하거늘 하 물며 영원한 영적 존재인 사람이야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그 어디에도 참된 생명과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과 생명은 오직 진리요 생명이 신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모십시오. 그분을 가정의 주인이 되게 하십시오. 그 분 위에 가정을 세우십시오. 서로 생명을 나눈 가족들 사이에 결코 시들지 않는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꽃이 만발할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생명을 함께 나눈 사랑하는 가족들이 이 시간 더불어 주 님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참생명이요 참사랑이신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 우리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는 가족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 위에 세워지는 우리의 가정이 진정한 위로와 소망과 안식의 보금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참된 천국이 되게 하옵소서. 그 천국 속에서 자라는 우리의 자녀들이 눈부신 햇살처럼 구김 없이 아름답게 자라게 해주십시오. 복된 우리 가정들이 한데 모여 건강한 사회를 이루게 하시고, 해맑은 우리의 자녀들이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 가는 역사의 주체들이 되게 해주옵소서.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