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 베드로전서 3:15∼16/설교자:임영수목사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 영성(1998. 7. 5).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기독교 신앙은 시대의 변천과 함께 새로운 도전을 받아 오곤 합니다. 그러한 도전은 기독교 신앙을 무력화시키거나 약화시키기 보다 오히려 신앙의 내용을 보다 온전하게 깊게 넓게 재구성하는 계기가 되곤 하였습니다.

비유로 말씀드리면 어떤 사람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아주 값비싼 보화를 가지고 있지만 그 가치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과 함께 그에게 그 보화의 가치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 보화는 그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보화 없이는 살 수 없게 될 정도로 그것은 값비싼 것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은 진리의 의미를 더욱 극대화 시켜 가고 있고 그 가치를 더욱 더 높여 가고 있습니다. 도전은 기독교 신앙의 감추어진 면을 새롭게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가리켜 포스트 모던니즘(post modernism), 해체주의시대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모든 전통적 가치가 다 해체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와 더불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삶의 목적과 가치를 재통합해 가려는 진지한 노력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기독교 신앙 역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요즈음 서구 교회에서 그들 스스로 제기하는 주요한 신학적 물음들 가운데 하나가 오늘의 다원주의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입니다. 그러한 물음은 저 역시 지난날 한때 목회의 현장에서 진지하게 질문해 오던 문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서구교회가 그러한 물음을 오늘에 와서 제기하게 되는 것은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시대에만 해도 서구인들은 기독교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종교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동서의 교류가 깊어지고 과학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확신하고 있던 기독교 신앙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면서 동양의 신비스러운 종교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전에는 그들에게 문제시되지 않았던 종교적 물음이 새롭게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만이 진정 구원의 종교인가?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는가? 인간 문제의 해답이 진정 기독교에만 있는가? 그러한 물음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맹목적인 강요보다 타종교와의 비교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의미를 새롭게 찾아보려는 움직임으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맹목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을 변증하면서 타종교의 무익성을 역설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상대적 신앙을 강조하지도 않겠습니다. 저는 오늘과 같은 다원주의 시대에서 기독교 영성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타종교의 구원이 있다 없다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오늘의 시대에 기독교 신앙을 값비싼 보화로 소중하게 간직해 갈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 가는 길은 편협 되고 배타적인 교리보다 기독교 영성이 어떤 것인가를 재정립하는데 있습니다. 영성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종교에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특성은 다릅니다.

먼저, 기독교 영성은 인간이 산 소망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인생에 관한 다음과 같은 우화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버스를 타고 호수와 산, 전원과 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지방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창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차창 밖으로 무엇이 지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누가 버스 상석에 앉을 것인가, 누구에게 갈채를 보낼 것인가, 누구를 중요한 인물로 여길 것인가에 대해 말다툼하느라고 여행의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럴 것입니다."

이 우화는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잘못하면 그러한 상태에서 살다가 생을 끝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암시해 주는 우화입니다. 자기 자신은 매우 중요한 일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눈을 뜨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다른 한 차원의 삶에 대해 평생 눈을 뜨지 못한 채 생을 마칠 수 있습니다.

다시 잠시 우화의 내용으로 돌아가면, 기독교 복음은 버스 안에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가리워진 커튼 하나 하나를 젖혀 주면서 그들에게 차창 밖의 다른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버스 창의 커튼이 걷히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 앞에 전개되는 새로운 현실 앞에 경이로움과 감탄을 연발하면서 한편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산 소망으로 깨어나면서 세상과 생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독교 영성은 자기 부인이며 동시에 자기 초월입니다. 모든 종교에 자기 부인과 자기 초월이라는 두 요소가 다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자기 부인과 자기 초월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관련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삶으로 현재의 자신을 부인하고, 새 가치, 새 의미, 새 목표와 일치시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 종교에서 자기 부인은 자연과 관련됩니다. 현실을 떠나서 자연과 자신을 일치시켜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 2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세 번째, 기독교 영성은 적극적인 현실 긍정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 생활을 한다고 할 때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현실을 긍정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악한 것으로 부인하고 내세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은 현실을 악한 것으로, 자신의 번영과 안전을 위한 수단으로 받아 드리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현실 긍정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이 세상에 오셨고, 종국에 가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산 마더 테레사 여사가 세상을 떠난 후 어느 외국 주간지에 실린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 가운데 지금도 인상에 남는 내용은, 마더 테레사를 비롯해서 그와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에게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을 돕는 일은 단순히 봉사의 차원이 아니라, 버림받은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그들과 함께 고통 당하며 눈물 흘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현실을 긍정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소망과 평강의 일에 참여해 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빨리 불의 심판으로 다 소멸되어 없어지고 자기들만 하늘나라로 올리워지기를 기다리는 이기주의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의 사역에 믿음, 소망, 사랑으로 참여해 가는 평화의 사역자들(peace-maker)입니다.

네 번째, 기독교 영성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지속적으로 갱신, 새롭게 형성 되어 가는 삶입니다. 시편 23편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새로운 힘을 부여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무기력, 회의, 도전, 좌절, 무의미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에 참여해 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기독교 영성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에너지를 개발해서 극대화시켜 수퍼맨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살아가는 독특한 삶의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에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말씀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씀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넓고 깊게 벌어진 간격(gulf)를 연결해 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평강은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워지는 새로운 관계를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것보다 우선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새롭게 해 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자라가야 하고 그 분에게 복종해 가는 삶이 새로운 차원에서 이루워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영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입니다. 이것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활의 때에 이루어지는 우리의 희망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내세나 현세에서의 성공에 그 의미를 국한시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매우 값싼 은혜로 만들어 버리는 과오를 저지르게 됩니다. 값싼 은혜는 깊이 소중하게 간직할 만한 보화가 되지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생, 역사, 우주, 현세는 물론 영원한 생에까지 깊은 의미를 부여해 주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이 값비싼 것이 돼지에게 던져진 진주가 되어 의미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교회는 계속 깨어서 신앙의 값진 의미를 밝혀 내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의 싸움은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값싼 것으로 바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망의 내용을 묻는 사람들에게 믿는 자로서 소망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해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아 멘 -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예레미아 29:10∼14/설교자:임영수 목사
 

우리와 다른 하나님1998. 6. 28.

오늘의 본문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요시아 왕 13년(B.C.627)에 활동을 시작하여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B.C. 587년 이후 얼마동안까지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다른 어느 예언자들보다 자기 민족의 불의와 죄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렸던 눈물의 예언자였습니다.

유다왕 여호야긴 때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다인은 왕족, 선지자. 일반 민중을 포함해서 약 3,000명이었습니다. 이때가 이스라엘의 가장 절망적인 어두운 역사의 시기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비애에 찬 애가를 지어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은 무능력하신 분이라고까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역사의 시기에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과는 전연 다른 희망적인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29장 전반의 내용이 예레미야의 편지입니다

예레미야가 본 하나님의 계획은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차면 그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킬 것과 그들을 통해 미래의 역사에서 전 인류를 구원할 구속의 역사였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본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이스라엘이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재앙을 준비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평안과 소망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바로 그 포로의 시기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린 때가 아니요, 가장 가까이 계신 때라는 것을 알고, 그때 오히려 `하나님께 부르짖고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가운데 있는 평안과 소망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없이 그들 수준에서 만들어 놓은 삶에서 경험해 온 평안과 소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불행과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평안과 소망은 십자가의 형벌 다음에 부활의 때에서 경험할 수 있는 평안과 소망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시기는 십자가의 심판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구속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바벨론 포로의 시기가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자비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절망하고 어둡게 느꼈던 그 시간에 그의 자비와 긍휼, 용서의 손길을 펴신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로 그 하나님의 시간을 파악했습니다.

본문에 70년이란 역사의 시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시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역사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밝아오는 평안과 소망의 시간의 전주곡과 같은 의미를 지닌 시간입니다.

교회에 통용되는 하나님과 관련된 호칭들 가운데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러한 호칭들은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다는 의미는 외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존재해 가시는 존재방식이 우리의 것과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협잡하거나 타협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권모술수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설득에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언제나 그 분으로서 계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분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자신의 신념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기도 하고 공상 세계의 인물로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전연 관련 없이 우리의 신념에 도취되어 행동하기도 하고 공상 세계 가운데서 허황한 꿈을 꾸기도 합니다. 굉장히 흥분과 열기로 일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전연 상관없는 일이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사상을 충족시켜 주는 분으로, 우리가 계획하고 추진하는 생의 길을 보장해 주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한 신념에 사로잡혀 살아가다가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좌절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계신다고 인정하는 때는 우리 소원대로 무엇이나 다 되어 갈 때 우리가 세워 놓은 계획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보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정직하게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사상, 우리의 계획, 우리의 생의 설계가 얼마만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에 가까우냐 하는 것입니다. 전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계획은 하나님 없이 세워진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도 하나님께 그것에 동참해 달라고 합니다. 그것을 찬동해 주고 편을 들어주고 보장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점이 하나님과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학생이 대학교수 요원으로 일하기 위해 박사과정 시험을 치렀습니다. 불행하게도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 그 학생을 만나 시험 결과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때 그 학생은 시험에 불합격되었다고 하면서, 자기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학기에 시험에 다시 응시해서 합격과 함께 장학금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 학생을 만났을 때 그는 시험에 합격하고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아직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학생 대답은 지금은 좀 계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교회의 공통된 착각이 있습니다. 교회를 세상 수준과 똑같이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교회의 편이요, 교회의 수호신이라고 맹신하였던 점입니다. 화려한 건물, 짜임새 있는 제도, 지적 수준이 높은 성직자 확보, 풍족한 재정, 많은 수의 신도가 곧 하나님께서 교회의 편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으로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러한 조건 때문에 전적으로 교회의 수호신이 될 수 있을는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국가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경제가 풍성하고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마음껏 먹고 즐길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즐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경험한 사실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기 이전 그들은 향락에 도취되어 불의와 악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계획한 것은 무엇이나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생각들이 심판 받을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 심판 받을 사람들은 심판 받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자기들을 버렸다고 생각하거나 계시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때는 그 이전이었고, 심판의 순간은 그 분이 가장 가까이 접근해 오시는 때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우리와 다른 하나님의 시간을 바르게 파악하였습니다.

교회가 자기 시대에서 예언자적 안목을 상실하지 않고 깨어 있을 때,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이 세상의 평안과 소망 가운데서 먹고 즐길 때 애통하는 자로 살게 되고, 그 반대로 자기 시대 가장 절망적인 역사의 시기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고, 전심으로 그 분을 찾으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다른 하나님에 의해 마련된 십자가의 심판 다음에 다가오는 평안과 소망의 시간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심판 다음 부활의 때에 경험하는 평안과 소망의 시간에 비춰지고 있는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용서되고, 화해되고, 치유되고, 온전케 된 우리 자신의 모습이며,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두운 역사의 시기에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갖게 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게 됩니다. 우리가 설계하는 미래는 어디까지나 우리와 다른 하나님의 시간 안에 있는 소망과 평안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옛것이 아닌 새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옛 것 가운데서 후회와 갈등, 한숨, 자기 연민이 아닙니다. 옛 것을 십자가에 못박고 새 것으로 갈아입는 미래 지향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소망·사랑의 근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신 분이라는데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거짓으로 우리를 합리화시켜 주거나 우리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고 자기에게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새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거짓 소망, 거짓 평강 가운데 머물게 하며 우리를 합리화시켜 주고 우리의 비위를 맞춰 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우상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다른 하나님은 십자가 없이 이루어진 소망과 평안의 삶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합니다.

저는 희망이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다른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거짓 소망, 거짓 평안에서는 이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 가운데 있는 평안·소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아 멘 -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 1998. 6. 21/설 교 자 이 재 철


창립10주년/임직식/고별설교

부족할 줄 아노라 (요한복음 21:25)



 
92년 4월 넷째 주일이래, 지난 6년 2개월 동안 함께 은혜를 나누었던 요한복음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 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것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절인 동시에 4복음서를 종결하는 최종 구절이기도 합니다. 만약 이 마지막 구절이 없었다면, 우리의 신앙은 필경 4복음서의 틀 안에 갇혀 기형화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구절로 4복음서가 끝남으로 인하여, 우리는 4복음서를 토대로 하여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만남, 바른 사귐, 바른 섬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임마누엘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곧 인류를 위해 시공을 초월하여 이 땅위에서 행하신 일이 어찌 고작 4복음서에 기록된 것뿐이겠습니까? 비천한 갈릴리의 어부에 불과했던 요한 사도 한 사람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서만도, 요한은 요한복음보다 훨씬 더 긴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지난 2천년 동안 이 땅을 거쳐간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에게 주님께서는 요한 사도에게와 똑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한사람 한사람들의 삶이 다 한결같이 책 한권 분량 이상의 은혜로 가능할 수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요한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 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행하신 행적과 베푸신 은혜를 모두 기록할 경우 이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책을 수용하기에 부족할 것이라는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은혜는 너무나 크고 엄청나서 주님 안에 거하는 한 우리에게 부족함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다윗이 무엇이라 노래했습니까?―"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자에게 무슨 부족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은혜를 모두 기록한다면 세상이 부족할 것이라는 요한의 고백과,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다윗의 노래는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요한 사도의 이 고백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면, 오늘 아침 우리가 이 구절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창립 1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요한복음의 이 마지막 구절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구절과 엇물려 사도행전의 막이 오르고 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마지막 구절을 교량으로 하여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연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복음 안에서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만 사도행전의 삶을 펼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족함이 없는 은혜―이것만이 사도행전의 문을 여는 열쇠요, 그 막을 올리는 동력입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던 갈릴리의 어부들이 어떻게 사도행전의 증인들이 될 수있었겠습니까? 복음 안에서 얻은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은총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도행전의 삶을 살았습니까? 거창한 구호부터 제정했었습니까? 각분야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 야심찬 마스터플랜부터 세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웅장한 예배당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축키 위해 전력투구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어느 곳에 있든 말씀의 증인 ―말씀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을 비롯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와같은 사도들을 죽이려 안달하였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사도들이 하는 짓이란 기존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불온한 반체제 행위요, 그같은 짓을 자행하는 사도들은 사회를 뒤흔드는 불순 세력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과연 사도들은 전혀 무익한, 아니 해롭기 만한 불순 무리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명실공히 사도로써 말씀대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말씀의 증인이었을 뿐인 사도들을 불순 세력으로 간주하고 거세하기 위해 안달했다는 것은, 그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었음을 증명하는 증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한 유대교 집단과 사도들의 무리를 비교해 본다면, 그 양자 사이에는 조직적으로나 수적으로나 자금 면에서나 규모면 에서나 도저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만 본다면 거대한 유대 종교 집단이 사회적으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져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새 역사의 대업은 볼품없던 소수 사도들의 무리에 의하여 전개되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새로와 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져 있을 때 유대교 집단이 아무리 거대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아무리 웅장해도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일 수 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의 어둠을 가증시키는 흑암의 원천이었을 뿐입니다.

반면에 세상적으로는 비천하기 짝이 없었던 사도들에 의하여 어떻게 새 역사가 전개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비록 비천하고 소수였을 망정 주님의 말씀대로 살 때, 말씀되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도구 삼아 역사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주님으로서는 결코 불가능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이란 실은 무엇입니까?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 때, 그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이 땅위에 친히 펼치신 주님의 역사, 곧 `예수행전'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일컬어 `성령행전'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교회 창립 10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10년이란 한 시대의 매듭을 짓는 날입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는 늘 개혁이란 관점에서 한국 교계의 주목을 받아 왔습니다. 마치 개혁의 선봉에선 교회인 것처럼 인식되어 온 것입니다. 적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켜 소리 없이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의도적이거나 인위적으로 개혁 혹은 혁명 그 자체를 우리의 목적으로 삼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야망과 욕망으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굴혈이라 부르신 반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일컬어 교회라 정의해 주셨기에, 우리는 그저 건물에 불과할 뿐인 예배당을 소유하려하지않고 교회인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안에서 바로 세우기에 주력했을 뿐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치는 두 번의 십일조 중에서 첫 번째 것은 성전을 위하여 그리고 두 번째 것은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말씀하셨기에, 헌금의 50%로 이웃과 나눔을 실천해 왔을 뿐입니다.

헌금이란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믿고 고백하는 증표로 드리는 것이라 말씀하셨기에, 주님의 것을 주님께 바르게 바쳐 드리기 위하여 헌금 봉투에서 우리 이름을 삭제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구별없이 제사장이라 말씀하셨기에, 주일 낮 예배 시간에 안수 받지아니한 서리 집사들까지도 남녀 불문하고 순서대로 대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인간의 고백 위에 분명히 `내 교회' 즉 사람의 교회가 아닌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 말씀하셨기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 자신이 주님의 교회를 특정인간의 교회로 전락시키는 범죄를 부지중에라도 저지르지 않기 위하여 임직자들의 임기를 스스로 정하여 실천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지난 10년간 단지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 했을 뿐인데도, 결과적으로 그것이 사람들에게 개혁과 혁명으로 받아 들여졌다면, 그리고 도처에서 여러 교회들이 우리를 본받고자 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슴아프게도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주님의 말씀과 멀어져 있음의 반증 아니겠습니까? 다수의 교회들이 주님의 교회로부터 인간의 교회화되었음의 역작용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것을 부정할수 없다면, 이 땅위에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교회들의 십자가가 부지기수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새로워지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 더 부패해지는 이유를 이제야 밝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멀어진 교회란 또 하나의 단순한 이해 집단에 지나지 않기에, 이해관계로 얽히고 설킨 이사회의 문제를 해소하기보다는 심화시킬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시 새로운 10년을 맞이하는 문턱에 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참으로 더럽고도 더러운 죄인이었던 우리의 죄값을 친히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대신 치루어 주시므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족함이 없는 은혜 속에서, 더더욱 말씀대로 살기 위해 늘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지중에라도 말씀에 등돌리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심령을 말씀에 동여 매어야 하지 않겠습니끼? 그때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를 통하여 이 시대를 위한 `예수행전'이 더 눈부시게 전개될 것입니다. 우리는 올해의 표어를, 21세기를 내다보면서 이사야 43장 18절∼21절에 근거하여 `새일을 행하리라'로 정한바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매사에 철저한 말씀의 증인되어 역사를 새롭게 하시는 예수행전의 도구 되는 것 외에, 이 세상에 도대체 무슨 새일이 있겠습니까? 참된 새로움은 유한한 세상이 아니라 오직 영원 속에만 존재합니다.

돌이켜 보면, 제 개인적으로도 지난 10년은 주님의 부족함이 없는 은혜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과거의 소유자에 지나지 않는 제가 이곳에서 목회자로 쓰임 받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매주일 말씀을 전하면서 성경의 문외한이었던 제가 먼저 말씀의 광맥을 캐어 내는 은총 속에 거하였습니다. 중단 없이 교회가 성장하는 보람도 맛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들과 같은 훌륭한 교우님들과 함께 신앙 생활하는 벅찬 환희를 누렸습니다. 제가 아무리 강단에서 소리쳐 말씀을 외친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말씀을 따라 살려하지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주님의 교회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 속에서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기뻐하였기에, 주님의 교회는 명실공히 주님의 교회일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은혜였습니다. 그렇기에 교회 학교 학생을 포함한 2천 6백여 교우 여러분 한분 한분은 저를 향한 주님의 부족함이 없는 은혜인 동시에, 주님을 향한 저 자신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과의 아름다운 만남을 주선해 주시고 주관해 주신 분이 주님이셨던 것입니다. 이 엄청난 은혜를 2천 6백권의 책엔들 어찌 다 피력해낼수가 있겠습니까? 설령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는다 할지라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주님의 이 측량 불가능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10년의 임기를 마치고 약속대로 주님의 교회를, 여러분을 떠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사랑하기에,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주님이 주인 되시는 주님의 교회이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훼손치 않기 위하여 저는 떠납니다. 10년이란 세월은 한편으로는 짧기도 하지만, 그러나 한 인간의 영상이 깊이 새겨지고 우상화 되기에는 충분히 긴 세월입니다.―지금 이 교회의 곳곳에는 주님의 영상보다 이재철의 영상이 더 짙게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교회'하면 주님은 제쳐놓고 먼저 이재철 목사를 연상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오늘의 모습으로 있게 된 것이 마치 이재철의 역량인 듯, 이재철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고서는 주님께 감사드리려 하기보다는, 이재철에게 감사하려 합니다. 우리가 지난 10년간 그토록 애써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실정이라면, 우리 교회인들 어찌 조만간 인간의 교회로 전락치 않겠습니까?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하찮은 인간에 불과한 이재철의 말을 더 신뢰하려는 불상사가 어찌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제가 만약 제 자신의 인간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교인들을 거짓된 길로 인도하려 한다 할지라도, 절대 다수가 의심 없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 자신이 주님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의 불행일 뿐입니다. 인간이 주인된 교회를아무리 열심히 다닌다 할지라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날 곳은 공동묘지 이상 일수는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공동묘지 너머로 인도해 갈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기쁨으로 여러분들을 떠납니다. 하찮은 이재철이란 인간의 굴레와 한계로부터 여러분들을 해방시켜드리기 위하여 떠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주님에 의한 주님의 사람으로 더욱 든든히 세워 드리기 위하여 저는 떠나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을 떠나면서 주님을 믿는 한 인간으로서 고해 성사하는 심정으로 고백 드립니다. 지난 10년 동안 주님의 교회를 위해, 그리고 여러분들을 위하여 제가 한 것이라고는 단언하거니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약 제가 제 능력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였더라면, 이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의 교회로 이미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저는 단지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있어야 할 곳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친히 주님의교회를 오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꾸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100퍼센트 주님의 작품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저 자신이기에, 다음 주일부터 임영수 목사님께서 오시게 되었음을 누구보다 기뻐하지않을수 없습니다.

뉴질랜드에 갔을 때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별―남십자성이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같이 하늘이라 불리지만 한국에서 보는 하늘과 뉴질랜드의 하늘이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 쪽도 진정한 하늘 일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늘의 한 부분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늘 전체를 알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지금보고 알고 있는 하늘이 모두가 아니라는 자기부인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서는 이제부터 저를 잊으셔야합니다. 저를 기억한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목사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떠나버린 목사에게 집착한다는 것은, 한국에서 보이는 하늘만을 하늘이라 우기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임영수 목사님은 이 시대에 가장 영성이 깊은 목회자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부터 임영수 목사님을 통하여 이제껏 까지는 전혀 경험치 못했던 더 크신 주님을 바라보며, 부족함이 없는 더 크신 은혜를 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그 크신 은혜에 응답드리면서 매사에 투철한 말씀의 증인이 되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통해 주님의교회를 21세기를 향한 교회의 표본으로 더 아름답게 빛어가실 것이요, 주님의교회를 통하여 이 나라의 역사 속에 예수행전―당신의 새일을 펼쳐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웃으며 서로 작별을 고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헤어짐이 있는 곳에 주님과의 뜨거운 만남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전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43:18∼19a)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지난 10년동안 한결같은 은혜를 베푸시사 우리 모두 주님의 교회되는 감격을 맛보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주님의 은총이 늘 이곳에 함께하여 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저는 지난 10년 동안 주님의 명에 따라 이곳에서 주님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을 하다가, 이제 주님의 때가 되어 저의 손가락을 거두고 떠납니다. 지금 주님 앞에 머리 숙인 교우님들의 심령속에, 행여라도 주님보다 주님을 가리킨 제 손가락의 영상이 더 깊이 새겨져 있다면, 이 시간 주님의 보혈로 친히 씻어 주시고 지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혹 저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상처받은 영혼들이 있다면 이 죄인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고, 그 분들의 심령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다음 주일부터 말씀을 전하여 주실 임영수 목사님을 통하여 모든 교우님들이, 지난 10년 동안 예기치도 못했던 더 크신 주님, 더 부족함이 없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케 하옵소서. 그 은혜로 인하여 모든 교우님들이 더 더욱 말씀의 증인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날마다 말씀을 쫒아 사는 교우님들을 인하여, 지난 10년 동안의 주님의교회보다 앞으로의 주님의교회가 더 밝은 진리의 빛을 이 세상을 향해 발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주인 되신 주님의교회가 21세기 새 역사의 문을 여는 열쇠로 쓰임 받게 하여 주옵소서.

10년 동안 부족한 종에게 넉넉한 마음의 형님 되어 주었던 장로님들, 자상한 누님이었던 권사님들, 사랑하는 친구였던 교우님들, 혈육처럼 가까웠던 교역자들, 주님의교회를 위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을 마다치 않았던 모든 신실한 주님의 종들, 그리고 오늘 직분을 받는 임직자들이 부족함 없는 주님의 은총 속에서 다 예수행전의 도구들이 되어, 일평생토록 주님의 새 일을 이 땅에 이루어 가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아멘―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 설교말씀/1998. 6. 14/ 설 교 자 이 재 철

하신 것이 아니라(요한복음 21:18∼24)


 
몇 해전 집안에서 애완용 개를 키울 때입니다. 이 개가 오줌을 가리지를 못해 아무데나 싸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식구들이 무심코 지나가다가 개의 오줌을 밟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첫째 아이가 개오줌에 양말을 적시는 횟수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날도 무심결에 개오줌을 밟아 젖은 양말을 벗는 첫째 아이를 향해 제가 말했습니다.

`본래 마음씨가 착한 사람들이 개 오줌과 친하다더라'

그것은 순전히 속상해 하는 첫째 아이를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당시 유치원생이던 셋째 아이가 토라진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럼 우리 집에서 제가 제일 못됐단 말이예요?'

희안하게도 우리 집 식구 중에서 개오줌을 거의 밟지 않는 사람이 셋째였습니다. 용케도 개오줌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큰 형아가 마음씨가 착해 개오줌과 가깝다면, 개오줌을 거의 밟지 않는 자기는 제일 못됐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첫째 아이가 착하다고 했지 셋째 아이가 못됐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오줌에 또 양말을 적셔 속상해 하는 첫째를 위로하기 위함이었지 셋째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해프닝은 해프닝으로 끝났기에 망정이지, 만약 셋째 아이가 아빠의 중심을 계속 외면한 채, 우리 아빠는 나를 못된 아이 취급하고 날 제일 미워한다고 말하며 다닌다면 가족 관계가 얼마나 뒤틀려 지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콜라가 치아에 좋지 않다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사람의 치아를 콜라 속에 넣어 두면 몇 일 이내에 녹기 시작해 결국엔 형체도 없어져 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 아이들에게서 뽑아 낸 젖니로 콜라의 유해성을 아이들에게 직접 실험해 보이기로 했습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치아를 해친다는 콜라를 마시지 않도록 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동안 귀동냥으로 들었던 대로 유리컵 속에 콜라를 가득 붓고는 아이의 젖니를 그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젖니가 어떻게 삭아 없어지는지를 아이들과 함께 매일 관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흘 나흘은 물론이요 일주일 열흘 보름이 지나도 컵 속의 치아는 멀쩡하였습니다. 콜라를 새것으로 교체하여 한 달이 지나도 전혀 녹지 않았습니다. 50여일이 되어 썩은 콜라 위에 곰팡이가 끼이는 것을 보고서 실험을 중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콜라 속에 치아를 넣어 두면 형체도 없이 녹는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식품위생국(FDA)이 얼마나 까다로운 곳입니까? 전 미국인이 매일 즐겨 마시는 콜라가 정말 사람의 치아에 그토록 치명적이라면 식품위생국이 가만히 내버려둘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송사가 많은 나라가 미국입니다. 최근에는 흡연으로 인하여 건강을 해친 사람들의 집단소송에 의해 미국의 담배회사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의 배상금을 물어주고 있는 판입니다. 그러나 콜라로 인해 치아가 상했다며 콜라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그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날부터 도가 지나치지 않는 한 아이들이 콜라 마시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즐거이 마십니다. 콜라가 치아에 치명적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저가 직접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고 있거나 전하고 있는 말 가운데 진실과는 동떨어진 말, 전혀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무책임한 말들이 얼마나 많을지 모릅니다.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에서 가장 경계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중심에서 이탈하거나 진실에서 벗어난 공허한 말입니다. 공허한 말이 판을 친다는 것은 그 모임의 명칭과는 상관없이, 그것이 주님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인간의 모임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해 주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증거하고 이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요한복음이란 이름으로 이제껏 까지 증거된 내용들이 모두 진실 되고 참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요한복음이 성경 속에 포함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요한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호리만한 거짓도 없이 참된 증거인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 아니 4복음서의 마지막 결론장인 요한복음 21장의 마지막 단락은 도대체 어떤 사건으로 끝나고 있는지 본문 23절을 함께 살펴보십시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아니하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우리는 이것이 무슨 사건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 사건의 전개 과정이 어떠한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새벽이 소리 없이 동터오는 갈릴리 바닷가―그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시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양들을 구별 없이 치고 먹이는 구체적인 삶이어야 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은 원치 아니하는 때에 원치아니하는 장소에서 원치아니하는 방법으로 느닷없이 들이닥치게 될 죽음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며 살아가는 자에게만 가능함과, 결국 그와 같은 자의 삶과 죽음만이 하나님께 영광일 수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런 연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영광된 삶도 죽음도 불가능함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앞에 계신 주님을 향해 대답을 드리는 대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등뒤에 서 있는 요한을 발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을 가리키며 오히려 주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그때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여전히 주님보다는 사람을 더 의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제 곧 승천하실 주님께서 언젠가 재림하실 때까지 요한을 설령 남겨 둔다 할지라도 ―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법일 뿐이었습니다 ― 너와는 상관이 없으므로, 남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주님을 따르려 하지 말고, 절대 진리이신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대 주님의 이 말씀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형제들 사이에 엉뚱하게 와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형제들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교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의 교인들은 한 분이신 하나님아버지의 자녀란 의미에서 서로 형제 자매로 불렀습니다. 그때는 아직까지 신약성경이 확정되기 전이었는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교인들 사이에서는 엉뚱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나시던 새벽, 주님께서 요한사도에게 너는 죽지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거짓 소문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말미에서 교인들의 그릇된 인식을 분명하게 교정해 주고 있습니다.―`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요한복음 마지막장의 가장 마지막절인 25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한사도가 기록한 요한복음을 포함한 4복음서는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아니라, 추리고 추려진 결과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나 사건 중에서 의미 없거나 중요치 아니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4복음서의 마지막 단락에서 초대교회에 만연되어 있던 거짓 소문을 요한이 교정하는 것으로 4복음서의 막이 내리고 있음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 사도는 왜 이 사건을 복음서의 맨 뒤에 기록하므로 요한복음을 끝맺고 있습니까?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정말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자칫 중심과 진실에서 벗어난 공허한 말이 지배하는 추악한 인간의 집단, 건실해야 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뒤틀리는 균열의 시발점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초대교인들 사이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죽지 않겠다 말씀하셨다는 헛소문이 퍼졌을 때, 도대체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은 죽지 않을 것이라 믿는 요한을 마치 우상 섬기듯 하려 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눈앞에 있는 불사조 요한의 말을 더 중요시했을 것입니다. 요한이 아닌 다른 사도들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요한과 주님의 관계, 요한과 사람의 관계는 심각하게 뒤틀려 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떠나, 그릇되고 거짓된 공허한 말이 판을 치는 교회는 결코 주님의 교회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4복음서의 막을 내리면서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천명하고 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친히 요한 사도를 통하여 거짓 소문을 믿고 퍼트리는 교인들에게, 나는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질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가 끝나고 사도행전의 막이 오릅니다. 사도행전이란 곧 초대 교회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에 입각한 참되고 진실한 말을 하는자에 의해서만, 허물 많은 사람들의 모임이 진정한 주님의 교회일 수 있음을 본문은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저기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자신이 곧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교회의 수준은 저기 건축 중인 정신여고 강당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어지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가 주고받는 말에 의해 판가름납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요, 그리스도인들이란 진리이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기에 그들의 모든 말은 참되고 진실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입에서 매일 쉬임없이 발해지고 있는 그 숱한 말들은 얼마나 참되고 진실됩니까? 첫째 아이의 정직을 말하는 데 왜 자기를 못됐다고 하느냐는 셋째 아이 말처럼, 지극히 자기 중심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콜라 속에 치아를 넣어 두면 녹아 없어진다는 것처럼,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마치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본 것처럼 퍼트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본문 속의 교인들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거짓된 것을 믿고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참된 주님의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한평생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을 위한다고 열심히 말하며 살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너의 말은 모두 거짓되다고, 나는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주님에 의해 전면 부정 당한다면, 그보다 더 낭패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처럼 우리의 말을 늘 스스로 점검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본문 24절 상반절을 통해 요한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24a)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자신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장본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24b)

여기에서 `우리'란 좁게는 요한 자신을 포함한 초대교회의 교인들을 의미할 수도 있고, 넓게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요한복음을 읽게 될 모든 사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고 표현하므로써 요한이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모든 증언이 참됨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요한이 자신을 객관화시켜 자신의 참됨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4복음서의 마지막장인 요한복음 21장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주제―

즉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양들, 곧 주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 하나의 주제를 위해 요한복음 21장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요한복음 21장 마지막 단락은 자신을 객관화 시켜 스스로를 점검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기준으로 늘 자신을 객관화시키며 살아갈 때 요한의 모든 증언은 그릇되거나 거짓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십시다. 제3자의 입장에서 우리 자신을 사랑의 잣대로 냉정하게 평가해 보십시다. 우리는 정녕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 속에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참된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말은 참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 안에 거하는 자만 주님과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으며, 진리 안에 있는 우리의 말이 공허한 거짓으로 채워질래야 채워 질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참된 말을 하는 우리들로 인해 우리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주님의 교회는 더욱 든든해질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한 사진작가를 만났습니다. 카메라를 잡은지 10년이 넘었다는 그는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순발력을 절대로 요하는 스냅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말 훌륭한 작품은 필름의 양을 많이 쓴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피사체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얻어진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정말 아름답거나 감동적인 풍경을 접했을 때, 그는 함부로 셔터를 누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경우 사진은 십중팔구 실제의 풍경보다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같은 장소를 몇 번이나 찾아가, 그 풍경이 자신에게 하고자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했습니다. 때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은 가만히 만지면서 피사체의 숨결과 체온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피사체와 친밀한 일체감을 느끼게 될 때, 그는 완벽한 구도 완벽한 명암 완벽한 색상의 살아 있는 작품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사진작가와 피사체의 관계가 이러할진대, 하물며 사람과 주님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야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10년전 어린아이를 합쳐 50여명으로 시작된 `주님의교회'가 10년만에 우리의 자녀들을 포함하여 2천 6백 여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2천 6백명이야말로 서로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주님께서 한곳에 모아 주신 주님의 양들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주님의 양들인 우리 모두를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우리 서로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다. 영혼의 숨결을 느껴 보십시다.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의 영혼을 감싸 보십시다.

우리를 한 우리에 모아 주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모두 일체감을 느껴 보십시다. 그때 우리의 입 속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주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의 언어, 참된 말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요, 진리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인 까닭입니다. 그리고 거짓 없는 참된 말을 하는 우리 자신이야말로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 아니 우리 주님의 살아 있는, 참된 작품이 될 것입니다. 참된 말이야말로, 주님의 참된 작품됨의 참된 증거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요한처럼 중단 없이 자신을 객관화시키며 사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사랑하라 모아 주신 2천 6백 명의 교우들이 서로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법을 익혀가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우리가 주고받는 모든 말들이 참된 말이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의 말이 사람과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틀린 관계를 회복시키는 생명의 언어들이 되게 해 주소서.

말이 신뢰를 상실하여 총체적으로 불신의 사회가 된 이 시대에 참된 말을 행하므로 언어의 신뢰성을 되 세우는 자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살 것인지는 우리의 자유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일평생이 결정됨을 잊지 말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말을 하는 우리 자신이 바로 주님의 교회임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주님의 살아 있는 작품―곧 이 시대의 사도행전이 되게 해 주옵소서. - 아 멘 -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1998. 6. 7./ 설 교 자 이 재 철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18∼24)



 
뚜렷한 목적과 목표가 없을 때, 사람들은 그같은 행보를 가리켜 방랑 혹은 방황이라고 부릅니다. 방황의 시간이

길고 방랑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삶이 지치고 고달플 수밖에 없는 것은,목적과 목표를 상실한 삶 속에서는 생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는 삶의 반복은 생의 고갈에 지나지 않기에 그것은 고통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무릇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목표를

향한 삶만이 하루하루가 생의 보람으로 축적되게 됩니다. 그러나 뚜렷한 목표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뚜렷하되

바른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목표가 바르지 못할 때 보람을 느낄 수는 있으나, 아니 더 진한 보람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신과 자신 주위 사람의 파멸로 귀결되고 맙니다.
 

한 말단 세무 공무원의 아내가 삶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10년 이내에 10억원을 모아 큰 평수의 아파트에 대형

자가용차를 굴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겠다는 목표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녀의 인생 목적은 떼부자가 되는 것이였습니다.

분명한 기간에 금액까지 설정했으니 얼마나 뚜렷하고 야무진 목표입니까?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가 행상이라도 하면서 돈을 모우려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의존했던 것은 말단 세무 공무원인 남편이 관내 업체로부터 받아 오는 부정한 뇌물이었습니다.

그녀는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이 받아 오는 뇌물을 꼬박 꼬박 가계부에 기재하였고, 그 액수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많자 자신의 목표를 앞당겨 이룰 수 있겠다는 감격의 글귀를 가계부에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날마다 기대

이상의 돈을 모아 가는 그 여인의 삶이 얼마나 보람스러웠겠습니까? 매일 매일 뿌듯하기 그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한 뇌물 위에 세워진 그녀의 인생 목표는 분명하기는 했을망정 바른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변명의 여지없이

그릇된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그릇된 목표는 삽시간에 자신의 가정을 파멸시키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부패공무원

자신은 범죄자의 아내, 그들의 자식은 부끄러운 탐관오리의 자식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일이 터지자 그녀는

이렇게 항변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어떻게 우리만의 일이냐고,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우리만

억울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참됨과 그릇됨은 결코 다수결에 의해 판가름되지 않습니다. 참됨과 그릇됨은 어떤

경우에라도 절대적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릇된 것은 오늘 흥하는 것 같으나 반드시 그 자체로 썩어 소멸될 뿐이고,

참된 것은 연한 순처럼 이내 이지러질 것 같으나 필경 굳게 영글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참된 의미와 보람을

갖기 위해서는 분명할 뿐만 아니라 바른 목표를 지녀야만 합니다. 설령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욕망에 사로잡혀 그릇된

목표를 당연한 듯 추구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와 같은 시류에 휩쓸림 없이 바른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 가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공허하게 헛 그물질만 하던 갈릴리 바다―그러나 이제 새벽이 동터 오는 그 바닷가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한다 함은 주님의 양들을 구별 없이 치고 먹이는 구체적인 삶이어야 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은 원치 않는 때에 원치 않는 장소에서 원치 않는 방법으로 느닷없이 찾아오게 될

죽음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며 살아가는 자에게만 가능함과, 결국 그런 자의 삶과 죽음만이 하나님께 영광 일수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런 연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3년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뵙던 날, 주님께서는 그날도 베드로에게 주님을 따라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베드로는 배와 그물은 물론이요 가정까지 버려둔채 3년 동안이나 밤낮으로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도 3년이나 지난 지금 왜 주님께서는 또다시 `나를 따르라'고 새삼스럽게 명령하고 계십니까?

베드로가 지난 3년동안 주님과 동행했던 동인은 베드로의 욕망이었습니다. 자신의 두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주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3년동안 베드로의 몸은 비록 주님을 따라다녔을

망정, 그의 마음은 반대로 주님을 이리저리 멋대로 끌고 다니려 하였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생각과 상반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함부러 꾸짖는가 하면(마 16:22), 예수님 앞에서 누가 더 높은지를 놓고 제자들과 버릇없이 다투기도

하였고(눅 22:24), 또 예수님을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난 밤만 할지라도 주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밤새도록 헛그물질을 해대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도저히 제자의 행동거지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에

대하여 스스로를 주인이요 스승으로 착각한 어이없는 짓거리였습니다. 지난 3년간 베드로의 몸이 주님을 따라 다녔지만

그 삶이 참될 수도, 진실될수도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지금, 복음서의 마지막 장 마지막 단락에서 다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냥 `나를 따르라'고 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신 후,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해 두팔을 벌려 항복하고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 중심이 진리이신 주님을 따를 때에만 그 삶이 진리안에서 참되고 바르게 가꾸어질 수

있음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었는지를 본문 20절∼21절이 이렇게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20∼21)
 

여기에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란 이미 아는바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중 사도 요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은 베드로는 앞에 계신 주님께 대답을 드리는 대신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등뒤에 있는 동료 요한을 발견하고는 주님을 향하여 도리어 질문을 던졌습니다.―`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이 질문이야말로 주님의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일종의 항변이었습니다.― `왜 제게만 주님을

따르라 명령하십니까?' `왜 요한에게는 두팔을 벌려 주님께 항복하고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라 명령치 않으십니까?

' `보십시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적당히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저만입니까?

베드로의 이 항변에 대하여 본문 22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2)
 

베드로의 항변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지극히 간단했습니다. 즉 주님께서 요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시건 그것은

베드로와는 아무른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가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주님께 등을 돌린다 할지라도 너는 절대적으로 진리 되신

주님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진리의 절대성 자체가 어떤 경우이든 상대화될 수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이 이후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우리는 먼저 사도행전을 통하여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로 태어나

마흔 살이 되기까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거지가 베드로에 의해 주님의 이름으로 치유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에 귀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한데 모여, 사도들에게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어떤 일도

행치 말 것을 엄하게 명하였습니다. 만일 어길 경우 생명이 온전치 못할 것이라 위협하면서 말입니다. 수적으로는

대제사장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적어도 다수결 원칙에 의한다면 사도들은 대제사장 측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명령을 다음과 같이 일축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것보다 옳은가 판단 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사도행전의 막이 오름과 동시에 이미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진리이신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니 만약 베드로가 절대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추구하지 않았던들, 베드로가 사도행전의

서막을 여는 주역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19절 ∼21절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다가 설령 그로 인해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진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조금도 개의치 않는 반석과도 같은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외경속에서는 말년의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정경인 성경 속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복음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서들을 따로 엮어 외경이라 부르는데, 그 외경의 베드로행전은 베드로의 말년의 모습을

전해주고있습니다. 폭군 네로에 의한 기독교 대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베드로 역시 로마에 있었습니다. 로마 당국이

당시 기독교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베드로의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로마를 떠나

피신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변장을 한 뒤에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베드로

행전 35장이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문에 다다렀을때에 베드로는 주님께서 로마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단다.' 베드로가 주님께 또 물었습니다.―주여, 주님께서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작정이란

말입니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그렇단다. 베드로야, 내가 또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구나.'

그때 베드로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크게 기뻐하며 주님을 찬미하면서 로마로 되돌아갔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베드로 자신에게 일어나야 할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를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진리를 증거 하는 것만이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임을 깨닫는 즉시 베드로는

로마로부터 도망치던 길에서 돌아서 로마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임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에게 있어

그 길은 절대적인 길임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 생케비치가 쓴 소설이 그 유명한

`쿼바디스'입니다.
 

이상에서 살핀 사도행전과 베드로전서 그리고 외경의 베드로행전은 무엇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까? 그 동안 상대적으로

주님을 따랐던 베드로가, 새벽이 동터 오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기 시작한 이래 중년을 거쳐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그 삶이 흔들림 없이 지속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를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진리는 상대화 할 수 없고 절대적으로 수용해야 함을 바르게 안 이상, 일평생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그의 삶의 목적과 목표는 추호도 흔들릴 수 없었습니다.
 

이천년전 구라파와 중동 그리고 북부 아프리카까지 지배하던 거대한 로마제국에 비한다면,당시 베드로란 존재와 그가

행한 일이란 미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소멸되지 않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욱

공고해짐은, 이천년전 그의 목표가 어떤 경우에도 주님만 따르는 참되고 바른 목표―절대적인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돈이나 권력을 목표로 했다면 그의 삶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에게 돈이나

물질이 필요했다면 그것이 목적이거나 목표여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주님을 따르기 위한 도구로 삼기 위함이

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바른 목적과 목표가 있다면, 생의 전반에 걸쳐 주님만 따르는 절대적인 삶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모두를 향하여, 세상 사람이 다 그릇 되이 산다 할지라도 `너는 나를 따르라'고

절대적으로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절대적으로 명령하시는 까닭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절대 진리를 절대목표를 삼는 삶만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살아 남기에, 그 영원한 삶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문자 그대로 맨손으로 상경하여 15년 동안 엄청난 돈을 벌었던 교우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돈을 버는 비결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검은 돈을 조성하여 어디에 얼마를 뿌리면 얼마만큼의 돈이 들어온다는 확실한

공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돈을 벌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치부 방법을

나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세상 사람이 다 그런 식으로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진리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의 잣대로 자신을

재어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불의하고 거짓된 방법으로 치부한 자신의 모습이야말로 진리의 거울 속에서 도둑으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돈을 번다는 것은 돈을 벌면 벌수록 점점 더 지옥에 가까워지는 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 자체를 목표로 삼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황금같은 15년을 허망한 욕망으로

인해 죄와 맞바꾸었다는 사실을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부터 삶의 목표를 바꾸었습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불의하게 돈을 벌던 방법을 완전히 청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매출은 ¼까지 떨어졌습니다. 정직하게 회사를 경영함으로 인하여 매출이 무려 75%나

감소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라진 75%를 아쉬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살고도 남아있는

25%에 만족하였습니다. 하루는 중역이 그에게 간곡히 당부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같이 총체적으로 부패한 사회

속에서 큰돈을 벌려면 어쩔 수 없으니 옛날 방식대로 사업하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

하였습니다. 설령 억만금을 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된 그가 예전 도둑으로 되돌아갈 수는 절대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두(冒頭)에 부정한 뇌물을 받아 떼부자가 될 목표를 갖고 있던 말단 세무 공무원 부부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말단 공무원이 불과 몇 년만에 몇억원을 치부한 그 사건이 터졌을 때 세상의 여론은 그 부부를 도둑 다루듯

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사실 도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삶을 목표로 갖지않는한, 그 도둑 같은 부부와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보시기에는 다 똑같은 도둑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중

제8계명을 통하여 `도적질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이미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전과자들에게만 국한된

계명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삶의 목표로 삼지 않는 우리 모두를 향한 명령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도적처럼 살라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도둑의 삶을 청산하고 절대

진리를 목표로 하는 새 사람으로 살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되이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된 우리는 진리를 절대적으로 따르기를 포기치 맙시다. 절대 진리를 목표로 삼는 참된 그리스도인

10명만 있으면 세계의 역사가 새로워질 수 있음이 이미 2천년에 증명되었음을 상기하며 용기를 가집시다. 거짓과

타협하는 불의한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털어서 먼지 않나는 사람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털어서 먼지 날 수 밖에 없는 옷이난 물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격과 양심을 갖춘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털어서

먼지 않나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장본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그 동안 주님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을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되이 살고있음으로인해 우리의

거짓된 삶을 정당화시켜 왔습니다. 그 결과 도적처럼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도적이라는 사실을 자각치도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었습니다.

주님! 나는 요행히도 아직 수갑만 차지 않았을 뿐, 내가 바로 도적이었음을 이 시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도적

같은 나로 인해 대한민국이란 이 사회가 이처럼 총체적으로 부패한 사회가 되었음을 회개 드립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식들 역시 이 부패한 사회속에서 우리처럼 거짓되고 불의한 방법으로 살기를 진정코 원치 않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우리 삶의 목표가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절대 진리를 변함없는 목표로 삼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옵소서.

그리스도인된 우리로 인해 이제 이 사회가 맑아지게 도와주시옵소서.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불의하게 모은 재산이 아니라, 절대 진리 되신 주님을 따른 바른 믿음의 삶뿐임을

기억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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