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열심 설교자 이재철

말씀: 이사야 9 : 1∼7


방글라데쉬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최빈국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곳의 가난은 우리와는 개념 자체가 틀리다고 합니다. 그 곳 사람들의 거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 재산이란, 대개 식구의 수와는 상관없이 입고 있는 단벌 옷과 그릇 두 개가 고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으면 시도 때도 없이 굶기를 다반사로 한답니다. 온 국민의 태반이 그런 정도라니 실로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사람이 생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있기 마련인데, 국민의 태반이 그 기본적인 것조차 갖추고 있지를 못한다면 그것은 가난보다 더 비참한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비참한 땅에서 오랫동안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하던 중 안식년을 맞아 귀국해 있는 동안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음 주초 다시 방글라데쉬 선교지로 출발하게 된 권병희·장성희 선교사님 부부와 식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장성희 선교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워낙 아무것도 없는 방글라데쉬에서 오래 살다가 한국에 오니 모든 것들이 너무도 풍요로왔답니다. 방글라데쉬에서는 먹을 엄두도 낼 수 없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입을 수 없는 옷을 입을 수도 있었고, 감히 누릴 수 없는 문화 생활을 향유할 수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어느 날 불현듯 자신도 몰래 자신의 신앙이 퇴보하고 있음을 느꼈답니다. 방글라데쉬에서는 아예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밖에 없었고, 매일 하나님과 대면하다 보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적인 삶이 중단없이 지속될 수 있었답니다. 그러나 한국에 나와서는 모든 것이 풍족하기에 하나님께 애써 구하지 아니하여도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기에 매일 애절하게 하나님과 대면할 필요가 없었고, 그와 같은 삶은 신앙의 낙후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처럼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무렵, 그 분은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갖고 또 갖추고 있는 여성도님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는 모습의 발견이었습니다. 방글라데쉬에 비해 조금 삶의 여유가 생겼다고 자신의 신앙은 퇴보하고 있는데, 자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유여한 삶을 사는 여성도님들이 교회의 구석구석에서 소리 없이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분은 이런 질문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분들로 하여금 저토록 신실한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게 했을까?'

그것은 그 분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의 질문에 대하여 저는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신약 성경 에베소서 2장 8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는 본래 예수님을 믿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돌로 쳐죽이는 일에 앞장서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처럼 불한당과도 같던 바울이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전혀 바울의 노력이나 애씀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바울은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또 그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위하여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그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그 선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보답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란 이것이 단지 바울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실은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참되고 영원한 삶이 있을 수 없음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을 본받아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이 삶의 여정에 어떻게 나서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나 아닌 타인을 생각하며 봉사와 헌신의 길에 기꺼이 나가아게 되었습니까? 우리 노력의 결과였습니까?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우리가 아직 죄와 죽음 가운데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셨던 선물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열심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성취된 일이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이미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면서 예수님을 본문 6절을 통하여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여기에서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것은 통치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통치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사야는 예수님을 네가지의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첫째 `기묘자라 모사라'고 불렀습니다. 원문을 영어로 옮기면 `Wonderful Counselor'란 말이 됩니다. `위대한 교사' 혹은 `놀라운 상담자'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만백성의 통치자시되 자기 마음대로 백성을 억압하고 호도하는 세상의 통치자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야 말로 인간에게 참 생명의 도를 일깨워 주시는 위대한 교사요, 우리의 모든 하소연을 듣고, 우리에게 언제나 바른 해답을 제시해 주는 놀라운 상담자시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사야는 예수님을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 불렀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곧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셨던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고, 장애물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호칭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영원한 생명의 아버지시기에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자 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호칭은 `평강의 왕'이었습니다. 그 분은 이 세상의 통치자시되 칼과 창으로 세상의 평화를 깨트리는 파괴자가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던져 인간을 섬기므로 이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평강, 어떤 경우에도 깨어지지 않는 절대적 평강을 주시는 평강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가 예수님에 대하여 행하였던 이 예언들은 한낱 이사야의 착각이나 망상에 불과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700년 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 이사야의 예언은 단 한마디도 거짓되지 않았음이 예수님의 삶에 의하여 모두 증명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바른 길과 해답을 얻고, 그 분의 전능하신 능력에 힘입어 세상을 이기며, 그 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을 누리고 절대적 평강을 구가할 수 있음은, 그분이야말로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오,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같은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하잘 것 없는 인간들에게 오시어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동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7절이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당신의 평강과 공평과 정의로 당신의 나라를 일구어 가실 터인데, 그 모든 동인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되신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노력했기 때문에 구원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의 열심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우리의 열성으로 인해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자가 되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열성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스라엘 갈릴리 주변에 사는 자들은 다 찢어지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불쌍한 빈민들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들과 더불어 사시면서 그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시어 영화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의로왔고 진리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흑암 속에 행하고 사망의 그늘 속에 살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당신의 열성으로 그 땅에 임하시사 당신의 생명으로 그들을 살리시고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갈릴리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그리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 속에서 살던 갈릴리 사람들이란 죄중에서 죽어가던 우리 자신들을 의미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우리에게 생명의 빛, 구원의 빛, 진리의 빛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음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오늘, 성탄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 근거하여 성탄절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성탄절이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살리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의 열심을 만나는 날입니다. 지금도 나를 위해 전능하신 당신의 능력으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재확인하는 날입니다. 오늘 내가 이런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전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의 결과임을 알아 하나님의 그 열심에 깊은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 뜻하지 아니한 고통과 고난 속에 있다면, 그 고난의 풀무속에서 나를 정금같이 새로이 빚으시기 위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믿고 다시 일어서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열심에 우리의 열심으로 보답하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탄절이 없어서는 안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날이 있기에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심령속에 각인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저녁 찬양 예배 시간에 음악부에서 주관하는 `성탄축하 열린 음악회'가 열렸었습니다. 몇 주전부터 음악회 당일 주최측에서 제게 노래를 시킬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여러 경로를 통하여 그 계획을 철회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노래 부르는 은사는 주시지 않았음을 제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임기가 내년 6월이면 끝나는 관계로 이번 성탄절이 저의 입장으로 보면 성도님들과 맞는 마지막 성탄절이라는 이유로 제 요청은 거절되었고, 마침내 그 날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노래를 다 부르고 앉았던 자리로 되돌아가자 제 곁에 앉아 있던 첫째와 둘째 아이들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아이들이 들어오더니 둘째가 저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아빤 왜 박자와 음정 그리고 가사를 아무렇게나 불러요?'

제가 물었습니다.

`너희들 어디 갔다 왔냐?'

그때 둘째가 대답한 내용을 아이의 용어 그대로 옮기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빠가 노래를 너무 못 부르시는 통에 쪽이 팔려서 화장실에 갔다 왔어요.'

제 노래가 시작되자 마자 음치 아빠의 노래가 너무 창피해서 혹시 누군가 자기들을 알아 볼까 봐 외투를 뒤집어쓰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답니다. 그런데도 아빠의 음치 노래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도저히 쪽이 팔려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 둘이서 함께 화장실에 가서 숨어 있다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말을 들으니 저보다 더 음치였던 선친 기억이 났습니다. 지독히도 음치였던 선친과 저 사이에 다른점이 있다면 저는 가능한한 공식석상에서 노래 부르기를 꺼려하는 반면, 선친께서는 기분만 나면 어디서나 노래 부르기를 마다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친께서 공개 석상에서 노래를 부르실 때면 괜히 제가 부끄러워 얼굴이 싯뻘게지곤 했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 아이들이 제 노래 때문에 쪽이 팔려서 화장실에 가서 숨은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 노래 실력을 가지고 어디서나 노래를 부르려고 열심을 낸다면, 제가 노래 열심을 내면 낼수록 아이들은 더 쪽팔려 하고 말 것은 불을 보 듯 뻔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부모는 자식들을 얼마든지 부끄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부모가 열심을 내면 낼수록 자식들이 더 낭패스러워하고 더 망신스러워 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세상의 부모는 모두 유한하고 부족하고 허물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열심은 결코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열심이 특심하실수록 우리는 더 큰 능력, 더 큰 평화, 더 큰 생명의 빛 속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당신의 열심을 다해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께서는 `위대한 교사'시오, `놀라운 상담자'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오,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뜻깊은 성탄절을 맞이하여 당신의 열심을 다해 우리를 찾아 오시고 당신의 열심히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이 열심을 만나는 자들이 되십시다. 우리가 불의와 거짓속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IMF라는 산타를 보내시사 우리를 진리위에 바로 세우고 계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깨닫는 자들이 되십시다. 작금의 경제적 한파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열심을 다해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 하시고 우리를 정금같이 제련시키고 계심을 믿읍시다. 하나님의 열심속에 거하는 한 넘어져도 망하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의 열심속에 있는자의 넘어짐은 새로운 일어섬의 시작임을 확신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우리모두 하나님의 열심에 힘입어 다시 굳건하게 일어나 진리를 향한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열심에 응답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열심 속에 거하는 한 우리의 가정과 일터, 이 사회에는 소망의 빛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려 함이 아니라 영화롭게 살리시고 바로 세워 주시기 위해 당신의 열심을 다해 이 땅에 우리를 찾아와 주신 예수 그리스도시오, 그 변함없는 열심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흑암에 행하고 사망의 그늘 속에 거하던 우리를 오직 주님의 열심으로 찾아 와 주셨음을 감사 드립니다. 주님의 열심을 다해 진리를 아는 영화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해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이 경제적 한파를 도구 삼아 우리를 보다 완전한 정금이 되게끔 열심히 제련해 주고 계심을 감사합니다. 귀한 이 성탄절 아침, 주님의 이 열심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확인시켜 주셔서 더더욱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 열심에 진리를 향한 우리의 열심으로 응답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님의 소망과 평강이 넘쳐나게 하시며,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일터와 더불어 우리의 사회가 주님의 빛 가운데에 바로 그리고 굳건하게 세워지게 해 주시옵소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반드시 이 일을 이루실 것을 믿고 열심히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 아멘 ―

넣어보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24∼29


안녕하십니까?

22구역 강은애입니다. 하루는 남편이 구역장 공부를 마치고 와서 20만원 수표를 내보이면서, 교회에서 달란트를 주었는데 무얼해서 남기지?" 하는 거예요. 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름치마 장사나 할까?" 했지요. 저는 정식으로 배운 일은 없지만 취미 삼아 제 옷을 만들어 입곤 해서 주름치마 정도 만드는 것은 자신이 있었거든요.

구역 식구들과 의논한 결과 저는 생산을 담당 하고 다른 여집사님들은 보조, 남자 집사님들은 어느 한날을 잡아 양재역 부근에 좌판을 벌리고 판매를 담당하자고 했습니다.

우선 20만원을 가지고 중고 오바로크 기계를 15만원에 구입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재봉틀밖에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바로크 기계가 필요했던 거지요.

그 다음은 동대문 광장 시장 단골 가게에서 자투리 천을 샀습니다. 한벌 만드는 재료비가 15,000원 들었습니다. 판매가를 3만원으로 잡고 우선 샘플로 제 옷을 해 입고 나타났더니, 그때부터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 집사님들의 좌판 장사 꿈은 사라지고 곧 바로 주문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5월부터 7월까지 150벌, 이익금은 225만원이었습니다. 구역 집사님들이 오셔서 일손을 도와 주셨지만, 서로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집사님들은 다른 사업을 하기로 하고 각기 사는 아파트에서 티셔츠 장사를 해서 남긴 이익금이 27만원, 1학기 마치기 전에 총 이익금이 252만원이 되었습니다. 8월 한 달은 너무 덥기도 하고 힘들기도 해서 쉬었습니다. 한 달을 쉬면서 제 마음에는 갈등이 일었습니다. `이만큼 했으면 됐지'하는 마음과 `아니야, 이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닌데……'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300만원은 채워야 하겠다는 욕심이 생겨 이번에는 긴팔 블라우스와 주름치마 몇 벌만 주문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총 수익금이 280만 2천원, 원금까지 합쳐 300만 2천원이 되었습니다. 일 등을 하려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등수와는 관계없이 그저 주문에 맞추느라 열심히 바느질만 했는데 일등이 됐더군요.

그 동안 백화점에 보내시지 않고 주로 도매시장으로만 보내며 훈련시키시더니, 이번에 달란트 훈련을 별 어려움 없이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 한 분 한 분에게 어울릴 만한 천을 고르고 옷을 만들면서 형편과 사정은 잘 모르지만,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도 제게는 큰 은혜였습니다. 전문가도 아닌 저를 믿고 옷을 구입해서 예쁘게 입어 주신 분들께도 감사한 마음이구요. 구역 식구들과도 시장을 같이 다니고 바느질을 함께 하며 남다른 정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이 일을 다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보너스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바느질하느라 엉망이던 집안을 잘 참고 견뎌 준 남편에게 주신 병 치료의 역사입니다. 작년 말부터 성대에 혹이 생겨서 3월에 수술을 했는데, 5월 - 바느질로 한창 바쁠 때 재발이 된 것입니다.

아나운서 직업의 생명인 성대에 고장이 생겨,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걱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재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다니는데 수술 날짜가 자꾸 지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화장품 회사를 경영하시는 권사님께서 자신의 회사 화장품 원료로 사용하는 천연 물질을 먹어 보라고 하시면서 한 병을 주셨어요. 이것을 먹으면서도 될 수 있으면 빨리 수술을 끝내려는 마음으로 구로 고대병원, 이대 목동병원을 거쳐 영동 세브란스까지 왔는데, 수술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니까 기다려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정상 근무를 못하고 있는 상태라 답답해했지만, 저는 수술 안하고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리란 확신이 들더군요.

그래서 모든 걱정 접어 두고 열심히 바느질만 했습니다. 그런데 바느질이 다 끝난 후 10월 23일, 마지막 검진 결과 혹이 다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저에게 직장을 주셨습니다. 25년간 묵혀 두었던 양호교사 자격증을 쓰게 된 것입니다. 물론 임시직이긴 하지만 전혀 새로운 기분으로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고등학교 양호실의 아늑한 공간에서 성경 말씀을 많이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바느질하느라 소홀히 했던 말씀을, 하나님이 주신 그 공간에서 열심히 읽어 지난 주말까지 통독할 수 있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는데 중간에 꾀를 피웠던 것입니다.

이번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믿고 맡겨 주신 많은 달란트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양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실하게 그 일을 감당했느냐를 물으실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삶을 낭비하는 일없이 신실하게 살아감으로 이다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하는 칭찬을 듣기 위해 노력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12구역 구역장 윤좌원 집사입니다. 달란트 훈련을 위해 준비된 하얀 봉투를 받는 순간부터 저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아닌,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려는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조건이란 바로 나 자신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속으론 우상화 시켜 놓은 "교만" - 그것이었습니다. 안내 1부장과 중등부 부장에 구역장, 그것도 매년 1∼3등 안에 드는 구역장인데, 달란트 훈련 과정 정도야 졸업한 셈 아닌가? 그리고 성경 말씀을 앞세우고 선한 우리 교인들에게 이런 일까지 시키시다니, 목사님도 잘못 생각하실 때가 있구나 - 그렇게 생각한 채로 그 봉투는 받는 순간부터 검은 제 가방 속에 집어 넣어진 채 6개월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구역 식구들이 여러번 걱정을 할 때에 저는, "구역 공부만 열심히 하십시다" 하고 무시했었습니다.

어느 주간 구역공부 때는 여호수아의 유언에 대해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광야에서 그렇게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아름다운 땅 가나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을 때 그들에게 3번씩이나 부탁하였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아니하면 이 아름다운 땅에서 쉽게 멸망할 것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던 저야말로 나 자신을 우상화해 가고 있었던 것을 저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뻔뻔하게 6개월을 보내고 달란트 열매들을 교회 앞에 돌려 드리는 시간이 다가 왔습니다. 저도 태연하게 곱게 넣어 두었던 봉투를 돌려 드리려고 목사님 한 분에게 갔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시간 그 목사님은 어느 교인 한 분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급한 성격대로 5분여를 못 기다리고 구역 공부하는 방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 주에 다시 그 봉투를 돌려 드리려고 가방에서 찾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봉투가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설마 설마 했으나 결국 그 봉투는 나타나지 않았고, 저는 억울한 마음으로 제 봉급에서 그 돈을 돌려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저에게 주신 1달란트를 뺏어 가신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 돈이 아까운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 어느 순간부터 제 마음은 두려운 마음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그냥 이야기로만 생각했는데 나에게 그런 일이 직접 일어나다니…….

그러다가 제 마음은 공포로 변해 갔습니다. 성경에 있는 그 숱한 하나님의 약속, 경고 그리고 주님의 비유들이 모두 다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1달란트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있는 다른 달란트도 하나님께서 다 뺏어 가실수도 있다는 얘긴데, 만약 내 회사의 직위, 내 집, 내 사랑하는 가족들 마저 빼앗아 가신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며칠 동안 저는 성경을 쳐다보기도 두렵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더 무서웠습니다. 아직도 죄악 가운데 저는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중 어느 날, 불현듯 희망의 빛이 조금 비치는 듯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에게서 한 달란트를 뺏어 가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 역사하시는 것이고, 그 사실이 나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며 역사 하고 계신다는 말이겠구나.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뺏어 가시는 일만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 나에게 이미 주신 다른 달란트를 잘 쓰기만 하면 더 주시기도 하시겠구나. 아니 또 다른 달란트를 새로 주실지도 모른다. 겨우 한 달란트를 뺏어 가심으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귀한 진리를 나로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구나.'

그 이후로 지금까지 저는 두렵고 무서운 생각은 깨끗이 지워버리고 저에게 주신 달란트를 절대로 뺏아기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와, 또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달란트를 맡겨주실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찬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말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지난봄부터 10월말까지 우리 교회에서는 `구역별 달란트 훈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써 우리가 과연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자신을 성찰하고 또 재정립하기 위해,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해 보는 훈련이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두분의 간증을 방금 들어보았습니다. 한분의 간증은 가장 많은 열매를 거든 구역의 간증이고 나머지 한분의 간증은 전혀 열매 맺지 못한 구역의 이야기이기에 두 분의 간증은 전혀 상반된 내용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강은애 집사님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달란트를 조금이라도 더 잘 갈무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방송인인 남편의 고장난 성대를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무려 25년 전에 받아 두었던 양호교사 자격증을 활용할 수 있는 귀한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결코 멀리 게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양호교사 자격증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잊지 않고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적절하게 고치시고, 또 활용할 수 있도록 반드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윤좌원 집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과 명분에 의거하여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구역식구들이 `달란트 훈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결과적으로는 봉쇄해 버린 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맡겨진 달란트의 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운이 나빠 잃어버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와 같은 악하고 게으른 종의 것을 하나님께서 빼앗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보고 계시는 분이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실은, 나는 언제나 하나님의 존전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두 집사님의 간증은 외양상으로는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그 핵심은 동일한 것입니다. 따라서 남긴 달란트의 양에 상관없이 이번 `달란트 훈련'을 통하여 우리가 두분처럼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나와 언제나 동행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확인하고 경험했다면, 이번 `달란트 훈련'은 대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변화요, 진정한 변화는 바로 이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감사도, 순종도, 자기 부인도, 성숙도 오직 여기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셨건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한 채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문들을 걸어 잠군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 한심한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친히 찾아오시어 당신의 부활을 직접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그 감격적인 순간에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만은 그 현장에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타난 도마를 향하여 제자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그러나 도마는 제자들의 말을 선뜻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그것도 시신이 무덤 속에 장사 지낸 바 된지 사흘이나 지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b)

 

주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직접적 사인(死因)이었던 못자국과 창자국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그 자국에 넣어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결코 믿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아직 뵙지 못했던 도마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밖에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도마가 이 말을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도마는 그렇게 말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 곳에 있는 도마를 발견한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다가가 당신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친히 보여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27a)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마가 그 말을 할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도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주장했는지, 무엇을 요구했는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도마가 원했던 대로 도마의 눈앞에 당신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도마로 하여금 손가락을 넣어 확인해 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손가락을 내밀어 주님의 상처자국에 넣어 보았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도마는 새삼스레 자신의 손가락을 주님의 상처 자국에 넣어 볼 이유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언행을,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미 다 알고 계시면서 자신이 요구한 상처자국을 보여 주시는 분이라면 그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시오, 성자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처럼 언제나 자기 곁에 계시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주님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의심많던 도마는 위대한 사도, 다시말해 진정한 감사와 순종 그리고 자기 부인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성숙하게 변화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나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주체는 언제나 나 자신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인을 한 사람만 선택하라면 우리는 주저없이 다윗을 택할 수 있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족보를 통하여 오실 만큼,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신앙인 중의 신앙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그처럼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을 그 자신의 고백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직접 지은 시편 139편 1절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여기에서 `감찰한다'는 동사는 탄광에서 사용되는 단어로써, 채광 작업을 할 때 행하여지는 정밀 작업을 의미합니다. 밖에서 보는 사람은 광산 속에 무엇이 정확하게 얼마나 매장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갱도 속으로 들어가 정밀 조사를 하는 자는 그 깊은 속까지 샅샅이 알게 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깊은 곳까지 낱낱이 살피시고 알고 계시는 분이심을 다윗은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아신다'는 단어는 동거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어디를 가든 자기와 함께 동거하시며 자기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고백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2∼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 자신의 모든 생각, 자신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입밖으로 아직 발설되지 않고 혀끝에서 맴돌고 있는 말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심을 다윗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나의 깊은 곳까지 감찰하시며 언제 어디서나 나와 동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다윗이 확연히 알고 믿었을 때, 한순간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이는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던 다윗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날로 날로 하나님 앞에서 성숙하게 변화 되어 갈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계셔도, 다윗이 자신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거나 알려하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는 대사건이었습니다.

 

 

 

지난 목요일(97. 12. 18) 우리나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이기에, 야당의 집권은 갑자기 야기된 IMF사태와 더불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를 예견케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를 열망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우려하는 사람들 역시 상당수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민주사회의 발전이란 관점에서 볼 때, 여야간의 정권교체란 필수적인 것이기에 이와 같은 변화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임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런 외적 변화가 아니라, 당연히 수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미동도 않는 우리의 내적 변화입니다. 내적 변화가 없다는 것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아직까지 믿지 못하고 살아가는 증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우리의 삶이 바로 세워질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열흘만 지나면 또 한 해가 사라집니다. 이 한해를 뒤돌아보건대 연초에 비하여 우리는 얼마나 변화되었습니까? 우리 각자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면 그리고 없다면, 이 사회에 아무리 외적 변화의 바람이 몰아 닥쳐도 이 사회가 본질적으로 변화될수는 없습니다. 이 사회의 본질은 정당이나 체제 혹은 제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인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은 25년전 양호교사 자격증을 땄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것을 활용케 하신 강은애 집사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계십니까? 윤좌원 집사님과 함께 하시면서 집사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아시고, 그의 잘못된 삶을 바르게 교정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 있습니까? 다윗의 깊은 곳까지 감찰하시고 다윗의 혀 끝에 맴도는 말까지 알아들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대강절 네째 주일을 맞이하여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그 분 앞에서, 그 분을 힘입어, 그 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다가오는 외적 변화를 두려워함이 없이 우리 자신이 내적으로 변화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도마처럼, 다윗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우리 삶의 키를 온전히 맡겨 드립시다. 그 분으로 하여금 우리 인생의 선장이 되게 하십시다. 그때 1998년은 이 사회가 본질적으로 새로워지는 진정한 새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나의 깊은 곳까지 감찰하시고 언제나 나와 동거하시는 주님. 주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 날마다 변화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이 사회의 본질이기에 우리가 변화되는 만큼만 이 사회의 본질이 변화됨을 잊지 않게 해 주옵소서. 도마와 다윗이 내적으로 변화되므로 그 시대가 새로워 졌던 것처럼, 외적 변화를 두려워함이 없이 우리 자신이 먼저 본질적으로 변화되므로, 1998년이 이 사회가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진정한 새해로 다가오게 해 주옵소서. 나의 변화를 가능케 해주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늘 기억하게 하옵소서.

― 아멘 ―

믿는자가 되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24∼29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공포에 사로잡힌 채 문들을 꼭꼭 걸어 잠근 다락방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셨건만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그때가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가련한 제자들이 벌벌 떨고 있는 다락방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찾아 오셨습니다. `당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친히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왠 까닭인지 그 역사적인 순간에 예수님의 제자중 도마만은 그 현장에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타난 도마를 향하여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이것은 그저 한 번 만나 뵈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말해 `주님의 부활'을 확인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증언을 들은 도마는 25절 하반절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b)

 

주님께서 돌아가신 직접적 사인(死因)이 되었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죽은 사람이, 그것도 시신이 무덤 속에 장사되기까지 한 사람이 몇 일 지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그날은 도마 역시 다행히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도마를 발견하신 주님께서 도마에게 다가가 하신 말씀을 본문 27절이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주님께서는 도마가 직접 보기를 원했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시며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말고 믿는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믿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당신의 부활'을 믿으라는 간곡한 당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순간 도마는 이렇게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무엇에 대한 감탄의 고백입니까? `부활의 주님', `주님의 부활'에 대한 감격에 찬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드디어 도마도 `주님의 부활'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결코 불가능한,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가능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분명히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 속에서 단 하나의 핵심적인 주제를 찾는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의 부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던 주님의 죽음은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영원한 부활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제자들이 이 이후 다락방을 열고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셨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핵심은 바로 부활에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신앙의 핵심 또한 부활이어야 합니다.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 할 이유도 없고, 또 사도 바울의 지적처럼 예수 믿는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지적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십시다.

 

"예수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今生)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7∼19)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므로 인하여 누구이든 단지 금생, 이 세상만을 목적하고 주님을 믿는다면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의 신앙이 아무리 출중하고 완벽하다 할지라도 그의 인생은 결국 이 세상의 땅 속에 묻혀 썩어져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기에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보다 더 강하고 더 소망에 찬 삶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어찌 절망치 않을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어찌 낙심치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부활을 믿는 연고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아도 어찌 버린바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부활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것은 어찌된 영문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다세 세워 주시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심하던 도마는 부활의 주님, 주님의 부활을 본문 속에서 확인한 뒤엔 인도로 건너가, 거기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증거 하다가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순교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영원한 부활의 시작임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 생명의 종교라 부르는 까닭은 거기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곳에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가 아니라, 단지 죽음의 종교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부활 즉 생명의 상태가 그처럼 중요하다면 왜 죽음이 필요한가 라는 것입니다. 죽음없이 생명이 계속하여 지속된다면 그것이 더 가치롭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천년전 저 머나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 오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와 관련을 갖고 있음은 무슨 이유입니까? 왜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 되십니까? 무슨 연고로 우리는 그분을 믿고 있습니까?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단순히 그분의 육체가 아니었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허물과 죄가 함께 못 박힌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그저 그분의 사지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죄악과 더러운 욕망이 매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죽음을 허물어트리고 영원한 생명, 참 생명으로 다시 사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우리 생명의 질이 전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더불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서의 우리는 영원히 죽고, 그분의 부활과 더불어 그리스도안에서 의인으로서의 우리가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죄인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그분은 불멸의 신 일수 있었을는지는 모르나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 우리를 위한 참된 그리스도일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은 너무나 당연할 수밖에 없었고, 그 죽음으로 인하여 그분의 부활은 당신 개인의 부활로 끝나지 않고 우리 모두의 부활로 귀결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죽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죄인된 내가 죽으므로 그리스도안에서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 영원한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야만 진정으로 살게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터득했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체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체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1∼42)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생명이란 썩을 것으로, 욕된 것으로, 약한 것으로, 유한한 육체의 것으로 끝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있기에 썩을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약한것이 강한 것으로, 유한한 육체의 것이 신령한 몸으로 새롭게, 영원히 세움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죽음이란 결코 피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허물어짐이란 절대로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죽어야 살고, 허물어져야 새로 세워짐을 아는 자들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죽고 허물어지는 것이야말로 그 생명의 가치와 질을 영원히 새롭게 하는 부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조국이 경제적으로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소위 `1인당 소득 1만불'과 `견실한 기초'를 자랑하던 이 나라의 경제는 불과 2주일만에 거들이 나고 말았습니다. 환율은 그 짧은 기간동안 두배 가까이 폭등한 반면, 주가는 바닥까지 폭락하고 있습니다. 상호 불신에 의한 금융 시스템 마비로 인해 매일 수많은 기업들이 속수무책으로 도산하고 있습니다. 일부 품목의 가격 폭등은 사재기를 불러일으키고 있고, 급기야는 국가 자체의 부도 위기를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까지 몰린 가운데 거의 모든 국민들은 좌절과 절망을 되씹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건 한 나라가 허물어져 내린다는 것은 그 국민에게는 말할 수 없는 수치요 절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절망 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절망보다 오히려 더 큰 소망을 지니고 있음은, 우리는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살고 무너져 내려야 새로이 세워지는 부활의 법칙을 확신하는 부활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후 410년 고트족의 침공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여겨졌던 로마의 도성은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허망하게 허물어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인들이 야만족으로 업수히 여기던 고트족에 의해,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대적할 민족이나 나라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의심치 않았던 로마제국이 유린당하면서 수도 로마의 도성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목격하는 로마인들은 좌절과 절망을 씹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순간에 도리어 말할 수 없는 소망에 차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 어거스틴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도성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그 유명한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집필하였습니다. 인간에 의해 세워진 불의와 부패의 도성이 허물어짐으로써 비로소 구축되는 `하나님의 도성'을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거스틴은 진정한 부활 신앙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고트족의 침략 사건 이후 로마가 모든면에 걸쳐 더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의해 지배되게 되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이 나라의 경제가 허물어져 내리는 이 사태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불의와 거짓 위에 세워진 사회는 사상 누각 일뿐이요, 사상 누각은 반드시 허물어지기 마련이며, 사상 누각이 허물어지는 데는 결코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언제든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사태 속에서 주님께서 진정 허물어트리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만연되어 있는 부정과 부패의 사슬, 불의와 거짓의 고리가 아니겠습니까? 이 붕괴 속에서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리 위에 바로 세워진 바른 사회, 하나님의 공법이 물같이 하나님의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바른 나라 아니겠습니까? 이 혼란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더 이상 사상누각―한순간 순식간에 무너져 버릴 모래 위의 집이 아니라,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의 말씀―진리위에 결코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집을 지으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일터가, 우리의 손으로 행하여지는 일들이 거의 거짓과 부정직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손에 의해 작성되는 결산보고서, 회계보고서, 감사보고서, 업무보고서를 포함한 각종 보고서 중 거의 대부분이 실은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과 부정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에 이것이 마치 정상적인 듯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살려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이 땅에 1천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건만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께서 남의 손을 빌려 우리의 실상을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IMF가 우리 정부와 체결한 합의문에서 10여 차례씩이나 투명성을 강조하고, 대통령에 출마한 세후보의 각서까지 오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희들은 믿을 수 없는 상대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작성한 각종 서류는 신뢰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정한 선진국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기를 원한다면 더 이상의 거짓을 버리고 정직한 사회를 구축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IMF사태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계시는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작금의 사태는 결코 절망할 일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죽어야 살고, 허물어져 내려야 새로이 새워짐을 확실히 알고 있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사상누각에 안주하던 우리로 하여금 반석 위에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집을 세우게 하시려, 주님께서 20세기말 우리에게 허락하신 마지막 은총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진정 부활의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이상 절망치 마십시다. 스스로 허물어 터트려야 할 부정과 거짓과 불의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 버리고, 진리 위에 우리의 삶을 바로 세우기에 진력하십시다. 부활을 믿고 부활을 실천하는 우리 자신들로 인해, 머지않아 이 나라는 반석 위의 세워진 하나님의 도성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대강절 세 번째 주일을 맞는 이 아침,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의 입은 정의를 말했지만, 우리의 손은 불의와 부패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혀는 진리를 외치고 있었지만, 우리의 말은 거짓과 욕망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던 우리나라는 사상누각에 불과했으며, 사상누각은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이며, 사상누각이 무너져 내리는 데에는 결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음을, 우리의 살아 있는 동안에 확인시켜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죽어야 살고, 무너져 내려야 바로 세워진다는 부활의 법칙을 일깨워 주셔서 더 더욱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이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20세기 말 우리에게 베푸신 이 마지막 은총의 기회에, 우리의 손으로 모든 거짓과 불의와 부정과 부패를 철저하게 허무는 자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진리 위에서 우리를 진실되고 정직하게 바로 세우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을 믿고, 부활의 삶을 살며, 부활의 법칙을 실천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이 나라의 21세기가 진리의 반석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도성으로 부활하게 해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이 귀한 은총의 기회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감사 기도 드립니다.

― 아 멘 ―

우리가 보았노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24∼29


본문 24절로 25절 상반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열두제자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믿지 못한 채 겁에 질려 문들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 한가운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사흘 전 분명히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무덤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시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들을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직접 뵙는다는 것은, 제자들로서는 실로 황홀하기 그지없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왠 영문인지 그 역사적인 현장에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만은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도마를 만난 제자들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었던 자들에게는 그 한마디 외에 따로 더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그런데 우리는 제자들의 이 외침과 똑같은 외침을 이미 이날 새벽에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날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뜻밖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뵙는 첫증인의 영광을 얻습니다. 그 직후 그녀가 무엇을 했었는지를 본장 18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그녀는 그 길로 예수님의 제자를 향하여 달려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의 외침은 똑같이 `주님을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보았다'는 동사 `horao'는 얼핏보거나 스쳐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친한 친구를 우연히 만날 때, 그 친구의 머리끝부터 말끝까지 찬찬히 뜯어 본 뒤에야 친구임을 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척 보는 순간에 아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은 그날 처음 주님을 뵌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래도록 주님을 따라 다녔기에 주님을 뵙는 순간 주님을 알아 볼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주의 깊게 살펴보았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들의 목전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은 무덤에 장사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대 그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그들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죽음을 이기는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보았던 것입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진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진리만이 영원히 죽지 않고 죽일 수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에게서 참된 길,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르는 영원한 구원의 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죄의 삯인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분만 죄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르게 하는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주의 깊게 뵈면서 평소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란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나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외친 그 외침의 참된 뜻은 `주님이시야 말로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길이시요, 영원한 진리시요, 참 생명이심을 보았다'는 의미였습니다.

이것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이 바로 도마의 고백입니다. 지난주일 함께 보았듯이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가 다시 찾아오신 주님을 뵈었을 때 그는 이렇게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도마 역시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 하나님을 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주를 보았다'고 증언한 내용의 심오한 의미는 동일하지만,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는 형태상 두 가지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 말한 주체의 수가 달랐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고 말한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인 단수였던데 반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외친 제자들은 다수인 복수였습니다. 두 번째로 그 말을 듣는 객체의 수가 달랐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언할 때 그 말을 듣는 객체는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할 때의 객체는 도마 한사람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귀중한 깨달음 두 가지를 얻게 됩니다.

 

첫째, 단 한사람이라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바르게 증언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반드시 열매가 수반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언할 때 막달라 마리아는 홀로 였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제자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는 진리를 체험한자로써의 고독감을 혼자 씹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고독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10명의 제자들이 `우리도 주를 보았다'고 증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미천한 한 여인의 신실한 증언을 발판으로 삼아 주님께서 역사 하셨을 때 그곳에는 10배의 열매가 거두어 졌던 것입니다. 자신의 증언을 조롱하던 제자들이 `우리도 주를 보았노라'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진리를 증거한 자로서의 막달라 마리아의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여기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착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는 것을 뜻합니다. 또 `피곤하지 아니하면'이란 말은 `포기하지 아니하면'이란 의미입니다. 진리를 증거 하는 삶을 살다가 낙심하지 말랍니다. 진리를 사는 자가 언제 낙심하게 됩니까? 나홀로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쳐도 세상에선 불의가 점점 더 기승을 부릴 때, 진리를 좇아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때, 아무리 진리를 증언하는 삶을 살아도 이 세상은 조금도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결코 낙심치 말라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진리를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 하시매 반드시 열매 거두게 하심을 바울은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내가 주를 보았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고독한 고백이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고백을 거쳐, 이천년이 지난 오늘 전세계 15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고백하게 하기에까지 이르지 않았습니까? 내가 지금 나홀로 고독하게 진리를 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와 똑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열매를 반드시 수반하기 마련입니다. 진리는 영원하고 영원한 진리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이 다수에게 진리를 행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단 한사람에게 진리를 증거 하는 것 또한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이 주님을 증거할 때 그녀의 앞에는 11사람의 제자들이 있었고, 10명의 제자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을 증언할 때 그들 앞에는 단 한 명의 도마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달라 마리아보다 제자들이 행한 일이 덜 가치로운 일입니까?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한 일이나 제자들이 한 일이나 그 가치는 동등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의 가치는 나머지 모든 사람의 생명의 가치와 동등한 탓입니다. 한 사람이라고 해서 생명의 절대적 가치가 감소되는 것도 아니고 다수의 생명이라고 해서 그 절대적 가치가 증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절대적 가치는 그 수에 상관없이 모두 동등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100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고 사라졌을 때, 주님께서는 안전한 99마리를 안전한 곳에 두고 길 잃고 헤매이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1 마리의 양의 가치와 안전한 99마리의 가치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이런 분이 아니셨다면 죄악과 죽음의 길에서 방황하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친히 찾아오시는 참 구원자가 되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자들에게 진리를 보여 주기 위해 애쓰되, 길 잃고 헤매이는 한 사람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한 사람을 진리 안에서 바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세계를 진리 위에 세우는 것과 똑같은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이 두 가지의 깨달음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나, 어느 누구 앞에서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당신의 생명의 역사를 펼치시기 원하시는 분인 까닭입니다.

 

한국 축구가 `98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전'에서 종합 전적 6승 1무 1패로, 1위를 차지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던 사람은 누가 뭐래도 차범근 감독이었습니다. 그의 용병술과 작전력은 온 국민을 열광케 했습니다. 특히 경기 전후에 그리고 우리 팀이 골을 얻었을 때 두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의 감동과 더불어 뜻밖의 비판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모 일간지에 게재되었던 어느 철학자의 비판과 그에 대한 차감독의 반론은 다 그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기에 언론의 자유가 있는 민주 사회에서 반드시 누가 옳고 그르다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저 개인적으로는 차감독의 기도와 관련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전혀 다른 의미에서 한 가지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1일 서울에서는 일본과의 2차전이 있었습니다. 그날 한국 팀은 전국민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2:0으로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최종 예선전에서 한국이 당한 유일한 패배요, 뼈아픈 1패였습니다. 저의 아쉬움이란 왜 그날 그 패배 후에는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나 하는 것입니다. 왜 이겼을 때는 기도하고 골을 얻었을 때에는 기도하면서, 두골을 먹고 패배했을 때에는 바바리 코트에 두손을 넣고 고개를 숙인 채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누구를 피하듯 퇴장하기만 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물론 홈 그라운드에서 일본에 당한 충격적인 패배였기에 감독인 그분이 가장 곤혹스러웠을 것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날 패배 후에도 승리하던 날처럼 벤치에 앉아 두손을 모으고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경건하게 감사 기도 드렸더라면,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함없이 내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분명하게 증거할수 있었을 것이고, 그 이전 드렸던 모든 승리의 기도가 더욱 가치로와 질 수 있었을 뿐만아니라, 그분의 그 참된 신앙앞에서 그 분을 비판하던 철학자 마저 승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안타까움은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70년대에서부터 80년대 초에 걸쳐 경제적 번영을 구가할 때, 이 땅의 교회들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며 얼마나 찬양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까?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오늘 이 나라의 경제는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사상 유래 없는 경제난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땅의 교회들은 걱정하고 근심하는 기도만 할뿐 이 상황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지는 않습니까?

다시스로 가는 요나가 탄 배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배가 폭풍에 휩싸였습니까? 주님께서 요나를 저주하셨기 때문에 요나가 물 속으로 던져졌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 배에 주님께서 계셨기 때문에 폭풍이 닥쳤고, 주님께서 요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는 배에서 던져졌습니다. 만약 요나가 자신의 욕망을 따라 끝내 다시스로 간다면 그는 죄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음을 주님께서는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 속에 던져져 큰 물고기에게 삼키운 요나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오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2:8∼9)

 

지난달 초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 Takapu절벽을 가 보았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닷가 한눈에 들어오는 절벽이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태풍이 부는 날이어서 온 바다에 마치 사이다를 부은 것처럼 온통 하얀 파도 천지였습니다. 얼마나 태풍이 센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않으면 바람에 밀려 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절벽 바로 아래 큰 바위에 수백 마리의 갈매기들이 앉아 있는데 사람이 밀릴 정도의 그 강풍 속에서 그 조그만 갈매기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갈매기들은 한 마리도 예외 없이 모두 태풍이 불어오는 쪽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중에 몇 마리는 태풍을 가슴에 안고 날아오르며 태풍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태풍에 새들이 휩쓸려 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음이 생각났습니다. 태풍이 몰아쳐 집채가 날아가도 새들은 끄떡없답니다. 그 비결은 태풍을 마주보는 것이랍니다. 태풍을 마주보는 한 절대로 날아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태풍이 새들의 날개쪽지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답니다, 그러나 만약 태풍을 피하기 위하여 바람 부는 쪽을 향해 엉덩이를 갖다 대면 영락없이 휩쓸려 버리고 만답니다. 저는 태풍 속에서 쓰러져 버리지 않고 오히려 태풍을 마주보며 태풍을 즐기고 있는 갈매기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칙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이 나라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 나라가 폭풍과 태풍 속에 휩싸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저주하셨기 때문에 이 가혹한 경제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결단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민족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민족을 사랑하심으로 인하여 이 나라를 바로 세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이 민족은 필경은 부정과 부패, 타락과 방종, 교만과 허세 속에서 영원히 몰락해 버리고 말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태풍을 피하려 하지 마십시다. 태풍을 정면으로 마주 보십시다. 하나님을 향하여 이 태풍을 주셨음을 감사드리고 이 폭풍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이 폭풍 속에서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리고 세울 것은 바로 세우므로, 이 민족이 영원히 살길은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있음을 우리의 삶으로 증거 합시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진리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한 이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이 나라를 오늘 우리를 통해, 아무렇게라도 잘 살기만 하려는 그릇된 나라로부터 바르게 사는 바른 나라로 바로 세워 주시기 위해 이 태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이 아침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메세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태풍이 불고 있습니다. 이 태풍을 피하려다 쓰러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해주옵소서. 이 태풍을 주신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게 해 주옵소서. 이 태풍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그리스도안에서 이 태풍을 가슴으로 안고 진리안에서 비상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태풍 속에서 이 민족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우리의 삶으로 이 민족에게 보이게 하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진리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태풍이 이 민족과 나라를 바로 세워주는 생명의 바람, 성령의 바람이 되게 하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한낱 미물에 불과한 갈매기보다 못한 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중심을 붙들어 주옵소서.

―아멘―

내 손과 옆구리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24∼29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전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직접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못하여 겁에 질린 채 다락방 속에서 문들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공포에 질린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강을 부어주셨고, 배신자들인 제자들에 대한 계속적인 신뢰를 천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원한 생명의 숨결인 성령을 불어 넣어주신 다음, 참 그리스도인,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써 지니고 있어야할 바른 의식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 24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여기에서 `디두모'란 `쌍둥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중 도마가 누구와 쌍둥이였는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쌍둥이였던 도마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던 그 역사적인 현장에 무슨 영문인지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25절이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제자들로 부터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들은 도마는, 부활의 첫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들은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혀 제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신다 할지라도,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자신의 손으로 확인 하기 전 까지는 결코 믿을 수 없노라 단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서 있었던 일을 본문 26∼27절이 이렇게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날도 문들은 여전히 닫혀 있었지만 다시 말해 아무도 열어둔 사람이 없었지만, 지난 10월 셋째주일 살펴보았듯이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 방안에 나타나시어 또다시 당신의 평강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못자국과 창자국이 뚜렷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도마에게 보여주시면서, 당신이 과연 부활하신 주님인지 아닌지 도마로 하여금 직접 손으로 확인해 보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도마나 예수님이나 예수부활의 증거를 예수님의 얼굴이나 옷 혹은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흔적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도마가 요구한 것이 바로 고난의 흔적이었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 또한 고난의 상처, 아픔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때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해 보았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본문 28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우리 개역성경에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하고 서술형으로 번역되어있지만, 원문은 서술형이 아닌 감탄형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자국을 보는 순간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새삼스럽게 예수님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신 고난의 흔적보다 더 분명한 부활의 증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대단히 귀중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인이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향하여 주님께서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 당하셨던 고난의 흔적, 아픔의 흔적, 고통의 상처를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의 증거는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93년 4월 제2회 신앙 대 강좌가 열렸을 때, 강사중의 한 분이었던 이어령 교수님으로부터 `교회 밖에서 본 교회'란 제목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와 한국교인들의 모습이 비기독교인의 눈에는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웬만한 교인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은 분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종교를 택해야 할 경우가 온다면 필경 기독교를 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직 교회에 다닐 수 없는 까닭을 그 분이 본문을 들어 설명한 요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도마가 예수 부활의 증거로 요구한 것이 바로 고난의 흔적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의 증거로 도마에게 보여주셨던 것 또한 고난과 아픔의 상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할 증거가 바로 이것입니다.―진리 때문에 고난 당한 흔적, 시대의 아픔에 동참한 상처자국, 세상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당한 희생의 흔적.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흔적과 자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집단화된 이기심, 거대한 야망 그리고 세속화된 성공주의와 출세주의뿐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증거가 결단코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당하셨던 고난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를 소개해주십시오. 나는 그 교회 교인 되기를 고려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분의 외침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외침은 우리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주었고, 우리자신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고난의 흔적, 진리의 상처를 찾아볼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성취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야욕뿐이었던 것입니다.

 

 

지난달 세례를 받은 한 성도님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고백문에서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 다시 말해 신앙의 참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왕국이 있었습니다. 지혜롭고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왕국의 성곽을 지키는 장수 중에 무술이 뛰어나고 지혜와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지혜에 감사할 줄 알았고, 주어진 일에 항상 성실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왕으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왕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다음, 적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에게 칼을 버리고 갑옷을 벗게 하였습니다. 성곽 밖으로 나가 적을 물리치되 주어진 권세를 쓰지 말것이며, 다만 사랑으로 적을 물리 치라 하였습니다. 자신의 권세와 힘과 능력과 지혜로 쉽게 적을 물리칠 수 있건만, 이를 사용치 말고 단지 사랑으로 적을 승복시키라 하십니다.―저는 성령에 의지합니다. 헌신은 육체적 고통이 따르고, 사랑은 스스로를 희생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의 군병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승복하겠습니다.'

얼마나 보배로운 깨달음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오직 진리의 법, 사랑의 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법 사랑의 법으로 전쟁터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할키우고 찢기우는 등 상처자국, 고난의 자국이 생기지 않을래야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도님은 하나님의 군병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승복하여 진리의 법 사랑의 법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결단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이 영원한 부활의 참된 발판이듯이, 진리와 사랑 때문에 당하는 아픔과 고난의 상처는 참된 사랑과 생명의 터전임을 그 성도님은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픔 없는 사랑이란 값싼 욕정일 뿐이요, 진통 없는 생명이란 마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희생의 아픔을 통해서만 피어나는 꽃이요, 생명은 자궁이 찢어지고 골반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통해서만 출산되는 법입니다. 총과 칼을 들고 온 천하를 정복할 수는 있어도 자기 아픔과 진통 없이는, 단 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참된 생명과 사랑을 심어줄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진리 때문에 아파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나의 진통이 크면 클수록, 그 상처자국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은 더 크게 역사 하여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총이나 칼, 돈이나 권력으로도 구축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에덴을 이 세상 속에 복원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와 사랑 때문에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고난의 자국을 갖지않을수없고, 그 자국을 가진 자는 세상을 바로 세우는 생명의 불씨가 되지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가 꽃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다 당하신 고난이 남아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써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분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다보면 고난의 자국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고, 그 고난의 자국만이 교회가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참 생명의 증표인 동시에 진정한 사랑의 표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제2회 광주 비엔날레 전시작중에 루마니아 작가 Nedko Solakov가 출품한 `나무아래 어디선가'(somewhere under the tree)란 제목의 작품이 있었습니다. 큰 전시실 천정에 땅아래에 있는 나무 뿌리들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전시실 천정이 지표면이요, 천정아래 빈 공간이 온통 흙으로 가득찬 땅속이 되는 셈이었습니다. 땅위에 나무들이 한가로이 서있습니다. 그 모습만 보면 말할 수 없이 평화스러운 광경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각 나무 뿌리들은 서로 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엉키고 설키면서 무서운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작가는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뿌리들의 처절한 다툼과 암투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므로써, 실은 끊임없이 자행되는 인간들의 다툼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보는 순간 제 눈에는 천정에 매달린 나무뿌리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허공이, 아니 그 나무 뿌리들을 감싸고 있는 흙―대지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뿌리가 왕성해 질수록, 뿌리들의 다툼이 치열해질수록 사실은 대지의 품이 할퀴어지며 찢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대지가 그 고난이, 진통이 싫다하여 나무를 뱉어 내어버린다면 나무의 존재는 불가능해지고 맙니다. 대지의 아픔과 고난과 진통이 나무에게는 생명의 자궁이 되어 나무가 싱그럽게 살아있을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땅위에 살아 숨쉬고 있는 모든 나무들은, 실은 대지의 상처자국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왜 대지가 생명일 수 있습니까? 생명의 잉태를 위해서라면 상처와 진통과 아픔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전시장의 허공, 아니 대지 속에서 우리를 품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끝없는 죄악의 수렁 속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이 친히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시고 찢어지시므로 끝내 당신의 사랑과 진리의 대지 속에서 우리를 바로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입니다.

저는 또 그 전시장의 허공, 대지 속에서 우리 스스로 이루어가야할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난장판이자 전쟁판과 같은 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법, 진리의 법으로 껴안으므로 우리의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된다하나, 그 상처 자국을 통해 역사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 세상을 바로 세워가야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 전시장의 허공, 대지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고난의 자국 부활의 증거인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할 사랑의 증표 생명의 표식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사상 유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해있습니다. 누구를 비난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과 진리의 법으로 이 세상을 바르게 품지 못했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임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고백 드립시다. 진통과 아픔이 없이는 생명의 모태가 될 수 없거늘, 우리모두 아무런 고통없이 사랑과 생명을 누리려 했던 마약중독자들이었음을 하나님께 회개 드립시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할것은 부활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 고난의 흔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보여주었던 것은 겉껍질만 복음으로 위장한 추한 욕망덩어리였음을 하나님 앞에서 자복드립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직 우리를 살리시려 고난당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을 대망하는 대강절 첫째주일을 맞이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먼저 불의와 거짓, 사치와 허영, 방종과 야욕의 미몽에서 깨어납시다. 진리와 사랑의 법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 혼란한 세상을 껴안는 생명의 대지가 됩시다. 이 민족을 진리와 정의 안에서 바로 살리기 위해 우리가 당해야만할 고난과 진통이라면 기꺼이 감수합시다. 진리의 사람임을 자처하는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이세상이 진리와 정의의 사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진리와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할퀴어지고 찢어지면 질수록 주님께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무의 뿌리를 더욱 든든하게 하실 것임을 믿으십시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우리를 통하여 이 나라를 부활케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세상사람들은 도마처럼 고백하고야 말 것입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세상을 향하여 욕망의 손만을 펼쳐 보였습니다. 세인을 향해 정욕의 몸뚱이만을 보여왔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비추는 진리의 빛이기는커녕, 이 사회를 이 지경으로까지 허물어지게 한 주범이었음을 이 시간 회개 드립니다.

상처받지 않고서는, 찢어지지 않고서는, 뼈가 으스러지는 진통 없이는, 생명과 진리와 사랑이 잉태될 수 없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흔적으로 인하여 이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모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아수라장 같은 이 세상을 품는 생명의 대지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이 나라가 당하는 어려움이, 우리 주님의 진리의 법, 사랑의 법, 생명의 법,정의의 법을 믿고 따르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오히려 이 나라에 찬란한 부활의 영광이 임하는 은총의 계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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