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 죄든지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9∼23


한국 연극계의 원로인 장민호 선생의 연기 인생 5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 `파우스트(FAUST)'가 지금 국립극장에서 공연 중에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국립극장 홍보실에서 제작한 팜플렛을 보면, 특별히 눈길을 끄는 내용이 나옵니다.

―몇년 전 모 일간지 기자의 인터뷰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인상적이다.

"연극배우 장민호에게 그가 우리나라 연극·방송·무대의 원로 중 한사람임을 염두에 두고, 교육기관에서 연기 이론을 강의한 경험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딱 잘라서 `없다'고 대답했다. 분장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대중 앞에 서 본적이 없으며, 또 그런 의도도 가져 본 적이 없었노라고 했다. 그래서 50년이나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TV쇼는 물론, 대담 프로그램과 같은 교양물에도 일체 출연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 프로페셔날리즘을 철저하게 추구하고자 하는 집념이자 무대관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장민호 선생님이 한국 연극의 정신적 지주로 대접받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분장을 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무대 위 배우로서가 아니고서는 결코 대중 앞에 서려 하지 않았던 투철한 프로 의식의 소산이었습니다. 그 프로 의식이 그 분으로 하여금 프로 연극인이 되게 해 주었고, 그 결과로서 그 분은 오늘날 한국 연극계의 상징적인 원로가 된 것입니다.

 

2주전에 뉴질랜드 오클랜드 주님의 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창립된 지 겨우 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장년 180명, 학생 120명, 총 300명이 출석하는 견실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동규 목사님은 오클랜드에 있는 많은 목사님 중 가장 인품이 높은 목사님으로 존경받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사실을 확인하면서 이동규 목사님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으로써, 이 목사님에 대해 얼마나 큰 긍지를 느꼈는지 모릅니다.

하루는 그 곳 교우님들 사이에서 골프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골프란 경비가 많이 드는 운동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국토가 초원인 뉴질랜드에서는 골프가 볼링보다 더 싼 대중 스포츠입니다. 그래서 뉴질랜드에서 골프를 친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삶의 한 부분이요, 조금도 이상하거나 특출한 일이 아니기에 실제로 상당수의 그 곳 목회자들 역시 골프를 즐기고 있습니다. 서로 골프 이야기를 나누던 한 교우님이 이동규 목사님에게 `목사님도 건강을 생각하셔서 골프를 시작하십시오'하고 권했습니다. 뉴질랜드로 간지 2년이 되기까지 이 목사님은 골프채에 손도 한 번 대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잠시 머뭇거리다 `생각해 보지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날 저녁 단 둘이 있게 되었을 때 혹 앞으로 다른 목사님처럼 골프 칠 의사가 있느냐고 묻자 이 목사님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회를 쉬거나 하지 않으면 모르지만 목회를 하는 동안만큼은 정말 프로 목회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주위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권해도, 아무리 많은 목회자들이 골프를 쳐도 목사님만은 지금처럼 골프에 손을 대지 마십시오."

제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한가지였습니다. 골프란 운동은 다른 운동처럼 30분이나 1시간 내에 끝낼 수 있는 운동이 아닙니다. 최소한 4시간, 경우에 따라서는 하루종일이 소요되는 운동입니다. 그 긴 시간 자체도 문제지만, 그처럼 긴 시간이 소요되기에 끝난 뒤에도 반드시 잔영이 길게 남는 법입니다. 그 잔영을 갖고 그날 저녁 성경을 본다 한들 무슨 영성의 샘물을 퍼 올릴 수 있겠습니까? 눈앞에서 푸른 잔디밭의 골프 공이 왔다 갔다 하는데 어찌 영적인 설교를 준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골프가 모든 현대인들에게 유익한 운동이라 할지라도 프로가 되고자 하는 현직 목회자에게만은 금물 일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전문가의 시대입니다. 프로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어떤 분야에서건 프로만이 살아 남을 수 있고 그 분야를 이끌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그저 프로가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투철한 프로 의식이 있어야 하고, 그 의식을 행동화 할 수 있는 실천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신앙인이 되려면 프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설픈 신앙으로서는 안됩니다. 어설픈 신앙으로서는 이 세상의 혼란과 어둠을 가증시킬 뿐입니다. 프로 신앙인 만이 무너져 내리는 이 세상을 바로 세우는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고, 썩어져 가는 이 세상을 살리는 소금이 될 수 있고, 이 세상을 삼키려는 흑암을 몰아내는 빛일 수 있고, 하시라도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 프로 그리스도인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성령 충만한 자, 즉 지난주일 살펴본 바와 같이 영원하신 주님의 숨결, 주님의 생명 속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숨결 속에서 살아가는 성령 충만한 프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지녀야 할 프로 의식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공포에 질린 채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 곧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그곳을 떠나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 주시면서 한마디 당부의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야말로 성령 충만한 참된 그리스도인, 주님을 따르는 프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프로 의식인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본문 23절이 이렇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그대로 둔다'는 동사 krateo는 `붙잡고 있다' `쥐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누구의 어떤 죄이든지 사하면 그가 용서함을 받을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내 손에 쥐어 잡고 그의 죄인 됨을 즐기기만 한다면 그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는 죄인이 된다는 것―이것이 프로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할 프로 의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을 주님께서 죄사함의 권세 자체를 우리에게 위임해 주신 것으로 오인해서는 안됩니다. 죄사함의 권세는 오직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전유물입니다. 성부·성자·성령 하나님만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호불호(好不好)에 따라 죄사함을 임의로 선포하라는 뜻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 우리의 구원자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얻게 해 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알지 못한 채 죄의 수렁 속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면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죄사함의 구원을 받을 것이요, 내가 그들을 방치하고 그들의 죄지음을 즐기기만 한다면 그들은 영락없이 심판 받고 말 것이라는 것, 다시 말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임을 통감하는 것―바로 이것이 프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프로 의식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죄 가운데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그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도구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죄 가운데서 죽어 가는 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이 프로 의식 없이는 어찌 참된 그리스도인, 사람을 살리는 프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왜 주님께서 다른 불신자들보다 전혀 나을 것 없는,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더 못한 우리를 먼저 구원하시고 불러 주셨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왜 주님께서 오늘도 말할 수 없이 크나큰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를 품어 주고 계십니까? 이 세상 사람을 구원하는 생명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명분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프로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한평생 교회를 다녔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단 한사람을 위해서도 참 생명의 도구가 되어 본적이 없다면, 그는 아직까지 프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막 주님을 영접한 초신자라 할지라도 죄 가운데 있는 자들에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프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지은 시로써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를 읊으면 우리의 심령은 금새 평강과 소망으로 가득차 오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1~4)

 

아무리 읊어도 지루하기는커녕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절감케 해주는 영혼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이 이후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주님께서 내게 큰 잔치상을 배설하시고 내 머리에 향기로운 기름을 부어 주시매 내 잔이 넘치는 그 은혜와 사랑과 풍요로움을 주님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행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가 그처럼 존귀케 되었으니 얼마나 통쾌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읊조릴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원수의 코가 머지않아 주님 앞에서 납작해지는 모습을 그리면서 주님을 찬양하곤 합니다.

 

그런데 지난달 세례를 받은 한 성도님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고백에서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한 뒤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큰상을 차려 주시고 풍요로움이 넘치도록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 나의 원수들도 함께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어찌 그 원수들 앞에서 나혼자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저의 갈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차려 주신 그 큰 상 주위에 원수와 더불어 모두 모여 함께 나누고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잔치상을 배설하신 것은 내 앞에서 원수의 기를 꺾으시고 원수의 코를 납작하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원수와 더불어 잔치상을 나누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성도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사랑과 생명의 은총을 베푸심은, 바로 자신이 원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마저 그 생명과 사랑을 전하는 생명의 도구로 자신을 사용하시기 위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오한, 그리고 명확한 깨달음입니까? 이런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는 한, 원수의 구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한, 그 성도님이 비록 지난달 세례를 받은 초신자라 할지라도 그는 프로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작년 9월 우리 교회에 오셔서 은혜로운 간증을 해 주셨던 서울 구치소 경비교도대 대대장이신 박효진 장로님께서 그 동안 자신을 통해 구치소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하는 책을 발간하였는데, 그 분은 자신의 책에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사형수라 할지라도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그를 인도하기만 하면,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살리시더라는 뜻에서입니다. 그 분은 사형수를 사형수로 보지 않습니다. 그 분은 구치소로 들어오는 사형수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이 비록 세상의 법정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 얻게 하는 구원을 받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먼저 믿은 자신의 책임임을 통감하면서, 사형수들과 함께 부둥켜안고 울며 찬송하며 기도하면서 끝내 그들을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게 만드는 그분이야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프로 그리스도인의 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 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2∼24)

 

그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라면 환란이나 핍박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먼저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까닭이 그 사명을 수행케 하시기 위하심인 것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는 진정한 프로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입니다. 프로 그리스도인인 그를 통하여 세계의 역사가 새로워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추락하던 한국 경제는 마침내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온 나라에는 위기감이 팽배해 져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인 것은 경제가 아닙니다. 경제란 산등성이 있으면 반드시 골이 있는 법이요, 골에 닿으면 반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인류 역사상 어느 나라의 경제이건 변함없이 상승하기만 한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습니다. 정작 위기인 것은 아직도 이 나라에 불의와 부패, 부정과 거짓, 야합과 술수, 타락과 방종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진리의 길을 벗어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죄악과 죽음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큰 위기는 그들을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음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 책임을 깨닫지 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맡겨 주시기 위해 우리를 먼저 구원해 주셨건만 우리는 나만을 위하는 이기적· 기복적 신앙 속에 안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위기는 없습니다. 한 나라의 경제는 등락을 거듭할 수 있지만 이 땅에서의 인간의 생이란 단 한 번뿐이요, 그 한 번의 삶으로 영원한 판결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통감하여 이 시기를 이 민족에게 의와 진리와 생명을 삶으로 전하고 보여주고 일깨워 주는 기회로 삼는다면 작금의 경제 난은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시대의 경제는 정부와 정치인 그리고 경제인과 국민 모두의 책임이라 할지라도, 이 시대의 생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의 책임임을 잊지 마십시다. 우리 모두 이 민족을 의와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프로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우리가 프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한 이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반석 위에 세워질 것입니다. 이 다음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얼마나 경제를 살렸느냐고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대신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죄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렸느냐?'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심은 원수에게마저도 사랑과 생명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임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나라의 위기는 경제가 아니라, 불의와 거짓이 팽배한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을 느끼지도 못하는 우리 자신들임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 프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진리 앞으로 인도해 내는 프로 신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를 먼저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보답해 드리는 프로 신앙인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프로 그리스도인들이 되므로 오늘의 경제난이 이 나라가 새롭게 소생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 아멘 ―

숨을 내쉬며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9∼23


저는 여태껏 상대가 특별히 요구하지 않는 한 제 나이를 만(滿)으로 대답해 본적이 없습니다. 한국 사람끼리는 한국 나이로 답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 가는데 대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949년생인 저는 올해 들어 누가 물어도 스스럼없이 49살이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나이와 관련하여 엉뚱한 해프닝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귀가 길에 마침 시간이 남아 막내를 데리러 유치원엘 갔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방으로 들어가자 저를 발견한 승주가 `아빠'하고 달려왔습니다. 그러자 승주와 함께 놀고 있던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뛰어오더니 느닷없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 몇살이에요?'

아마 저희들끼리 나이에 관한 놀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평소대로 `49살'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불현듯 작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작년 봄 유치원에서는 `아빠와 함께 하는 날'을 실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아이와 아빠가 함께 어우러져 노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갔더니 아빠들이 거의 모두 30대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제일 연장자였습니다. 하기야 대한민국에서 제 나이에 유치원 다니는 아이를 가진 남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49살'하고 대답하면 승주가 아이들로부터 `나이 많은 아빠의 아들' 이라며 놀림을 받을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평소에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날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불쑥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제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아이가 다시 채근을 했습니다.

`아저씨! 몇살이냐니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넌 몇살이니?'

질문만 던지고 승주를 데리고 얼른 나올 심산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저의 심중을 꿰뚫어 본 듯 재차 물었습니다.

`5살, 근데 아저씨는요?'

그 순간 옆에 있던 남자아이가 끼여들었습니다.

`아저씨! 몇살이예요?'

그러는 사이 그 방안에 있는 아이들의 시선이 온통 제게 집중되었습니다. 도저히 대답을 않고는 그 자리를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이되었습니다. 그때 제입에서 나온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음…만으로 48살이야!'

그리고 승주의 손을 잡고 돌아서는데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겨우 5살짜리 꼬마들에게 한 살이라도 더 적게 보이려고 `만으로 48살!' 했으니 도대체 어른 꼴이 그게 뭡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막내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런 생각들이 제 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래, 자식을 위해서 한 살이라도 젊어보이려하는 이런 마음이 자식에 대한 부모 사랑이구나.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지극하실까?

이제껏 나의 산 날보다 살날이 분명히 짧은 만큼 승주에 대한 나의 사랑은 언젠가는 끝나고 말겠지. 그러나 결코 늙지 않으시는 우리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사랑인가? 그렇다면 자식사랑과 관련하여 지혜란 무엇일까? 언젠가 끝날 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겠지.'

그날은 참으로 유익한 날이었습니다.

 

 

지난 9월 27일 밤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는 35만 여명의 젊은이들이 환호하는 가운데`록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그런 정도의 콘서트라면 간혹 있을 수 있는 대형공연이었지만 그날의 공연이 유독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60년대에 기성체제에 저항하는 노래들을 불러 젊은이의 우상이 되었던 미국 가수 밥 딜런(Bob Dylan)이 출연했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젊은이들의 축제에 교황 바오로 2세가 참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밥 딜런은 자신의 히트곡들을 부르던 중 그 유명한 `Blowin in the Wind'(바람속에 실려있다)를 열창하여 35만명의 젊은이들을 열광케 하였습니다. 그 노래의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노랫말이 됩니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길들을 거쳐야만 하는가?

하이얀 비들기가 모래 가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거쳐야만 하는가?

평화가 정착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포탄들을 쏘아 대어야만 하는가?

친구여,그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네

인생의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네

 

바다로 씻기어 사라지기까지 저 산은 몇 년이나 버텨낼수 있을까?

참된 자유를 얻기까지 인간은 몇 년을 더 버텨낼수 있을까?

한 인간이 도대체 몇번이나 보고서도 못본척 고개를 돌려버릴 수 있을까?

친구여 그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네

인생의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네

 

진정으로 하늘을 볼 수 있기까지 인간은 몇번이나 머리를 치켜들어야만 하는가 ?

울부짖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까지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만 하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상 당하고 있음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죽어야만 하는가?

친구여, 그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네

인생의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네"

 

교황 바오로 2세는 딜런의 노래를 주의 깊게 들은 뒤 노래가 끝나자 딜런과 악수를 나눈 다음, 35만명의 관객 앞에서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방금 한 인간이 인간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길들을 거쳐야만 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인간이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인간이 걸어가야 하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즉 진리와 생명의 길입니다."

그리고 교황은 이번에는 관객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전 밥 딜런은 인생의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모든 인생의 해답은 언제나 바람 속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이리저리 흩어져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바람이 아닙니다. 그 바람은 바로 주님의 숨결이자 음성입니다."

교황의 그 말에 35만 여명의 젊은이들은 열화와 같은 환호와 박수로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그 말은 단순히 그 날밤 록·콘서트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주기 위한 말치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해답이 바람 속에 실려 있으며 그 바람은 주님의 숨결이란 그 말은, 바로 오늘의 본문에 기초한 탁월한 강론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빈 무덤을 두 눈으로 확인까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믿지 못하여 두려움에 떨며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겁에 질려 있는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제자들은 갈릴리의 하찮은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과 함께 3년이나 동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락방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어찌 참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평안을 누린다 한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주님의 모습이 보이지 아니하면 다시 불안과 공포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제자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신했던 배신자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 배신자들을 계속 신뢰해 주시고 중용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반드시 또 다른 배신을 행하는 법이거늘 과연 제자들만은 예외일 수가 있겠습니까? 왜 주님께서는 겁쟁이들에게 평안을 빌어 주시고 배신자들을 계속 중용하시겠다는, 얼핏 생각하면 시간 낭비요 헛일처럼 보이는 일을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오히려 당당하게 행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본문 22절 속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그렇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기만 하면 아무리 겁쟁이였다 할지라도 어떤 상황에서건 참 평안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 거하기만 하면 씻을 수 없는 배신의 전과자라 할지라도 주님의 제자로 중용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여기에서 숨을 내쉰다는 동사 emphuso는 숨을 불어넣는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냥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숨결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영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거룩하신 영―즉 성령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숨결,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숨결인 것입니다.

이 헬라어 동사는 신약에서는 본문에 단 한 번 사용되었으며, 같은 뜻의 히브리어 동사는 구약에서 두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구절은 창세기 2장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흙속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므로 비로소 살아 있는 영적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동사는 구약 에스겔 37장에서 한 번 더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여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 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9∼10)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어느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마른 뼈, 해골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였을 때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숨결이 그 마른 뼈에 들어가매 마른 뼈들이 살아 일어나 큰 군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다운 성령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숨결 속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숨결로 호흡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은 영원한 숨결이요, 진흙을 생령으로 마른 뼈를 군대로 변화시키시는 창조의 숨결이요, 전능하신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숨결 속에 있을 때 겁쟁이가 평강의 사람이 되며, 배신자가 참제자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1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은 그 유명한 솔로몬의 고백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와 부귀영화의 상징입니다. 그럼에도 인생이란 너무나도 헛되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헛되다는 히브리 동사 habal은 숨결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hebel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숨결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숨결이 아닌 인간의 숨결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숨결을 의지할 때 그 인생은 부귀영화와 주지육림 속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황 바오로 2세의 지적처럼 인간의 숨결이란 이내 이리 저리 흩어져 버리는 헛바람인 까닭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숨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내뱉고 있는 이 숨결은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내뱉는 즉시 우리의 숨결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뿐입니다. 생명이란 곧 호흡이요 호흡이란 숨결일진대, 우리의 인생이 지금 헛바람이 되어 매초마다 이리저리 헛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형체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헛바람을 의지하는 인생이 어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헛된 숨결로야 누구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으며 무슨 가치 있는 일을 행할 수 있으며 어찌 영원을 지향하며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헛바람을 의지하고서야 어찌 불안에 떠는 겁쟁이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상황에 따라 배신의 길을 걷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아침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그 영원한 숨결, 진흙을 생명으로 만드시는 그 창조의 숨결, 마른 뼈를 군대 되게 하시는 그 전능하신 사랑과 생명의 숨결을 말입니다.

겨우 7∼80년 헛바람만 일으키다 끝나 버릴 우리의 숨결 속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의문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 인생의 모든 해답이 실려 있습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 사랑치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이 곧 사랑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이 평강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진리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이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이 능력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만으로 48살이던, 우리 나이로 49살이던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숨결은 헛바람이 아니라 영원한 바람,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십니까? 바로 당신의 영원하신 숨결, 성령의 바람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이제껏 헛바람에 불과한 우리의 숨결만을 의지했기에,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또 헛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를 사랑하시사 불러 주시고 영원하신 주님의 숨결로, 주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일평생 이 숨결로 살아가게 하소서. 이 숨결로 사랑하게 하소서. 이 숨결로 영원을 살게 하소서. 이 숨결로 사는 우리의 삶이 진정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령 충만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나를 보내신 것같이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9∼23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란 책의 저자로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STEPHEN R. COVEY는, 새로 출간된 <첫 번째 것들을 제일 먼저(First things First)>란 명상록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바른 일 행키 원할 수 있고, 또 그 일을 바른 명분으로 행하기를 소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바른 원칙을 지니고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손으로 벽을 치는 것처럼 헛된 일이 될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옳고 바르다는 신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탄식하셨겠습니까?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그릇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는 범죄자들마저도 자기 나름대로 정당한 명분과 이유를 다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스스로 자신은 옳고 바르다 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사회는 정의롭지 못합니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으면 다 자신은 옳고 바르다 주장함에도 왜 이 사회에는 오히려 불의가 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COVEY의 지적처럼 바른 원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나치를 보십시오. 그들이 2차세계대전을 일으킬 때 그들에게는 정당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그들은 정당한 사유를 갖고 있었고, 독일 신학자와 교회는 그 명분을 성경적으로 뒷받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반인류적 범죄 집단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바른 원칙을 갖고 있지를 못했던 까닭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지니고 적용했던 게르만적 원칙이란 그릇된 야망과 폭력의 원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거짓된 원칙으로 그런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바른 일을 바른 명분으로 행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바른 원칙을 소유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바른 원칙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진리입니다. 진리로 이 땅에 오시어 진리의 원칙을 삶으로 보여주셨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 바른 원칙이 없을 때 내가 무엇을 행하던 그것은 만행일 수 있고, 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어도 실은 나치군과 다를 바 없을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마음 자세가 아닐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그때까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면서 문들을 꼭꼭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을 친히 찾아오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본문21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것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한 후 주님과 갖는 첫대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배신자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당신의 평강을 부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은, 제자들이 여전히 허물투성이지만, 여전히 부족하지만, 여전히 문제 덩어리이지만, 그러나 계속하여 주님의 제자로 중용 하시고 변함없이 신뢰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언약이었음은, 이미 지난주일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로 위대한 주님의 사랑이요 은혜였습니다. 그 큰사랑과 은혜를 입은 제자들이 그 이후 복음 증거의 현장으로 주저 없이 나아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아무 원칙도 없이 자기 신념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그냥 마구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제자들은 세상의 빛이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을 해치는 무서운 이기 집단이 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거기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아버지께서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이 주님의 원칙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가는 것이, 제자들이 지켜야 할 원칙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원칙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보여주셨던 진리의 삶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목적은 제자들을 통해 당신의 삶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참 진리의 삶, 참 생명의 삶, 영원한 구원과 사랑의 삶을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하여 만방에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이후 제자들은 철저하게 이 원칙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온전히 주님 안에 감추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였습니다.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이는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할 정도로 원칙에 투철하였습니다.그결과 그들을 통하여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원칙에 충실치 않았더라면 그들이 아무리 주님을 사랑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다 할지라도 인류의 역사가 BC에서 AD로 전환되는 대변혁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원칙이 없는 곳에 남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뿐이고, 인간의 이기심과 이기심이 부딪히는 곳에는 그 열정의 도가 심할수록, 대통령 선거를 앞둔 오늘날의 정치 판에서 보듯, 끝없는 다툼과 분열로 귀결되어 지고 마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주님의 말씀은 2천년전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2천년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과 생명 그리고 진리를 이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해 삶의 현장에 보내어진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불신자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 행위가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한가지―우리의 삶이 반드시 지켜야 할 바른 원칙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제자들로써 삶의 현장에서 보여야 할 원칙을 적용한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만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던 삶은 한마디로 어떤 모습이습니까? 열매를 보고 나무를 판단할 수 있듯이 우리는 그 해답을 성령의 열매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24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이 성령의 열매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실천하신 삶의 모습이요,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 원칙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요,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으로, 그 분의 희락으로, 그 분의 화평으로, 그 분의 오래 참음으로, 그 분의 자비로, 그 분의 양선으로, 그 분의 충성으로, 그 분의 온유로, 그 분의 절제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진리와 복음은 절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통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이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소홀한 것 또한 이것입니다. 그 결과 삶의 현장에서 반드시 실현되어져야 할 이 원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속에서 결여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람이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수 있겠습니까? 바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과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와 같이 그 원칙을 실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 분은 임마누엘 하나님―즉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신이신 하나님이 하찮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은 신에게 수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빈민촌 나사렛에서 비천한 목수일을 하신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일 수 있겠으나 예수님께서는 가난을 단 한 번도 수치로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신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손에 의해 벌거 벗기운채 못 박혀 죽으신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독일 수 있으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런 것을 부끄러워 하셨다면 우리같이 가난하고 죄많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화평과 자비와 온유와 절제 등을 결코 보여 주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구원자로서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시는 한, 성육신이나 가난이나 고난은 자랑일망정 전혀 부끄러움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교묘한 술책으로 주님을 유혹했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향하시는 주님 앞을 가로막는 수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 단호히 질책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 분을 통하여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만나며,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참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시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에 우둔하셨다면, 이와 같은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그 분을 통해 일어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원칙을 어떻게 쉽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언제나 당당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에 늘 민감한 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요,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삶의 원칙입니다.

 

가끔 작은차 타고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을 볼수 있습니다. 간혹 작은 평수의 아파트나 상대적으로 작은 수입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따금 병든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목회자로써 간곡히 말씀 드립니다. 그런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결코 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절대로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정직하고 진실되이 산 결과가 가난이요 육체의 연약함이라면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크나큰 자랑거리입니다.

정작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뇌물이요, 탈세요, 불의요, 까닭 없는 분노요, 무절제한 탐욕이요, 무분별한 이기심이요, 이유 없는 분열이요, 끝없는 다툼이요, 진리에서 벗어난 거짓된 삶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보다 더 큰 수치는 없습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엡 5:11-12)

 

정말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부끄러운 삶을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치 않을지 모르나, 오히려 그 부끄러운 것들로 더욱 큰소리치며 살지 모르나, 주님 앞에서는 반드시 수치를 당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나의 자녀인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자신을 갖게 되고, 다시 오시는 그 분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Ⅰ요 2:28)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끄러운 것과 부끄럽지 아니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주 조천 초등하교 6학년생인 안현숙양이 <우리 아빠>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동시를 썼습니다.

다섯 여섯 살적엔가

처음 알았다

아빠가 말을 못하신다는 것을

 

어디엔가 갈 때면

초라한 츄리닝을 입고

한마디 말도 못하시는 아빠가

정말 싫었다

 

그런데……

 

내가 손을 크게 다쳤을 때

정신없이 츄리닝을 입고

나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신 아빠

 

말은 못하고

아빠 등 뒤에서

엉엉 울어 버렸다

 

아빠가 말을 못한다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모습이든 나를 책임져줄 아빠가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였습니다. 오히려 그런 아빠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겨우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벌써 깨달았으니 이 소녀는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만약 소녀가 자신의 잘못을 수십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야 깨닫고 땅을 치며 통곡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다시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가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부끄러움과 부끄럽지 아니한 것을 구별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때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 같이, 우리 삶의 현장으로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며,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입니다. 한알의 밀알은 지극히 작으나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의 삶에 바른 원칙이 없었음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부끄러워했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에 오히려 당당했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것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바르게 구별하는 자 되므로 이 다음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참다운 그리스도인, 세상의 빛이요 소금 되게 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멘 ―

너희를 보내노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9∼23


오래 전 3개 부처의 장관을 역임한 원로께서 사석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각각 다른 부처의 장관을 세 번씩이나 했다고 해서 절더러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들 합니다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같은 사람을 발굴하여 적재 적소에서 활용하신 대통령께서 위대하셨던 겁니다."

훌륭한 지도자란 숨어있는 인재를 발굴하여 중용할 줄 아는 자라는 의미에서 그 분의 말씀은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다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 그 분은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실은 대통령보다 더 위대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절 이렇게 만들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저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수십년 전 중국 땅에서 죽어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정녕 위대하십니다. 그 원로의 말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때에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20대에 암흑 속에서 허랑방탕하던 저를, 30대 중반까지 쓰레기 같은 삶을 살던 저를 오늘의 저로 가꾸어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아니셨던 들 오늘도 저는 어디에선가 저의 귀한 인생, 생명을 덧없이 탕진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 아니셨더라면 제 아내나 자식들은 어디선가 저로 인해 남몰래 괴롬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는커녕 오늘도 저로 인해 수많은 영혼들이 저와 더불어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정말 위대하시다는 그 원로의 말씀에 저는 100%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위대하신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두려움에 떨며 문들을 걸어 잠근 채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신했던 인간같잖은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 배신자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평강을 부어 주셨습니다. 생각할수록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 21절을 통하여 주님의 더욱 위대하심을 발견케 됩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배신자였던 그들에게 평강을 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하여 당신의 제자로 변함없이 중용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여전히 허물투성이지만, 여전히 문제 덩어리지만, 그러나 당신의 제자로 계속 신뢰해 주시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위대한 주님께서는 그들을 교정시켜 주실 능력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사도들의 행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핍박이나 환란은 물론이요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도들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위대한 분은 한때 형편없는 배신자들을 그런 사도로 만들어 주신 주님이셨습니다.

그 위대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주님이심을 알고 계십니까? 그 위대하신 주님께서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하셨습니다. 그 분 아니셨던 들 우리 같은 죄인이 어찌 이 구원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위대하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중심이 그 분을 향하는 한, 앞으로도 우리를 계속 가꾸어 가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 위대한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 그 은혜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위대하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가꾸시며, 어떻게 역사해 가시는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것은 한 특정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 모두의 공통된 고백이 될 것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교육전임을 맡고 있는 김효숙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저를 이 자리에 세워주시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는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저는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드러나는 모나고 형편없는 부분들을 하나님께서 갈고 닦으셔서 겨우 세움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막내 아들을 얻기 위해 4명의 딸을 먼저 얻으셔야 했던 부모님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아버님께선 첫째 딸도, 막내 딸도, 그렇다고 귀하게 얻은 막내 아들도 아니지만, 유난히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았던 셋째 딸인 저를 특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선 다른 식구들이 미처 가보지 못한 멋진 곳에도 자주 데려가 주셨고, 매일 저녁 간식을 사들고는 으례 저를 먼저 찾으시곤 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님께선 다른 형제들을 생각해 아이들을 편애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게 되었음에도, 아버님께선 어머님과 다른 형제들이 모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른 형제들보다 더 많은 용돈과 그 위에 사랑을 얹어 주셨습니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저는 다른 형제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채 아버지의 편애를 즐기기만 하던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장자만이 입을 수 있었던 채색옷을 입고 마냥 즐거워했던 요셉처럼 말입니다.

또한 어릴 적 저의 모난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제가 사용하고 난 공책입니다. 제 공책은 어느 것 하나도 처음 살 때 만큼의 양이 남아있질 않았습니다. 글자모양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두 글자 이상만 지운 흔적이 있어도 그 한 장 전체를 찢어버리는 이상하리만큼 완벽주의적인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해서 제가 사용한 공책들은 대개 10장을 넘기지 못한 채 남겨졌습니다. 그 완벽주의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모양으로까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모난 저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릴 때면 또 한 곳 생각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마당입니다. 동네에 넓은 뜰이라곤 교회 뒷뜰 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레 매일같이 해거름이 질때까지 교회 뒷뜰에서 놀았습니다. 또한 이렇듯 교회에 자주 가다보니 교회학교 발표회가 있을 때엔 항상 주역을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이기적이고 완벽주의 적인 성격에 사람들의 시선과 칭찬을 받게 되면서부터는 점점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적으로 저는 또래들 보다는 저를 인정해주는 선배들이나 어른들과 어울리는 것이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저는 적어도 또래의 친구들 보다는 훨씬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수준이 맞지 않는 또래들 보다는 윗사람들과 사귀려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고 1 겨울방학 때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는 무엇보다도 성령체험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고, 그로인해 산상기도와 수련회를 목적으로 한 기도원행이 잦았습니다. 그때 저는 또래들이 가는 겨울등산이나 기차여행이 아닌, 어른들과 선배들이 참여하는 기도원행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또한 또래들보다 우월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교만함에서 비롯된 선택이었습니다. 무엇에도 지기 싫어했던 저는 은혜받는 데에도 지기 싫었습니다. 해서 집회장소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맨 앞자리까지 갔습니다. 집회를 인도하시는 목사님께선 늘 들었던 그 말씀을 전하시기 시작해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런데 그토록 익숙하게 들었던 그 말씀이 들려오자마자 제 눈과 마음 깊은 곳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시작된 눈물인지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바로 너를 위해 내가 죽었단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지 않는 이기주의자, 자신을 해치며 다른 사람들까지 위협하는 완벽주의자, 무엇보다도 자신만을 섬기는 너를 위해 내가 죽었단다. 그러한 네 모습까지도 사랑하기에 내가 죽었단다."

그때 저는 몇 천 명이 앉아있는 그 큰 홀의 사람들이 다 들을 것 같은 소리로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그 이전에도 그토록 울어본 적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제 인생에서 단 한 번 있을 울음이었습니다. 얼마를 정신없이 울다보니 제 마음속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나 같은 사람까지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겠노라고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이후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주어지는 봉사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것조차 욕심스럽게 감당해 갔습니다. 봉사의 기회가 전혀 없어 교회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에도, 그저 교회에 가 의자라도 한 번 쓸고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학학력고사 전 날까지도 학교 도서관에서 몰래 빠져 나와 성가연습을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유롭고 넓은 세계인 대학생활이 시작되었고, 그 생활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제는 제 스스로 무언가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 삶의 방향은 뒤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비롯된 눈물이 제 교만의 탑을 녹이는가 싶더니, 다시 그 탑엔 하늘을 찌를듯한 교만의 벽돌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외형적으론 아직도 주일성수하고 봉사많이 하는 별 문제없는 모범적인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러 기독교 서클엔 가지 않으려고 애썼고, 마치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도 애매한 약속을 하여 몇 번을 교회에 가지 않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마음 한 켠엔 끊임없이 자유를 넘어선 방종으로의 욕구가 있었고, 또 다른 한 켠엔 그러한 방종으로 인한 무거움이 점점 더해 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4학년 2학기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교수님의 연락을 받고 찾아 간 저는 거의 하나님의 뜻같은 돌파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졸업생 중 단 한 명만이 채용될 수 있는 아동학과 부설 유아원에서 교사로 일하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졸업도 하기 전에 취직이 된 셈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서원한 것을 잊어 버리기에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을 그럴듯하게 변명하고 도망치려는 저에게 유아원 교사로 있었던 10개월의 기간은, 마치 큰 물고기 뱃속에서 철저히 고독해야만 했던 요나의 시간과도 같았습니다.

더 이상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그 해 여름, 유아원 방학을 이용해 고 1 겨울방학 때 하나님을 만나 서원기도 드렸던 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서원의 짐을 내려놓고 와야만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 여름의 굵은 소나기가 천둥 번개와 함께 세차게 내린 날이었습니다. 평소 천둥 번개가 칠 때면 이중 창문을 잠근 채 커튼을 치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쓴 후 생각나는 잘못들을 다 아뢴 후에야 잠들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 그토록 무섭게만 느껴지던 천둥 번개가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굵은 소낙비를 맞아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마치 하늘을 향해 결판이라도 내려는 듯이 산 위에 앉아 그 비를 다 맞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어릴 적, 철도 들지 않고 사고의 폭도 좁았던, 아무런 세상경험도 하지 못했던 그때의 서원을 제발 잊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하늘이 맑게 개이면서 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었단다."

그 음성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은 국자였습니다. 절대로 모양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튼튼한 쇠국자였습니다. 그 환상을 본 제가 하나님께 드린 첫 마디는 "저라구요. 하나님?"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만약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갈 나의 인생을 그릇으로 표현하신다면 아무렇게나 사용되거나 값싼 그릇이 아니라, 귀한 잔치에서만 볼 수 있는 고급 그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이기적인 마음과 교만함이 빚어낸 환상의 그릇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 순간적으로 불평했습니다.

"어째서 제가 제대로 된 그릇에 속하지도 않는, 또한 혼자서는 절대로 귀한 음식을 담고 있지도 못하는 바보스런 국자란 말인가요?"

저는 그 당시 국자란 저의 삶의 형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 배신하신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응답을 잘못 받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또한 저를 만드신 하나님 보다 오히려 제 자신에 대해서 만큼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의 확신이었습니다. 불평 가운데 기도를 마친 저는 어릴 적부터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선배에게 그 기도응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들은 선배는 "결국 하나님께서 너를 쓰시겠다는 거로구나"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서 제가 가지고 있던 환상의 그릇을 깨시고 국자를 보여주신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국자는 귀한 음식들, 귀한 그릇들이 놓여있는 곳에는 꼭 필요한 도구입니다. 이 국자는 혼자서는 제대로 설 수도 없는 볼품없는 그릇이기에 반드시 주인의 손이 닿아야만 사용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자는 생명을 살리는 음식을 담고 있는 것으론 아무 의미가 없는 그릇입니다. 다만 귀하게 놓여있는 그릇 속에 주인이 담아주는 생명의 음식을 담아 그 그릇에 옮겨주는 도구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제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혼자서는 볼품없지만 하나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인생,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음식을 그릇 그릇마다에 옮기는 국자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을 가지고 산길을 내려온 저는 유아원 교사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곤 3개월 후에 있을 신학대학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야할 길이 어떤 길인지, 제 몫의 인생그릇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장신대 도서관을 매일같이 다니며 하루 14시간씩 공부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3개월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은 시간이었기도 하지만, 그 당시 다른 신학생들은 도와줘도, 이미 아들을 서원기도 드린 상태에서 당신의 딸마저 목회자의 길을 걷게 할 수 없다는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라도, 그 해에 꼭 합격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원하는 일, 제가 결정하는 일이라면 한 번도 가로막거나 반대하지 않으셨던 아버님마저도, 이 길만은 가지 말라고 만류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버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대셨습니다. 저를 도와줄 마지막 분이셨던 아버님마저 포기하라고 하셨기에 저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제 곁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고, 그 고독함 때문에 그때처럼 제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곁을 한번도 떠나신 적 없으시고, 버리시지도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저는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하심과 신실한 인도하심 가운데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신학수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학수업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선 참 값진 깨달음과 귀한 만남의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깨달음 가운데 가장 절실했던 것은,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얼마나 많은 불신앙의 모습과 연약함이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더불어 그 사람을 날마다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이 얼마나 성실하신지, 또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신대원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신학수업과 더불어 어느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사역을 시작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저의 모난 부분들을 다듬어가시는 속도는 더 빨라졌고, 그로 인한 성숙의 아픔도 더해 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도로서 모양을 갖추기 위해 부수고 깨어내야 할 부분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교역자로서 준비되어야 하는 어려움에, 그때까지 전혀 겪지 않았던 여성으로서의, 여성교역자만이 겪어야 할 일들 또한 있었습니다. 어릴적부터 외아들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였고, 교회에서나 학교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불공평한 대접을 받아본 일이 없었는데, 오히려 사역하면서부터 그 불공평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공평한 일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 교육전도사들이 저녁예배 전 찬양인도를 맡기로 한 교육회의결과에 따라 제 순서가 되어 찬양인도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여교역자를 본당의 단 위에 세운 일이 없는 그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저는 그 날 이후 다시는 찬송인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끊임없이 비참해지는 저 자신이 불쌍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전 그 일로 설 자리도 없는데 왜 제게 신학을 하게 하셨고, 또 이곳에 세우셨는지에 대해 밤새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힘든 그 밤을 보내고 다음 날이 되어 저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 1 남선교회 회장님이었습니다. 전화의 내용은, 어제 찬양인도할 때 너무 나 큰 은혜를 받았으니, 이번 주에 있을 1 남선교회 주최 철야집회 때 찬양만을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한 찬양의 달란트를 받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는 저에게 그 전화는, 네 혼자서가 아니라 내 손에 붙들여야만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위로의 전화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쌓였던 교만의 탑이 높았던 만큼이나 저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더 많은 계단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물론 때때로 닥친 어려움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한 뜻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시듯, 의롭지 못한 사건들과 사람들을 만나게 하심으로도 저는 또 부수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축하를 받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그 다음 주일의 일입니다. 교회로부터 다른 사역지를 알아보라는 일방적인 통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결혼을 했으니 아기를 낳을텐데 교회가 산후휴가를 주는 비효율적인 운영은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후 여교역자 모임에서 많은 교회들이 여성교역자들의 능력을 인정해 청빙하면서도 산후휴가는 주지않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 일이 계기가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빈틈없는 예비하심 가운데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딸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만이 아니라 맡겨진 모든 아이들의 영적인 엄마가 되는 좀 더 넓은 가슴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제게 주어진 시간과 주어진 건강, 주어진 삶의 여건들이 PART TIME사역자로서 헌신하기엔 너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선 주님의 교회에서 전임사역자로 일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한 집안의 며느리, 한 가정의 주부, 한 아이의 엄마로서 전임사역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재철 목사님과 여러 동역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참된 종으로서의 자세를 배우고, 또 성도님들과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사랑을 나누는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전임 사역자로 온전히 헌신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고,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 달 전 쯤 아버님께서 소천하시던 날 새벽의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소천하시기 그 전날, 다음 날 새벽기도 인도를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 저는 급한 전화벨 소리를 듣고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아버님께서 호흡곤란을 일으키셔서 응급실에 계시다는 연락이었습니다.

막 CT촬영을 마치고 실려 나오시는 아버님은 호흡곤란과 허리통증으로 매우 고통스러워 하고 계셨습니다. 평소 혈압이 높으신데 심적 스트레스가 겹쳐서 심장의 대동맥이 파열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가 몸 속으로 계속 흐르고 있는 상태여서 수술도 불가능하고, 상태가 어떻게 진전될 지는 아무런 예측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스러워 하시는 아버님 곁에서 이제까지 못했던 이야기도 드리고 싶고, 함께 기도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밤새 병원에 있던 저는 그 날 새벽기도를 인도하기 위해 눈물을 닦고 교회로 떠나 와야 했습니다. 전임 사역자로서 저는, 개인의 일들을 접어둔 채 하나님의 일들에 우선적으로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되어 새벽기도를 인도하기 위해 예배실로 올라가려는 바로 그때에 교회 전화벨이 또한번 급하게 울렸습니다. 아버님께선 제가 교회로 떠나오자 얼마 후 임종하셨다는 연락이었습니다. 마음같아선 서둘러 가서 아버님의 마지막 온기남은 손이라도 잡아보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서둘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아버님의 영혼을 부탁드립니다"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예배실로 올라갔고, 이제껏 살아오면서 키웠던 온 힘을 다해 눈물을 참으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겨우 새벽기도를 마친 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으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이미 따뜻함이 남아있을 마지막 모습조차 볼 수 없는 냉동실에 안치되신 상태였습니다. 며칠 후 하관식을 마친 그 날, 식구들은 그제서야 제게 물었습니다. "왜 그 날 빨리 오지 않았느냐고." 식구들은 임종소식을 들은 제가 서둘러 올 줄 알고 병원측의 양해를 얻어 40분이나 중환자실에서 시신을 둔 채 기다렸던 것입니다. 아버님이 특별히 사랑하셨던 저로 하여금 아버님께 고맙다고 말씀을 드릴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안타까움이야 세상에 있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이 큰 것이지만, 저는 제게 여전히 괜찮다고 하시며 웃으실 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살아오는 동안 어느 것 하나도 반대치 않으셨던 아버지, 그러나 사랑하는 딸이 너무 고생스러울까 목회자의 길만은 반대하셨던 아버지께서 끝내 묵묵히 바라보시다가, 엊그제 추석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언제 목사고시 합격자 발표가 나느냐는 물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딸의 고생스러움이 마음아파 묵묵히 계실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 그러나 딸의 길이 바로 그 길임을 받아들여야 하기에 더 열심히 하길 바라셨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서야할 그 자리를 지키고 내려오느라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을 결코 섭섭해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계셨던 이 땅의 자리는 이제 비어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의 자리엔 오히려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소망은 아버지께서 이 땅에서 다하지 못한 아버님의 사랑의 몫을 아버님께 가장 많은 사랑의 빚을 진 제가 감당하며 살아가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저는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형제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아버지의 사랑만을 즐겼던, 세상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해치면서까지도 완벽하려 했던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별 볼품없으면서도 하늘 찌를 듯한 교만의 탑을 쌓아온 사람입니다. 그토록 저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것에 머무르기만을 좋아했던 형편없는 저를, 하나님께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한 생명의 양식을 나르는 국자인생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선 앞으로도 결코 쉬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의 부족함을 날마다 가르치고 고치시면서 저를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선 저를 이 자리에 세우셨듯이 바로 성도님들 또한 지금의 삶의 자리에 세우신 것입니다. 저를 세우고 보내신 하나님께서 그 열심과 신실함으로 성도님들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성도님들을 통해선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일들이 펼쳐지겠습니까?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허물투성이지만 위대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이 그 분을 향하는 한 날마다 우리를 가꾸어 주시고, 우리를 통하여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허물투성이인 저희들을 주님의 제자로 인정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부족하지만 위대하신 주님께서 날마다 교정해 주시고 가꿔주시기에 오늘도 저희들은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들의 중심이 늘 우리를 우리 삶의 자리로 보내신 하나님을 향하게 하셔서, 지금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 멘.

평강이 있을지어다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9∼23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사흘째 되는 안식일후 첫날, 즉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8주 동안 그날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뜻밖에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막달라 마리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녀의 삶 자체가 부활과 복음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같은 그녀의 삶이 얼마나 밝고 빛났을런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날 곧 안식후 첫날 저녁때에"(19a)

 

안식후 첫날 저녁이란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막달라 마리아가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며 기쁨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을 시각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본문은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19b)

 

그들은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마가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두려워서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제자였던 자기들에게도 위해를 가할까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겁을 먹고 있었던지 그들은 `문들을 닫고' 있었다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닫았다'는 동사 kle o는 걸어 잠구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하나의 문만을 잠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중 혹은 삼중으로 된 문들을 그들은 겹겹이 걸어 잠구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공포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믿지 않았을 때, 그 결과는 참혹한 두려움뿐이었습니다.

다락방에 숨어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과 집밖에서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증거하며 다니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비교하여 그려 보십시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란 호칭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막달라의 창녀였었다는 전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느냐 아니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아니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이처럼 엄청난 차이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걸어 잠군 것은 단순히 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걸어 잠구었던 것은 실은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마음의 빗장을 치고 있었습니다. 빗장 쳐진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불안과 불신만이 판을 치는 법입니다.

신앙이 무엇이겠습니까? 두려움의 빗장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의심과 불신의 문을 열어 젖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어 두려움과 불안과 불신의 빗장을 걷어내시고 밝은 세상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19c)

 

마침내 주님께서 제자들의 굳게 닫힌 내적·외적 문들을 친히 열어 주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찾아오시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굳게 닫힌 문들을 열어 달라고 두드리시지를 않았습니다. 손수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문을열어 주지 않는다고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의 한 가운데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나 자신이 어떤 이유로 인해 두려움에 떨며 문을 겹겹이 걸어 잠근 채 다락방에 숨어 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내가 문을 열어 준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은 여전히 꽁꽁 닫겨진 채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누군가가 그 방안에 나타난다면 기겁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임에 그것은 귀신임이 분명한 까닭입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굳게 문이 닫혀진 방안에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그들의 두려움은 배가 되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누가복음 24장 37절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표현을 점잖게 해서 `영'이지 사실은 제자들이 `귀신'인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잖아도 겁에 질려 있는 제자들이 갑자기 나타나신 주님을 귀신이라 여겨 질겁을 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귀신의 특성은 몸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귀신이 아니셨습니다. 분명히 손과 발, 몸을 그대로 갖고 계셨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일깨워 주심으로써, 제자 가운데 계신 이는 귀신이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직접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문을 두드리시지 않았습니까? 왜 문을 통해 들어오시지 않고 갑자기 나타나시어 제자들을 더더욱 놀라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공연히 제자들을 골려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제자들의 심령에 분명히 각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 지금 이 방의 모든 문들이 이중삼중으로 겹겹이 잠겨 있다고 치십시다. 이 방안에 있는 누군가가 방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밖에서 부수지도 않고서 귀신이 아닌 누군가가 이 방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뿐입니다. 20년전, 이 건물이 세워지기 전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때는 이곳이 허허벌판이었습니다. 그 벌판 위에서 이 방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에 섭니다. 그리고 다시 오늘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면 문은 잠긴 채 그대로이지만 그는 이 방에 서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실 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귀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분명히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체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두드리시거나 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방에 나타나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인식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 당신을 가리켜 그토록 즐겨 사용하시던 `인자(人子)'―즉 `사람의 아들'이란 호칭을 부활 후에는 다시는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시공을 초월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본문 19절 종반절은, 시공을 초월하여 제자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첫마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d)

 

여기에서 평강이란 단어 `에이레네'는 히브리말 `샬롬'을 옮긴 것으로 그 뜻은 `평안' `평화' `화평' `평강'이란 의미입니다. `샬롬'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거나 헤어질 때 보편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만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저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귀신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21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a)

 

주님께서는 또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똑같은 인사말을 연거푸 두 번 하는 경우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본문 26절 역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8일 후에도 문들이 걸어 잠긴 방안에 시공을 초월하여 나타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그때에도 역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기를 원하셨던 것이 평안이었음을 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두려움과 불신과 불안에서 벗어나 그들의 심령 속에 참된 평강이 충만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참믿음의 사람이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강의 사람이어야 함을 일깨워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평강의 원천은 누구십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데 어떤 상황에선들 어찌 평강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앞에,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우리의 평강을 앗아갈 상황이 어찌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어찌 그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믿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건 평강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두려워 문을 이중 삼중으로 걸어 잠구고서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면서 그들에게 평강을 부어 주셨을 때 그들은 굳게 잠겨 있던 문을 비로소 활짝 열어 젖힐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두려움의 문, 불신의 문, 불안의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골방에서 뛰쳐나와 이 평강을, 진리의 평안을, 참생명의 화평을 전하는 평강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떨던 베드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바울이 이 글을 쓸 때에 그는 로마의 감옥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로마의 감옥은 2중 3중으로 철문이 굳게 닫겨져 있었습니다. 지하에 있던 감옥은 암흑천지였습니다. 먹을 것이 제대로 제공될 리도 없었습니다. 모든 여건이 지옥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바울은 평강을 간직한 평강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철문이 겹겹으로 잠겨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암흑천지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기를 찾아와 자기 곁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성자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의 평강을 빼앗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생각해 볼 때에 저와 여러분 중 누가 지금 현재 더 평안하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여러분입니다. 저는 겨우 두 발만을 밑바닥에 맡긴 채 서 있는 반면에 여러분들은 저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의자에 맡기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앉아 있는 것보다 더 평안스런 자세가 있습니다. 아예 방바닥에 드러누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안식을 위하여 잠을 잘 때 서거나 앉아서 자는 경우가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드러누워서 잡니다. 그것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평안한 자세인 까닭입니다. 드러눕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온몸을 남김없이 온전히 방바닥에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을 바닥에 많이 맡기면 맡길수록 우리의 몸은 더 평안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닥을 믿지 못하면 우리를 맡길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이 강단이 곧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면, 저는 지금 두 발을 강단에 맡긴 채 평안스레 서 있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곧 의자가 쓰러질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평안히 앉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지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자는 평안히 누워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바닥에 많이 맡길수록 평안하지만 그것은 바닥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바닥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몸의 평안은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똑 같습니다. 하나님께 많이 맡길수록 우리는 평안을 얻습니다. 작게 맡길수록 우리는 그만큼 고통과 괴롬을 더 겪어야만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만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하나님의 온전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호텔방 옷장 안에 조그만 금고가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귀중한 것은 그 속에 넣어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안에는 언제나 이런 경고문이 놓여 있습니다.

`더 귀중한 것은 호텔 프런트에 있는 금고에 맡기십시오. 호텔 프런트에 맡기지 않은 물품에 대해서는 분실시 책임지지 않습니다.'

맡긴 것만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맡길 수 있는데도 호텔주인을 믿지 못해 귀중품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밤낮 불안해하는 투숙객이 있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잠시 이 세상에 투숙하고 있는 여행객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맡기는 만큼만 평안합니다. 그 분께 맡긴다는 것은 그 분이 결과를 선하게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어떤 상황 속에서건 그 분의 법도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맡길려면 손과 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맡기십시오. 평강의 하나님께서 평강의 삶으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 27)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문을 꼭꼭 닫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에게 평강을 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평강의 주님이시요, 전능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나 자신을 맡기는 자 되게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모든 두려움과 불안과 불신의 빗장을 열어 젖히고, 주님과 더불어 참 평강의 삶을 누리게 해 주시기를 평강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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