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말씀하셨다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1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뜻하지 않게도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뵈므로써 영광스런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일을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18)

 

막달라 마리아는 그 길로 제자들을 찾아가서 두 가지 사실을 고했습니다. 첫째는 `내가 주를 보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두 문장은 화법 상으로는 모두 직접 화법입니다. 직접 화법이란 문장이나 언어 표현에 있어 남의 말을 재현할 경우 그 사람의 말을 직접 그대로 되풀이하는 표현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요한복음의 기자인 요한 사도는 본문을 직접 화법 아닌 간접 화법으로 기록하였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를 보았다는 것과, 주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본문과 같은 원문을 놓고 직접 화법으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간접 화법으로 번역할 것이냐 하는 것은 순전히 번역 기술상의 문제일 뿐,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개역 성경이 간접 화법인 원문을 직접 화법으로 번역한 것은 오류가 아닙니다. 아니 오류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정말 탁월한 번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을 직접 화법으로 번역하므로써 간접 화법일 때에는 깨달을 수 없는, 신앙의 참된 의미를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의 말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내가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말은 다음과 같이 끝났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고 말할 때 주어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할 때 주어는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주님께로 이미 옮겨가 있습니다. 주어란 모든 단어의 으뜸이 됩니다. 뒤에 아무리 많은 단어가 동원되어도 그것은 모두 주어를 위한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을 주어로 삼았다는 것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된 것이고, 주어를 주님으로 옮겼다는 것은 주인을 주님으로 바꾸었음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참된 모습, 참된 신앙의 바른 진행 과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를 주어로 삼는 삶으로부터 주님을 주어로 삼는 삶으로 중단 없이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고, 자기 말이 아니라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19b)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것이 악일 뿐만 아니라 고통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를 경외치 않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내 인생의 주어로 삼는 것입니다. 그같은 삶은 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주어가 되어서는 결코 진리 안에 거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내가 내 자신의 주어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진리밖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주어가 되는 것은 악일 뿐만 아니라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근심이 끊일 날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주님을 내 인생의 주어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자신이 주어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빈 무덤을 떠나지 못한 채 그 앞에서 하염없이 통곡하고 애곡하던 막달라 마리아가 문득 몸을 구푸려 무덤 속을 다시 들여다보았을 때, 그 곳에 두 천사가 보였습니다. 천사가 막달라 마리아를 향하여 왜 그처럼 울고 있는지 연유를 물었을 때에, 그녀는 13절을 통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3b)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이때도 주어는 막달라 마리아 자신이었습니다. 도대체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한치 앞을 알기를 합니까, 죽을 날을 알기를 합니까? 인간이 안다는 것은 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요,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윽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시어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는지 물어 보셨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15절을 통하여 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b)

 

이때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주어였습니다. 자신을 주어로 떠받들고 있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서도 동산지기, 즉 묘지관리인으로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겠답니다. 만약 있다면 가져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다시 정중하게 장례식을 치루어 드리고 매일 묘지 앞에 꽃이라도 가져다 놓겠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해서야 그가 어찌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주어가 되어서야 막달라 마리아는 구원도 생명도 없는, 계속되는 근심과 괴롬의 고통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어가 자신에서부터 주님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주님을 자신의 주어로 삼았을 때에 모든 악과 온갖 고통으로부터 진정 자유 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주어로 삼는다는 것은 자기 부인과 동의어요, 자기 부인이란 참된 신앙의 첫걸음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한 곳으로 데려 가리라."(요 21:18)

 

여태것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주어로 삼아 왔지만, 이제부터는 주님을 주어로 삼지 않을 수 없음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주어였을 때 그의 몸은 주님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부인하는 죄악과, 그 죄악의 고통으로인해 통곡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주어로 삼았을 때에 그는 이렇게 외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회개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주어된 삶에서 돌이켜 주님을 주어로 삼는 것입니다. 그때 모든 악과 고통의 족쇄에서 풀려나 비로소 유쾌한 인생을 구가할 수 있음을 베드로는 확실히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 오호로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3~24)

 

여기에서 `곤고하다'는 것은 `비참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학식과 경력과 의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지만, 자신이 자신의 주여 였을 때 그는 결코 죄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자신의 주어를 바꾸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 20)

 

이처럼 바울이 자신의 주어를 확실하게 바꾸었을 때 그의 탄식은 발붙일 곳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주님께서 바울의 주어 되어 주실 때 바울은 참 생명과 자유와 구원의 기쁨을 진정으로 구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죽기 직전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율법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 2∼3)

 

한마디로 무슨 말입니까? `네가 네 자신의 주어가 되지 말고 주님을 주어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자신을 주어로 삼는 삶이 얼마나 패역한지 다윗은 스스로 경험해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8월 말 우리 교회 정선일 집사님이 출연한 `가마솥에 누룽지'란 제목의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가마솥의 누룽지처럼 자신의 삶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진리로 구수하게 일구어 주는 한 크리스천 할머니가 연극의 주인공입니다.

남편을 일찍 여윈 할머니는 남편이 남기고 떠난 집에서 하숙을 치면서 살아 갑니다. 처음 그 집에 하숙방을 얻어 들어오는 사람들은 할머니의 까다로운 규칙과 간섭에 당황해 하지만 함께 생활해 가는 가운데 할머니로부터 참된 사랑과 삶의 의미를 배우게 되는 내용입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예전 할머니 집에 일을 도와주던 여인의 출산을 돕기 위해 집을 비우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밤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게된 하숙생들은 그 집의 금기 사항인 술판을 벌리게 됩니다. 하숙생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할머니가 귀가했을 때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술병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만취한 하숙생들은 여기 저기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본 할머니가 이런 독백을 합니다.

"너희들 예수쟁이들 욕하지만 욕할 것 하나도 없다. 이 세상에 예수쟁이들이 없어 봐라. 세상이 이런 난장판밖에 더 되겠어? 그래도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지탱되는 것은 다 예수쟁이들 덕분인줄 알아!"

쓰러진 하숙생들, 그리고 그들 한 가운데 서서 독백을 되뇌는 할머니―그 광경이야말로 이 세상의 실상과, 그리스도인이 이루어 가야할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신의 주어로 삼는 인생이란 결국 난장판이 되다가 어느 날 고목 쓰러지듯 쓰러지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주어로 삼는 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난장판 한 가운데에서 의엿하게 서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할머니가 난장판을 벌리는 다수의 하숙생들에게 휩쓸려간 것이 아니라, 엉망인 다수의 학생들이 한분의 할머니에게 동화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원칙이요 메시지입니다. 자신을 주어로 삼는 자들에 의해 세상이 얼마나 난장판이 될 수 있는지, 하나님을 주어로 삼는 한 사람에 의해 난장판인 세상이 얼마나 교정되어 질 수 있는지를 성경은 오늘도 웅변해 주고있습니다.

 

년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작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의 이전 투구를 보십시오. 참으로 한심한 추태들이요, 보기조차 고통스러운 작태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그들만의 행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 삶의 주어로 삼고 있는 우리 모두의 실상이라는데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정치판이 연극 `가마솥의 누룽지'의 하숙생들이 벌린 난장판의 확대판이라면,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일터는 오늘날 정치판의 축소판이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어로 삼고 있는 한, 그 하숙생들이나 한심한 정치가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진정 이 나라를 사랑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니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지혜로운 자라면 우리 모두 막달라 마리아가 되십시다. `가마솥에 누룽지' 하숙집 할머니가 되십시다. `내가 주를 보았다'에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로 우리 삶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바꾸십시다. 우리 모두 주어되신 그분의 동사 목적어 보어들이 됩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당하게 하십시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을 지배하게 하십시다. 우리 자신이 주어된 우리의 말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절대자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이 난장판 같은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소망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주어로 삼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 사람들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시기까지 친히 수술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에게, 내가 나의 주어된 내 자신에게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나 자신을 주어로 삼으므로 악과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치 않게 도와주십시오. 이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가는 주범의 자리에서 내려오도록 우리를 끌어 주십시오. 우리 모두 지금부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우리 삶의 주어로 삼는 지혜로운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을 주어 삼는 우리를 통해 주님께서 이 세상을 맑히시고 밝히시는 주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 아멘 ―

 

내가 주를 보았다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18


한 성도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주관되는 여러 행사가 나름대로 다 은혜스럽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초신자들을 위한 학습 세례식이라고 말입니다. 이유인 즉은, 만약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본래 불신자였던 그 분들이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주님의 교회'로 인해 이미 주님을 믿던 분들의 믿음이 더 성숙해진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가 미래 교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주님의 교회가 이 땅에 있어야 할 단 하나의 본질적인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이 땅에 많은 교회가 있는 가운데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하나 더 세우신 것은, `주님의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하실 영혼들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면 참 생명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자기의 생명을 갉아먹으면서 오랫토록 방황할 영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땅위에 또 하나의 교회인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 절대적인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절대적인 이유가 죄 가운데에서 죽어 가는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요한복음 20장 31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록된 성경을 주신 이유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 있는 교회의 절대적인 존재 이유 역시 이 생명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욕망과 탐욕에 찌들어 하루 하루 죽음을 향해 행진하고 있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생명의 한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행사중 초신자를 위한 학습 세례식이 가장 감동적이라는 그 성도님의 의견에 우리는 전적으로 동조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행위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겠습니까? 우리의 어떤 행동이 하나님께 가장 감동적일 수가 있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생명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진리로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생명을 주셨고, 교회를 주셨고, 가정을 주셨고, 일터를 주셨고, 무엇보다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이 생명의 증인, 이 생명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에 따라 우리 생명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응당 그곳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으므로 인하여 무덤 앞에서 통곡하고 애곡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측은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친히 나타나셨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은 상상치도 못한 채 단순히 묘지 관리인인줄만 알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다정스레 불러 주셨습니다.

"마리아야!"

그제서야 막달라 마리아는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는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지에 대하여는 지난 주일 상세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은 그 이후의 일을 이렇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막달라 마리아는 그 길로 제자들을 찾아가 외쳤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달라 지방의 천한 창녀였던 마리아는 이 이전까지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주님을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창녀였던 자신이 주님을 만나므로 인하여 주님으로부터 얻게 되었던 평안, 위로, 소망, 새 삶으로 인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이 순간부터 타인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을 깨트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녀는 거침없이 생명의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기에 주님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막달라 마리아는 본문 18절을 끝으로 요한복음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이 이 이후 막달라 마리아가 어떻게 여생을 보내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치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카메라의 촛점이 막달라 마리아에서 제자들에게 옮겨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여생을 어떻게 살았겠는지를 보여주는 실례가 이미 요한복음에 소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수가성에 살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5명이나 되는 여자였습니다. 말하자면 창녀였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를 바가 조금도 없는, 비천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어느 날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야말로 유대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구원자 되신 메시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임을 알았습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마치 시체와도 같이 부패했던 그녀의 삶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신 참 생명의 능력과 기쁨을 그녀는 자기 홀로만 간직하고 있을 수가 도저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28절로 30절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리에 들어가서 사람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리에서 나와 예수께 오더라."

 

여인은 물동이를 우물가에 버려둔 채 동리로 뛰어 들어가 외쳤습니다. 그 요지는 바로 두 가지였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고 그 생명을 증거 했을 때 동리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한번의 증거로 만족하고 증언을 그쳐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 39절이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 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그 여인은 한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계속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로 인하여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의미에서 한때 사람 같잖았던 이 여인은 누구보다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셈입니다.

 

이 수가성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여생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수가성 여인이 그 정도로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해내었다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 증인이 된 막달라 마리아야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날 이후 그녀는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본래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던 창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을 살리는 생명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그 변한 참 생명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왔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그녀의 여생이 얼마나 값지고 보람되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녀야말로 진정한 교회요, 참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즐겨 행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부터 7절에 걸쳐 답변해 주고 계십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100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길을 잃고 죽음의 벌판을 방황하는 양 한 마리를 찾아내는 것,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죄인 한 명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 내는 것, 즉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하여 계곡 낭떠러지마저 마다 않고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숭고하고 거룩한 사랑의 모습입니까? 내가 참 생명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거룩하고 숭고한 사랑의 사람으로 가꾸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올 초에 한 구역장님이 이색적인 제의를 했습니다. 자기 구역에는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는 가정이 여섯 가정인데, 이 여섯 가정이 이런 목표를 세웠답니다. 올해 내로 각 가정이 반드시 한 가정씩을 주님께로 인도하기로 하고, 그 목표가 달성될 때 자축연을 갖기로 했는데 그때 꼭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목표의 달성 여부를 떠나 그 뜻 자체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대답했습니다.

지난 주초에 그 구역장님이 찾아 왔습니다. 여섯 가정으로 출발한 구역이 목표를 초과하여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는 가정만 17가정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분의 말을 들으면서 그 구역식구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몇달동안 6가정이 17가정으로 늘어나기 위해서는 구역식구들이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모두 한 마음 한 믿음을 갖지 않고서야 한 가정도 빠짐없이 그 일을 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 믿지 않는 가정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 구역식구들이 얼마나 본이 되는 삶을 살았겠습니까? 본래 6가정의 삶이 전혀 그리스도인 답지 않았다면, 불신자들이 볼 때에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그 분들의 인도로 어찌 11가정이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왔겠습니까? 6가정이 수개월만에 17가정으로 늘어났다는 것은 바로 그 구역식구들이 생명의 삶을 살았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만이 생명을 깨웁니다. 생명만이 생명을 이끕니다. 생명만이 생명을 살립니다. 이제 월말이 되면 저는 그 구역의 자축연에 참석하여 그분들의 기쁨에 동참함과 아울러 그분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9절∼20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께서 오실 때에, 그 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표준새번역)

 

사도 바울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을 향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주님 앞으로 인도해 낸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한 사람들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요, 그것만이 자신의 삶을 숭고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길임을 사도 바울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들은 몇 사람이나 생명이신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 내었습니까? 하나님에게 자랑할 사람의 명단이 얼마나 됩니까? 혹 여러분에게 아직 하나님께 자랑할 명단이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주님의 진리와 생명을 입으로만 전할 뿐, 여러분의 삶으로 증명해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닙니까?

 

마태복음 25장에는 유명한 달란트 비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달란트를 나누어 준 뒤 세월이 흐른 뒤에 그 달란트로 얼마나 남겼는지를 셈한다는 내용입니다. 자칫하면 이 비유를 달란트의 양적 관점에서만 잘못 이해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본문과 전연 동떨어진 관점입니다. 마태복음 25장 전체의 주제는 `생명'입니다. 누가 참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지를 설명하시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 비유',`양과 염소의 비유',`마지막 심판 비유'와 더불어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달란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를 도구로 삼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흡을, 가정을, 일터를, 물질을 주신 까닭은 그 모든 것을 통해 사람을 살리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셈하실 때에는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 자체를 셈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달란트를 선용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렸는지 그 머릿수를 셈하시게 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최소한 비인격적인 물질 때문에 사람을 해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으며, 나아가 내게 맡겨진 모든 달란트를 동원하여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우리 삶 속에 실제로 적용해 보기 위하여 올 봄 각 구역에 20만원씩을 나누어 드렸고, 이제 그 마감일이 10월 말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더 많은 달란트를 남기는 사업적 수완을 배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모든 달란트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함입니다. 나의 궁극적인 관심이 사람을 살리려는 생명인지, 아니면 사람을 죽이려는 욕망인가를 가려보기 위함입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명단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 보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신앙 간증인지 아니면 불신의 웅변인지를 확인키 위함입니다.

 

"우리 주께서 오실 때에, 그 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내일이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과연 준비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정녕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지금부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자랑거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생명으로 살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참 생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달란트로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그 달란트때문에 오히려 사람을 해치는 우를 더 많이 범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관한 한 우리의 인생의 손익계산서는 언제나 붉은 적자 투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고 맡겨 주신 달란트로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람을 살리는, 진정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생명이신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우리의 삶 자체가 `내가 주를 보았다'`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생명의 간증이자 진리의 찬양이 되게 해 주십시오. 세월이 흘러 갈수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랑 거리가 쌓여 가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떠나가기까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도구 되는 삶보다 더 값지고 더 거룩하고 더 아름다운 삶이 없음을, 오직 그 삶만이 영원함을 망각치 않고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 멘―

 

만지지 말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18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0장 23절을 통해 이렇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신상(神像) 즉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십계명의 제 2계명이기도 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신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없는것보다 있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의 상을 지성을 다해 빚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 엄명하고 계십니까?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셨기에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신상 속에도 갇힐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만약 누구든지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 믿고 경배한다면, 그는 눈에 보이는 그 우상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만날 수도 알 수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은 신상이 서있는 그곳에만 존재할 것인즉, 그런 하나님은 무소부재의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신상이 사람의 모습이라면 그 하나님은 사람이상의 능력을 베풀 수 없을 것이요, 짐승의 형상이라면 짐승보다 나은 권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인즉, 그런 하나님이라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일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새긴 우상은 그 새겨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더러 깨라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 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8∼19)

 

따라서 당신의 어떤 신상이나 우상도 새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이야말로 이 세상 인간들로 하여금 당신의 참 존재를 바로 알게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침 참된 신앙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신앙이란 우리 자신들에 의해 잘못 만들어진 하나님의 우상과 신상을 끊임없이 깨어 가는 것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인들이란 하나님의 신상을 만들지 않는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 주위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가 하나님이라며 경배하는 하나님의 신상 우상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날마다 깨어가야 할, 우리 자신에 의해 잘못 빚어진 하나님의 우상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하찮을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경험이나 인식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라고 단정해 버리는, 그리고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지 않으려는 모든 잘못된 사고―이것이 우상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특정한 공간이나 시간 속에 묶어 두는 행동이나 생각 자체가 우상입니다.

이와 같이 형체가 없는 내적인 우상이 형체를 지닌 외적 우상보다 더 무서운 까닭은, 외적 우상은 만들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내적 우상은 우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서운 우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이처럼 우리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우상을 매일 깨어 가는 구체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무서운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손으로 외적 우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상숭배자였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신봉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앞장 설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심중에는 가공할 우상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잘 섬긴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중에 있는 우상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과 전혀 동떨어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을 지배하던 그 무서운 우상이 언제 깨어져 나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뵘으로서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시던 동안에 바울은 예수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다메섹을 향한 길 위에서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와 같은 사람의 형체가 아니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의하면 바울 앞에 나타나신 주님은 빛이셨습니다. 보통 빛이 아니라 바울이 며칠동안 눈이 멀 정도의 강하고도 찬란한 빛이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바울의 우상이 깨어져 나갔습니다.

만약 이때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사람의 형체로 나타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이 그동안 지니고 있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기존의 우상은 마음 속에 깨어졌을지라도,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님때문에 그는 또 다른 우상을 필히 심중에 만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두 눈으로 보았던 예수님의 형체 이외의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신다면, 바울은 그 분을 예수님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본 형체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늘 나타나시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도 몰래 예수님을 자신이 예수님을 뵈었던 그 시간과 공간 속에 가두어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울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에 사람의 형체가 아닌 빛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빛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빛이 있는 한 내가 어디를 가도 나는 빛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빛이 있는 한 그 빛은 계속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햇빛을 생각해 보십시오. 햇빛이 있는 동안 동서남북 어디로 가도 햇빛은 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전에도 오후에도 나와 함께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햇빛이 있는 동안 햇빛이 나와 함께 하긴 하지만, 그것은 햇빛이 있을 동안 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태양의 빛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태양이 빛을 발하고 있어도 내가 땅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 빛은 나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태양 빛 속에 거하기를 갈망한다 할지라도 밤이 되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날 바울에게 이와 같은 햇빛으로 나타나셨다면, 그 햇빛은 바울의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을 깨트려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햇빛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그 빛을 본 시간은 바로 정오 한낮이었습니다. 태양의 빛이 가장 눈부시게 빛날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바울은 햇빛과는 전혀 다른 빛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그 빛 앞에서는 햇빛이 어둠이 될 정도였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빛을 본 바울의 눈이 며칠이나 멀었겠습니까? 그 강렬한 빛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깜짝 놀란 바울이 땅에 엎드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다시 바울의 귓전을 때리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바로 바울에게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왜 주님께서 햇빛을 초월한 빛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까? 영으로 바울과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햇빛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언제나 바울을 품고 계심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바울은 과거의 특정한 공간이나 시간 속에서 자신의 경험이나 인식으로 빚어 두었던 하나님에 대한 내적 우상을 깨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빛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심중에 우상으로 가두어지실 분이 아니심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경험하던 간에,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종착역이 아니라 언제나 시발역이요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임을 터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돌로 쳐죽이던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날아오는 돌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돌이 날아오는 그 현장에도 주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며, 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영원한 빛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던들 있을 수 없는 변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응당 그곳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황급히 달려온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사실 확인만을 마친 뒤 그냥 집으로 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만은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못한 채 그 앞에서 통곡하며 애곡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몸을 구푸려 무덤 안을 다시 들여다보았을 때, 예수님의 시체가 뉘었던 곳에 흰옷 입은 두 천사가 한 명은 머리 편에, 또 한 명은 발편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리아를 본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그토록 슬피 울고 있는지를 묻자,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의 시신을 어디로 치워 버렸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등 위로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을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14)

 

인기척을 느낀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거기에는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 때문에 그토록 통곡하고 애곡하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고서도 예수님이시라 생각조차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던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전 모습이셨고 음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 즉 묘지 관리인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 순간 막달라 마리아는 심중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엉뚱한 우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은 반드시 시체로만 무덤 속에 누워있어야 된다는 우상입니다. 무덤 속에 시신으로 안장된 예수님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우상이었습니다. 그 우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16)

 

그때 예수님께서 다정하게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동산지기라면 마리아의 이름을 알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묘지관리인이라면 설령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처럼 허물없이 다정하게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막달라 마리아는 앞에 서 계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 순간에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반드시 시신으로 무덤 속에 누워 있어야만 한다는 우상이 마리아의 심중에서 깨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본문 17절 상반절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여기에서 `만지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붙잡고 늘어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을 때에 가만히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유독 `나를 붙잡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아 본 막달라 마리아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계속 예수님을 붙잡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당신을 계속 붙잡지 말라고 말씀하신 연유를 주님께서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셨기' 때문이라고 친히 밝히셨습니다. 이 구절을 그대로 놓고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승천하고 싶으셨지만 실패하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원문은 `못하였다'가 아니라 `안했다'는 것입니다. 승천하지 못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아 승천치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때로부터 40일 동안 더 이 땅에 계신 뒤에 승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본문의 참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못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고서 너무나 기뻐 예수님을 붙잡고 늘어 졌습니다. 다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앞으로도 너와 함께 있을 것인즉 이 순간에 집착하거나 머무르려 하지 말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 그치지 않으시고 17절 하반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형제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지금은 육신을 가지신 모습으로 너와 함께 있지만 그러나 때가 되면 몸을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승천하실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만약 이 말씀을 하시지 않았더라면, 막달라 마리아는 또 다른 우상숭배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이 나타나시지 않는 한 그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을 찾아 헤매느라 그녀의 남은 인생은 의미없이 허비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으므로 말미암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체를 뛰어너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을 포함한 이 우주를 품고 계신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향하여 `나를 만지지 말라'고하신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날 새벽이 막달라 마리아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 동안 막달라 마리아가 품고 있던 우상이 깨어진 날이요, 또 다시 태동될 수 있는 우상의 뿌리가 아예 발본색원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을 통하여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명령하시는 것은, 나아가 타종교의 신상을 부수어 없애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 우리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님에 대한 우상을 타파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예전에 경험한 은혜의 순간에 멈추어 서서 그 경험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특정한 시간 속에 가두어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하나님의 또 다른 측면을 체험치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실패한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부정하고 절망하고만 있다면, 나는 하나님을 성공이란 공간 속에 묶어 두고 있는 우상숭배자입니다. 그 우상으로 인해 실패의 현장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며 오묘한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느닷없이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절대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을 세상에 묶어 두려는 우상제조자입니다. 그 우상 까닭에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을 볼 수도 얻을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물이 멈추면 그 순간부터 물은 썩기 시작합니다. 시간 역시 멈춤 없이 흘러갑니다. 만약 누군가의 시간이 멈추었다면 그것은 그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한순간 멈춘다면 그것은 신앙의 죽음이요 우상으로의 전락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영원한 빛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 멈추어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한 순간의 은혜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예전에 체험한 은혜의 순간에 되돌아가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그 모든 은혜의 순간을 새로운 은혜를 위한 발판으로 징검다리로 삼으십시오. 날마다 우상을 깨어 가십시오. 그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서도 자기가 품고 있는 우상때문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막달라 마리아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때 쇠사슬에 묶여 로마의 토굴 속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삶의 기쁨을 노래했던 사도 바울을 닮을 수 있습니다.

참된 평안도 기쁨도 소망도 자유도 우상을 타파한 사람의 심령 속에만 둥지를 틉니다. 그 사람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빛으로 영으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의 품에 진정 품겨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동산지기인줄로만 알았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은 시신으로 무덤속에만 누워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우상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잘못된 우상을 친히 깨어주셨던 예수님! 오늘 아침 우리의 우상을 깨어주시기 위해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빛이요 영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모든 근심과 절망, 혹은 교만과 방종의 우상으로부터 진정 자유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시체 뉘었던 곳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18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을 때, 응당 그곳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세마포와 수건, 즉 수의만 그 곳에 잘 정리된 채 개켜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난 8월 넷째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시신이 도난 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셨음을 증명해 주는 부활의 증거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예수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남기신 예수님의 돈으로 구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단 1원의 유산도 남기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수의는 산헤드린 의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자기 돈으로 구하여 예수님의 시신에 입혀 드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돌무덤 역시 예수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를 위하여 예비해 두었던 새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흘에 걸쳐 누워 있었던 그 무덤 속에 본래부터 예수님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시어 분명한 삶의 족적을 남기시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신의 것 하나도 없이 남이 제공한 수의를 입고 남의 무덤 속에 사흘동안 누워 계신 예수님의 시신을 머리속에 자세히 그려 보십시오. 그것 자체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 욥기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욥 1:21a)

 

여기에서 적신이란 `붉을 赤' `몸 身', 즉 아무것도 걸치지 아니한 벌거숭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공동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내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니라"

표준 새번역은 그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한마디로 `공수래 공수거'란 말입니다. 당신의 것 하나도 지니시지 못한 채 남의 무덤에 누워 계신 예수님의 시신을 보십시오. `공수래 공수거'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마저 빈 손으로 오셨다가 빈손으로 무덤에 누워 계시다면, 하찮은 우리가 어찌 `공수래 공수거'란 하나님의 법칙에서 예외일 수가 있겠습니까?

 

진리란 결코 먼 곳이나 특별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늘 평범한 곳에,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매일 접하고 있는 죽음 속에서 `공수래 공수거'란 하나님의 진리는 오늘도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듣고 망각치 않는 자만 빈손으로 무덤 속에 눕기 전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세상에서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하게 청빈하셨습니다. 그 분은 재물의 유혹에 빠지신 적도 없었고, 단 한번이라도 물질로 인해 양심을 저버리고 불의와 타협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그 분은 한평생 청빈을 벗삼아 사셨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무능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이 선택하셨던 바른 삶의 결과였습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그 청빈 속에서도 당신의 생명을 송두리째 나누어주실 만큼 부요하셨습니다. 그 분의 삶이 이처럼 청빈으로 시작하여 청빈으로 끝날 정도로 청빈의 부요함 속에 거하였던 것은, 그 분은 누구보다도 `공수래 공수거'란 하나님의 법칙을 분명히 알고 계셨던 까닭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 중 하나님 앞에 직접 들고 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잘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자기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부귀영화를 주겠노라고 예수님을 유혹했을 때 그 분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습니다. 그런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평생 그와 같은 청빈의 삶으로 일관하셨다면, 그리스도인 된 우리 역시 그 분을 본받아 청빈의 도를 따르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청빈의 삶을 구현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청빈하면 수도원을 먼저 떠올립니다. 청빈이란 세상을 등진 수도원에서나 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식입니다. 청빈을 소유 정도 문제, 혹은 가난하거나 부유한 상태의 문제로 받아 들여서는 청빈이란 수도사의 전유물로 오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현해야 할 청빈이란 첫째로, 까를로 까레또가 그의 저서 <사막에서의 편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자유'입니다.

여기에서의 자유란 유행 풍조 허영 헛된 체면으로부터의 자유요 해방을 의미합니다.

현대인들의 집안을 들여다보십시오. 계층에 따라 가구며 집기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유행과 사치를 따른 결과입니다. 젊은이들의 혼수품도 예외는 아닙니다. 계층별로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이것 역시 풍조와 체면에 구속당해 있는 연고입니다.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으로부터 업수히 여김을 받지 않기 위하여, 인정받기 위하여 똑같은 것 혹은 보다 나은 것 들을 구입하는 어리석음과 낭비를 현대인들은 얼마나 자주 저지르고 있습니까?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을 청빈과 동떨어지게 하는 유행 허영 풍조 헛된 체면이란 그것 자체가 무서운 유혹입니다. 청빈이란 이 모든 유혹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청빈이란 아무것도 구입 않거나 소유하지 않고 그저 알몸으로 빈손 빈 주머니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물건을 살 수도 있고 지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행이나 체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구입하고 소유하는 것―바로 이것이 청빈입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있던 그 모든 것이 꼭 필요한 것들이기에 가진 모든 것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사장됨이 없이 아름답게 이용되는 삶―이것이 곧 청빈의 삶입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최악이지만 물질을 아름답게 이용하는 것은 그 물질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요한복음 12장 6절은 예수님의 제자중 가룟 유다는 돈을 관리하는 회계였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돈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중에 예수님께 돈을 헌금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가 하면 폭풍도 말 한마디로 잠재우는 능력을 베푸시는 주님이셨기에 헌금액수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걸치거나 지니시지 않고 알몸으로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청빈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분명히 돈이 있었습니다. 회계를 두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돈이 많았습니다. 그 돈으로 옷도 사 입으셨을 것이고 먹을 것도 구입하셨을 것입니다. 전도여행을 다니시면서 경비로도 지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것의 유혹에 빠지신 적이 없었기에, 유행과 사치 그리고 허영과 헛된 체면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한 분이셨기에, 그 분은 우리 모두에게 청빈의 본보기가 되신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이 구현해야 할 청빈이란 곧 봉사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필요한 것만을 소유하되 불필요한 것을 구입하지 않고 남는 여유 분을 자기를 위하여 쌓아 두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청빈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구두쇠요 인색한 인간일 따름입니다.

청빈한 자가 필요한 것만을 소유하는 것은 그 나머지 분을 자기를 위해 쌓아 두기 위함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봉사의 도구로 선용하기 위함입니다. 아니 꼭 필요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마저 자신의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언제나 봉사의 도구로 내어놓을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는 자입니다. 이것이 진정 청빈한 자가 소유 가운데에서 무소유의 부요함을 누릴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청빈과 봉사는 언제나 동의어요, 봉사를 떠난 청빈한 삶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기업을 소유한 기업가라 할지라도 자신의 기업을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사회를 위한 봉사의 도구로 활용하고 선용한다면, 그는 청빈한 사람입니다. 학문이 깊은 학자가 자신의 학문으로 사람들에게 겸손히 봉사하며 산다면 그가 거지보다 나은 옷을 입고 있을지라도 그는 청빈한 사람입니다.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대통령이 권력을 진정으로 백성을 섬기기 위한 봉사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가 그 나라에서 가장 웅장한 대통령궁에서 살고 그 나라에서 가장 큰 차를 타고 다닌다 할지라도 그는 청빈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자기만을 위해 사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저 가난한 사람일 뿐 청빈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이 구현해야 할 청빈이란 곧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부당하게 물질을 추구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바르게 쓰는 것보다 바르게 얻는 것이 더 중요함은, 바르게 얻지 아니한 것은 결코 선한 봉사의 도구로 이용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바르게 얻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쳤음을 의미하는데, 그런 사람이 그렇게 얻은 것으로 어찌 남을 위해 바르게 사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물질을 구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용하는데 이르기까지 물질과 관련된 삶의 전 과정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고백이 될 때에만 청빈은 가능한 것입니다. 청빈이 있는 곳에만 정의와 진리와 사랑이 실천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물질을 불의하게 얻고 불의하게 사용하는 곳에는 정의와 사랑과 진리의 구호만 있을 뿐, 그 실체는 형성될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5장 8절∼9절이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 라. 빛의 열매는 모두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행하여야 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란 우리의 삶중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합니까? 의식주는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해주는 기본적 요소이며, 그것은 물질을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물질 가운데에서 물질과 더불어 영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의 자녀로써 행하여야 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란 물질관계에서 반드시 결실되어져야만 합니다. 바꾸어 말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은 물질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관계에서 불량하고 불의하며 거짓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물질을 숭상하는 우상숭배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빛이 아니라 단지 캄캄한 암흑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청빈의 삶을 구현하지 않으면 안될 까닭이 또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착하심과 의로우심과 진실하심은 이 물질 세상 속에서, 물질과의 관계 속에서 실체화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질에 관한 한 유행과 허영, 풍조와 헛된 체면으로부터 완전 자유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생명마저 내어놓으실 정도로 당신께 속한 모든 것을 봉사의 도구로만 선용하셨습니다. 그처럼 단 한가지라도 당신만의 것으로 삼지 않으신 채, 남의 수의를 입고 남의 무덤 속에 시신으로 누워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야말로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당신의 착하심과 의로우심과 진실하심을 보여드리는 삶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처럼 청빈의 삶을 몸소 실천하셨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에 대하여 본문 12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검은 옷을 입은 악마가 언제나 어둠의 상징이라면 흰 옷입은 천사는 광명, 하나님의 빛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는 무덤에서조차 청빈의 표상으로 누워 계셨던 바로 그곳, 예수님의 시체가 뉘었던 그 곳,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던 그 현장―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광명이, 하나님의 빛이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진실로 진리를 위하여 선택한 청빈의 삶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취한 청빈은 영원히 빛난다는 것입니다. 자유와 봉사와 신앙고백을 위하여 구현된 청빈보다 더 광명한 삶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과 얼마전 너무나도 대조적인 두 여인의 죽음과 장례식을 목격하였습니다. 한 여인은 영국의 다이애나비였고, 나머지 또 한 명은 인도의 테레사 수녀였습니다. 한 여인의 삶이 얼마나 인간이 호사스럽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면, 또 한 명의 삶은 인간이 얼마나 청빈하게 살 수 있는 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한 여인의 삶이 인간이 얼마나 자기를 위해 살 수 있는지를 증거해 주었다면, 또 다른 여인의 삶은 인간이 얼마나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살 수 있는지를 증거해 주었습니다. 한 여인의 죽음이 얼마나 인간의 삶이 허망한지를 증명해 주었다면, 다른 여인의 죽음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가치로운지를 실증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영국의 총리는 장례식에서 다이애나비를 성자로 불렀고 영국의 언론도 그렇게 취급했습니다. 테레사 수녀 역시 장례식에서 성자로 불리웠습니다. 적어도 그 면에서 두 여인은 동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두 여인 중 누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성자의 삶을 구현했는지를! 누구의 삶이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날 것인지를! 이미 하나님 앞에 섰을 두 사람의 영혼 중 어느 여인이 이 땅의 자신의 삶에 대해 가슴을 치며 후회했었겠는지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그 두 여인의 삶을 판단하고 평가하듯이 우리 각자의 삶 또한 사람에 의해, 아니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판단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공수래 공수거'란 하나님의 법칙임을 잊지 마십시오. 청빈의 삶을 추구하고 구현하십시오. 그 삶만이 영원한 빛으로 남습니다. 그때에만이 후회없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청빈을 추구하는 자만이 하나님과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이 세상의 유행과 허영, 잘못된 풍조와 헛된 체면으로부터 진정 자유하게 해 주십시오. 나의 소유가 모두 봉사의 도구로 선용되게 하시어 소유 속에서 무소유의 부요함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물질과 관련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게 해 주십시오. 진실로 청빈한 자가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사람을 바르게 사랑할 수 없음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청빈한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진리가 이 땅에 구현되게 해주십시오. 청빈한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을 밝히는 하나님의 빛이 되게 해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울고있더니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20 : 1∼1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신지 사흘만에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사실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뛰어가 그 사실을 알렸고, 거의 모든 제자들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허탄하게 여기며 믿지 않은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만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 정말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별 생각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깨닫지도, 깨달으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3년 동안이나 주님의 제자로 주님을 따랐건만, 그리고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그 엄청난 사실을 자신들의 두눈으로 직접 확인하였건만, 아무 생각없이 베드로와 요한이 그냥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는 그 순간, 그들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등뒤로 하고 오는 주님의 무덤을 되찾아가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 였습니다. 그녀만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것을 안 이상 그냥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막달라의 비천한 창녀였던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새로워진 자신의 삶을 생각할 때, 그녀는 비록 비어있을 망정 주님의 무덤을 되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할 시신이 사라져 버린 무덤으로 되돌아간 막달라 마리아는 그곳에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밖에 서서 울고있더니(11a)"

 

그곳에서 마리아가 할수있었던것은 그저 우는것 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울다'는 동사 klaio는 단순히 울먹이거나 혹은 소리없이 흘리는 눈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땅을 치며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것, 간장이 끊어지듯 애곡하는것을 뜻하는 동사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간 막달라 마리아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애곡하였습니다. 이른 새벽 아직까지 거의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시각에, 골고다 언덕으로부터 새벽의 정적을 찢으며 울려 퍼지는 막달라 마리아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다는 창녀였기에 남편도, 자식도, 번듯한 친구 한 명도 없었을 그 가련한 여인이 울부짖는 애곡소리는 얼마나 애절합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게 통곡하고 또 애곡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왜 이렇듯 슬피 목놓아 울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그녀가 구세주로 믿고 사랑하던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제기해 보겠습니다. 만약 이날 새벽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속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었다면 그녀는 결코 이처럼 울부짖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 계획했던 대로, 가지고 간 향품을 예수님의 시신에 정성스럽게 발라드렸을것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식후 예수님의 시신을 찾은 첫 번째 사람이 자신임을 알고서는 어쩌면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되었을 경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겠읍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이날 아침 통곡치도 않고 애곡치도 않는 대신 그녀에게는 영원한 소망도, 영원한 생명도, 영원한 구원도 결코 주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덤속에 시체로 누워 썩어 가는 예수님이라면 절대로 영원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일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Lenski는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까닭에 울었으나 만약 그날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속에 있었더라면 그녀와 우리는 영원히 울게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속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생명과 부활의 종교인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외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생명을 지닌 우리는 언젠가 슬피 울며 이 땅에서의 삶을 절망 가운데에서 마감하고 말 것입니다. 이 땅은 소망도 구원도 없는 거대한 공동묘지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갔을 때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는 통곡하며 애곡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울부짖음은 그날 그 한시간만으로 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녀의 통곡은 기쁨으로, 애곡은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새로이 만났고, 그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한순간 목이 쉬도록 통곡할망정 에수님의 시신은 그곳에 없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속에 없었기 때문에 그 분은 무덤과 죽음을 뛰어 너머 우리의 부활, 우리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분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신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 곁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그분의 기쁨으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신이 그곳에 없었기에 그분은 절망에 빠진 우리를 일으키사 소망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신이 그곳에 없었기에 주님은 오늘도 우리 앞에서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을 때 예수님의 시신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이 모든 일은 전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금년 1월 2일 미국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대학 동창생으로부터의 전화였습니다. 새해 첫날부터 목사인 저로부터 축복기도를 받고싶어서라고 했습니다. 그때가 미국시간으로는 1월 1일 이른 아침이었던 것입니다. 작년 5월, 대학을 졸업한지 25년만에 미국에서 만났을때만해도, 그때가 자식을 잃은 직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대해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친구였기에, 새해 첫날 이른 아침부터 기도를 받기 위해 미국에서 한국으로 다이얼을 돌렸다는 그의 전화는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친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를 드린 다름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한달 여가 지났을 때 그 친구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십대 갱단의 총격으로 잃었을때의 울분과 비통, 복수의 칼을 갈며 술독에 빠져있을때의 고통과 번민 등을 그는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여! 고백하건대 지난 1년 남짓동안, 난 사실상 이 땅에서의 삶을 끝장내기 위해 나름대로 마음 준비를 단단히 했었네.

혼자서 마음속으로 무수히 맹세하며 부르짖었지―`장렬한 최후를 갖자. 아들의 생명을 앗아간 갱 집단을 반드시 내 손으로 처단하고 내생의 끝을 맺어버리자. 비록 홀로 복수 극을 벌릴 힘과 자금과 조직이 내게 없을지라도, 늙어 가는 이 몸이나마 온 세포 온 마디마디를 갈고 닦고 곧추세워 그놈들을 죽인 뒤 장렬하게 사라져 버리자'고 말일세. 반드시 원수들의 간을 꺼내 내입으로 씹어야겠다는 일념에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절치부심하면서 독주만을 퍼 마셨다네. 나이 들어가는 몸에 밤낮 독주를 들이붓다보니 오장육부마저 다 망가져 모진 설사와 구토가 계속되었지만, 그러나 술없이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네. 그것도 아들녀석이 피살당했던 그 현장에 차를 세워놓고는 차속에서 독주를 들이키는것이었지. 말하자면 나로서는 매일 죽은 아들을 위해 치르는 의식이었던 셈이지―.`아가야, 내 꼭, 이 못난 아비가 반드시 네 원수를 갚아줄께. 그리고 난후 네가 있는 곳으로 가마. 암! 이 애비가 반드시 복수를 해주고 말고'―이런 독백을 안주 삼아서 말일세. 정신을 잃을 만큼 퍼마신 상태에서 차를 몰고 집으로 가다가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어 수갑을 차고서 수감된 것도 세번씩이나 되었다네. 그럴수록 아들을 죽인 놈들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는 더욱 불타올랐지.

 

어느 날 불한당 같은 갱단의 총격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아비의 심정이 어찌 이와 같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이 친구의 편지를 읽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몇 번씩이나 닦아야했던것은, 아들을 빼앗긴 아비의 비통한 심정 때문만이 아니라,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 친구가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 아니 이 친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무려 16장에 걸친 그 친구의 편지는 그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얻은 주님의 사랑, 주님의 평강, 주님의 은총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삶의 기쁨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었습니다. 실로 믿기 어려운 대 반전이었습니다.

올 4월 코스타리카를 다녀오는 길에 그 친구를 미국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 친구는 작년에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더 이상 복수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증오의 화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죽인 갱들을 이미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비록 아들이 이 땅에서 비명에 갔을망정 영원하신 주님의 품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있었습니다. 참으로 신비스럽기 짝이 없는 주님의 구원의 대역사였습니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후 첫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을 때 예수님의 시신이 그 무덤속에 그대로 있었다면, 그 친구에게 이 신비스러운 대 역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것입니다. 만약 시신이 그곳에 있었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그날 아침 통곡치 않았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 친구는 육체도 마음도 영혼도 영원토록 고통속에서 번민하며 울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증오심과 복수심, 고통과 번민, 괴롬과 슬픔으로부터 진정 자유하는 그리스도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날 무덤에 계시지 않던 주님, 무덤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친구의 곁에서, 그 친구의 앞에서, 그 친구의 안에서, 그 친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전도자인 동시에 시인이었던 톰슨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구주예수 떠나가면 죄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맘에 근심 쌓일때

위로하고 힘 주실 이 주 예수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소망되시니

이 세상을 떠나갈 때 곧 영생얻으리

한없는 복을 주시고 영원한 기쁨주시니

나의 생명 나의 기쁨 주 예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을때 예수님의 시신이 여전히 그 무덤속에 있었더라면 어찌 그분이 오늘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분이 지금 나의 힘, 나의 소망이 되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모든 이유는 하나 - 그분은 무덤속에 누워계신 시신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즐비하게 늘려있는 무덤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 또한 새로와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무덤을 보면서 그 속에 누워있는 시신만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자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덤속에 누인 시체는 결코 시체 그대로 존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속에 묻힌 모든 시신은 썩어져 흙으로 화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무덤은 언젠가는 시신이 소멸해버린 빈 공간, 빈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신을 안장한 무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미래의 빈 무덤에 불과한 것입니다. 시신을 장사지내건만 언젠가는 그 속이 텅비어버리게될 무덤―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얼마나 위대한 주님의 메시지입니까? 시신이 썩어 없어진 그 빈 공간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이 차고 넘치는 참 생명의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덤은 끝이 아니고 시작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무덤을 보고서 그 속에서 썩어지는 시체가 아니라, 그 육체를 떠난 영혼이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고 있을 영원한 생명을 보고 느끼는 자가 있다면, 그는 두말할것도 없이 참 그리스도인인것입니다.

 

작년 말에 소천하신 저의 어머님은 생전에 당신이 입으실 수의를 친히 준비해두셨습니다. 그리고 생각나실 때마다 당신의 수의는 어디에 들어있노라 일러주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의를 한번도 직접 본적이 없었던 저는 어머님의 수의도 일반수의와 같으려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어머님께서 소천하신뒤 어머님의 수의를 직접보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그 수의의 색깔이 일반적인 통념을 깬 분홍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연유를 아내는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이야말로 그토록 사랑하던 주님을 친히 뵙는 순간임을 분명히 믿고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신랑을 맞는 신부의 심정으로 주님을 뵙겠다는 신앙고백의 증표로 당신의 수의를 친히 분홍색 비단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저는 추석을 맞이하여 내일 부모님의 산소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35년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의 시신을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머님의 시신에 입혀졌던 분홍색 수의를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시신과 수의를 뛰어너머 기도하시던 중 운명하실정도로 주님을 사랑하셨던 아버님, 분홍색 수의를 친히 만드실 정도로 주님을 그리워 하셨던 어머님 - 그 두분이 그리스도안에서 지금 누리고 계실 영원한 생명의 기쁨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부모님의 산소를 찾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추석을 맞이하여 단순히 조상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을 찾는 어리석은 짓은 이제 그만 두십시다. 8월 첫째주일에 베드로전서 3장과 4장 그리고 사도신경 원문을 통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듯이, 음부에 내려가시어 음부에 있는 영혼까지 품어주신 참 구원의 주님,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 무덤으로 나서십시다. 돌아가신분들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고 있을 참 생명과 그 생명의 기쁨에 동참키 위해 무덤으로 향하십시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천년전 무덤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사 지금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 나의 힘 나의 소망 나의 생명이 되신 주님을 친히 뵐 것입니다. 그래서 조상의 죽음을 통해 참생명의 의미를 깨닫게해주는 추석이야말로 주님께서 이 민족에게 주신 크나 큰 선물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 때문에 통곡하고 애곡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날 주님의 시신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녀와 우리는 영원히 울어야만했을 것입니다. 우리민족을 사랑하시사 추석을 허락하시고, 죽음과 무덤의 의미를 깊이 생각케 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상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부까지 품어주신 생명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성묘길을 나서게 하옵소서. 고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고 있을 참 생명과 그생명의 기쁨에 동참키 위해 귀향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거기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우리의 힘, 소망, 생명, 기쁨이 되시는 주님을 친히 뵈옵게 하옵소서.

이 추석을 기하여 우리의 통곡이 그리스도안에서 정녕 기쁨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추석이 단순한 민족명절이 아니라, 신앙인의 영원한 축제일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