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었다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4 : 15∼26


일반적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데에는 연역법과 귀납법이 있습니다. 연역법이란 이미 일반화된 원리 혹은 명제를 근거로 하여 특수한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으로써 이른 바 삼단논법이 동원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모두 백의민족이다, 나는 한국인이다. 고로 나는 백의민족이다'와 같은 식입니다.

반면에 귀납법이란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명제나 법칙 혹은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서울에 있는 까마귀를 보아도, 부산에 있는 까마귀를 보아도, 동경이나 뉴욕 그리고 파리에 있는 까마귀를 보아도 다 검은 색이므로, 까마귀는 검다'고 정의하는 방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볼 때에도 연역적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귀납법적으로 다가서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방법 모두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지만, 연역적으로만 성경을 보면 은혜로울 수는 있으나 성경 속의 사실을 내 삶에 적용시키기 어려운 단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다.' `믿음의 조상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고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주저없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

참으로 은혜로운 논리 전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내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믿음의 조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음의 조상이 아니다.' `믿음의 조상이 아닌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고로 나는 아브라함처럼 내 자식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식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연역적으로 접근해 보십시다.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사도였다.' `위대한 사도는 날아오는 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로 그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바울과 비교한 우리 자신은 어떻게 표현되겠습니까?

`나는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가 아니다.' `위대한 사도가 아닌 나는 이유없이 내게 돌팔매질을 하는 자를 용납할 수 없다.' `고로 지금 내가 천수를 다하기도 전에 진리 때문에 순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을 이처럼 연역적으로만 접근할 때,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과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면서 결단보다는 오히려 주눅이 들고 자포자기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인물에 대하여 귀납적으로 다가갈 때 우리는 전혀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가장 큰 재산이던 그 옛날 100살이 될 때까지 자식을 얻지 못했던 인생 실패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믿지 못해, 여종과 동침하여 서자를 먼저 얻는 믿음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고 보니 기근의 땅이자 그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도망 가버린, 신앙의 지조라고는 전혀 없는 한심한 인간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자기 아내를 탐내는 사람들로 인해 목숨을 잃을까 아내를 누이라 속이다가 정말 빼앗겨 버린 창피스러운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인간 같잖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치 않으시고 말할수 없는 자비와 긍휼로 그를 붙드시고 바로 세워 주셨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인격적으로 깨달았을 때, 자신을 위해 인내하시며 끊임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바뀌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과 사랑과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자식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자식을 더 확실하게 얻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으로 높임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삶을 귀납적으로 들여다보면 우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믿음도 신앙의 지조도 없고, 정말 창피하고 한심한 삶을 살아 왔다 할지라도, 아니 참담한 실패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는, 우리도 모두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진리인 주님을 부정하던 인간이었습니다. 자기와 반대 의사를 가진 자를 돌로 쳐죽일 정도로 독불장군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잘났고 자기만 옳다고 착각하던 철부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처럼 형편없던 인간인 그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살리시기 위해 피 흘리시며 돌아 가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에 의해 그는 새롭게 변화되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날아오는 돌맹이도 기꺼이 맞을 수 있었고, 그 사랑의 증인이 되기 위해 참수형마저도 두려워 않았습니다. 주님 사람의 종착역은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임을 알았던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또 다시 소망이 용솟음치게 됩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의 바울 같은 독불장군이요 철부지 같은 인간이요, 심지어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 할지라도 주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주님의 사랑 속에만 있으면, 주님에 의해 우리 역시 얼마든지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더 이상 아브라함이나 바울 앞에서 죽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귀납법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우리 삶 속에 적용시켜 가기만 하면, 우리는 성경 속의 그 어떤 위대한 인물과도 동일할 수 있습니다. 40년동안이나 실패자로 살다가 위대한 출애굽의 지도자가 된 모세가 될 수도 있고, 남의 유부녀를 빼앗은 불한당이었으면서도 이스라엘 최고 성군이 된 다윗일 수도 있고,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모른다 부인하다가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던 베드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로 연역법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다가 80년대 중반을 너머서면서, 세계적으로 귀납법적 성경공부가 일반화되고 있는 것은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이 방법이 우리의 신앙적 결단과 실천 그리고 성숙에 훨씬 더 유익한 까닭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연역법적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같은 신이시다.' `고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넉넉히 지실 수 있었다.'

이렇게 될 경우 우리는 예수님을 닮을 수도 없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질 가능성은 더더욱 없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입니다. 하찮은 인간이 어찌 신을 닮을 수 있으며 신이나 지는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귀납적으로 다가설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수님 역시 여인의 몸을 통해 육신을 입고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목수 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궁핍함 속에서도 그 분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만을 구하며 사셨습니다. 30세쯤 되셨을 때에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버리사 인간 구원의 길에 나서셨습니다. 3년동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끝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루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육신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실 망정, 그 고통을 끝내 피하지 않으시고 죽음으로 감수하시므로 하나님에 의해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인류의 구원자, 부활의 주님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와 같은 귀납법적 설명은 인간의 해석이 아닙니다. 빌립보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신으로 이 땅에 오시어 신으로 아무런 고통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감수하셨기에 하나님께서 그 분을 그리스도로, 인류의 구원자로, 성자 하나님으로 세워 주셨다는 뜻입니다. 뿐만아니라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만에 하나라도 예수님께서 죽음 뒤에 찾아 올 부활의 즐거움을 믿지 못하시어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을 꺼려 하셨더라면, 결코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귀납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성경의 방법입니다. 아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지칭하실 때 가장 즐겨 사용하신 호칭이 바로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복음서를 통하여 무려 81회나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고 계십니다. 신(神)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참사람으로 십자가 지심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좇아 갈 수 있는 가능성과 공간이 비로소 확보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으로서만 오셨다면 인간인 우리는 감히 그 분을 흉내 낼 수조차 없겠지만, 그 분 역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갖고 오셨던 사람의 아들이셨기에, 사람인 우리는 참사람이셨던 그 분을 믿고 따르며 그 분을 본받아 각자의 십자가를 지므로, 그 분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 세움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30)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구원 사역을 다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 중 단 한가지라도 이루지 못하신 것이 있었다면, 그 분은 결코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한 구원 사역을 마지막 십자가에서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셨기에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원 사역을 다 이루셨습니까? 예수님 당신의 방법으로입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따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처럼 베들레헴에서 사람의 아들로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의 예언처럼 동정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사야 9장 1절∼2절의 예언처럼 갈릴리를 중심으로 천국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처럼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신음하시자,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가에 갖다 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 군병들이 마취제 효능을 가진 쓸개 탄 포도주를 드리자 거절하셨습니다. 마취제를 먹고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고난의 참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작 필요할 때 필요한 포도주마저 거절하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새삼스럽게 포도주를 드실 까닭이 없습니다. 더우기 신 포도주라면 식초와 같기에 목마른 자는 더더욱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골리기 위해 드린 식초같이 신포도주를 받으셨다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보가 아니신 다음에야 왜 그처럼 어리석어 보이는 짓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본문 28절이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하실 최후의 모습을 시편 69편 21절을 통하여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나이다"(시 69:21)

 

십자가 위에서 생명의 심지가 꺼져 가는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타는 목마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식초와 같은 신 포도주를 삼키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다 이루었다'는 한마디로 당신의 생애를 정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루었다'는 단어 'teleo'는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분의 삶이 곧 하나님 말씀의 완성이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한 말씀도 빠짐없이 그 분의 삶 속에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사람의 아들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성육신한 그리스도, 즉 성자 하나님이 되셨고, 십자가 위에서 당당하게 `다 이루었다' 선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습니까?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어야만 합니다. 나의 욕망이나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진리의 말씀을 지향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 성취되어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세상을 향해 보여 줄 수 있는 성경이어야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셋째아이가 수학문제를 풉니다. 사탕 12개를 놀러온 친구 세명에게 나누어주면 한 사람당 몇 개씩 줄 수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답은 두말할 것도 없이 4개씩 입니다. 그런데 셋째 아이는 세개씩이라고 답을 썼습니다. 아내가 왜 세개씩이냐고 묻자 아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저도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우리 집에 친구 3명이 놀러왔다면 자기까지 네 사람이므로, 12개를 네명에게 나누어주면 한 사람당 세개씩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논리로는 맞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분명 틀린 답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려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아이처럼 언제나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 논리에 빠지고, 우리가 얻는 답은 다 오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틀린답은 우리 자신을 망치고 타인마저 해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돈을 벌더라도 나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지식을 구해도 지식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진리을 위하여, 가정을 꾸려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무엇을 행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때에만 우리는 진리안에서 인생의 바른 해답을 따라 살 수 있으며, 우리의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 아무런 후회도 없이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당당하게 이 땅에서의 생애를 마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형편없는 인간이었을지라도, 모세처럼 철저한 실패자일지라도, 다윗같은 패륜아였을지라도, 바울 같은 살인마 였다 해도, 우리 삶이 말씀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모두 믿음의 조상,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사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중심이 있는 한,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시사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우리 자신들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같은 참담한 실패자였다할지라도, 다윗이나 바울처럼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정녕 주님을 바르게 믿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좇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으로 주님의 말씀을 성취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이시여.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진리를 구현하는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고 주님의 참사람 되심을 온전히 본받게 하옵소서. 맡겨 주신 사명 다 감당한 뒤에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버지여, 다 이루었습니다'란 고백의 예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하여 주옵소서.

― 아멘―

내가 목마르다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사람이 살아 있다는 진정한 증거는 무엇이겠습니까? 박동 치는 심장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심장이 활기차게 뛰어도 뇌가 움직이지 않으면 소위 `뇌사자', 즉 `죽은자'로 간주되어 장기를 이식하는 것으로 그의 생을 마감케 하는 것이 이미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살아 있음의 참된 증거는 뇌나 심장의 활동여부가 아니라 목마름과 주림을 느끼는 것입니다. 설사 심장과 뇌가 움직이고는 있지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목마름과 주림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의식도 없이 단지 인위적인 주사액에 의해 연명하고 있다면, 그는 살아 있으되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목마름과 주림을 느낀다는 것이야말로 살아 움직였음의 결과요, 살아 움직일 것의 대비이기에 그보다 더 좋은 `살아 있음'의 증거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같은 목마름과 주림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인격과 성숙도 그리고 신앙의 정도에 따라 목마름과 주림의 내용 대상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한 개인이 무엇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느냐에 따라 그 개인은 물론이요, 그가 속한 공동체 및 국가의 역사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술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가장이 마침내 알콜 중독자가 되어 가산을 탕진하고 가문을 망치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돈에 대한 목마름과 주림, 이를테면 헝그리(hungry)정신이 불세출의 스포츠 스타를 탄생시키고 신기록을 수립케 합니다.

영국왕 에드워드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에 주리고 목말라 한 끝에 그 여인을 위하여 영국 왕위를 버렸습니다. 만약 그가 심프슨 부인의 사랑에 대하여 그토록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았던들 오늘날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 여왕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그녀의 아들 챨스 황태자와 결혼했다가 파탄에 이른 비련의 세자비 다이애나의 인생도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자유와 정의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 하던 자들에 의해 프랑스 혁명도, 이 땅의 4 19 혁명도 가능할 수 있었고, 그것은 두나라 역사의 분수령을 이루었습니다. 영적 목마름과 주림으로 인해 몸부림치던 마틴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그가 속해 있던 독일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무릇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목마름과 주림을 느끼는 자입니다. 이면에서는 누구든지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단지 무엇에 대해 목말라 하고 주리고 있는가―그 내용과 대상에서 차이가 날 뿐입니다.

 

 

오늘 본문 28절은 `이후에'란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27절과 28절 사이에 시간적 거리가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생모 마리아를 부탁하시면서 "네 어머니라" 말씀하신 뒤,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을 때란 뜻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28)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구름너머에가 아니라, 하늘 위에가 아니라, 육신을 입으시고 바로 이 땅에 오시어 이 땅위에서 구체적으로 사셨음의 참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위에서 육신을 가지고 사시지 않았더라면 결코 목마름을 느끼시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설이나 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 땅위에 실존하셨던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왜 목말라 하고 계십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물과 피를 다 쏟으셨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께서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주님 당신의 죄로 인하여, 당신 자신을 위함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를 위하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지로 지었던 온갖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주님의 사지가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지금 목말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 목마름은 단순한 육체의 목마름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원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채워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 하라시는 하나님의 명령, 즉 진리에 대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어떻게 주님께 가기만 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말라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목말라 하시는 그 십자가 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하신 생명을, 영원한 생명의 말씀인 진리를, 변함없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구원을 넘치도록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십자가 앞에 나아 오기만 하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고 진리와 사랑과 구원이 용솟음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말라 하지 않으셨던 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목마르다'는 주님의 이 절규야말로 주님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백미요, 인간을 향한 주님 사랑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릇 살아 있는 자란 모두 주림과 목마름을 느끼는 자라 했습니다. 이면에서는 누구이든 예외일 수가 없고, 단지 무엇에 대하여 목말라 하고 주려하는가―그 내용과 대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무엇에 목말라 하고 주려해야 겠습니까? 주님을 본받아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구원 ― 한마디로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해 자기 육체만을 위하여, 자기 욕망으로만 인해 목말라 하는 삶에서 탈피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갈증을 느끼는 자만 물을 구하고 얻듯이 자기를 탈피하여 하나님을 목말라 하는 자의 삶 속에만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칠 수 있고, 그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할 줄 아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여기에 목마르다는 동사 dipsao의 또 다른 뜻은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 하시므로, 하나님을 갈망하시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완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진실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목말라 하지 않고, 하나님을 갈망치 아니하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된 길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 속에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1∼2a)

 

시인은 한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우리의 영혼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치 않고서는 결코 바르게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위대한 신앙인 다윗은 우연히 다윗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간절히 갈망하므로써 3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 모두의 신앙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선지자는 또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 8:11∼13)

 

아모스는 사람을 정녕 갈하게 하는 것은 세상의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암 5:24) 외치는 참 진리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7)

 

바울 역시 하나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자에게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가 주리고 목마른 그 헌신의 길을 그는 조금도 주저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이 아침에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을 향해 세상을 향해 `내가 목마르다' 고백하면서, 그 고백에 상응하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지난달 고교생과 대학생 1,0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들의 한국전쟁 통일 안보 국가현실에 관한 의식조사> 결과가 보도된 바가 있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응답자의 70.7%가 가능성이 높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는 무려 33.9%가 외국이나 시골로 피난 가겠다고 응답했고, 자발적으로 참전하겠다고 답변한 청소년은 전체의 9.5%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그 보도를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카톨릭신자들을 포함하여 우리 국민 중 네 사람 당 한 명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숫자상으로는 그 조사에 응한 1,074명의 고교생과 대학생들의 25%는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국에 전쟁이 터졌을 경우에 당연히 참전하겠다는 응답이 최소한 전체의 25%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독교인 수 25%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겨우 9.5% 였습니다. 그 9.5%가 모두 크리스천이 아닐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 땅의 10대와 20대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자기 이기심과 자기 욕망에만 주리고 목말라 하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전쟁이 터졌는데도 도대체 젊은이들의 90.5%가 그 전쟁을 외면한다면 이 땅은 과연 누가 지킨다는 말입니까?

 

만약 똑같은 조사를 대학생 이상 되는 국민들에게 실시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30세 이상 되는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모두 내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키겠다고 응답하겠습니까?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실시한다면 100% 다 `그렇다'는 응답이 나오겠습니까?

분명히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10대 20대란 기성세대의 축소판일 뿐입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자기 이기심과 욕망에만 목말라 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의 30세 이상인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삶을 추구하고 있음의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다. 국민들은 틈만 나면 정부와 정치가들을 욕합니다. 그렇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들은 다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택시를 타 보아도, 지하철을 타 보아도, 식당에서 밥을 시켜 먹어 보아도, 가게에서 물건을 사 보아도, 거리를 걸어 보아도, 상인들과 거래를 해 보아도, 기업체을 들여다 보아도, 학교를 보아도 정말 정직하고 바른 양심으로 진리를 따라 헌신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아니한 것이 이 땅의 숨길 수 없는 실상입니다.

 

이 땅의 크리스천들이 모두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만나는 네 사람마다 한 사람씩은 그런 헌신자이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를 비롯하여 이 땅의 크리스천 역시 하나님을 갈망하기보다는 자기를 더욱 갈망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 최승호씨가 쓴 `황금털 사자'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평생토록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간의 이해득실로 얽힌 세상에서 손해보다는 이익을, 실보다는 득만을 취하면서 살다보니 노년이 되었을 때 주위에 남은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습니다. 쓸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라고는 사과 궤짝에 쌓아 놓은 돈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죽음이 찾아 왔습니다. 사람에게 헌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지막 기회마저 자기를 위해 쓰고 말았습니다.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털어 순금으로 만든 관을 구입하여 그 속에서 죽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금관 속에서 죽은 뒤 금관에 누운 채로 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밤, 그의 시체는 금관을 탐낸 무리들에 의해 무덤밖에 내팽개쳐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굶주린 들쥐에게는 기회였습니다. 들쥐들은 배가 터지도록 시체의 배를 터뜨리며 내장까지 남김없이 뜯어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리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갈망하다가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의 사회를 그 지경으로 몰아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 자신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십시다. 그 분의 진리와 생명에 갈한 자들이 되십시다. 우리는 모두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절규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을 잊지 마십시다. 그 분을 본받아 한평생 헌신자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때에만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사회도 바로 세워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가 있는 곳에만 하나님의 구원역사, 생명의 역사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평생 자기만을 갈망하며 사느라 마지막 기회마저 다 상실한 채, 죽은 뒤에 내 팽개침을 당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갈망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갈을 느끼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사랑에, 은총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절규하신 주님을 본받아 사는 참된 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와 같이 헌신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일터가, 우리의 사회가 바로 세워지는 역사가 오늘 아침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게 하옵소서. 우리자신들이 하나님만을 목말라 하고 갈망하므로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자기 집에 모시니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개신교 목사님 중에 직접 수도원을 창설하고, 그 속에서 수도자로 살아오는 분으로 엄두섭 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 노 목사님이 교회를 목회 하는 목회자의 삶으로부터, 한평생 수도원 운동에 앞장서는 수도자로 돌아서게 된 데에는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30세 되던 해에 목사 안수를 받고 처음 부임한 곳은, 전라남도 광주 인근의 남평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막상 그 곳에 당도하고 보니 교회의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하였습니다. 까닭을 알아보았더니, 그 교회에서 신앙적으로 가장 모범적이었던 집사님 한 분이 얼마 전에 교회를 떠나 `산중파'를 따라 가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산중파'의 지도자는 이현필이란 사람이었는데, 그 무리들은 산 속에서 기거하면서 기성교회에는 다니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 성경을 공부하며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그들을 `산중파'라 부르면서 아예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부임한 엄목사님 역시 그렇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라도에는 공산당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는데, 엄목사님이 목회 하는 교회에도 공산당원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5명이나 될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6 25 전쟁이 터졌습니다. 인민군들에 의해 서울이 점령되었다는 정보를 제일 먼저 입수한 사람들은 광주를 비롯한 도시 큰 교회 목사들과 힘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연줄을 대어 상무대 장교들의 군 트럭을 타고 서둘러 부산으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인민군들이 전라도까지 쳐들어 왔을 때 곤욕을 치루어야 했던 사람들은, 시골 작은 교회 목사들과 힘없는 교인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는 미국 여인으로 한국명이 유화례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끝까지 돕다가 그만 피난 시기를 놓쳐 버린 채, 인민군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국적상 만약 인민군에게 붙잡히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도와 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미국 여선교사의 생명보다는 각자 자기의 생명이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목숨을 걸고 미국 여선교사를 구출해 낸 사람들이 바로 `산중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던 미국 여선교사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된 자의 의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큰 궤짝을 만들어 여선교사를 그 속에 들어가게 한 뒤 번갈아 지게에 지고, 도중에 사람들이 물으면 짐짝이라 대답하면서 70리나 떨어진 화순 화학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산중턱에 있는 동굴에 선교사님을 숨겨놓고, 인민군들이 해를 넘겨 물러갈 때까지 산중파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해 그녀를 지켰습니다. 그 와중에서 산중파 사람 두 명이 빨치산에 발각되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산중파 사람들의 이와 같은, 생명을 건 헌신과 사랑에 의해 미국 여선교사는 끝내 무사히 구출될 수가 있었습니다.

 

엄목사님은 그 사실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으면서 과연 누가 진정한 크리스천인지, 누가 참으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인지, 어느쪽이 정말 교회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8년만에 서울로 목회지를 옮기어 도시 그리스도인들의 타락상을 더욱 절실하게 확인한 뒤, 옛날 산중파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목회를 관두고 수도원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크리스천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크리스천이란 그 심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만 어떤 상황 속에서든, 자신이 모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분별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생모 마리아를 가리켜 `보라, 네 어머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당신의 어머니를, 요한이 친 어머니처럼 봉양해 줄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27)

 

그 날로부터 제자 요한은 지체없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서 모셨습니다. 하루 이틀 혹은 한 두 달 모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요한은 장수한 마리아가 늙어 죽을 때까지, 다시 말해 요한 자신이 늙은이가 될 때까지 마리아 모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친 어머니를 한평생 한 집에서 모시고 사는 것도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때론 뜻이 맞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서로 마음이 상할 때도 있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자기 어머니도 아닌 남의 어머니를 한평생 모셨습니다.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과 제자 요한을 사촌지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의 어머니가 친 자매지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25절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모가 서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는바, 그 이모가 바로 요한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촌 요한에게도 이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요한이 마리아를 한평생 모시기에 이모인 까닭에 특별히 편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척지간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으므로 남남일 때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한결같이 모시기를 중단치 않았습니다.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성미가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에게 은밀히 부당한 청탁을 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던 인간이었습니다. 그와같은 요한이 어떻게 한평생 그 일을 해 낼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사도 요한이 그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집에 모시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만 모신 것 같습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요한은 남의 어머니를 한평생은 고사하고 한 두 달도 제대로 모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기 이전에, 자신의 심중에 주님을 먼저 모셨던 것입니다. 자신 속에 모시고 있는 주님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님의 사랑에 의해, 어떤 상황 아래서든 변함없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노인이 될 때까지 할머니 마리아를 모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주님을 모셨을 때 단지 마리아만 섬겼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자신이 모신 주님으로부터 늘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모신 그의 심중에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마리아 봉양이 끝났을 때에, 노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요한1서, 2서, 3서를,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한평생 주님을 모시고 살지 않았더라면 결코 가능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한평생 주님을 모시고 살면서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아니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날마다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 4:7∼8)

 

큰 교회 목사들과 힘있는 교인들이 관심도 없이 내팽개쳐두고 가버린 미국 여선교사님을, 그들로 부터 이단시 당하던 산중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건 채 지게에 지고 70리나 떨어진 산 속으로 들어가 동굴에 숨겨놓고 해가 바뀔 때까지 먹을 것을 구해 공궤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들이 여선교사님을 극진히 모셨음을 의미합니다. 모두 자기 살 궁리만 하는 그 살벌한 전쟁판에서 어찌 산중파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아니 두 사람의 생명을 잃으면서까지 미국 여선교사님을 끝까지 모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야말로 진정 그 심중에 주님을 모신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심중에 계시는 주님 때문에,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 사랑을 힘입어 그들은 그녀를 모시고 섬기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산중파의 지도자였던 이현필은, 추운 겨울 신발도 없이 선교사를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산속을 헤매고 다니면서도 주님을 향해 이런 사랑의 시를 남겼습니다.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 준령 험치않소

방울방울 땀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주님 가신 길이라면, 가시밭도 싫지 않소

방울방울 피방울만 보고 따라가오리다.

 

주님 계신 곳이라면, 바다끝도 멀지 않소.

물결물결 헤엄쳐서 건너가서 뵈오리다.

 

주님계신 곳이라면, 하늘 끝도 높지 않소.

믿음 날개 훨훨 쳐서 올라가서 뵈오리다.

오, 주예수, 주님이여, 이 천한 맘에 계시오니

밝히 인도하여 주옵시기

꿇어 엎드려 비나이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만약 교회가 타락하고 교회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건물이 낡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교인들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을 그 심중에 모시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고서는 교세가 아무리 커도 사도 요한처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참 제자가 될 수 없고, 주님을 심중에 모시지 않고서는 예배당이 제아무리 웅장해도 소위 `산중파' 사람들과 같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은 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방법이 없고, 주님을 모신 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니 될래야 아니될 수도 없음은,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빛이요 소금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고서는 교회가 교회다울 수 없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다울 수 없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은 창립 9주년을 맞는 기념주일입니다. 9년전 우리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교회가 되자는 의미에서 교회 이름을 `주님의 교회'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에 속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각자가 사도 요한과 같은 제자, `산중파' 사람들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목사를 비롯하여 모든 임직자들은, 그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분명한 본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교회 역시 우리가 주위에서 더러 볼 수 있는, 추악한 사람들의 교회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 개인 신상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1년 후면 저는 이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저 스스로 저의 임기를 10년으로 정하고 떠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 아닌 사람을 우상으로 섬기고 모시는 우를 피차 범치 않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교회가 진정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주님의 교회로 지속되는 데에 저 자신이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얼마전 익명의 교우님으로부터 편지를 한통 받았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이 지금의 제 심정을 너무나도 잘 피력하고 있기에 이 시간 읽어 드리겠습니다.

 

목사님께 드립니다.

 

저는 주님의 교회에 등록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밖에서 들은 이야기도 있었고, 막상 등록하고 다녀보니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 나름으로는 신앙도 성장한 것 같고, 교회와 목사님과 구역 식구들과 모든 성도들이 큰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 자랑은 그 안에 내재하시는 주님께 대한 자랑임은 말할 것도 없구요. 그런데 최근에 제 마음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금년에 착공할 정신여고 강당 건축과, 내년 중반이면 떠나실 목사님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이기심에서 비롯된 근심, 걱정의 소리를 듣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속 남아 계셔서, 늘 신앙의 좌표가 되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 뿐, 목사님의 하나님에 대한 서원을 우리는 당연히 더 우위에 두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그러기에 저는 목사님의 결단을 존중하며, 정신여고 강당 건축도 한국 교회 건축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두손들어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일부에서, 정신여고 강당 건축이 끝날 때까지는 목사님이 계셔야 한다는 둥, 심지어는 목사님이 떠나시고 나면 교회에 동요가 있을 것이라는 둥, 지극히 인간적인 염려의 소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저는 심히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입으로는 주님의 교회가 참 좋은 교회이고 이재철 목사님은 훌륭한 분이라고 칭찬하면서, 막상 그 배후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결국 눈에 보이는 교회와 상대적으로 다른 목사님보다 좀 나은 자연인 이재철 목사님만 보았기에 이런 염려의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염려의 소리는 그 동안 목사님께서 일관되게 가르치신 내용과도 크게 배치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가 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목사님의 결심까지도 존중할 수 있어야 하고, 목사님께서 떠나신 후에도 정신여고 강당 건축은 물론, 교회가 전혀 동요없이 더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줄 때, 비로소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했다는 증거가 드러날 줄 믿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일부의 염려처럼, 목사님 떠나시고 난 다음 교회가 흔들린다면 주님의 교회를 주목하고 있던 교계로부터 "그러면 그렇지 주님의 교회인들 별 수 있나" 이런 비웃음을 받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우리 교회 교우님들이 이재철 목사님만 보고, 이재철 목사님을 있게 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우를 정말 범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저는 이 익명의 교우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교우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이 분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이미 이분과 같은 믿음을 갖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지난 9년동안 여러분들께서 이 부족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해 주셨는지 눈물겹도록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사랑이 없었던들 오늘의 저는 존재치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누구보다도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해도 우리는 주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그 분을 중심에 모시고 그 분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만약 제가 주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로 변함없이 존속케 하기 위하여 떠남으로 인하여 이 교회가 흔들린다면, 이것이 어찌 주님의 교회일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어찌 믿을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정말 살아계시고 진정 이 교회의 주인이 되신다면, 저처럼 부족한 사람과는 비교가 안될 훌륭한 분을 이미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 왜 훈련시키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 분을 도구 삼아 어찌 이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우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만에 하나라도 여러분의 심중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인간 이재철이 더 깊게 각인 되어 있다면, 이제부터 1년 내에 그것을 지워야만 합니다. 주님보다 인간 이재철을 더 깊이 새기는 것은 여러분과 저 자신을 동시에 망치는 일입니다. 자금부터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내년에 새로 오실 목사님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맞을 준비를 해야합니다. 그때 우리의 교회는 진리와 생명과 사랑과 봉사와 개혁과 헌신이 멈추지 않는 영원한 주님의 교회가 될 것이며, 우리 모두는 썩어 가는 이 도시 속에서 참된 생명의 밀알이 되는 진정한 산중파 사람들―곧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참 제자 요한이 될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우리의 고백을 기뻐 받으시고, 그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친히 세우시사, 지난 9년 동안 주님께서 한결같이 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 주셨던 것을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일 수 있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을 중단치 말게 하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우상시되고 사람이 주인 되는, 사람의 집단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심령을 붙들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교회가 언제나 진리와 생명, 사랑과 헌신, 봉사와 개혁이 넘치는 주님의 교회 되게 하시고, 모든 교인들이 썩어 가는 이 세상에 생명의 불씨를 던지는 산중파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1년 후에 오실 새목사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하시고 주님의 방법으로 멋지게 훈련시키시고 계심을 믿사오니, 그 분과 더불어 이 주님의 교회가 21세기 이 땅의 역사를 밝히고 맑히며 선도하는 빛과 소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 아멘 ―

네 어머니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작가 조연경씨의 작품 중에 `효도별곡'이란 콩트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만두집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부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어김없이 만두가게에 나타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만두집 부부는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주 수요일 3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따로따로 만두집으로 들어선다든가, 식탁에 마주앉아 서로 쳐다보는 표정 등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개는 할아버지가 먼저 오는 편이었지만, 비나 눈이 온다거나 날씨가 궂은 날이면, 할머니가 먼저 와서 구석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할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만두를 시킨 뒤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먹을 생각도 않고, 마치 이별을 앞둔 젊은 연인들처럼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로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상대에게 황급히 만두를 권하다가 다시 눈이 마주치면,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였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부지간 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만약 부부라면 매번 만두집에 따로 나타날리도 없고, 만날때마다 그처럼 서로 애절하게 쳐다보다가 헤어질 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를 옛날 `첫사랑'의 관계로 잠정 결론을 내렸습니다. 몸은 늙어도 사랑은 늙지 않는 법이기에 나이 들어 우연히 재회한 첫사랑의 연인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젊은 시절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의 아쉬움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그날 따라 할머니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만두 하나를 집어 할머니에게 권했지만 할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따라 할머니는 눈물을 자주 닦으며 어깨를 들먹이곤 했습니다. 한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만두 값을 치룬 할아버지는, 그날 만큼은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만두집을 나섰습니다. 곧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며 걷는 할머니를 어미 닭이 마치 병아리를 감싸듯 감싸안고 가는 할아버지―그 두 노인의 뒷모습이 왠지 가슴 아프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수요일도, 또 그 다음 수요일에도 두 노인은 영영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어느 수요일 정각 오후 3시에,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만두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부부는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얼굴은 예전과는 달리 몹시 초췌해 보였고, 진심으로 반가와하는 부부를 향해 할아버지가 답례로 보인 웃음은 울음보다 더 슬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만두집 여자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도 곧 오시겠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습니다.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만두집 부부는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뜨릴 만큼 놀랐습니다. 그리고 마치 독백하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사연을 듣고서는, 부부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첫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어엿한 부부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수원에 있는 큰 아들의 집에서,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둘째 아들의 집에서 각각 떨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두 분의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식들이 싸운 결과였습니다. 큰 며느리가 다 같은 며느리인데 자기 혼자만 시부모를 모두 모실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서는 바람에, 아들들이 공평하게 한 분씩을 모시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서울과 수원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 세시만 되면 마치 견우직녀처럼 그 만두집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온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 나만 죽으면 돼, 천국에서는 같이 살 수 있을거야."

 

 

연로한 부모님을 생이별시켰던 그 자식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자식들에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피치 못할 절박한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자식들이 부모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있었더라면, 부모로 인해 이 땅에 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었고, 부모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음에 대한 긍지가 있었다면,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다못해 달동네 삭월세 방이라도 얻어 함께 기거토록 해 드릴지언정, 그 어느 때보다도 삶의 반려자가 필요한 노부모를 생이별시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가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십계명 중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작년 어버이 주일 `공경하라'는 히브리어 `k bad'는 `무겁다'는 뜻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즉, `공경한다'는 것은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부모님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경륜의 무게, 인식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를 인정하면 귀히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게'란 `긍지'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 인생의 무게를 존중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만약 이 긍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무게를 인정하기는커녕 깃털보다 더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란 함께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 용돈을 얼마나 드리느냐, 얼마나 호강을 시켜 드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효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에 대한 긍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벌써 15 년전의 일입니다. 일본 혹가이도의 삿뽀로에서 돈을 많이 번 재일교포 한 분이, 형편이 어려운 재일교포 노인들을 위한 최신 시설의 양로원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지를 직접 답사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연 소문대로 양로원은 호텔과 같은 수준의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많은 노인들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영양사와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재일교포 노인을 위해 지어진 그 양로원에 재일교포 노인은 막상 1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막상 시설 좋은 양로원에 재일교포 노인들이 들어가고 싶어해도, 자식들이 혹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까 두려워 반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효자이어서 노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불효자라는 욕을 듣지 않기 위하여, 실제로는 전혀 효도를 하지 않으면서도 부모님을 단지 가두어 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낳아 주신 부모님이 단지 귀찮아서, 혹은 남의 손을 빌어 형식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양로원에 보내는 것은 물론 천륜을 어기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자식이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부모님께서 노인들을 위해 특수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양로원에서 같은 또래의 노인들과 함께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시기에 양로원에 모셔다 드리고 정기적으로 찾아뵙는다면, 그것은 결코 불효가 아닙니다. 도리어 참된 효도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한 집에 모시고 살면서도 함께 사는 애완용 강아지만도 못하게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씻을 수 없는 불효입니다.

 

따라서 내 부모님의 재산이 얼마냐, 내 부모님이 얼마나 출세한 분이냐, 얼마나 배운 분이냐에 상관없이, 그 분의 자식으로 태어난 데 대한 긍지가 참된 효도의 필수조건이 됩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도 존중도 섬김도 오직 이 긍지로부터만 비롯되는 까닭입니다.

 

 

본문 26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사용한 호칭 `여자'란 단어 `gunee'는 이스라엘인들이 존경하는 상대에게 사용하는 경칭이라는 것과,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에 하신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한 성도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신 것은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을 일컫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적절한 질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모친 곁에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사도요한이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7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제자 요한과 예수님은 친형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자기 친 어머니처럼 모셔 줄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해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고 말씀 하신 것은 당신 자신이 마리아의 아들이란 뜻이 아니라, 요한을 가리켜 앞으로 요한을 양아들로 삼으라는 의미란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래서 표준 새 번역 성경은 아예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어머니를 보시고, 또 그 곁에 자기가 사랑하는 제자가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자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셨다."

 

즉 본문에서의 아들이란 사도 요한임을 단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황적으로나 문맥적으로 대단히 설득력있는 해석입니다. 저 역시 원문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 자신이 아들이란 말인지, 아니면 사도요한이 아들이란 말인지를 밝혀 줄 주어와 동사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본문의 아들을 사도요한과 예수님 중 어느 쪽으로 번역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이야말로 예수님의 효성을 강조하는 구절로 인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친 어머니였던 마리아에 대하여, 효도와는 거리가 멀었던 분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12살 되던 해 가족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어머니 마리아가 그만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심정이 어떻했겠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사흘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어린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그리스도로서의 공생애를 위해 출가한 예수님을 어머니 마리아가 찾아갔을 때 에도,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48∼50)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이와 같은 언행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볼 때 불효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리켜 불효자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부모공경의 본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그 근거는 요한복음 2장에 나타난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와 오늘의 본문 두군데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라는 곳의 혼인 잔치 집에 어머니와 함께 참석하셨을 때, 마침 그 집의 포도주가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기적을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직은 당신의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강권하자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굽히고 어머니의 명령에 순종하여 생애 첫 번째 기적을 행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효성을 강조할 때마다 늘 인용되는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의 일이었습니다. 그 이전은 물론이요 그 이후 역시 예수님의 효성을 엿볼 수 있는 기사는 복음서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운명하시기 직전, 오늘의 분문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효성을 발견하고 강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이 구절은 정말 중요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이 구절이 없다면, 가나의 혼인 잔치 기사 하나 만으로 예수님을 효자라 강조하기엔 너무나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란 주님의 말씀은 모친 마리아에게 단순히 사도 요한을 아들로 삼고 살라는 소개의 말 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말해 어머니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살다가 기껏 죽기 직전 다른 사람을 아들로 소개나 시켜주는 예수님이야말로, 단지 자식으로서의 형식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이별시켜 놓고도 부모를 모신다고 생각하는 자식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저 애정도 없이 남의 손을 빌어 효도아닌 효도를 하기 위해 부모를 양로원에 떠 맡겨 버리는 자식들과 다를 바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구서야 어찌 예수님께서 부모공경의 본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본문 속의 아들은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던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발견하셨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에게 어머니보다 더 그리운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에 두 팔을 벌리신 채, 당신 자신을 가리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 보십시오. 바로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그것은, 어머니 마리아가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동정녀 처녀의 몸으로 당신을 잉태하고, 당신을 낳고, 당신을 키워 주었기에,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시어 그리스도로서 구원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다는, 어머니에 대한 주님의 긍지의 대선언이었던 것입니다. 동정녀 처녀였던 어머니가 내 어머니 되어 주지 않았던들, 그 모든 일이 가능할 수 없었다는 긍지로운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 한 마디로 인해,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으므로 마리아가 세상사람들로 부터 겪어야만 했던 온갖 고초와 고난의 고통이 눈녹듯 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머니에 대하여 이처럼 긍지를 갖고 계셨기에, 비록 주님께서 어머니와 떨어져 사셨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성만은 변할 수가 없었고, 바로 이 긍지로 인해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 하시며 당신 모친의 여생을 간절하게 부탁하실 수 있었고, 남의 손을 빌어 효도하려는 여타 인간들과도 구별되실수 있었고,그래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예수님의 삶 속에서 성취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 살아생전 효도를 다 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나이들수록 그것을 예외없이 후회하게 되는지 아십니까? 이제 곧 죽으면 하나님과 먼저가신 부모님을 만나게 될 것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효도라는 단어의 의미가 퇴색해 가는 비정상적인 세태 속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제5계명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주셨던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찾으십시오. 비천한 달동네 나사렛 출신의 마리아가 단지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긍지가 되듯이, 우리의 부모님이 아무리 늙고 병들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에 의해 우리 부모님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긍지가 될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해 이 긍지를 갖고 있는 한, 설령 남에게 불효처럼 보이는 행동도 그 본질은 실은 효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긍지를 갖지 못한 자식이라면, 그가 부모에게 행하는 것들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또다른 불효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녕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오늘부터 우리 모두 부모님을 향하여 주님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긍지로운 고백의 삶을 시작치 않겠습니까?

`보십시오. 저는 바로 부모님의 자식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아름답게 펼쳐질 것입니다.

 

 

기도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부모님 아니셨더라면 지금 우리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서 빼시고 빼시어, 우리 존재의 통로가 되게 하신 부모님에 대해 긍지를 갖는 자식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 긍지로부터만 참된 효도가 시작됨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자녀된 긍지로부터 비롯됨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 긍지 속에서 하나님 공경과 부모 공경이 우리 삶으로 성취되게 하시고, 그 누구도 아닌,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분별하고 실천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불효자처럼 보이는 효자 가 될지언정, 효자처럼 보이는 불효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부모 공경이 연례행사가 아니라 매일의 삶이 되게 하옵서소. 진정한 부모공경의 본이 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옵서소.

― 아멘 ―

여자여 보소서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얼마 전부터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이야기 중에 `만득이 씨리즈'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득이라는 아이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귀신과, 그 귀신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만득이에 얽힌 이야기 씨리즈입니다. 귀신이라고 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호칭만 귀신일 뿐 실은 사랑과 인간미 넘치는 존재입니다. 한가지 이상한 것은 아이들은 `만득이 씨리즈'를 이야기하면서 깔깔거리며 재미있어 하는데, 어른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전혀 우습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아이들이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즐기는지 이해하기조차 힘듭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식사 시간에 아이들이 서로 `만득이 씨리즈' 이야기를 하며 저희들끼리 우스워할 때, 무엇이 그토록 우스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오히려 아이들이 이상하다는 듯 `왜 아빠는 우습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만득이 씨리즈'에 대한 정신분석학자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즉 이야기 속의 귀신은 아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간섭하며 잔소리하는 부모를, 그리고 만득이는 그러한 부모의 잔소리로부터 해방되기 원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나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만득이 씨리즈'를 서로 이야기하고 폭소를 터트리면서, 끊임없는 부모의 잔소리로 인한 스트레스를 자신들도 모르게 해소한다는 것입니다. 그 글을 읽은 뒤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만득이 씨리즈'를 들으니 저도 아이들과 함께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설을 덧붙여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하루는 만득이가 길을 걸어가는 데 엄마가 `만득아 만득아' 하고 따라 오며 어딜 가는지 묻습니다. 귀찮아진 만득이가 얼른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 지하철을 탔습니다. 설마 여기까지야 못 좇아오겠지 하고 있는데, 갑자기 천정에 붙은 스피커가 울려 퍼졌습니다.―`만득아, 만득아' 바로 엄마의 목소리였습니다.

이번에는 만득이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갑니다. 갑자기 자동차 앞 유리창에 엄마가 나타나 `만득아'하고 불렀습니다. 짜증이난 만득이는 유리창 앞 와이퍼를 켰습니다. 그랬더니 유리창으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만득-득득-아득'. 만득이를 부르는 엄마소리와 자동차 와이퍼 소리가 겹친 음향이었습니다.

만득이가 화장실 변기에 앉았을 때입니다. 갑자기 변기 아래쪽에서 엄마가 `만득아!' 하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언짢아진 만득이가 변기의 물을 틀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아래에서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 `만푸-득푸-아푸'

아이들이 지하철을 타건, 자동차를 타고 가건, 심지어 화장실에 가건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부모들의 모습이, 그 간섭 속에서 살아야하는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비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또 `삐삐'라는 게 있어, 심지어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한테 까지 삐삐를 채워주고 원격조종하는 부모까지 있는 한, 만득이 씨리즈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될 것입니다.

 

 

비단 요즈음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 모든 아이들은 부모하면 먼저 잔소리를 연상할 만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아이들은 부모의 끝없는 간섭과 잔소리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책임이요 의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그 숱한 간섭과 잔소리 중에 정말 자식에게 필요한 말, 자식이 격랑의 세상을 살아 갈 때 도움이 될 생명의 말, 지혜의 말, 진리의 말들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2년 전 삼풍 백화점이 붕괴되어 수많은 사람이 졸지에 생명을 잃었던 그 참혹한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던 사람 중에 유지환양이 있었습니다. 당시 18세의 어린 소녀였던 유양은 무려 13일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구조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연약한 소녀가 무려 열 사흘 동안이나 죽음의 구렁텅이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제 죽었구나' 하고 절망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평소 엄마가 들려주던 말들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고학력자가 아니었습니다. 넉넉한 가정의 주부도 아니었습니다. 5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의 병간호와 생계를 도맡은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상을 졸업하고 대학생인 오빠의 뒷바라지와 생계를 돕기 위해 취직한 딸에게, 늘 희망의 말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유양은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 평소 어머니가 들려주던 희망의 말들을 곱씹으면서, 절망과 죽음을 끝내 이긴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자 한 어머니는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13일간이나 갇혀있으면서 엄마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힘을 얻었다는 18세 소녀의 말을 들으며, 저는 저와 제 아이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말은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가라는 잔소리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인생의 지혜를 들려줄 지혜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어머니는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나는 이제껏 내 아이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까? 아이들이 훗날 역경에 처했을 때, 과연 내가 가르쳐 준 어떤 말에 의지하여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을까?"

 

죽은 줄 알았던 딸이 13일만에 살아 나왔을 때 어머니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딸을 대견스러워하는 어머니에게 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가르쳐 줬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자기가 그 지옥으로부터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란 의미입니다. 그 말을 듣는 어머니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때 서로 부딪치는 어머니와 딸의 시선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감동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에게 생명과 지혜의 말과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부모, 그리고 그 말을 가슴 속에 새기는 자식 사이에서만 일어 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땅의 모든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다 이러하다면, 쉬임없는 부모의 잔소리를 귀찮아하는 `만득이 씨리즈'와 같은 이야기들은 발붙일 틈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벌였던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그가 100세 때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 명령하십니다. 마치 짐승을 잡듯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모리아산으로 갔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당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성경은 이렇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7∼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리라 약속하신 이상, 이삭은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이삭이 죽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시 살려 주시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거짓말장이가 될 것인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리아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지체없이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눕혀 놓고 칼을 치켜들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됩니다. 이때 아들 이삭은 15살 안팎의 소년이요, 아브라함은 115세 경의 노인이었습니다. 사내 아이 15살이라면 115세 노인이 당할 수 없을 정도로 한참 힘이 넘칠 때입니다. 그런데 그 팔팔한 나이의 아들이 어떻게 노인 아버지의 결박을 순순히 받고 죽겠다며 제단 위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지금 자기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게 된 이삭이 도망쳤더라면, 아브라함의 기력으로는 이삭을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전혀 반항하지 않고 아버지가 하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그것은 아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의 결과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모리아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말하는 장면을 머리 속에 그려보십시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지금부터 너를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다. 그러나 너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너를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루실 것을 약속하신 이상, 설령 네가 죽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너를 살려 주실 것을 아빠는 확신한다. 너 내 말을 믿어 주겠니?"

"네, 아빠 말씀이라면 믿어요."

이런 과정없이 어찌 이삭이 아버지의 칼 아래 가만히 누워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아들 이삭을 가르쳐 왔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삶이 이삭에게 본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소년 이삭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 눈에 보이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음을 뜻합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믿었던 대로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제지하시고, 그 부자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는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정도의 믿음이라면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날 아브라함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믿고 따라 주었던 아들 이삭이 얼마나 대견스러웠겠습니까? 아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까요?

"아빠가 말씀하셨잖아요. 하나님께서 죽어도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고 말이에요."

함께 손을 잡고 모리아산을 내려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참으로 황홀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성경에서 가장 황홀한 부자지간을 보여주고 있다면, 오늘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자,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25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사지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흐릅니다. 죽어 가는 예수님 앞에서 군병들은 서로 제비를 뽑아가며 예수님의 유류품을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순간입니다. 그 비극적인 현장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다른 세 여인과 함께 서 있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은 의붓 관계아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친 어머니요, 친자식이었습니다. 자신의 태에 10달동안 품고 있었고, 자신의 젖을 물려 주었고, 자신의 품속에서 말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시작했고, 자신이 지어주는 밥을 먹고 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30년 동안이나 한 집에서 모자지간으로 살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자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자식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갑니다.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군병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옷은 자기 자식의 옷입니다.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직한 광경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땅을 치고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뒤로 넘어져 실신하지도 않았습니다. 불한당 같은 로마군병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홀로 슬픔을 삼키면서 아들의 죽음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마리아의 행동이야말로 예수님이 자신의 친자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기의 아들로, 자신의 소유로 키워오지 않았음의 증거였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괴로와 하시던 예수님의 시선이 어머니와 마주쳤습니다. 마지막 순간 당신의 친어머니를 보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해 하신 말씀을 본문 26절은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자'란 호칭 `gunee'는 존경하는 상대에 대한 경칭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원문의 뜻에 더 가깝게 번역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어머님, 보십시오.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돈 많이 벌어서 어머님을 호강시켜 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죽어가서 죄송합니다라는 실패자의 한탄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어머니야말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왜 그토록 참혹하게 돌아가셔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입니다. 아니 어머니 마리아야말로 예수님의 어린 시절부터 그 모든 사실을 일깨워 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시켜준 스승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인이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란 예수님의 말씀의 깊은 의미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덕분으로, 어머니 아들답게,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다한 아들의 긍지로운 자기 선언인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그 마지막 순간 이런 고백을 하셨겠습니까? 전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당신을 낳고 키워준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하시는 이 장면보다 더 눈부신 모자지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위대한 자식은 위대한 부모로부터 비롯됩니다. 위대한 부모란 아브라함처럼, 마리아처럼,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자만 자식에게 참된 지혜, 참된 생명, 영원한 진리를 전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13일간이나 갇혀 있으면서 엄마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힘을 얻었다는 18세 소녀의 말을 들으며, 저는 저와 제 아이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말은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가라는 잔소리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인생의 지혜를 들려줄 지혜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껏 내 아이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까? 아이들이 훗날 역경에 처했을 때, 과연 내가 가르쳐 준 어떤 말에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을까?"

 

부모가 어떤 삶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 자식의 삶이 결정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숱한 말들 가운데, 정말 자식들에게 참된 생명과 영원한 힘이 될 진리와 지혜의 말들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 이 시간 되돌아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나를 먼저 드리지 않는 한, 나의 모든 말들은 의미 없는 잔소리에 불과하며, 의미 없는 잔소리는 부모와 자식간의 골만 넓힐 뿐임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먼저 아브라함과 같은 아버지, 마리아와 같은 어머니가 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자식들에게 채워 주는 부모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식들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삶을 다 산 뒤에 우리의 자식되었음을 가장 큰 긍지로 여기게끔, 지금부터 우리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참 신앙인이 되게 해 주옵소서. 내가 어떤 삶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내 자식의 삶이 결정됨을, 늘 기억하며 살게 하옵소서.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결과가 죽음일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만 잘 살게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 아 멘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