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교회/주일낮 예배 / 1998. 9. 20. / 설교자 : 임영수 목사님


영원을 향한 삶
말씀 : 누가복음 16 : 19∼26


 
사회에서 소유를 근거로 해서 사람을 구분할 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됩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가진 자보다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나타내고 있는 책입니다.

그 유명한 마태복음 산상수훈의 팔복 내용이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자라는 구체적인 사회계층에 대한 위로와 희망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발췌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그러나 화 있을 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가난한 자로,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주린 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부요한 자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의 비유는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가 미래에 받을 보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나사로는 가난한 자를 대신하고, 부자는 부요한 자를 대신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가난한 자의 삶 그 자체를 부추기고 예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좀더 깊은 안목을 들여다보면 가난한 자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경건한 자의 삶의 모형으로 제시되어 있고, 부자의 삶은 그것과는 반대되는 삶의 모형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릴 줄은 모르지만 보고 느끼는 즐거움은 향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한 때에는 인상파의 그림을 좋아해서 그림을 수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추상적인 그림이나 조각을 더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것들은 무한한 상상력을 가지고 감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작가의 분명한 철학과 의도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그림 언어입니다.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역시 그림으로 비유하면 추상화이면서,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분명한 의미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깁니다. 여기서 부자의 입은 옷을 특별히 강조한 것은 그의 부의 척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시대 아주 부요한 사람이 아니고는 입을 수 없는 의상들입니다. 거기에 곁들여 이 부자가 날마다 호화롭게 연회를 즐기면서도 자기 눈앞에 비참한 상태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 조그마한 관심이나 긍휼을 베풀지 않고 살았다는 것으로 그의 삶의 방식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상태에서 살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나사로를 헌데투성이 거지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것으로 배를 채워 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희망이나 낙이 없는 삶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거지 나사로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가난 가운데서 그가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천당과 지옥을 말해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고, 이 현실에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유에서 재물 그 자체를 선악으로 규정하거나 문제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재물과의 관계에서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부자는 맴몬 `Mammon'이라는 신을 숭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신을 숭배할 때 그의 눈은 어두워져서 가난한 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의 쾌락 자신의 배만을 채우는 것이 생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부자와 같은 삶의 결과는 결국 깊은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고통은 제삼자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온전한 삶으로 실현되지 않고 왜곡 되이 형성된 삶의 결과 그 자체가 그에게 고통과 두려움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한 고통을 비유에서 고통 속에서 몹시 목말라 하는 부자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현실에서 자신의 영혼의 요구를 무시하고 외면하며 살았을 때, 그 영혼의 갈급함은 나중에 영원히 고통과 아픔, 후회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한 고통과 아픔은 영원한 생명으로 닿을 수 없는 큰골을 만들게 됩니다. 비유에서 그러한 현상을 아브라함 품안에 있는 나사로와 고통 가운데 있는 부자 사이에 왕래할 수 없는 큰 구렁텅이로 그려져 있습니다.

오랜 기간 정신과 치료를 받아 오던 삼십대 남자가 임종을 앞두고 그의 정신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그림의 내용은 고래와 같은 큰 괴물이 입을 벌리고 한 사람을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반대편에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그 그림의 해설에서 큰 괴물은 그 환자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의식화시키지 못하고 억눌려 놓았던 무의식이 죽음의 순간에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인데, 죽음 앞에서 그 환자가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서 몸부림치는 것은 그 괴물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 그림은 저에게 매우 깊은 것을 암시해 주었습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그의 진정한 내적 요구를 외면하고 살아갔을 때 죽음의 순간에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미래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의 요구나, 내적 요구는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이며, 그의 통치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와 같이 자기만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것이 현명한 삶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러한 삶은 진정한 자기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 내적 고갈과 허무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자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것은 자동차의 경고등과 같은 것으로 다가오고 있는 위기를 암시해 주는 경고 표식입니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사회적으로도 육신의 안목과 정욕만을 자극하는 문화적인 분위기는 그 사회가 매우 심각한 위기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빨간 신호등입니다.

한편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 희망이 다 끊어진 상태입니다. 직장도 없고, 연줄도 없고, 저축해 놓은 돈도 없고, 도와줄 친구도 없습니다. 헌데투성이로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 개들이 그의 헌데를 핥았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생의 희망을 둘 곳이 전연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것은 가난 가운데서 그의 삶이 어떠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살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현실에서 숨겨져 있는 진정한 삶의 길을 발견해서 그 길로 간 것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그의 것이라"는 미래의 희망의 약속을 현실에서 선취해서 살았고, 나중에 그 약속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영적으로 부요하게 살아간 경건한 자의 삶의 모형입니다. 진정한 경건에는 능력과 자족, 희망,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삶의 맛을 안 사람들은 그것과 대치되는 현실의 쾌락을 포기해 갑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정신적 고통은 경제적인 핍절에서 보다는 좀더 깊은 곳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쾌락은 쉽게 경험하지만 참된 기쁨의 경험은 점점 힘들어 집니다. 참된 기쁨은 우리에게 삶의 희망, 인격의 통합을 가져오지만 쾌락은 희망 대신에 어두움·좌절·가책·분열을 가져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늘 배부르게 먹고 마시지만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은 미용 기술과 의상으로 외적인 멋은 드러내고 있지만 진정한 미적 만족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삶은 점점 더 고독해지고 피곤해집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와는 멀리 있는가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에 몸담고 살면서 재물, 성, 권력과 무관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 때문에 눈이 어두워져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을 놓쳐 버리면 안됩니다. 이러한 것들과 관계를 맺고 살면서도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유해 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에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이러한 것들을 더 높은 목적을 위해 활용해 갈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삶이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추구해 가는 삶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해 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해 가는 구체적인 삶의 태도를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로 받아 드리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의 소유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태도는 염려와 욕심에서 해방되는 좋은 길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업을 내가 돌보고 있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 가는 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의 필요나 유익을 위해서는 언제나 함께 나눌 수 있다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리고 쌓아 두고 모아 두는 습관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습관을 길러 가야 합니다.

다음,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음미하고 감상하는 것을 즐기는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통 당하는 이웃에 대해 사랑의 관심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을 길러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을 지향하는 삶은 내세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이러한 삶은 오히려 더 현실적인 것으로 현실의 삶을 영원의 시간으로 확대시켜 현실의 가치와 목적을 설정해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현실의 삶이 영원의 시간과 잇대어질 때 현실의 의미와 목적이 더 분명하게 밝혀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본래의 진가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독일 뮨스터 대학 신학부에 신약 성서 사본 사료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신약 성서가 한 권의 책으로 편집되기 전 신약 성서의 자료로 사용된 여러 종류의 사본의 파편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조각 하나 하나는 매우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각 자체로서의 가치는 그것이 성서 본문 전체 중에서 어느 부분의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그 것의 가치가 인정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성서 어느 책 몇 장의 내용의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오래된 양피지 사본이라 해도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이 영원이라는 전체에 잇대어질 때 영원의 부분으로서 우리의 생의 가치와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한 밝혀짐 가운데서 나라는 존재의 가치뿐만 아니라 그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의 가치도 밝혀지게 됩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성당에는 아름다운 세 개의 아치문이 있다고 합니다.

한 문에는 황홀하리 만치 아름다운 장미가 조각되어 있는데, 밑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기쁘게 해주는 그 모든 것들은 잠시뿐이다."

또 다른 문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그 밑에는 이렇게 씌여 있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은 잠시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오직 영원한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서에서는 우리의 생을 아침 안개, 잠시 피었다가 지는 꽃으로 비유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의 생이 매우 짧고, 허무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한 순간이 영원의 시간과 잇대어져 그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볼 때 현실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허무한 한 순간이 아닌 매우 소중한 한 순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죽음은 현실과 영원을 이어주는 다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옛날 희랍 사람들이 사용하던 시간과 관련된 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이며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입니다. 먼저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이며, 뒤의 것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비유의 부자의 삶은 이 현실에서는 용납될 수 있는 삶이지만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서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영원히 수치와 고통·번민·후회로 남아 있게 됩니다. 부자의 삶은 완전히 영원과는 단절된 삶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구원받지 못한 자의 삶의 한 유형이라 말하게 됩니다.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나 비겁한 자와 신실하지 못한 자와 가증한 자와 살인자와 음행 하는 자와 마술쟁이와 우상 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계 21:8)<표준새번역>

- 아 멘 -

주일설교말씀/1998.9.6 

 대화로서의기도(설교자 : 임 영 수 )
  말씀: 고린도전서 14 : 15

올림픽 공원 야외 조각 전시장에 알제리 조각가 아마라(Amara. Monhand)씨의 "대화"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작품의 내용은 석상으로 된 상반신의 두 사람의 상(Image)입니다. 이 두 석상은 서로 서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작품에 대한 작가의 해설은 이렇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지식을 풍부히 하고 서로 세심하게 보살피는 듯한, 그리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려고 애를 쓰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한 것은 인간은 서로 의지하고 교류함으로써 존재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초월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대로 인간은 서로 의지하고, 교류함으로써 존재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가능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다른 한 차원의 대화의 삶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인간 서로 서로에 대한 가치를 높여 주고 인간끼리의 장벽을 제거하고 서로를 받아 드리게 합니다. 이 하나님과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기독교인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 기도는 다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형식과 동기,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옛날 원시 종교에도 기도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시 종교에서의 기도는 거의가 다 자아중심적이었습니다. 원시 종교에서 기도자의 간구 내용은 주로 자신이나 자기 종족의 번영이나 보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동기는 자신의 이득과 공포 두려움이었습니다. 원시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힘을 무마시키고, 불행과 위험에서 구출 받기 위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후 문명의 발전과 함께 기도의 형태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기도는 주로 어떤 일정한 종교 의식을 갖춘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의식 기도에서 기도는 일정한 형식으로 작성된 기도문을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의식 기도로서 대표적인 것은 희생 제사였습니다. 이 희생 제사는 종교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기도 내용은 원시 기도와 다를 바 없는 현실의 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는 주문이나 독백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인격적 대상들 간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의 인격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와 대화를 원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대화에서 하나님은 대화의 주체이시면서 또한 객체이십니다. 객체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닌 `나와 당신'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대화의 주체며 객체가 되신다는 것은 대화의 동기와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분이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존 낙스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진지하고 친밀한 대화다."고 했습니다. 존 칼빈은 "기도는 하나님과 경건한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교제이다."고 했습니다. 한편 도날드 불뢰쉬는, "기도는 교제나 연합보다 더한 구체적인 것인데,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상호 의사 전달이다"고 했습니다.

묵상이 말이 없는 하나님과의 교제라면 기도는 말이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마음속으로만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삼상 1-13). 그는 비록 소리는 내지 않고 기도했지만 그것은 말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말이 개재된다는 것은 `나와 당신'의 관계에서 쌍방의 뜻과 의도가 개재됨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 기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성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말이 있는 대화로서 기도이며 거기에는 뜻과 의지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대화에는 언제나 이의 의문이 수반됩니다. 에룰(Ellul)은, "대화에는 전도·긴장·모순·반론을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역시 이의 의문이 수반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불완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불완전과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 없이 맹종하는 로봇이 아닌 약속의 동반자로 상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런 뜻도 모르고 중언부언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레미아의 기도에서 대화로서 기도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은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되기만 합니까?"(렘 12:1 표준 새번역)

이 기도에서 예레미아는 하나님께 이의 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아가 제기하는 문제는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입니다. 결국 나중에 가서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의 현실적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들으려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말이 있다.

그가 나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영이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계속 듣고 있었다."
(겔 2:1∼2)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상대로서의 자격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의 목적을 완성해 가시면서 우리를 그의 계약의 동반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과 동등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선임 동반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주인이지만 우리를 친구로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친구로 말씀하셨습니다. (출 3:6)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기 위해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보좌로 다가가기 위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오직 성령의 감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준비는 믿음 가운데서 기대·소망·겸손·진지함·단순함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그것이 하나님과 대화이기 때문에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파울은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롬 8:26) 토마스 아켐퍼스는,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에 있어서 하나의 위대한 기술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인간적인 기술이 아니고 우리의 내적 존재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탄식과 곤핍을 말로 나타낼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요 믿음에 있어서 약한 우리는 기도 생활에서 성장하기 위해 지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기도 생활을 배양해 가는데 있어서 각자의 방법들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인도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존중해 주시고, 우리의 명철과 영적 발전을 위해 우리를 만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생활에 고정된 규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진지하게 대화의 디딤돌을 딛고 나아가노라면 굴레가 아닌 자유롭고 도움이 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성서에서 기도의 때와 시간에 대해서 특별히 규정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적 근거에서 바람직한 지침은 제시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특별히 제시하는 기도의 시간은 하루 중 아침·낮·저녁입니다.

기도의 때와 시간에 대해 시편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고 아침마다 주님께 기도 드립니다"(시 88:13)
     "저녁에도 아침에도 한낮에도 내가 탄식하면서 신음할 것이니, 내가 울부짖는 소리를 주께서 들으실 것이라"(시 55:17)

다니엘은 하루 세 번 예루살렘 쪽으로 나있는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단 6:10) 예수님은 해질 무렵에 홀로 빈들에 가셔서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기도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주로 아침 기도를 권장합니다.

좋은 기도, 깊이 있는 기도를 위해서는 경건의 서적들을 많이 읽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에는 기다림과 끈질긴 씨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정한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습니다.

우리가 지속적인 기도의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진보와 영적 승리의 대리자들로서 하나님의 목적과 그 분의 뜻의 도구로 만들어져 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데 몇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교란시키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말고 솔직히 고백하곤 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나름대로 결론을 가지고 그것을 그대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자기 주장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문제 그대로를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그것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데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객관식 시험 답안지 작성과 같이 0,×가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은 함축적이며, 관점 변경·신뢰·해방·새로운 결단·새로운 시작·용서·사랑입니다. 최선의 기도의 응답이며 선물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의 문제와 물음에 대한 유일한 해답입니다. 그러한 해답에서 하박국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하박국이 자기 시대에서 생긴 역사적 물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긴 대화 끝에 그가 얻은 해답은 하나님 자신만으로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 아 멘 -

 

주일설교말씀/1998.8.30 

하나님의 희망 속에 있는 공동체(설교자 : 임 영 수 )

말씀: 사도행전 2:37∼47


스위스 제네바 국제 복지기관에 그 기관의 책임자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미모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여성은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전 그 날 방송을 마감하는 시간에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을 반드시 듣고 잠자리에 들곤 하였습니다.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이란 별 것 아닌 "여러분 이 밤도 좋은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아주 짤막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비서에게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이 인사말을 듣고 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여비서가 그렇게 하게 된 이면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이 기관에 와서 일하는지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책임자를 비롯해서 누구 하나 그에게 인간적인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오지만 모두 사무적인 이야기 외엔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서 아파트로 돌아오면 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루 중 인간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방송을 종료하는 시간에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폴 뚜르니에 박사의 "고독으로부터 도피"라는 책 서두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뚜르니에 박사는 그러한 현상이 참된 친교에 굶주려 있는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의 병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뚜루니에 박사는 이러한 병의 원인을 다음의 몇 가지 잘못된 인간의 그릇된 정신 때문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첫째, 의회 정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회 정신은 건전한 민주주의 정신을 의미하지 않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닫고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내서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정치적 복선을 가지고 인간관계를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독립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개인주의를 의미합니다.

셋째, 소유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탐욕·욕심·허영·지배욕·조급을 의미합니다.

넷째, 요구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뚜르니에 박사는 이러한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데는 참된 친교의 정신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도, 오늘의 가장 큰 인간의 병은 사랑의 결핍, 보살핌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결과는 고독·절망·좌절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병은 약으로 치유할 수 없고 오직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병이 치유되고 극복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적 삶의 유형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어느 심리학자가 창설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보혜사 성령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하나님의 희망 속에 있는 새로운 삶의 공동체 형태입니다.

이 공동체가 탄생된 동기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속대로 성령이 오셔서 그의 활동의 구체적인 결과로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삶의 형태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혜사 성령에 의해 인간의 역사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며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스케치에 불과합니다.

이 공동체의 내부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세상 공동체와는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공동체의 형성 동기부터 다릅니다. 세상의 공동체의 형성 동기는 주로 정치적, 경제적인 것들이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 부활의 영이신 보혜사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공동체는 어느 특정인의 신념, 이데올로기, 어떤 사람의 유훈이 그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데 여기서는 그것과는 달리 예수님으로 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이 공동체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살아가는 생활 방식이 세상의 것과 다릅니다. 세상의 생활 방식은 서로 많이 소유해 가는 것인데 여기서는 서로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 나누어주는 생활 방식입니다.

다음은 세상의 생활 방식은 소유가 목적인 철저한 개인주의인데 여기서는 존재가 목적인 친교입니다. 그 친교를 가능케 하는 힘이 돈이나, 권력의 힘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형제 자매 간에 형성된 새로운 관계입니다. 그러한 것이 본문에서는 서로 떡을 떼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세상 공동체에서는 개인의 행복과 가정의 평안을 위해 우상의 허구에서 복을 비는 것이 통례인데, 여기서는 그러한 허구에서 깨어나 하나님과 대화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탄생은 그 시대 사람에게는 너무 생소한 것이기 때문에 이 공동체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모두 경이로움을 느꼈고,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 공동체가 오늘의 교회 모체입니다. 이 공동체가 기독교 역사 이 천년을 지내 오면서 구체적인 형체를 갖게 됩니다. 그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조직입니다. 기독교 전 역사를 통해 교회가 몸부림치며 고뇌하고 투쟁해 오는 것은 자기 형체의 문제와 일치의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이 아니고 주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교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들이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희망 가운데서 온전한 교회로 지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교회가 계속해서 견지해 가야 할 몇 가지 기본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먼저 교회의 거룩성 문제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교회는 거룩합니다. 이 뜻은 교회는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특별히 구별되어 있고, 교회는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행위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그의 거룩성을 상실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공회입니다. 여기서 공회란 말은 카톨릭 교회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 후에 카톨릭 교회를 `기독교회'로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교회의 보편성 때문입니다. 카톨릭이란 말 자체가 `보편적'이란 뜻입니다. 교회는 종족·계급·지역을 초월해서 정의와 평화를 인류 전체의 목적으로 지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보편성입니다.

사도들의 사명 자체가 이러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어느 특정 종족이나 특정 계급의 사람들을 위해 보내심을 받지 않고 전 인류를 위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을 세상에 보낸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으로 성도의 교제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양식은 친교입니다. 친교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교제를 나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만찬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만찬과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도의 교제에서 그 구원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한가지 더 첨가되는 것이 믿는 자들간의 교제입니다. 교회는 친교라는 이 존재 양식을 상실하면 안됩니다.

교회가 견지해 오는 이같은 태도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본질적 내용과 일치됩니다. 교회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희망 가운데 있는 미래이며 세상의 미래는 교회의 미래이기 때문에 교회는 인간 사회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새로운 인류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의 공동체로서 지역이라는 제한성에 머물게 됩니다. 이러한 희망의 미래를 기대하는 교회는 세상에 있는 동안 그 어떤 제도나 규칙을 절대화해서 거기에 얽매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희망 가운데서 지향해 가는 하나님 나라는 눈물·죽음·애통·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간 새 창조의 현실입니다. 그 현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고, 용서되고, 치유되고, 온전케 되는 부활의 때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생을 조명해 볼 때 우리의 생의 실현이나 완성은 자아실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웃·자연·자기 자신과 조화라는 통합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지향하는 희망의 내용도 개인을 넘어서는 공동체의 구원입니다.

이러한 존재 방식을 가진 교회의 생명은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구원의 능력인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하고, 눈을 뜨게 하고, 갱신시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친교입니다. 그 다음은 소유가 목적이 아닌 나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의 삶인 기도입니다.

이것들이 교회의 힘이며, 교회의 재산이요, 교회의 긍지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당위성이나 필연성이 있다면 교회야말로 이 세상의 희망이며 미래라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이 역사의 현실에 현존하시는 종말론적 인격으로서 그리스도 몸입니다. 교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오늘의 위기는 이 세상의 위기가 아니라 교회의 위기입니다. 교회가 자기의 고유한 삶을 포기하거나 기권해 가고 있는 데 있습니다. 포기해 가는 이유가 구원의 능력인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자신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리석은 소년 한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요? 한스라는 소년이 집을 떠나 외지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해서 주인으로부터 금덩어리 하나를 삯으로 받게 됩니다. 소년은 집으로 가는 도중 어떤 사람이 말 한 필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그것이 갖고 싶어 금덩어리를 말과 바꿉니다. 얼마를 가다가 말을 거위 한 마리와 바꾸고, 다시 얼마를 가다가 거위를 고양이 한 마리와 바꿉니다. 다시 얼마를 가다가 고양이를 숫돌과 바꿉니다. 나중에 개울을 건너다가 그것까지 물에 던져 버리고 빈손으로 집으로 가면서 그는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잃어 버린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단지 귀찮은 것을 버렸기 때문에 홀가분하다고만 생각했지,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어 버렸는가에 대해서는 전연 생각을 못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기독교 공동체는 분명히 과거의 역사의 한 시점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비춰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같이 복잡한 조직의 형체는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의 교회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영적 생동감·희망·사랑이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어느 시대에서나 세상에 나타나야 할 종말론적인 인격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미 이 천년이 지난 이 시대에서 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과거의 역사에 있었다 없어진, 고고학적 연구의 자료로서가 아닌,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빛 가운데서 우리가 지향해 가야 할 공동체의 모형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 아 멘 -

 

주일설교 말씀/1998.8.23


보혜사 성령 설교자 : 임 영 수

말씀: 요한복음 16:5∼16



 
최근에 번역된 신약 영어 번역본으로 "Inclusive Version"이 있습니다. 이 번역본에 하나님이 아버지로 호칭되는 곳에는 모두 Father-Mother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특별히 여성을 배려해서입니다. 요즈음 서구 여성 신학자들에 의해 매우 강도 높게 제기되는 문제가 왜 하나님을 남성으로만 규정해야만 하는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남성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여성만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양성이 다 포함됩니다. 특별히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성령 가운데 모성적인 일을 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본문에 이러한 모성적인 성령이 보혜사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보혜사라는 뜻은, 위로자, 돕는자라는 뜻인데, 본문에 이러한 보혜사의 하는 일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번역을 달리 번역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한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눈을 떠서 새로운 것을 보게 합니다. 그 새로운 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실 시간을 얼마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사와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제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기 위해서, 예수께서 하셨던 일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되어야 하겠기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중요한 내용은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것과 그 보혜사가 오셔서 할 일에 대한 것입니다. 보혜사가 할 일로 죄·의·심판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무의미한 사건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교회가 굳게 서 갈 수 있고, 복음이 세상에서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고 능력 있는 복음으로 선포될 수 있습니다.

보혜사가 하는 일이 눈을 뜨게 하는 일이라고 할 때 여기서 뜨게 한다는 것은 태어남·자람·깨어남·갱신의 뜻이 포함됩니다.

먼저 보혜사는 존재의 새로 태어남을 통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눈을 뜨게 합니다.

유대인의 관원 중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어느 날 밤에 비밀리 예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시 태어남은 성령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보혜사는 하나님과 우리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하며, 우리의 내적 실체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씨앗을 주며, 우리 안에 새로운 나를 세우며,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삶의 현실을 갱신시킵니다.

보혜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다시 태어남은 하나님의 미래의 희망 속에 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초인적 인간, 현세의 인간의 경험들을 초월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고난의 면제도 아닙니다. 그리고 아울러 희망과 함께 인간으로서 사랑과 고통, 삶과 죽음을 다르게 경험해 가게 됩니다.

보혜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다시 태어남은 형성되어 가는 삶으로서 그 표상들을 제시하면, 자연 속의 봄을 연상케 합니다. 즉 모든 나무들과 식물들의 푸르름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이 다시 태어남은 영원히 사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과 시간의 만남입니다.

그 다음으로 보혜사는 다시 태어나게 함과 함께 자라게 합니다.

다시 태어남은 자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에서 도덕적 완성을 그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매우 좁고 편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단번에 전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생의 성장 과정에서 지극히 부분적으로 알아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파편에 불과하며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때 그 지식은 완성됩니다. 그리고 믿음에 있어서 성장은 인간의 삶에서 생의 계절에 상응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연령층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의 하나님 인식, 청년의 하나님 인식, 부모와 직업인의 하나님 인식, 노인층의 하나님 인식은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저의 경우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더라도 저의 하나님 인식은 저의 인생의 계절에 따라 각기 달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의 유아 시절의 하나님 인식은 신화나 동화에 등장하는 신비스러운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인식은 교회에서 주일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많은 동화를 통해 형성된 하나님 상이었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의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 이야기,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저에게 신비스러운 세계에 대한 많은 상상을 갖게 했습니다. 한편 그 이야기는 어린 시절 저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유년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훌륭한 인물에 대한 동경 가운데서 기독교 성인들의 전기를 통해서 제가 만나게 된 하나님은, 유년기 때와는 달리 거룩한 성인의 상으로 저의 마음에 간직되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상은 청소년기의 유혹을 극복해 가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정신적 방황과 고뇌 가운데서 하나님 인식은 고뇌하는 인간 실존에 개입하셔서 거듭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시는 도덕적인 하나님이었습니다.

제가 지난날 저의 생의 각 계절에서 달리 이해한 하나님은 각기 다른 분이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저의 삶에 현존해 계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단지 다른 생의 계절에서 부분적으로 경험한 하나님 인식의 파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생의 계절이 바뀜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새롭게 눈을 떠가도록 인도한 분이 보혜사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 없이 저는 저의 생의 변화와 함께 찾아오는 많은 생의 문제를 극복해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혜사는 생의 변화 과정 가운데서 진리의 뜻을 새롭게 조명하고, 재 구성시켜 믿음이 보존되게 합니다. 역시 보혜사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세워 가고 보존해 가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으로 보혜사는 우상의 허구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그의 내면에 미개인이 있습니다. 옛날 과학이 발달하지 않고 인간의 직관만이 사용되었던 시기에는 이 미개인에 의해 인간의 삶 전체가 지배되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변은 전부 어떤 신비스러운 힘을 가진 신들의 조작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고 빌기도 하고, 산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큰 바위나 나무에게 안전을 기원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인간의 운명이 그 어떤 변덕이 많은 신적 존재의 수중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종족의 안전을 위해 알 수 없는 변덕자를 달래고 무마시키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바쳤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불안해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후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이 합리적 사고를 하기 시작하면서 자연현상의 변화나 천재지변을 과학적으로 규명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미개인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인격 깊은 곳에 숨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미개인은 그 무엇인가 의지하고 붙잡는 것이 없으면 실존적 불안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과학의 시대에 합리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도 불안하기 때문에 생의 깊은 소외감 때문에 그 어떤 것을 신뢰의 대상으로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우상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재물을 가진 자나, 지식인이나 배우지 못한 자나 모두 우상이라는 허구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우상들은 이데올로기·돈·명예·성공·성·권력·인기 등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이러한 우상의 허구를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은 매우 지성적인 사람으로 합리적 사고를 한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실존적 불안이 더 크고 생의 소외감을 더 깊게 느끼게 됩니다. 특히 생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불안은 더 커집니다. 오히려 우매한 사람은 하늘을 믿던가 별이나 해, 달 같은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지적인 사람만큼 실존의 불안을 덜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은 인간을 우매하게 만듭니다. 우상은 눈을 어둡게해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상은 허구의 유토피아를 지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보혜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미개인의 눈을 뜨게 해서 진정 의지하고 신뢰하고 섬겨야 할 대상을 바로 보게 하고, 인간의 인격에서 분리되어 있는 합리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을 통합시킵니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위대성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 오랜 옛날인데도 그들은 우주 삼라만상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것을 통해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보혜사는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 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향락과 쾌락의 우상에 사로잡혀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현실을 넘어서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을 본다는 것은 보혜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참된 비젼은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을 넘어서 볼 수 있게 하고 현실에서 그것을 위해 창조적 활동을 하게 합니다. 그 비젼은 분명히 실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젼은 보혜사를 통해 갖는 새로운 안목입니다. 그러나 우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은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에 자기 중심의 세계밖에는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으로 가득찬 그 시대에서 소아시아 각 지방을 다니면서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우상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보혜사는 인간이 우상의 허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은 "보혜사는 본래의 뜻이 인간을 어두움에서 빛이 있는 장소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말에 일치합니다.

끝으로 보혜사는 우리를 갱신시킵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배터리가 다 소진되면 더 이상 목적한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때는 배터리를 재충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우리의 삶을 계속 고갈시키고 소진시키기 때문에 영적 충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갈 때 창조적 삶은 불가능합니다. 영적 고갈은 허세·과장·수다스러움·절망·비관을 느끼게 합니다. 생을 어둡게 단정지어 가게 합니다.

보혜사는 우리에게 참된 힘을 공급해 줍니다. 그 힘은 창조력·어두움을 이길 수 있고,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믿음·희망·시랑입니다.

보혜사는 우리를 갱신시키기 위하여 매개체를 사용합니다. 어떤 때는 조용한 장소, 어떤 때는 좋은 신앙 서적, 깊은 기도, 영적인 교제, 선포되는 말씀, 예배, 성만찬 같은 매개체를 이용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갖고 다시 세상에 나아가서 힘있게 살아가게 됩니다. 보혜사 자신이 신비스러운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보혜사는 우리를 그러한 길로 인도해 갑니다.

우리가 인생의 도상에서 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에게 조그마한 격려와 위로를 주어 생을 다시 시작하게 한 사람이 있어도 평생에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시작이 있게 했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주고, 우리를 깨어나게 하고, 우리를 갱신시켜 가는 분이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보혜사가 바로 우리에게 그러한 분입니다. 그는 우리를 영원한 곳으로까지 인도할 것입니다.

보혜사는 하나님의 희망의 계획 가운데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창조적 일을 수행해 갈 것입니다. 그 창조적 일이란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일, 자라게 하는 일, 깨어나게 하는 일, 갱신입니다. 우리 역시 보혜사와 함께 매일 매일 그 일에 동참해 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새 창조에 동참하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보혜사는 교회 안에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이 이루어져야 할 곳에는 제한 받지 아니하고 계십니다. 그는 인간의 문화에도 개입하고 정치에도 개입하고 경제활동에도 개입합니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함께 했습니다.

- 아 멘 -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마가복음 8:34∼38/설 교 자 임 영 수 목사님


자기를 부인하는 삶(1998. 8. 16)


 본문은 제자직의 의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두 가지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부정적인 것으로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긍정적인 것으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은 자기의 인격을 부인하거나 순교자로서 죽는다거나 회의주의자들처럼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주의적인 인간 본성의 경향에 따라 삶을 형성해 가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은 단순히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자기부인은 그 전에 반항하고 거부했던 그 어느 인격적 대상의 뜻, 권위에 복종해 가는 구체적인 행동과 관련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한 자기부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 복종을 위한 자기부인입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자기부인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원래 유대인들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십자가를 지고 도시를 지나 자기 처형 장소에까지 가는 것은 로마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신이 전에 거부하였던 권위에 굴복하고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에서 골고다까지 가신 것은 로마 정권에 굴복하고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상징입니다.

예수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든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닌,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같이 고통을 당하거나 십자가에 달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조건 없이 복종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뜻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십자가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독특한 삶의 형식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며, 그렇지 않고 자기 중심적 삶에서 자기를 섬기며 살아가는 삶은 궁극적으로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고 영원한 멸망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은 "잃다"와 "얻다"를 생명과 관련시켜 적절하게 대비시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잃다는 자기부인, 또는 자기 포기를 뜻합니다. 얻기 위해서 잃어야 한다는 역설적 진리를 말씀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그러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삶의 가치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것의 가치는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최상의 가치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자기부인을 시금석으로 한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과는 다른, 생에 대한 특별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최상의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그것을 희망 가운데서 성취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이득이 되는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삶을 포기하고 세상에서 아무 낙이나 즐거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선택한 삶이기 때문에 그러한 삶에서 오는 불이익·소외·핍박에 대해서 원망이나 후회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시대에서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감사하게 여기며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내 놓고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모든 사람 앞에서 시인하며 사는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기부인이나 십자가의 삶은 심한 거부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은 그러한 삶 자체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방해물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며 호감을 주는 것은 자기실현, 자기성취, 자기완성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부인이나 자기실현의 의미는 다 왜곡된 뜻으로 전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느 하나 제대로 실현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자기 부인은 자기 비하·자기경멸·자기억압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게 성숙되어 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한편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자기실현, 자기완성은 철저히 자기를 중심으로 한 삶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극도의 이기적인 인간, 쾌락과 욕망에 사로잡혀 영원한 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상태에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시대의 위기는 두 가지 다 왜곡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부인과 자기실현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진정한 자기실현은 자기부인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진정한 자기부인은 자기실현의 길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실현된 삶을 살아간 성인·성현들은 모두 자기부인을 통한 자기실현의 생을 살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둘은 갈등과 대립이 아닌 한 길이였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기부인을 시금석으로 한 십자가의 삶의 고귀성과 아름다움을 이 시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삶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중 앞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에게 충실한 것일까?

우리는 공공 생활 안에서 대담하고 적극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일까?

괴짜라고 보이고 싶지 않아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사교 생활에서도 예수님에게 충실한가?

어떤 분이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그는 "그렇습니다. 다만, 남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입니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자신의 신앙은 사교 생활의 기쁨을 즐기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난처한 처지를 겪지 않기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감추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사업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에게 충실한 것일까?

사업상 귀찮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이 세상의 기준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으면 결과가 어떨지를 묻지 말고 단호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에 따라 사느냐?

이 물음은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저마다의 양심에 따라 결정할 도리밖에 없다.

역시 윌리엄 바클레이의 말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사람에 따라 각양 각색이다. 돈·지식·명성·지위·큰발견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느 대학의 휴게실에서 장래 문제에 대해 대화를 주고 받았다. 누군가가 "너희들은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학생들에게서 여러 갈래의 답변이 나왔다. 훌륭한 학자, 선수, 대학 교수 등 멋진 대답이 많았다. 그때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섬세한 한 남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다른 것은 제쳐놓고 성인이 되고 싶습니다.."

성인을 정의하면, 다음의 셋으로 가른다.

첫째, 성인이란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 계시는 사람이다.

둘째, 성인이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일을 쉽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셋째, 성인이란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빛이 빛나게 하는 사람이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인생의 길을 걷는다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일이야말로 인생의 참다운 목적인 것이다.

계속해서 그의 말을 인용합니다.

어떤 공적을 많이 남긴 사람이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전기를 절대 쓰지 못하게 했다.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충분히 전기가 씌어져도 마땅하다고 생각될 만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 한주간 동안에 나는 낙오하는 사람을 싫증날 정도로 보아 왔기 때문이야."

인생은 끝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인생에는 안심할 수 있는 시기는 한 번도 없다.

"언제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일이 자유의 대가이다."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일이 바로 지속적인 자기 부인의 삶입니다. 자기부인 가운데서만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끝으로 자기부인에 대한 몇 가지 정의를 내립니다.

(1) 자기부인은 삶의 중점을 자기에서 하나님께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2) 자기부인은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묻고 복종해 가는 것입니다.

(3) 자기부인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더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4) 자기부인은 강요에 의한 포기가 아닌 선택을 전제로 한 자발적인 포기입니다.

(5) 자기부인은 이웃과 세상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것입니다

(6) 자기부인은 신앙의 모험의 길입니다.

(7) 자기부인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며, 아울러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8) 자기부인은 십자가의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죽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삶을 살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의 목적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시며 진리시오, 생명이십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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