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를 구하매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31∼42


요즈음 폭력문제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단 하루도 끔찍한 폭력에 관한 기사가 보도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사회가 이 지경이 되다보니 학교인들 안전할 리가 만무합니다. 학교인지 폭력원인지 구별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성적타락 또한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습니다. 동네마다 환락가 줄지어 들어서고있습니다. 그러니 그 속에서 자라나는 10대들이 무사할 까닭이 없습니다. 10대들이 직접 출연·제작한 `음란 비디오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은 개탄을 금치 못하면서, 도대체 이 사회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우려하며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오늘만의 문제입니까? 어제는 그러지 않았습니까? 10년 전에는 괜찮았습니까? 100년전, 1000년전에는 오늘날과 틀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단지 오늘날과 형태의 차이가 있었을는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나 판단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이 증거 해주고 있는바 입니다.

성경을 열어보십시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나라의 모형인 에덴동산과 그 낙원 속에 살고 있는 아담과 하와를 증거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으로 넘어가면 인간의 타락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실낙원, 에덴동산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창세기 4장으로 넘어가봅시다. 에덴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나타난 제일 첫 번째 문제가 바로 폭력이었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동생을 쳐서 죽여버린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폭력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의 여인들과 놀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즉 성적 타락이었습니다. 그때의 성적타락이 얼마나 도가 지나쳤으면 창세기 6장∼7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홍수로 인간들을 심판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까? 전혀 아니었습니다. 인간 교만의 극치요 영적 부패의 본보기인 바벨탑이 창세기 11장에 등장하고 있으며, 창세기 13장에는 인류역사상 성적타락의 전형인 소돔과 고모라가 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인간의 폭력, 성적타락, 영적 부패의 문제는 성경전체를 통해 중단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적 사실은 무엇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있는 모든 병리현상은 결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늘 있어왔고,앞으로도 있을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자신을 신봉하며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자들은 계속 있을 것이며, 소돔과 고모라는 갈수록 더 번창할 것이며, 폭력을 숭상하는 카인들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찬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을 그저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합니까? 그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대안이라면 너무나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인간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나 희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야 이 암울한 세상에서 구태여 애써 살아야 할 삶의 이유와 의미와 가치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모두 비관주의자가 되던가 염세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비참한 현실속에서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우리는 여전히 에덴동산을 만날 수 있음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나라의 모형인 에덴동산을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에덴동산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낙원은 오늘도 창세기 2장속에 영적으로 실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되돌아가야할 영적 고향으로 말입니다.그 낙원을 되찾기만 하면, 우리의 심령 속에 그 낙원이 회복되기만 하면, 이 세상이 악으로 인해 아무리 요동쳐도 우리는 흔들림 없는 소망과 진리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허물어트리려는 악의 세력은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여전히 있을 것이나, 인류의 역사는 그 심령 속에 에덴을 품고있는 자, 진리의 등불이 되는 자들에 의해 언제나 바른 방향으로 인도되어왔고, 되고 있고,또 되어갈 것이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낙원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에덴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영적고향으로 되돌아갈 길을 제시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암울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희망이요 소망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천년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주님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당시의 율법에 의해 정죄당한 자들이었습니다. 참다운 의미에서 인간일 수가 없는 한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했을 때, 실낙원을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찾았을 때에, 그들은 정녕 새로운 사람, 에덴의 사람, 진리의 등불로 거듭나므로 이 땅을 에덴으로 일구어 가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적타락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추잡한 창녀였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에덴을 회복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폭력신봉자였지만,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덴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영육간에 부패한 자의 표본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나매 에덴의 참된 실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는 반드시 소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언제나 실낙원이 회복되는 생명의 역사, 에덴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당신의 `목회 철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서슴없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 즉`에덴의 회복'이라고 답합니다.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나라-에덴이 회복된 자만 이 세상을 바로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될 수 있는 탓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에덴을 회복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에 대하여는 `새 신자반'제7과 `교회'에서 상세히 다루었기에 여기에서 재론치는 않겠습니다. 단지 이 시간에는, 그 심령 속에 에덴을 회복한자에게 나타나는 분명한 특징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실(失)낙원 했던 자가 그리스도안에서 득(得)낙원했을때, 먼저 그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얻은 에덴의 절대적인 의미와 가치를 터득한 연고입니다. 그 결과 그의 삶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에덴이 점점 더 확장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좋은 예를 보여주고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운명하셨습니다. 로마군병 한 명이 예수님의 사망을 확인키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매 피와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심장파열로 이미 운명하신 뒤였던 것입니다. 그때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자들의 낙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 버렸으며, 그 죽음의 현장에 제자중 유일한 목격자로 남아있던 사도 요한 마저 그 절망적인 순간에 어찌할 바를 알지못한채 망연자실 예수님의 주검을 쳐다만 보고 있었겠습니까? 그저 모든 것이 암울한 순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38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시체란 절망과 부정과 비탄의 상징일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가족이외의 사람이 타인의 시체를 구하는 법이란 통상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란 사람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 가져가기를 구하였습니다. 요셉이 의사이기에 해부실습용으로 쓰기 위함이었습니까? 아니면 장의사이기에 돈을 벌기 위함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7장 57절에 의하면 그는 장의사와는 거리가 한참 먼 소문난 거부였습니다. 할일 없이 남의 시체나 거두고 다닐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의 시체를 구한 이유를 본문은 이렇게 설명하고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1∼42)

 

본문이 말하는 새 무덤이란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자신을 위하여 예비해둔 무덤이었다고 마태복음 27장 60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구했던 이유는 한 가지―정성을 다하여 자기 무덤으로 장례를 치루어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39절-40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일찍 예수께서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 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 마포로 쌌더라"

 

유대인의 장례법은 시체에 방부제를 바르는 애굽이나 로마의 장례법과는 달리, 죽은자의 몸에 오히려 향품을 바르고 부드러운 세마포로 감싸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존귀한 산헤드린 의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에 필요한 값비싼 향품과 세마포를 가져다, 유대인의 관습대로 예수님의 시체를 염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리마대 요셉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믿는 자기자신을 은휘- 즉 숨기던 자요, 니고데모 역시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밤중에 아무도 몰래 예수님을 찾았던 위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처음부터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 완전한 크리스천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하고 도주해버리는 그 죽음과 절망과 공포의 극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두렴없이 자신들을 노출시키면서까지 지성으로 예수님의 장례식에 앞장설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주님을 육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만났던 자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나라, 에덴이 회복된 자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산헤드린 의원이었기에 남의 눈을 의식하여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던 날, 니고데모가 예수님으로 부터 배웠던 것은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해 그 날밤 주님을 만난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덴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에덴이 복원되었을 때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의회가 예수님을 체포할 것을 결의할 때, 유일하게 그 부당성을 용감하게 지적했던 자가 바로 니고데모였습니다. 이처럼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그리스도안에서 진정으로 에덴의 사람으로 거듭난자들이었기에, 본문에서와 같은 참 제자다운 행동을 주저없이 지체치 않고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육적인 욕구로만 좇았을 뿐 아직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지 못한 제자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버리는 배신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아예 처음부터 부정하던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오직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다리를 꺾어 죽여주기를 구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구경꾼들은 한결같이 폭력의 신봉자요, 성적·육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이런의미에서 이날의 골고다는 절망의 언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절망의 언덕에서 절망보다 더 크고 찬란한 소망의 빛을 볼 수 있음은, 그곳에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얻은 자, 그리스도안에서 에덴을 회복한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영적으로 만난 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의 육적인 죽음으로 인해 그들의 심령 속에 회복된 에덴이 흔들릴 까닭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얻게 된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육적인 죽음 앞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더욱 사랑할 따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구했던 것은 단순히 숨이 끊어진 예수님의 시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구했던 것은 주님을 향한,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더 깊고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주님을 위한 더 큰사랑을 간구했을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사랑을 도구로 삼아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디에서 부활하셨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자신을 위해 마련해두었으나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포기했던 새 무덤이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시체를 장사지내는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눈부신 부활의 현장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요한복음 20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예수님 부활의 증거품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신 빈 무덤 속에 남겨진 세마포였습니다. 그것은 니고데모가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의 시신을 향품과 함께 싸드렸던 세마포였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그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심령 속에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에덴을 훨씬 더 확장시켜주었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포기한 자기 무덤이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부활의 시발점이 되고, 주님의 시신을 감싸드린 세마포가 부활의 증거품으로 존귀케 됨을 보았을 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심령 속에서 끝도 없이 확장되었을 하나님의 나라- 에덴을 생각만 해보아도 가슴이 설레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온전히 거듭난 에덴의 사람인 요셉과 니고데모가 있기에, 그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셨기에, 그들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부활의 새역사를 이루어 가시기에, 폭력과 타락, 배신과 죽음,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요한복음 19장속에서 우리들은 말할 수 없는 소망을 발견하고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다시 우리의 주위를 살펴보십시다. 도처에 폭력이 기승을 부리고있습니다. 무분별한 성적타락은 우리의 건전한 가정을 위협하고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이 날로 썩어질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 자체만을 바라보면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마십시오. 이것은 어제 오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소위 선진국들을 보십시오.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므로 실낙원한 인간의 삶이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요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절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만, 낙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만 보며 탄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마십시다. 실낙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덴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그 분을 육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만나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분 안에서 득낙원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분 안에서 얻은 에덴을 끊임없이 확장시켜 가는 자들이 되십시다. 아무리 카인이 득세하고, 소돔과 고모라가 창궐하며, 멀쩡한 사람의 다리를 꺾는 흉폭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 시대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되는 한,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통하여 이 땅의 역사를, 우리의 미래를, 우리 자녀들의 장래를 기필코 바르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껏까지 그렇게 해오신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아침에도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3년동안 주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이 구했던 것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실은 주님의 육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육체가 운명하는 그 현장에서 그들은 모두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구했던 것은 그리스도안에있는 하나님의 나라, 실낙원 했던 에덴의 회복이었습니다. 그결과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에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주님의 시신을 구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주님을 향한,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도구로 삼으시사 부활의 새 역사를 이 땅에 이루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폭력과 배신과 죽음이 난무하는 골고다 언덕 위에서 절망보다는, 말할 수 없는 소망을 얻게 됩니다.

주님! 이 사회가 골고다처럼 절망의 언덕이라 할지라도, 아니 아무도 부정할수 없는 분명한 골고다 언덕이기에, 절망하기보다는 도리어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므로, 한없는 소망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나라, 에덴을 회복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주님을 어떤 상황속에서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이 작은삶을 통하여, 골고다 곧 해골과 같은 이 세상이 부활의 언덕, 새 생명과 새 역사의 시발점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성경을 응하게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31∼42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기 직전,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누가복음 18장 31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 즉 구약성경이 당신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바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인 즉은 유대인들의 음모로 체포되시어 희롱과 능욕 그리고 채찍질을 당하시며,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기 전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을 때에,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인자는 자기에게 기록된 대로 간다(마 26:24a)'고 말씀하시므로, 당신의 행동이 결코 당신 임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따르시는 것임을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마침내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게 체포당하실 때에 놀란 베드로가 스승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검을 휘둘러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귀를 고쳐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영(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3∼54)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 당신께는 하찮은 군병들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지만,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하실 경우, 당신의 고난을 예언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성경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하여 순순히 체포당하신다는 의미였습니다.

또 2주전에는 요한복음 19장 28절∼30절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오직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하여, 타는 목마름에도 불구하고 식초같이 신 포도주를 삼키셨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하여 성경이 예언하신 말씀을 훤히 아시고 그 말씀을 성취하는 삶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성경 말씀 중 그 분의 삶을 통하여 응하지 아니한 말씀이 단 한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 분의 삶은 온전히 말씀을 위한 삶이었고 말씀에 의한 삶이었습니다. 아니 그 분은 말씀 그 자체이셨습니다.

그분을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말씀을 알고 좇고 자신들의 삶으로 성경말씀을 성취하려 하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성경 말씀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본문 31절을 보십시다.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달라 하니"

 

일반적으로 건장한 남자의 경우 십자가에 못 박히면 대개는 사흘,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일주일만에 죽었다고 합니다. 로마인들의 관습은 십자가 사형에 처해지는 죄수는 숨이 너머간 뒤에도 시체를 그대로 십자가에 매달아 새들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범죄를 저지를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로마인들의 관습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곤란한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그들이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모세의 율법은 로마의 관습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신 21:22)

 

즉 모세는 나무 위에 달린 시체를 당일로 끌어내려 장사지내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하나님의 땅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못박던 그 날은 금요일이었기에 이제 조금 있다 해가 지면 그들의 성일인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그 날의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는 안식일이었으므로 죄인들의 시체를 매달아 둔 채 그 성스러운 절기를 맞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십자가 죄수들의 다리를 꺾은 뒤 해지기 전에 시체를 치워 버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당시 십자가 형틀에는 아래 쪽에 조그마한 디딤대가 붙어 있어 못 박힌 죄수들은 그 디딤대를 딛고서므로 양팔과 가슴을 압박하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고, 그 까닭에 사형수의 목숨이 생각보다 오래 부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리를 꺾어 버리면 더 이상 죄수가 자기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 아래쪽으로 몸이 쳐져 버리는 동시에, 가슴의 압박이 가중되어 순식간에 질식하여 죽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유대인들은 죄수들을 인위적으로 빨리 죽여, 해지기전 시체를 치워 버릴 수 있기를 빌라도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로마인들 역시 필요한 경우에는 십자가 사형수들의 다리를 꺾어 빨리 죽이는 예가 있었던 터라, 빌라도 총독은 어렵잖게 유대인들의 청을 허가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3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표현을 부드럽게 했기에 `다리를 꺾는 것'이지, 실제로 로마군인들이 십자가 사형수의 다리를 꺾을 때에는 쇠망치나 몽둥이를 휘둘러 다리뼈를 으스러트려 버렸습니다. 이왕 인위적으로 빨리 죽게 할 바에는 충격을 주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죽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던 두 강도는 그렇게 다리뼈가 으스러지면서 이내 질식해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33∼34)

 

예수님께는 몽둥이를 휘둘러 다리뼈를 으스러트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군병이 정말 예수님께서 운명하셨는지 확인하려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피가 흐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겠으나 어떻게 사람의 몸에서 물이 흐를 수 있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영국의 의학박사 William Stroud는 그 해답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의 심장이 파열하면 심장 속에서 돌고 있던 피가 심낭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데, 이와 같은 일혈(溢血) 현상이 일어나면 혈액이 원래 상태로 분리되면서, 일반적으로 말하여 물과 피로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십자가 위에서 이미 운명하신 예수님을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며 찔러 올린 군병의 창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뚫고 심장에 가 꽂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계속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35)

 

이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사도가 자기 자신을 가리켜하고 있는 말입니다. 자신은 현장의 목격자이기에 자신이 하는 말은 참말이요, 자기가 그처럼 참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성경 속에 참말 아닌 거짓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성경의 말씀 중 믿지 못할 말씀이 단 한 줄이라도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성경은 성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사도는 왜 여기에서 구태어 참말을 강조하고 있으며 새삼스럽게 무엇을 믿으라는 것입니까? 오히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구절처럼 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36절에는 `gar', 즉 `왜냐하면'이란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요한 사도가 엉뚱하게 보일 정도로 참말과 믿음을 새삼스레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36절 속에 나타나 있다는 말입니다.

 

36절을 보십시다.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꺽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골고다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위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두 강도의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군병이 먼저 한 강도의 다리뼈를 으스러트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불문곡직하고 예수님의 다리를 으스러트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그는 예수님을 건너 뛰어 나머지 강도의 다리뼈를 먼저 부러트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앞으로 되돌아온 그는, 유독 예수님 앞에서만 신중하게 당신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는 몽둥이를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유월절 제물로 드려지는 양의 뼈는 하나라도 꺾여져서는 안된다는 민수기 9장 12절의 말씀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유월절의 어린양이었습니다. 만약 로마군인이 몽둥이를 휘둘러 예수님의 다리뼈를 꺾어 버렸다면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한 유월절 어린양이란 말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 37절이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몽둥이를 휘두르던 자가 예수님의 운명을 확인하고 몽둥이를 내렸다면 그것으로 모든 상황은 끝난 것입니다. 구태어 다른 병사가 창으로 찔러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 병사가 그 누구의 명령이나 상의도 없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므로써, 예수님께서 창에 찔리우는 수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한 스가랴 12장 10절 말씀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찌른다'는 동사 ekkent o는 성경에 딱 두번만 나타나는 특수한 용어로, 그 뜻은 찔러도 그냥 찌르는 것이 아니라 깊이 꿰뚫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 깊숙이 박히어 예수님의 심장까지 관통할 것을 시사한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만 유독 몽둥이를 멈춘 병사나, 느닷없이 예수님의 몸 깊숙이 창을 찔러댄 병사나, 모두 무심코 행한 행동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어김없이 성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되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마군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는 이방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졌습니다. 이번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로마군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직후 예수님의 속옷을 서로 갖기 위해 제비를 뽑았을 때, 그것은 시편 22편 18절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본장 24절은 이미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로마군인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을 능욕하고 채찍질을 가하였습니다. 로마군인들은 모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통하여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알건 모르건 믿던 믿지않던 상관없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예외없이 하나님 말씀의 도구들입니다. 단지 각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응하게 하는 도구인가 하는 것 뿐입니다. 사도요한이 이 본문 35절을 통해 자신의 말이 참말이므로 믿으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 말씀의 바르고 선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을 통하여는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생각해 보기로 하십시다.

잠언 10장 16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지금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무슨 말씀이 응하고 있습니까?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른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른다'는 말씀입니까?

 

잠언 14장 1절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어느쪽 말씀입니까? 지혜로운 여인에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미련한 여인에 적용되는 말씀입니까?

 

다니엘 선지자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5)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질타하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지금 우리를 통해 어떤 말씀이 응하고 있습니까? 다니엘서 12장 5절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마태복음 23장 15절의 말씀입니까?

 

또 주님께서는 마지막날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마 13:41∼43)

 

어떻습니까?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풀무불에 던지워 울며 이를 갈 것이란 말씀이 내게 응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란 말씀이겠습니까?

 

 

몽고에서 라마교사원을 찾았을 때 사진이나 TV를 통해서만 보았던 마늬퇴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마늬퇴란 라마교 경전을 그 속에 써 넣어둔 크고 작은 원통들로써, 그 통을 한번 손으로 돌리면 그 속에 든 경전을 한번 읽은 것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따라서 사원에 설치된 마늬퇴를 모두 한번씩 돌리면 라마교 경전 전체를 한번 완독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차례로 마늬퇴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라마교 신자들이 얼마나 경전을 읽지 않으면 고육지책으로 그런 편법을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그러나 라마교신자가 라마교 경전 속에 무슨 말이 들어 있는지 한 번도 읽어보지 않고서야 어찌 참된 라마교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마늬퇴 따위를 용인하는 라마교와 같은 종교는 결코 참된 종교, 진정한 종교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말씀이시요, 그 말씀에 의해 창조된 것이 이 세상이요, 그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알지 못하고서는, 다시 말해 마늬퇴 돌리듯 해서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의식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 말씀의 도구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망각한다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포악한 로마군병이나 주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와 같은 악한 도구가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날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가는 말씀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그때 우리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는 바른 생명의 도구가 될 것이며, 그와 같은 우리의 삶만이 이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는 진리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1~6)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 응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하시니 무한 감사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날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아가므로 말씀의 바르고 선한 도구, 참생명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말씀의 선한 도구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이 사회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바른 열매를 맺으며, 이 시대 역사의 잎사귀가 마르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 아 멘 ―

돌아가시니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최후 모습을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30)

 

요즈음 시간으로 아침 9시경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로부터 6시간이 경과한 오후 세시가 되어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드디어 운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의 운명을 `돌아가셨다'는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표현과 동일합니다. 우리 역시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갔다' 혹은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우리가 쓰는 용어와 예수님에게 사용된 용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상반된 용어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가리켜 `돌아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수동적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장본인은 돌아갈 의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하여 발버둥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타력적인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죽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최후를 묘사하고 있는 동사 `paradidomi'는, 그와는 정반대로 능동적, 자발적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 구체적인 뜻은 `give up', `포기하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 타력에 의해,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인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스스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사지가 못 박히셨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지 결과였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 의해 체포당하시기 전에, 대제사장들이 음모를 꾸며 예수님을 고발하기 전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기 전에, 이미 당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놓으시고 자발적으로 포기하셨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의 그 귀한 생명을 포기하셨습니까? 죄인 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의 값은 오직 사망일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죄값을 당신이 대신 치루어 주시므로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그 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자발적으로 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 의해 체포될 당시 놀란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칼을 휘둘러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귀를 고쳐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영(군단)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당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미 당신의 생명을 포기하셨다는 의미였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포기치 아니 하셨더라면 어찌 하찮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체포하고, 재판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위대한 십자가 구원의 사건은 예수님의 능동적인 `자기 버림' `자기 포기' 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 아침 두 가지의 진리를 마음 속에 되 새길 수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자발적으로 버릴 때에만, 자기를 능동적으로 포기할 때에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참 생명이실 수가 있었습니까? 당신 자신을 스스로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나무 막대기에 불과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영원한 구원의 표징일 수가 있었습니까? 그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15세기의 사람인 일본의 선승 이뀨(一休)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벚나무 가지를 아무리 부러트려 보아도 그 속엔 벚꽃이 보이지 않네. 그러나 보라. 봄이 되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벚꽃들이 절로 피어오르는가?"

그렇습니다. 벚나무 가지를 부러트린다고 벚꽃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달래고 얼른다고 피어나지 않습니다. 몽둥이로 때린다고 해서 피어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봄이 오기만 하면 아무리 막으려 해도 피어나는 벚꽃을 막을 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봄이 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겨울이 자기를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겨울이 더 이상 겨울이기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춘3월이 왔다 할지라도, 북극에서처럼 겨울이 마냥 버티고만 있다면 벚나무가 기를 써도 벚꽃은 결코 피어오를 수가 없는 법입니다.

한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모든 열매가 알차게 영글 수 있는 것은 봄이 봄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요, 가을이 되어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은 여름이 자기를 버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을은 가을대로 또 가을이기를 포기해 주었기에, 비로소 온 자연은 한 겨울의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밤이 밤이기를 포기하므로 생명이 약동하는 낮이 이르는 것이요, 낮이 자기를 버림으로 안식의 밤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유치함을 버릴 때 성숙함이 가능한 것이요, 성숙함을 포기할 때 원숙함이, 원숙함마저 떠날 때 비로소 영원히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버림' `자기 포기' `자기 떠남'이 있는 곳에만 생명의 역사가 있음은 하나님의 법칙이요 철칙입니다. 그 곳에서만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후로 모든 인간은 본질적인 죄인으로 태어납니다.본질적인 죄인이 죄인된 자기자신을 버리고 포기치 않으려 할 때, 어찌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가능할수 있겠습니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보십시오. 참으로 가관이요 점입가경입니다. 지도자다운 인품이나 인격을 찾아 보기란 쉽지 않고 그저 유치하기 짝이 없어만 보입니다. 그런 좁은 생각, 좁은 마음으로 어떻게 한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설수 있는지 그 용기가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란 그들과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는커녕, 분열과 다툼을 거쳐 죽음의 열매만 있을 뿐입니다. 자기를 포기치 못한다는 것은 여전히 죄와 노예와 자기 욕망의 노예상태에 갇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죄와 인간의 욕망이란 인간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약이요, 흉기인 탓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진리와 생명의 열매 그리고 역사는 오직 자기 버림의 텃밭에서만 거두어진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저없이 포기하셨던 분이시라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요,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난 6월초 몽고에 갔을 때 양을 잡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몽고인이 양을 잡기 위해 양을 끌고 오는 동안, 그 모습을 본 개는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듯 요란하게 짖어대는데, 막상 끌려오는 양은 너무나도 잠잠하고 평화스러웠습니다. 양을 마당 한 가운데 거꾸로 눕힐 때에도 양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양은 다른 가축의 경우처럼 정수리를 찍거나 혹은 목을 따서 죽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기 위해 거꾸로 눕힌 양의 배가죽만을 칼로 조금 갈랐습니다. 그러자 속에 있던 밥통의 윗부분이 잘라진 틈으로 불거져 오르면서 피가 흐르지 못하도록 자동마개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몽고인은 양의 배가죽과 밥통 사이로 손을 넣어 양의 숨통을 눌러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무지막지한 사람의 손이 그처럼 양의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숨통을 틀어쥐는데도 양이 신음소리를 한번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숨이 너머 가는 마지막 순간 허공을 향해 치켜든 네 다리를 파르르 떨 뿐이었습니다.

양이 죽자 손을 빼낸 몽고인은 양의 털가죽을 다 벗겨낸 다음 양의 배를 완전히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를 주걱으로 남김없이 다 퍼내었습니다. 그렇게 잡은 양고기와 내장, 피를 돌멩이와 함께 큰 통에 넣고 몇 시간을 삶은 뒤, 마침내 조리가 끝난 양고기를 시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식은 양고기를 씹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53장 7절의 의미를 되씹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도다."(사 53:7)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동물들 가운데 왜 구약의 사람들이 유독 양을 속죄의 제물로 즐겨 사용하였는지,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는지, 왜 성경이 하필이면 주님을 양에 비유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그날 확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양은 자기 생명을 남을 위하여 잠잠히, 그리고 기꺼이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를 가르고 속으로 손을 넣어 숨통을 눌러도 반항 한번 없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므로 양이 인간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듯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내어놓으시므로, 잠잠히 포기하시므로 인류의 구원자,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신학자 C.S.루이스(Lewis)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해가 뜬다는 사실을 믿는 것처럼 주님을 믿는다. 단지 해를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해를 통해 모든 것을 비로소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위대한 깨달음입니까? 해가 중요함은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사물을 바르게 분간할 수 있음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절대적인 것은 주님으로 인해서만 이 세상을, 나의 상황을, 나 자신을 비로소 바르게 볼 수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 사랑의 빛으로 나를, 내 주위를, 이 세상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어느 것 하나, 어느 사건 치고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 그 분의 은총 아닌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롬8:31b~32)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리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시므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였다 할지라도, 막상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잠잠히 내어놓지 않으셨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침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잠잠히 포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도대체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찌 우리를 책임져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는 요즈음 수요 예배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심'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은 바벨로니아의 침공에 의해 멸망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성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2∼33)

 

예루살렘 멸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근심과 고난에 처하게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바로 그 고난을 통하여, 자기를 버리지 못한 채 자기에게 집착하여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허망하게 인생을 망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로 세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19년 전에 이미 다니엘과 에스겔 등을 미리 바벨로니아로 보내시어,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세우실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속에서 전혀 새사람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여건의 악화로 인하여 요즈음은 정말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도 회사를, 가계를 꾸려 가느라 얼마나 고생들 하셨습니까? 모든 상황이 호전되기보다는 점점 더 절망적으로 변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본심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께서는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잠잠히 내어 놓으셨던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분이, 어찌 우리에게 그 결과가 해로 끝날 것을 주실 까닭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본심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진리의 사람으로 바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의 어려움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사회적 경제적 정의와 개인적 정직, 그리고 일을 추진함에 있어 본질과 내실의 절대적 중요성을 인식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면 어찌 우리가 진리를 생각인들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근심과 고통이 없다면 어찌 하나님을 바라보기나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결코 절망치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망만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사 자기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에 그 분이 주시는 것이라면, 비록 고통과 고난처럼 보일지라도, 그 결국은 우리의 유익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이 기회에 우리 모두 주님처럼 자기를 버리는 자들이 되십시다.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는 자들이 되십시다. 진리 위에 바로 서는 진리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그때 우리는 머지않아 사도 바울처럼 고백치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니라."(롬 8:28)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7일동안 내내 절망하고 근심하며 한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버리지 않으시고 이 시간 불러 주시사,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잠잠히 내어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주님께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금 우리를 책임지고 계심을 확신케 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행여 어떤 어려움 속에 있다 할지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본받아 나를 버리고 나 자신을 온전히 주님 앞에 내어 드리는 은총의 기회로 삼는,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 썩어질 허망한 내 욕망의 열매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시는 영광된 열매들이 날마다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 아멘 ―

다 이루었다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4 : 15∼26


일반적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데에는 연역법과 귀납법이 있습니다. 연역법이란 이미 일반화된 원리 혹은 명제를 근거로 하여 특수한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으로써 이른 바 삼단논법이 동원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모두 백의민족이다, 나는 한국인이다. 고로 나는 백의민족이다'와 같은 식입니다.

반면에 귀납법이란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명제나 법칙 혹은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서울에 있는 까마귀를 보아도, 부산에 있는 까마귀를 보아도, 동경이나 뉴욕 그리고 파리에 있는 까마귀를 보아도 다 검은 색이므로, 까마귀는 검다'고 정의하는 방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볼 때에도 연역적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귀납법적으로 다가서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방법 모두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지만, 연역적으로만 성경을 보면 은혜로울 수는 있으나 성경 속의 사실을 내 삶에 적용시키기 어려운 단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다.' `믿음의 조상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고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주저없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

참으로 은혜로운 논리 전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내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믿음의 조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음의 조상이 아니다.' `믿음의 조상이 아닌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고로 나는 아브라함처럼 내 자식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식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연역적으로 접근해 보십시다.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사도였다.' `위대한 사도는 날아오는 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로 그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바울과 비교한 우리 자신은 어떻게 표현되겠습니까?

`나는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가 아니다.' `위대한 사도가 아닌 나는 이유없이 내게 돌팔매질을 하는 자를 용납할 수 없다.' `고로 지금 내가 천수를 다하기도 전에 진리 때문에 순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을 이처럼 연역적으로만 접근할 때,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과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면서 결단보다는 오히려 주눅이 들고 자포자기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인물에 대하여 귀납적으로 다가갈 때 우리는 전혀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가장 큰 재산이던 그 옛날 100살이 될 때까지 자식을 얻지 못했던 인생 실패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믿지 못해, 여종과 동침하여 서자를 먼저 얻는 믿음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고 보니 기근의 땅이자 그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도망 가버린, 신앙의 지조라고는 전혀 없는 한심한 인간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자기 아내를 탐내는 사람들로 인해 목숨을 잃을까 아내를 누이라 속이다가 정말 빼앗겨 버린 창피스러운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인간 같잖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치 않으시고 말할수 없는 자비와 긍휼로 그를 붙드시고 바로 세워 주셨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인격적으로 깨달았을 때, 자신을 위해 인내하시며 끊임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바뀌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과 사랑과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자식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자식을 더 확실하게 얻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으로 높임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삶을 귀납적으로 들여다보면 우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믿음도 신앙의 지조도 없고, 정말 창피하고 한심한 삶을 살아 왔다 할지라도, 아니 참담한 실패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는, 우리도 모두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진리인 주님을 부정하던 인간이었습니다. 자기와 반대 의사를 가진 자를 돌로 쳐죽일 정도로 독불장군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잘났고 자기만 옳다고 착각하던 철부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처럼 형편없던 인간인 그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살리시기 위해 피 흘리시며 돌아 가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에 의해 그는 새롭게 변화되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날아오는 돌맹이도 기꺼이 맞을 수 있었고, 그 사랑의 증인이 되기 위해 참수형마저도 두려워 않았습니다. 주님 사람의 종착역은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임을 알았던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또 다시 소망이 용솟음치게 됩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의 바울 같은 독불장군이요 철부지 같은 인간이요, 심지어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 할지라도 주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주님의 사랑 속에만 있으면, 주님에 의해 우리 역시 얼마든지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더 이상 아브라함이나 바울 앞에서 죽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귀납법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우리 삶 속에 적용시켜 가기만 하면, 우리는 성경 속의 그 어떤 위대한 인물과도 동일할 수 있습니다. 40년동안이나 실패자로 살다가 위대한 출애굽의 지도자가 된 모세가 될 수도 있고, 남의 유부녀를 빼앗은 불한당이었으면서도 이스라엘 최고 성군이 된 다윗일 수도 있고,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모른다 부인하다가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던 베드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로 연역법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다가 80년대 중반을 너머서면서, 세계적으로 귀납법적 성경공부가 일반화되고 있는 것은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이 방법이 우리의 신앙적 결단과 실천 그리고 성숙에 훨씬 더 유익한 까닭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연역법적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같은 신이시다.' `고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넉넉히 지실 수 있었다.'

이렇게 될 경우 우리는 예수님을 닮을 수도 없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질 가능성은 더더욱 없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입니다. 하찮은 인간이 어찌 신을 닮을 수 있으며 신이나 지는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귀납적으로 다가설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수님 역시 여인의 몸을 통해 육신을 입고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목수 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궁핍함 속에서도 그 분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만을 구하며 사셨습니다. 30세쯤 되셨을 때에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버리사 인간 구원의 길에 나서셨습니다. 3년동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끝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루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육신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실 망정, 그 고통을 끝내 피하지 않으시고 죽음으로 감수하시므로 하나님에 의해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인류의 구원자, 부활의 주님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와 같은 귀납법적 설명은 인간의 해석이 아닙니다. 빌립보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신으로 이 땅에 오시어 신으로 아무런 고통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감수하셨기에 하나님께서 그 분을 그리스도로, 인류의 구원자로, 성자 하나님으로 세워 주셨다는 뜻입니다. 뿐만아니라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만에 하나라도 예수님께서 죽음 뒤에 찾아 올 부활의 즐거움을 믿지 못하시어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을 꺼려 하셨더라면, 결코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귀납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성경의 방법입니다. 아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지칭하실 때 가장 즐겨 사용하신 호칭이 바로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복음서를 통하여 무려 81회나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고 계십니다. 신(神)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참사람으로 십자가 지심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좇아 갈 수 있는 가능성과 공간이 비로소 확보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으로서만 오셨다면 인간인 우리는 감히 그 분을 흉내 낼 수조차 없겠지만, 그 분 역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갖고 오셨던 사람의 아들이셨기에, 사람인 우리는 참사람이셨던 그 분을 믿고 따르며 그 분을 본받아 각자의 십자가를 지므로, 그 분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 세움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30)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구원 사역을 다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 중 단 한가지라도 이루지 못하신 것이 있었다면, 그 분은 결코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한 구원 사역을 마지막 십자가에서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셨기에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원 사역을 다 이루셨습니까? 예수님 당신의 방법으로입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따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처럼 베들레헴에서 사람의 아들로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의 예언처럼 동정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사야 9장 1절∼2절의 예언처럼 갈릴리를 중심으로 천국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처럼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신음하시자,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가에 갖다 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 군병들이 마취제 효능을 가진 쓸개 탄 포도주를 드리자 거절하셨습니다. 마취제를 먹고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고난의 참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작 필요할 때 필요한 포도주마저 거절하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새삼스럽게 포도주를 드실 까닭이 없습니다. 더우기 신 포도주라면 식초와 같기에 목마른 자는 더더욱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골리기 위해 드린 식초같이 신포도주를 받으셨다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보가 아니신 다음에야 왜 그처럼 어리석어 보이는 짓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본문 28절이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하실 최후의 모습을 시편 69편 21절을 통하여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나이다"(시 69:21)

 

십자가 위에서 생명의 심지가 꺼져 가는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타는 목마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식초와 같은 신 포도주를 삼키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다 이루었다'는 한마디로 당신의 생애를 정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루었다'는 단어 'teleo'는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분의 삶이 곧 하나님 말씀의 완성이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한 말씀도 빠짐없이 그 분의 삶 속에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사람의 아들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성육신한 그리스도, 즉 성자 하나님이 되셨고, 십자가 위에서 당당하게 `다 이루었다' 선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습니까?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어야만 합니다. 나의 욕망이나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진리의 말씀을 지향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 성취되어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세상을 향해 보여 줄 수 있는 성경이어야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셋째아이가 수학문제를 풉니다. 사탕 12개를 놀러온 친구 세명에게 나누어주면 한 사람당 몇 개씩 줄 수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답은 두말할 것도 없이 4개씩 입니다. 그런데 셋째 아이는 세개씩이라고 답을 썼습니다. 아내가 왜 세개씩이냐고 묻자 아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저도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우리 집에 친구 3명이 놀러왔다면 자기까지 네 사람이므로, 12개를 네명에게 나누어주면 한 사람당 세개씩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논리로는 맞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분명 틀린 답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려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아이처럼 언제나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 논리에 빠지고, 우리가 얻는 답은 다 오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틀린답은 우리 자신을 망치고 타인마저 해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돈을 벌더라도 나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지식을 구해도 지식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진리을 위하여, 가정을 꾸려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무엇을 행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때에만 우리는 진리안에서 인생의 바른 해답을 따라 살 수 있으며, 우리의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 아무런 후회도 없이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당당하게 이 땅에서의 생애를 마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형편없는 인간이었을지라도, 모세처럼 철저한 실패자일지라도, 다윗같은 패륜아였을지라도, 바울 같은 살인마 였다 해도, 우리 삶이 말씀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모두 믿음의 조상,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사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중심이 있는 한,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시사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우리 자신들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같은 참담한 실패자였다할지라도, 다윗이나 바울처럼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정녕 주님을 바르게 믿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좇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으로 주님의 말씀을 성취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이시여.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진리를 구현하는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고 주님의 참사람 되심을 온전히 본받게 하옵소서. 맡겨 주신 사명 다 감당한 뒤에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버지여, 다 이루었습니다'란 고백의 예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하여 주옵소서.

― 아멘―

내가 목마르다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사람이 살아 있다는 진정한 증거는 무엇이겠습니까? 박동 치는 심장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심장이 활기차게 뛰어도 뇌가 움직이지 않으면 소위 `뇌사자', 즉 `죽은자'로 간주되어 장기를 이식하는 것으로 그의 생을 마감케 하는 것이 이미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살아 있음의 참된 증거는 뇌나 심장의 활동여부가 아니라 목마름과 주림을 느끼는 것입니다. 설사 심장과 뇌가 움직이고는 있지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목마름과 주림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의식도 없이 단지 인위적인 주사액에 의해 연명하고 있다면, 그는 살아 있으되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목마름과 주림을 느낀다는 것이야말로 살아 움직였음의 결과요, 살아 움직일 것의 대비이기에 그보다 더 좋은 `살아 있음'의 증거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같은 목마름과 주림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인격과 성숙도 그리고 신앙의 정도에 따라 목마름과 주림의 내용 대상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한 개인이 무엇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느냐에 따라 그 개인은 물론이요, 그가 속한 공동체 및 국가의 역사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술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가장이 마침내 알콜 중독자가 되어 가산을 탕진하고 가문을 망치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돈에 대한 목마름과 주림, 이를테면 헝그리(hungry)정신이 불세출의 스포츠 스타를 탄생시키고 신기록을 수립케 합니다.

영국왕 에드워드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에 주리고 목말라 한 끝에 그 여인을 위하여 영국 왕위를 버렸습니다. 만약 그가 심프슨 부인의 사랑에 대하여 그토록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았던들 오늘날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 여왕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그녀의 아들 챨스 황태자와 결혼했다가 파탄에 이른 비련의 세자비 다이애나의 인생도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자유와 정의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 하던 자들에 의해 프랑스 혁명도, 이 땅의 4 19 혁명도 가능할 수 있었고, 그것은 두나라 역사의 분수령을 이루었습니다. 영적 목마름과 주림으로 인해 몸부림치던 마틴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그가 속해 있던 독일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무릇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목마름과 주림을 느끼는 자입니다. 이면에서는 누구든지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단지 무엇에 대해 목말라 하고 주리고 있는가―그 내용과 대상에서 차이가 날 뿐입니다.

 

 

오늘 본문 28절은 `이후에'란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27절과 28절 사이에 시간적 거리가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생모 마리아를 부탁하시면서 "네 어머니라" 말씀하신 뒤,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을 때란 뜻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28)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구름너머에가 아니라, 하늘 위에가 아니라, 육신을 입으시고 바로 이 땅에 오시어 이 땅위에서 구체적으로 사셨음의 참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위에서 육신을 가지고 사시지 않았더라면 결코 목마름을 느끼시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설이나 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 땅위에 실존하셨던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왜 목말라 하고 계십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물과 피를 다 쏟으셨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께서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주님 당신의 죄로 인하여, 당신 자신을 위함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를 위하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지로 지었던 온갖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주님의 사지가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지금 목말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 목마름은 단순한 육체의 목마름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원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채워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 하라시는 하나님의 명령, 즉 진리에 대한 목마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어떻게 주님께 가기만 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말라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목말라 하시는 그 십자가 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하신 생명을, 영원한 생명의 말씀인 진리를, 변함없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구원을 넘치도록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십자가 앞에 나아 오기만 하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고 진리와 사랑과 구원이 용솟음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말라 하지 않으셨던 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목마르다'는 주님의 이 절규야말로 주님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백미요, 인간을 향한 주님 사랑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릇 살아 있는 자란 모두 주림과 목마름을 느끼는 자라 했습니다. 이면에서는 누구이든 예외일 수가 없고, 단지 무엇에 대하여 목말라 하고 주려하는가―그 내용과 대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무엇에 목말라 하고 주려해야 겠습니까? 주님을 본받아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구원 ― 한마디로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해 자기 육체만을 위하여, 자기 욕망으로만 인해 목말라 하는 삶에서 탈피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갈증을 느끼는 자만 물을 구하고 얻듯이 자기를 탈피하여 하나님을 목말라 하는 자의 삶 속에만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칠 수 있고, 그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할 줄 아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여기에 목마르다는 동사 dipsao의 또 다른 뜻은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 하시므로, 하나님을 갈망하시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완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진실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목말라 하지 않고, 하나님을 갈망치 아니하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된 길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 속에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1∼2a)

 

시인은 한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우리의 영혼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치 않고서는 결코 바르게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위대한 신앙인 다윗은 우연히 다윗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간절히 갈망하므로써 3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 모두의 신앙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선지자는 또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 8:11∼13)

 

아모스는 사람을 정녕 갈하게 하는 것은 세상의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암 5:24) 외치는 참 진리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7)

 

바울 역시 하나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자에게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가 주리고 목마른 그 헌신의 길을 그는 조금도 주저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이 아침에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을 향해 세상을 향해 `내가 목마르다' 고백하면서, 그 고백에 상응하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지난달 고교생과 대학생 1,0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들의 한국전쟁 통일 안보 국가현실에 관한 의식조사> 결과가 보도된 바가 있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응답자의 70.7%가 가능성이 높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는 무려 33.9%가 외국이나 시골로 피난 가겠다고 응답했고, 자발적으로 참전하겠다고 답변한 청소년은 전체의 9.5%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그 보도를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카톨릭신자들을 포함하여 우리 국민 중 네 사람 당 한 명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숫자상으로는 그 조사에 응한 1,074명의 고교생과 대학생들의 25%는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국에 전쟁이 터졌을 경우에 당연히 참전하겠다는 응답이 최소한 전체의 25%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독교인 수 25%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겨우 9.5% 였습니다. 그 9.5%가 모두 크리스천이 아닐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 땅의 10대와 20대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자기 이기심과 자기 욕망에만 주리고 목말라 하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전쟁이 터졌는데도 도대체 젊은이들의 90.5%가 그 전쟁을 외면한다면 이 땅은 과연 누가 지킨다는 말입니까?

 

만약 똑같은 조사를 대학생 이상 되는 국민들에게 실시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30세 이상 되는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모두 내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키겠다고 응답하겠습니까?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실시한다면 100% 다 `그렇다'는 응답이 나오겠습니까?

분명히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10대 20대란 기성세대의 축소판일 뿐입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자기 이기심과 욕망에만 목말라 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의 30세 이상인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삶을 추구하고 있음의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다. 국민들은 틈만 나면 정부와 정치가들을 욕합니다. 그렇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들은 다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택시를 타 보아도, 지하철을 타 보아도, 식당에서 밥을 시켜 먹어 보아도, 가게에서 물건을 사 보아도, 거리를 걸어 보아도, 상인들과 거래를 해 보아도, 기업체을 들여다 보아도, 학교를 보아도 정말 정직하고 바른 양심으로 진리를 따라 헌신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아니한 것이 이 땅의 숨길 수 없는 실상입니다.

 

이 땅의 크리스천들이 모두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만나는 네 사람마다 한 사람씩은 그런 헌신자이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를 비롯하여 이 땅의 크리스천 역시 하나님을 갈망하기보다는 자기를 더욱 갈망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 최승호씨가 쓴 `황금털 사자'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평생토록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간의 이해득실로 얽힌 세상에서 손해보다는 이익을, 실보다는 득만을 취하면서 살다보니 노년이 되었을 때 주위에 남은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습니다. 쓸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라고는 사과 궤짝에 쌓아 놓은 돈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죽음이 찾아 왔습니다. 사람에게 헌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지막 기회마저 자기를 위해 쓰고 말았습니다.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털어 순금으로 만든 관을 구입하여 그 속에서 죽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금관 속에서 죽은 뒤 금관에 누운 채로 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밤, 그의 시체는 금관을 탐낸 무리들에 의해 무덤밖에 내팽개쳐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굶주린 들쥐에게는 기회였습니다. 들쥐들은 배가 터지도록 시체의 배를 터뜨리며 내장까지 남김없이 뜯어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리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갈망하다가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의 사회를 그 지경으로 몰아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 자신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십시다. 그 분의 진리와 생명에 갈한 자들이 되십시다. 우리는 모두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절규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을 잊지 마십시다. 그 분을 본받아 한평생 헌신자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때에만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사회도 바로 세워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가 있는 곳에만 하나님의 구원역사, 생명의 역사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평생 자기만을 갈망하며 사느라 마지막 기회마저 다 상실한 채, 죽은 뒤에 내 팽개침을 당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갈망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갈을 느끼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사랑에, 은총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절규하신 주님을 본받아 사는 참된 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와 같이 헌신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일터가, 우리의 사회가 바로 세워지는 역사가 오늘 아침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게 하옵소서. 우리자신들이 하나님만을 목말라 하고 갈망하므로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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