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말씀/ 1998년 / 10월 25일


경계해야할바리새인의  누룩 설교 자 : 임 영 수

말씀 : 마태복음23 : 23∼28


오늘은 종교 개혁 주일입니다. 개혁주일을 맞아 오늘 우리 시대에서 개혁의 정신이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바리새인의 형식주의에 대한 논쟁의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이 장에는 그러한 형식주의에 대한 논쟁의 내용이 집약적으로나타나 있습니다. 아마도 복음서 기자 마태는 그 당시 나이 어린 초대교회 공동체가유대주의 자들의 도전과 핍박에 굴복하지 않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해 그렇게 편집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논쟁의내용은 모두 다 잘못된 형식주의에 관한 것으로, 내용상으로 구분할 때 세 가지입니다.먼저는 십일조 문제, 두 번째와 마지막 것은 유대인의 정결법과 관련된 것입니다.이 세 가지 모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과 위선을 풍자적으로 통렬하게꾸짖은 내용입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농산물이나 과일의십일조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 농산물에 관한 십일조 규정으로, 해마다 씨를뿌려 밭에서 거둔 소출 농산물이나 과일 가운데 그 십분의 일을 떼어 두었다가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신 14:22∼29)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규정을 야채에까지확대시켜서 백성들에게 엄격하게 지켜가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은 율법의 보다 중심적인 것들, 곧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의문제, 이웃에 대해 베풀어야 하는 자비의 문제, 인간 관계에서 중요시되어야할 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데 대해서는 문제시하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행위를 하루살이와 약대에 풍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포도주를 마실 때 종교적 이유로 하루살이 때문에 포도주가 더럽혀지지 않게하기 위해 천으로 하루살이를 걸러내곤 하면서도, 그것 보다 종교적으로 더불결한 짐승인 낙타는 삼킨다고 풍자적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종교 생활에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지않은 규정은 엄격하게 지켜가면서 보다 더 중요한 도덕적인 문제인 정의·자비·신의는소홀히 하는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맹인된 인도자들이라고꾸짖었습니다.

그 다음 유대인들에게는 정결법이라는것이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 정결법에 따라 음식을 먹고 마실 때마다 그릇을잘 씻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규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했습니다.그러나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음식물은 부당하게 탈취해서 만든 것인데 그것은전혀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릇의 겉을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음식물을 정당하게 취득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형식주의와 외식을 회칠한 무덤으로 풍자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유월절이가까우면, 순례자들이 죽은 사람의 시체나, 뼈에 무의식적으로 접촉되는 일을피하게 하기 위해 무덤에 회를 칠해서 눈에 잘 띄이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한것은 역시 정결법에 따른 것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에 접하는 것은 종교적으로몸을 더럽힌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과 외식을 비판하신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이 겉보기에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냄새나는썩은 시신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시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거룩하게 옳게 보이려고 했지만 실제 그들의 속은 위선과 불법이 가득차 있다는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 종교가 이렇게 형식주의에집착하게 된 데는 그럴만한 역사적 원인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로부터돌아온 후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율법을 바르게 지키지 않았기때문이라 생각하고, 그 후부터 율법을 문자적으로 엄격하게 지켜 가는 형식주의에빠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로마가 팔레스틴을 지배한후 여러 지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유대 종교가 정체성의 위기에부딪히게 되면서 더욱 형식주의를 강조하게 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형식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그것에 대해 경고하신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형식주의와 문자주의는 사람을진실된 종교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위선자로 만듭니다. 그리스말에 `위선자'라는말은 광대라는 뜻이 있습니다. 종교적 의미에서 이것은 말과 속셈이 다른 사람을말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속 내면은 그렇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식주의는 사회적 무책임한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이것은 종교적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사회적 무책임을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형식주의는 신앙의 본질보다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기보다는 제도를더 사랑하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쳤을때 그 자리에 있던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예수님을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관심을 제쳐놓고제도나 규정에 넋을 잃은 무리에 대해 격렬한 노여움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보다도제도나 규정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잘못입니다.

형식주의와 문자주의는 하나님과 자기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공동체 안에 고르반이라는 제도가있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노인들을 위한 복지 제도입니다. 이 제도를 위해그 당시 유대인들은 십일조 이외에 노인들을 위해 일정한 액수의 부담금을 내곤하였습니다.

이 제도가 나중에 부패해서 노인들에게복지금이 엄연히 전달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을 도와야 할 사람들은그들이 고르반 제도를 이행했다고 하여 노인들을 외면했습니다.

형식주의는 죄인이 아닌 죄인을 많이만들어 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는 그 당시 많은 사람을 죄인 아닌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러한 형식주의 때문에 교회가 많은 범죄를 저질러 왔습니다.교회는 많은 사람을 정죄하고, 이단자로 몰아 태워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사람은 미워하는 마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 시대는 종교의 시대가 아니라광기의 시대였다고 했습니다.

형식주의는 삶의 진정한 변화를 불가능하게만듭니다. 형식주의의 기준은 자기들의 틀에 맞느냐 그렇지 않는 가이기 때문에인간의 삶의 변화는 문제로 삼지 않게 됩니다. 자기들의 틀에 맞지 않을 때는다 틀린 것이며 죄인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삶의 변화입니다.변화지만 올바르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주의는 역사의 어느 한 시대에만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가되고 나서 제 자신과의 싸움, 목회 현장에서 갈등하며 많은 시간을 낭비하며다루어 온 문제들 역시 형식주의와 문자주의였습니다. 한국교회 역사를 돌이켜볼 때에도 교회가 분열하고 갈라지고, 서로 적대시해 오는 문제들 거의가 다이러한 범주에 들어있습니다.

그러한 분열과 다툼 이면에는 인간적인독선·아집·문자주의에 의한 무지, 인간적인 교권 다툼, 경제적인 이득권 같은문제들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하나님의 영광을위해서라는 위선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그릇된형식주의에 빠져 들지 않고 이것을 극복해 가면서 바람직한 교회 공동체와 참된인간성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먼저 신앙생활의 중심을 제도나 형식이아닌 진리에 입각한 원칙 Principle에 중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박하와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보다 정의·자비·신의를 더 중요시하는 마음가짐입니다.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판할 때 십일조를 기준 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정의로운사람인가,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줄 아는가, 그는 신의를 존중하는사람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역시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볼 때에도 십일조를 어김없이내고 있는 의인가를 묻기 보다 나는 제도나 형식보다 인간을 더 존중하고 사랑하고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 공동체는제도나 형식을 하나님과 인간보다 더 중요시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정의·자비·평화·신의를존중하고 있는 공동체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원칙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에는 언제나창조성이 요청되지만, 제도나 형식을 위주로 한 삶에는 지켰는가 안지켰는가가문제시됩니다. 원칙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매우 포용적이지만, 형식을 중심으로한공동체는 매우 배타적입니다. 원칙을 중심할 때 갖게 되는 관심은 그 나라와그 의이지만, 형식이 중심이 될 때에는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이 언제나 문제가됩니다.

건전한 원칙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은사회를 위해 공헌할 수 있지만 제도나 규정에 얽매어 있는 신앙은 자기의 그룹에서는헌신적이고 그 그룹을 위해서는 순교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는세상을 위해서는 매우 무관심하게 됩니다.

어느 흉악범만 수감하는 교도소에 새로운교도소장이 부임했습니다. 그 교도소에는 교도관 이외에 그 누구도 들어갈 수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심이 많은 교도소장의 아내는 교도소에운동회와 같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아이들을 데리고 재소자들 틈에끼어서 함께 응원도 하고 친교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는 앞을 못 보는 맹인재소자들에게는 점자를 가르쳐 주고, 그리고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수화를가르쳐 주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그 교도소에는 점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교도 소장 부인이 교통 사고로숨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장례식을 위해 소장은 고참 간수에게 책임을 맡기고교도소에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날 교도소 안에 있는 모든 재소자들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교도소 정문에 모여 있었습니다. 고참 간수가 놀라서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와 보니 재소자들의 눈은 모두 붉게 충혈 되어 있었습니다.간수장은 즉시 규정을 어기고 문 앞에 모인 재소자들 모두가 장례식에 참석할수 있도록 교도소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재소자들 전원이 장례식에 참석하여깊이 슬퍼했습니다. 그날 장례식이 끝나고 거기에 참석하였던 재소자들 가운데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교도소로 다시 다 돌아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제도나 규정을넘어서서 참된 원칙을 가지고 사는 삶이 어떤 것임을 말해주고 있고, 그러한삶의 창조적 힘이 어떤 것임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제도나 규정을 절대시하지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제도나 규정에는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없습니다. 언제나 보완되어야 하고, 수정되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폐기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절대시 할 때 언제나 분열이 생기게 되고 생명력을상실한 공동체가 됩니다.

다음으로 부단히 자기 갱신을 해가야합니다. 부단한 자기 갱신을 통해서 자유하는 사람이 되어가지 않으면 형식주의에노예가 됩니다. 형식주의에 묶여 있을 때 진정한 구원의 경험은 불가능합니다.그러한 사람은 자기가 고수하고 있는 그 형식주의 자체가 구원이라고 착각하게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형식주의에 안주해서세상적인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참 인간이 되어 가는 것, 진리 안에서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내건 종교 개혁의 세가지 목표가 믿음·은혜·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는 결국 진리 안에서 자유해가는 삶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유를 위해 부름 받고 있고,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정의·자비·신의를 존중할 줄 알뿐 아니라그러한 품성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희망의 약속으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우리는 그 부르심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이세상에서 교회 공동체가 존속하는 한 지속적인 갱신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의 비유로서 하나님 나라의 지극히 부분적인 특성만이라도 나타내 보여야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삶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위선과 외식이라는 바리새인의 누룩을경계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의 누룩은 번식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깊이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른 사이에 공동체의 참모습을 변질시켜 갑니다.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10월 18일


구원 받은 자의 노래 설 교 자 임 영 수

말씀 : 시편 107편


시편 107편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구원의 기쁨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시입니다. 이 시편에 나타나 있는 어려움과 시련은 전쟁, 감옥 생활, 질병, 폭풍의 바다입니다. 어떤 이들은 전쟁에서 패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질병과 바다의 폭풍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어려움과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해 보았을 때 자신들이 그러한 상황에 결코 홀로 내버려져 있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전혀 불가능한 절망의 상황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 경험한 한가지 공통된 것은 그들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려는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시편 107편의 시작입니다. 이 시편에서 찬양과 감사의 말씀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아, 주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려라

동서 남북 사방에서, 주께서 모아들인 사람들아,

주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려라"(1∼3)

미적 감수성이 탁월한 화가가 이 시편에 나타나 있는 고난의 장면들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각기 배경과 등장 인물이 다른 네 장면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상상으로 네 장면의 그림을 생각해 가면서 본문의 중심 내용으로 다가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첫째 장면이 4∼5절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사막입니다. 시야에 들어오는 전경은 어디에나 모래밖에 없습니다. 나무도 풀도 식물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래를 움직이는 바람소리가 간신히 들릴 뿐, 모두가 침묵뿐입니다. 먼 곳에서 한 그룹의 무리들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들의 옷은 먼지로 덮여있고 머리는 바람에 날려서 흩어져 있고 얼굴은 햇볕에 타서 검어졌고, 눈은 충혈되어 있으며, 입술은 말라서 터져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배가 고파 허기가 져있고 갈증으로 인하여 속이 타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사막에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헤매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첫 번째 장면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표현한 것입니다. 본문에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광야의 사막에서 길을 잃고,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으며,

배고프고 목이 말라, 기력이 다 빠지기도 하였다"(4∼5)


이 절망적이고 암울한 상황에서 갑자기 발견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희망의 분기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는 그들을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바른길로 들어서게 하셔서,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들어가게 하셨다"(6∼7)

두 번째 장면의 그림의 소재는 10∼16절의 내용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감옥의 내부입니다. 그곳은 어둡고 우울한 장소입니다. 죄수들이 착고를 차고 차갑고 축축한 돌벽에 사슬로 묶여 있습니다. 간수들은 잔인하게도 죄수들을 차고 때립니다. 그들의 이 암울한 상황이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살며,

고통과 쇠사슬에 묶이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가장 높으신 분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셔서

그들을 낮추셨으니,

그들이 비틀거려도 돕는 이가 없었다"(10∼12)

이 암울한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때 갑자기 감옥이 흔들리며 놋대문이 부서지고 쇠빗장이 꺾였습니다. 이 두 번째 장면의 희망의 분기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은 그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다.

어둡고 캄캄한 데서 건져 주시고

그들을 얽어 맨 사슬을 끊어 주셨다

주께서 놋대문을 부수시고, 쇠빗장을 깨뜨리셨기 때문이다"(13, 14, 16)

그림의 세 번째 장면은 17∼22절의 내용입니다. 세 번째 그림은 매우 처참하고 불쌍한 장면입니다. 거기에 온갖 질병으로 아픈 사람들이 여기 저기 널려져 누워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아파서 음식을 보고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여기 저기서 신음 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의 처참한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반역의 길을 걷고 죄악을 저지르다가

고난을 받아 밥맛까지 잃었으니

이미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17∼18)

역시 이 장면의 그림에서도 희망의 분기점이 있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께서 그들을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다

단 한 마디 말씀으로 그들을 고쳐 주셨고,

그들을 멸망의 구렁에서 끌어내어 주셨다"(19∼20)

마지막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소재는 23∼32절의 내용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바다입니다. 섬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은 망망대해입니다. 거기에 고대의 돛단배들이 정상적인 항로를 따라 바다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지는 어딘지 잘 모릅니다. 갑자기 멀리서 폭풍 구름이 나타납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하늘은 점점 어두워집니다. 바람이 더 강해집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며 파도가 크게 일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배 안에 있는 누구도 불안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폭풍우를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일상적인 일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공포가 그들을 둘러싸기 시작합니다. 뱃사공들은 동료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립니다. 금방이라도 그 배는 부서져서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공포로 가득 찬 분위기가 본문에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바다 깊이 잠긴다

그런 위기에서 사람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

그들은 모두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리니,

그들의 지혜가 모두 쓸모 없이 된다"(26∼27)

다시 한 번 이 시편의 중심된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진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28∼30)

그리고 나서 시편 기자는 이 네 번째 그림의 결론을 덧붙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에게 베푸신 주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백성이 모인 가운데서 그분을 기려라

장로들이 모인 곳에서 그분을 찬양하여라"(31∼32)

사막이나 감옥, 병상이나 풍랑. 이는 바다는 모두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 존재합니다. 그것들은 우리 인간의 경험의 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한 우리의 경험은 좌절·절망·우울·고독·공포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희망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경험들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삶을 포기케하고 생을 비관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결론은 사막에서, 감옥에서, 병상에서,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막에는 시원한 물과 오아시스가 있고, 캄캄한 감옥 밖에는 상쾌한 공기가 있는 들판이 있으며 폭풍의 바다에는 잔잔한 물과 안전한 항구가 있습니다. 그러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 위대한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불가능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혼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절망적인 암울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선하심,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감사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때 있었던 일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죄 없는 자유인들이 독일의 유대인 학살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피눈물을 뿌리고 죽어가던 그 현장에서, 유대인들이 눈물을 뿌리면서, 피맺힌 절규를 통해서 외친 질문이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입니다.

어느 날 연합군이 이 수용소를 탈환하고, 수용소 벽을 검사하다가 한 쪽에서 뜻밖에 낡은 조각으로 쓰여진 찬송가의 가사를 보고 깜짝 놀라며 그 벽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느 그리스도인이 그의 신앙고백으로 기록해 놓았던 구절인 것 같습니다. 그 찬송가의 가사 내용은 우리 역시 잘 아는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두루마리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겠네.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할 수 없겠네."입니다.

이 놀라운 기록 앞에서 아연실색하여 바라보던 병사의 눈길에 그 아래에 조그맣게 쓰여진 글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God is here.였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이 여기에 계십니다.'입니다. 우리의 생의 모든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다.'입니다.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은 사막의 생활에도 함께 계시고, 옥중에도 함께 계시고, 병상에도, 풍랑이 이는 바다에도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잠잠히 있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는 생의 어려움 앞에서 상상을 초월하리 만큼 침착하게 합니다.

요한 웨슬레의 일화 가운데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웨슬레가 미국에 집회를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중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풍랑 가운데서 사람들이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 칩니다. 풍랑과 아우성이 뒤범벅이 된 가운데 어디에선가 은은하게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웨슬레는 그 찬송 소리가 나는 곳으로 찾아가 보니 배의 갑판 위 한 모퉁이에서 몇몇 명의 여자들이 모여앉아 얼굴에 아무런 불안한 빛이 없이 매우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라비안 신도들이었습니다. 웨슬레는 거기서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사건은 웨슬레의 생에 또 한 번의 거듭남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현실에서 사막·감옥·질병·폭풍의 바다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해 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대한 생의 경험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예배하기 위해 모인 것도 그 구원의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예배는 복을 받는 수단이라기 보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드리는 감사의 응답입니다.

- 아 멘 -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 1998. 10. 11/설 교 자 임 영 수


모든 이를 위한 자리

말슴 : 마태복음 20:1∼16


요즈음 우리 나라를 비롯해서 전 세계적으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불경기로 인해 실업률이 높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업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 침체로 고용 창출이 안되는 증거입니다. 제가 대학 입학하던 시기에 우리 사회에서 적성에 맞는 일자리 하나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때에는 경제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으로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사회 전문 분야에서 어떤 특정한 직종의 자리는 제한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를 놓고 매우 치열한 경쟁이 벌어집니다. 그러한 경쟁에서 이겨 자리를 확보하면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합니다.

인간사회에서 전문별 일자리에는 선후배의 관계가 있고, 임금의 차이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직일수록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 요청되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우월감이나 자만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요즈음 우리 나라 현실은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는 젊은이들에게 좌절을 줍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제창한 평화 봉사단 운동은, 그 당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방황하던 미국 젊은이들에게 큰 희망과 꿈을 주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임금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희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 나라에도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와서 각 분야에서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진정 인간의 희망과 꿈은 제한된 사회 전문 분야에 뚫고 들어가서 어떻게 성공하느냐가 아닙니다. 우리 앞에 얼마만큼 희망과 꿈이 있는 미래가 전개되며, 보람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고민과 좌절은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가 되지 못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을 바쳐 살아갈 만한 비전이 있는 현실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희망적인 비전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때에는 돈이나 환경이 그렇게 문제시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희망과 기쁨은 돈의 액수나 사회적 지위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 섬겨야 할 대상, 사랑할 수 있는 이웃, 평생을 바쳐 모험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일을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그러한 것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는 남에 대한 빚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그것을 갚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가 그러한 것을 찾지 못했더라면, 철학박사, 신학박사, 의학박사, 바하의 최고 권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모험의 길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그 길을 가기 위해 격심한 훈련과 연구로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적 지위, 명칭, 돈의 액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전, 모험, 섬김과 관련됩니다. 본분의 비유는 그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해 주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를 거듭 거듭 반복해서 읽어 가면 비유의 깊은 내용에 접근해 갈 수 있습니다.

불란서 파리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정박인들과 봉사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 이름은 아르슈(Arche)입니다. 그것을 창설한 사람은 쟝 바니에라는 해군 장교 출신입니다. 그가 군대에서 전역한 후 그가 존경하는 토마스 신부의 권고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설립 당시 쟝 바니에는 정박인 두 사람과 함께 조그마한 집에서 공동 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 태동의 동기였습니다.

그 곳에는 정박인들을 집단으로 수용하지 않고 각기 독립 주택에서 소수의 인원들이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한 가족처럼 살아가면서, 농사짓는 일, 공예품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거기서 일하는 봉사자들은 평생을 그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한 사람, 일정한 기간 그곳에서 봉사하는 사람으로 나뉘어집니다.

그들과 잠시 지내는 동한 함께 식사도 하고,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봉사자들이나 정박인들 모두 지극히 평화스럽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들 자신들이 매우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곳 책임자와 함께 한 가정에서 공동 식사를 하였는데, 식사 준비부터 설거지까지 모두 다 참여해서 맡은 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정상인, 정박인의 구별도 없고, 명령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만 각자 맡은 일이 있을 뿐입니다.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를 포도원으로 묘사한 것은 희망과 사랑의 모험의 일이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포도원에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에 걸쳐 하여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들이 일꾼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유의 포도원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지 않고, 이 세상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고, 찾아가서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의미합니다.

그 일이 정박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위하는 일, 새로운 창조적인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기를 원하시는 선한 일들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고용하기 위해 하루에 다섯 번씩 `아침 아홉시, 열두시, 세시, 다섯시' 밖으로 나아가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희망과 사랑의 선한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열려져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열려져 있습니다. 주인의 부름을 듣고 응답한 사람은 누구나 들어가서 일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르슈 책임자에게 저와 같은 사람도 이곳에 와서 일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누구나 와서 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가지 조건은 불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으려면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부름 받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한갓 취미나 여가 선용을 위해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선한 일이 주님의 십자가를 이 세상에서 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러한 선한 일은 언제나 품삯으로부터 자유합니다. 비유에 처음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이나 나중 들어온 사람이나 하루의 품삯을 꼭같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은 품삯으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택한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값진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삶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 큰 선물로 여겨지기 때문에 품삯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진정한 보상은 품삯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임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해 가는 것 자체로 자족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볼 수 있는 안목과 그 일을 할 수 있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품삯에 대한 관심을 초월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선한 일을 하는 자리에서는 지위나 명칭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업적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제가 아르슈에서 경험한 것은 그곳에서는 오래된 사람이 세도를 부리지 않고 더 깊은 섬김의 자리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의 특성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것이 그 특성입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자리는 세상적인 출세나 성공의 자리도 아니며, 명예의 자리도 아닙니다. 그 자리는 오직 섬김의 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는 진정한 섬김에 있습니다. 본문에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제가 지난날 섬기던 목회지에서 어느 날 안수집사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 그 자리에 참석한 어느 은퇴 안수집사 한 분이 후배 집사들에게 권면하는 말에서 `여러분은 나처럼 실패자가 되지 말고 다 성공자가 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분이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그것이 아니고 안수집사에서 장로가 되지 못한 것을 실패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실패 성공은 지위나 명칭에 있지 않습니다. 흔히 하는 말들 가운데 목회 성공·실패들을 말합니다. 그 기준이 거의 다 세상 기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끝까지 포도원에서 일하였는가 입니다. 몇 시간 어느 자리에서 일하였는가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맡은 일에 끝까지 충성하였는가를 묻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경력에 따라 품삯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일한 시간에 비례해서 품삯이 지불돼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 일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품삯이 지급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옆에 있던 강도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에서 경력·업적·지위·명칭이 중요시된다면 십자가의 강도는 낙원에 대한 약속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현실 사회에서 매일 매일 다른 사람보다 좀더 나아질려고, 좀더 좋은 여건을 확보하려고, 좀더 높은 임금을 받으려고, 고심하며 불안 가운데서 피곤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은 너무 각박하고, 웃음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그저 경쟁·견제·다툼으로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저뭅니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는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현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현실을 바라볼 때 우리가 해야 할 선한 일이 어떤 것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선한 일들을 경쟁심에서 벗어날 때, 이해관계에서 해방될 때 보여지게 되고, 그 일을 위한 부름을 듣게 됩니다. 그러한 선한 일은 우리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의 생은 빚을 진자의 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랑의 빚을 진자의 생으로 자신의 생이 받아들여질 때 현실이 자신이 들어가서 일해야 할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이 비유와 관련한 시 한 편을 소개하며 설교를 맺겠습니다.


「첫 시간부터 일한 사람은

정당한 보수를 받습니다.

늦게 온 사람은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오정때쯤 도착한 사람이라 하여

적게 받지 않기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후가 되어 늦게 온 사람도

주저않고 다가옵니다.

해질 무렵에 온 사람은

늦게 왔다 하여 겁내지 않습니다.

주인이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온 사람까지도

맨 먼저 온 사람처럼 즐겨 맞아들이시고

모두에게 휴식을 주십니다.

마지막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제일 먼저 온 사람에게는 상을 주십니다.

먼저 온 사람에게는 줄 것을 주시고

마지막 온 사람에게는 거저 주십니다.

일한 사람들을 존중하시고

일하려는 뜻을 지닌 사람도 칭찬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십시오.

맨 처음에 온 사람도 그 다음 보수를 받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다 함께 기뻐하며

주님의 모든 선하심을 즐기십시오.」

<로마의 히뽈리또. 3세기>

- 아 멘 -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로마서 5: 12∼21/1998. 10. 4


제이 아담, 예수 그리스도

설 교 자: 임 영 수 목사님



 
신구약 성서에는 인류를 대신하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구약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다른 한 사람은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입니다. 바울은 구약의 아담을 첫째 아담으로 예수를 제이 아담으로 부릅니다. 아담이라는 말의 뜻이 한 개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 보다 인류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담은 인류를 대신하고 예수 역시 인류를 대신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예수가 대신하는 인류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첫째 아담이 대신하는 인류는 죄와 죽음 지배 아래에 있는 인류이며, 예수는 그것을 극복한 새로운 인간입니다. 아담은 옛 시대의 인류를 대신하고, 예수는 새시대의 인간을 대신합니다.

근세에 서구 사회에서 예수를 등장 인물로 하는 영화, 뮤지컬, 소설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문화 속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예수는 대부분이 첫째 아담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대표적 소설 하나를 꼽는다면 희랍의 작가 카잔차키스의 "최대의 유혹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작가는 예수를 한 구도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잠시 정신을 잃고 꿈을 꾸게 됩니다. 예수는 꿈속에서 그가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는 가운데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한 평범한 인간으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살아간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는 꿈에서 깨어나 그것을 부인합니다.

교회가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대중문화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예수의 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그러한 예수상을 받아 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탄적이거나, 그렇지 않다를 떠나서 오늘의 세속 문화의 관점에서 그려낸 예수상은 우리가 희망하는 참 인간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첫째 아담으로 대신하고 있는 인류는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에 있는 희망이 없는 인간상입니다. 그러한 인간상은 그의 부정적인 내면의 의식들인 미움, 시기, 질투, 허무, 무의미, 적대감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들이 연출하는 부정적인 인간 행위들은 살인·폭력·강도·성적 방종·마약 중독·알코올 중독·거짓·불의 등입니다. 물론 도덕적인 양심이나, 법의 통제 아래서 인간적인 양식을 지켜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 역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죽어 갑니다. 이러한 인간을 대신하는 인간상으로서 성서에서는 첫째 아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제이 아담으로 예수가 대신하는 새 시대의 인간상은 이러한 어둡고 절망적인 삶을 극복한 새 인간을 대신하는 참 인간상으로 나타납니다. 새 시대 새 인간을 대신하는 예수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적 삶의 모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첫째 아담의 삶의 자리를 도피해 깊은 산 속에서 도를 닦아 해탈한 인간이 아닙니다. 제이의 아담인 예수는 첫째 아담의 낡은 인간 형태의 삶을 완전히 십자가에서 종결짓고 부활의 새로운 인간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에게서 나타난 새 인간상은 첫째 아담이 하나님께 복종해 가는 삶의 실패로 도달하지 못했던 것을 예수는 하나님께 온전한 복종의 삶을 통해 실현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첫째 아담이 대신하는 인간의 어둡고 절망적인 삶의 양태들은 하나님께 복종해 가기를 포기한 인간상입니다.

첫째 아담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제이 아담인 예수가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도 죄 인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인간이란 그저 한평생 그렇게 살다 죽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조금 안목이 트인 사람은 영혼이 불멸하다 믿고, 죽을 때 생전에 사용하던 집기들을 무덤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이 아담인 예수가 오심으로 인간이 살아야 할 본래의 삶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본래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하나님, 이웃, 자연과 함께 특유한 존재 양식을 가진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의 동역자로 부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자신이 그러한 새 인간상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유명한 전기 작가 로망 롤랑은 유럽에 만연했던 비루한 물질주의와 회의주의 사조의 타락하고 썩은 분위기 속에서 마비되고 있는 유럽을 바라보면서, 영웅적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한 위대한 영웅을 그 시대에 내놓습니다. 로망롤랑에 의해 그 시대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으로 제시된 인물이 악성 베토벤입니다. 로망롤랑이 제시한 영웅 베토벤은 억압된 정신의 해방을 기다리는 모든 불행한 사람들의 반려자로, 인간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사람이 되고자 전력을 다하며, 성실성과 위대성을 통해 인생이란 고뇌 속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간을 대신하는 영웅적 인간상으로 베토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로망롤랑은 베토벤을 통해서 불행 가운데서 고통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베토벤 자신이 그에게 찾아온 불행을 극복하고 승화시켜 나아가는 그의 투쟁의 모습이 그의 교항곡 운명·영웅·환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가 만약 예수의 전기를 쓴다면 그 전기에 등장하는 인간 예수를 억압된 정신의 해방을 기다리는 모든 불행한 사람의 반려자인 동시에 해방된 자로, 인간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삶의 길을 걸어간 참 인간의 모형으로서, 인생이란 고뇌 속에서 그것을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한 어린양으로 묘사할 것입니다.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깊은 명상 가운데서 도를 깨친 도인도 아닙니다. 예수는 믿음의 창시자시며, 믿음의 완성자이십니다. 예수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복종해 가는 인간상에 대한 가능성과 희망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신 분이며, 그러한 믿음의 완성자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갖게 된 새 인간의 길은 율법이나, 도덕주의적인 인간 실현의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치유되어 가고 온전케 되어 가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해 가는 인간상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인간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첫째 아담으로서 예수상을 거부하게 됩니다. 만약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그들이 희망하는 인간상이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예수와 같은 유형의 인간이라면 그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죽음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 보다 좀더 편하게 살려고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새로운 존재 양식을 가진 새로운 희망의 인간상으로 형성되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새 인간상의 완성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그러한 삶의 완성자이 실 뿐 아니라, 그러한 인간상으로 되어 가는 길을 열어 놓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가 인류의 해답이며 희망이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희망적인 현실을 경험해 가고 있습니다. 이 세속 사회에서 교회는 그러한 새 인간상을 보여주는 공동체입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상업에 크게 실패, 좌절한 사람이 목사와 상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받는 고통에 대해 말하면서 "이제 제 인생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를 이런 인생으로 만드셨나요?"라고 절규했습니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하나님께서 형제님의 인생을 다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형제님의 인생은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무조건 하나님의 일에 불평하지 말고 고난에 나타난 뜻을 헤아리십시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회개하며 인생을 재출발했고, 얼마 안 있어 청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고난은 끊임없이 인생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나 실패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인간으로 부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고 부활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는 새 인간으로 부름을 받고 있으며, 그러한 인간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낙심하거나, 고난 때문에 좌절하거나, 죄 때문에 우리의 생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안에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러한 희망과 믿음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능력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희망하는 그 희망의 내용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불의·거짓·권모술수·폭력·생태계의 파괴·자기 학대와 같은 낡은 존재 양식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는 그러한 존재 양식으로 부름 받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모형으로 바라보고 나아가는 인간상은 제이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신학교 졸업반 때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다면 어떤 목사상으로 되어 갈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음에 작정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시간까지 하나님의 손안에서 되어 가는 목사가 되겠다는 것으로 결론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진정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자연 환경은 모두 파괴되어 가고 있고 인간의 존재 양식들은 진정 비관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희망은 첫째 아담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죄와 죽음이 어떻게 그 종말을 맞았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첫째 아담의 운명으로 내버려두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새 사람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 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 : 1∼2 개역 개정) - 아 멘 -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1998.9.27/설 교 자 임 영 수 목사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말씀 : 요한일서 4:7~12)

저희 첫째 아이가 유아 시절 어느 주일에 교회에 다녀와서 저에게 자기는 예수님은 보았는데 아직 하나님은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한 번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아들에게 예수님은 어디에서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 답변이 교회에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시 교회 어디 계시드냐고 물었드니, 교회 현관 벽에 걸려 있는 예수님의 초상화를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제 아내는 수채화로 예수님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엽서 다섯 장을 경대 거울에 부쳐 놓았습니다. 그 다섯 장의 엽서에 그려져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각기 달랐습니다. 그중 어느 하나의 초상화로 예수님의 모습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 다섯 장에 각기 다르게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모두 합성해도 온전한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상은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저는 아들이 어떤 인상을 가졌는지 확인은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만나기를 위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어디를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해 듣고, 보고, 만져 보았다고 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에 대해 들었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외형적인 모습에 대해들은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해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가 세상을 사랑하시며, 특별히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가셔서 명상에만 잠겨 있었으면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사랑의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인간 역사의 현실 가운데서 사랑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외모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행동에서 인간과 함께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이 창조되었고, 그의 사랑으로 세상의 질서가 유지되고, 그의 사랑으로 모든 생명체가 보존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듣고 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고 경험적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서두에서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개역 개정)고 했습니다

본문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10절)

제가 군대 입대해서 약 삼개월의 훈련 과정을 마치고 기성부대에 배치되기 전 잠시 집에 들렸습니다. 그때 저는 새로운 사실을 한 가지 발견했습니다. 제가 입대한 그날부터 어머님께서 하루도 쉬지 않고 저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기도하는 것을 잊을까 해서 제가 입대할 때 집에 놓아 두고 간 손목시계를 경대 위에 놓아두고 아침마다 일어나셔서 그 시계를 보고 기도하시곤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제가 훈련소에서 훈련 과정을 잘 마치게 된 것이 저의 염려와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어머님의 기도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염려와 걱정으로 되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다는 것이 더욱 힘들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알려주신 것은 우리의 염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이 어떤 힘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 이야기 소설에 천사 미하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하일이라는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알몸으로 세상에 쫓겨났습니다. 미하일이 어긴 하나님의 명령은 쌍둥이 딸을 낳은 어머니의 영혼을 거두어 오라는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미하일은 그 어머니의 영혼을 거두어 가면 가엾은 어린것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미하일 천사를 쫓아내면서 세 가지 과제를 줍니다. 첫째는 인간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 셋째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 미하일에게 이 세 가지를 다 깨닫게 될 때 하늘나라에 다시 불러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천사 미하일은 추운 겨울 어느 날 알몸으로 교회당 벽에 붙어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세몬이라는 가난한 구둣방 주인의 도움을 받아 그의 집에서 함께 일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미하일은 구둣방 주인 세몬의 아내가 그에 대해 베푸는 배려에서 인간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후 구둣방에서 일하다가 어느 날 어떤 부자가 좋은 가죽으로 그가 신을 장화를 맞추고 돌아가서 바로 죽었기 때문에 그가 주문한 장화 대신에 죽는 사람이 신는 슬리퍼를 찾아가는 것을 보고 인간에게 자기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동안 세월이 흐른 후 한 여인이 쌍둥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구둣방을 찾았을 때 미하일은 그 아이들이 바로 자기가 영혼을 거두어 갈려고 했던 그 어머니의 딸임을 알게 됩니다. 그 어머니는 딸을 낳고 육 개월만에 죽고 그 쌍둥이 아이들이 다른 여인의 보살핌 가운데서 잘 양육되는 것을 보고 아이는 부모 없이는 살 수 있지만 하나님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천사 미하일은 세 가지 과제와 관련된 것을 모두 터득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 각자는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애씀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실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찬 있는 자는 하나님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 안에 계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다 깨닫고 나자 그는 다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 인간에게 본래 허락된 존재 양식은 사랑으로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게 한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 양식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고 그러한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한 삶에서 위로, 희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삶에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게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셨습니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윤리적인 완전을 의미하지 않고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함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온전함이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의미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사랑의 온전함이란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인간을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다음 사랑의 온전함이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셨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묻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현실 그대로 받아 드리셨습니다.

그 다음 온전함이란 용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온전함에는 치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그래서 온전케 하십니다.

결국 사랑의 온전함 가운데서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받아 드리지 못하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 자체가 온전함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고 받아 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랑 가운데서는 이러한 모든 것이 극복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이러한 사랑의 온전함이 서로 서로의 관계에서 다음과 같은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우리고 들어주기를 강요하기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우려 들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여 든다는 것은 사랑의 한 행위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할애하는 여유를 갖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우리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매우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생각할 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고독한 사람에게 위로의 편지를 쓰든가 위로의 전화를 거는 것 모두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은 항상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찾아오기를 요구하기 보다 먼저 우리가 그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슬픔을 당해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는 것 장기간 병상의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와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일 모두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아니하고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 재물을 대부분 우리와의 이해 관계 가운데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러한 이해 관계를 넘어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 관계를 떠나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일은 매우 고귀한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 시간에 언제나 기억되어 그 기도에 포함되는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들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사랑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려 주시려고 속죄 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완성되는 것입니다."(표준 새 번역)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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